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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31
    두 동자의 대화
    곰탱이
  2. 2015/12/30
    재(宰)
    곰탱이
  3. 2015/12/29
    무지(無知)와 이심전심(以心傳心)
    곰탱이
  4. 2015/12/27
    무상(無常)의 상(常)
    곰탱이

두 동자의 대화

역사소설 <<혁명>> 제1권 내용 중 또 한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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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에 영주로 왔을 땐 봄비가 닷새 동안 연이어 내렸다. 첫날엔 찬바람까지 불어, 밤이 들면서 봄비가 봄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맹자>>를 펼쳐 놓고 첫머리를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이 둘이 마루에 붙어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통통한 녀석은 앞으로 시중을 들 동자였고, 또 한 녀석은 동자의 종갑내기 사촌이었다. 둘은 한동네 친구로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다. 내 이사를 도우려는 동자가 혹처럼 사촌을 달고 온 것이다. 이삿짐이라고 해야 지게 한 짐이 고작이었고 비까지 내려 두 녀석은 할 일이 없었다. 대낮부터 나란히 앉아 낄낄대다가 졸고 또 히죽거리던 녀석들이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내 눈은 서책에 머물렀으나 내 귀는 재잘대는 말다툼에 쏠렸다. 동자가 어깨에 날아와 앉은 눈송이를 손등으로 털며 물었다.

 

"비가 눈이 되는 게 힘들까, 눈이 비가 되는 게 힘들까?"

 

"눈이 비가 되는 게 백배는 힘들지, 당연히!"

 

두 달 먼저 태어난 사촌이 아는 체했다. 세상에서 그가 답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왜"

 

"넌 달리다가 걷는 게 힘들어, 거다가 달리는 게 힘들어?"

 

"걷다가 달리는 거."

 

"눈은 천천히 내리잖아? 그러다가 녹아서 비가 되면 주루룩 빨리 떨어지니까 무척 힘들지. 비로 떨어지다가 눈으로 바뀌는 건, 느려지니까 하나도 힘들지 않아."

 

동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비가 눈으로 바뀔 때가 더 힘들지 않을까?" 

 

"억지 부리지 마. 가을에 이르면 잎이 떨어지고 봄이 오면 얼음이 사라지는 것과 똑같아." 

 

"비는 땅이 가까워지면 어디로 떨어질지 대충 알아. 지붕이면 지붕, 마당이면 마당! 하지만 눈은 흩날려. 지붕으로 내려오다가 실바람에 밀려 우물에 빠지고, 밭에 거의 닿았다가 강풍에 쓸려 언덕을 넘지. 회오리바람이라도 만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도 있어. 비일 때는 전혀 몰랐던 움직임이야.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다 받아들여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

 

사촌은 턱을 들어 하늘을 살폈다. 어둠이 찾아들자 허공의 눈들도 차츰 희미해져 갔다. 나는 서책을 펼쳐 놓았으나 등잔을 밝히진 않았다. 지금은 두 녀석의 대화가 내겐 서책이었다. 이윽고 사촌이 답했다.

 

"눈이 비보다 떨어질 곳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은 맞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엔 더욱더 눈이 비로 바뀔 때가 힘들겠어."

 

"왜?"

 

"떨어질 곳을 마지막까지도 모른 채 자유롭게 눈으로 떠돌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고 오직 애래로만, 딱 한곳으로만 떨어지는 비를 상상해 봐. 얼마나 갑갑할까? 계속 비로만 내리던 녀석이랑 눈에서 비로 바뀐 녀석이랑 무척 다를 거야. 안 그래?"

 

동자가 잠시 생각한 후 사촌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맞아. 눈에서 비로 내리는 게 비에서 눈으로 내리는 것보다 훨씬 힘들겠네. 근데 나 배고파, 형!"

 

동자는 배가 고플 때만 사촌을 형이라고 불렀다. 사촌을 따라 저녁을 얻어먹으러 갔다. 비에서 눈으로 바뀐 오늘의 화두는 계속 내리고 있었으나 어둠이 짙어 보이지 않았다. 등불 없이 화두를 붙든 채 화두 곁에서 영주의 첫밤을 보냈다. 내 인생은 눈에서 비로 내릴까, 비에서 눈으로 내릴까.

 

(242~24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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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宰)

역사소설 <<혁명>> 제1권에 나오는 또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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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宰)란 무엇인가. 재제(宰制)함이다. 백관의 상이한 직책과 만민의 상이한 직업을 두루 관장하며 공평하게 처결하는 것이다. 상(相)이란 무엇인가. 보상(輔相)함이다.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명령에는 순종하고 추한 명령은 바로잡는다. 옳은 일은 하고 그른 일은 막는다. 이를 통해 왕을 대중(大中)에 들게 만드는 것이다.

 

송나라의 대학자로 <<대학연의>>를 지은 진덕수가 강조하지 않았던가. 재상은 자신을 바르게 한 다음 왕을 바르게 하며, 인재를 뽑고 업무를 훌륭하게 처결해야 한다.

 

신하가 명군(明君)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만 왕이 양신(良臣)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대장군은 패자(覇者) 시대의 왕들처럼, 충분히 보상(輔相)의 의미를 이해하고 전권을 재상에게 맡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여러 번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권세가 왕에게 집중되지 않는 나라는 혼란에 빠져 사라지고 만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재상의 훌륭함과는 상관없이 하늘엔 두 개의 해가 빛날 수 없다는 논리다.

 

왕도 사람이다. 어진 이도 있고 각박한 이도 있으며 똑똑한 이도 있고 멍청한 이도 있으며 유악한 이도 있고 강건한 이도 있다. 왕이 전권을 휘두른다면 혼군(昏君) 혹은 폭군(暴君)의 도래는 시간 문제다. 왕은 신하를 두려워해야 하고 신하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움은 힘에서 나오고 그 힘은 법과 제도를 통해 뒷받침된다. 내 구상의 핵심은 왕을 예외로 두지 않는 것이다. 왕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지만 전체를 뒤바꾸지는 못하는 체계 속 일원이다. 이렇게 짜 둬야 왕이 설령 삼강과 오륜을 무시하더라도 체계 속에서 고쳐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재상은 백관과 만민뿐만 아니라 왕의 삶 전체를 세세히 살피고 알아야 한다. 왕의 패악함과 우유부단함이 구중궁궐 바깥까지 알려지기 전에 단속하고 고치고 바꿔야 하는 것이다. 빈첩(嬪妾)은 물론이고 내시나 궁녀, 수레와 말 그리고 의복과 음식까지 재상은 하나하나 챙겨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재상은 왕의 부끄러운 비밀조차도 알아야 한다.

 

재상은 어떻게 왕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지식을 자랑해서도 아니 되고 말재주를 뽐내서도 아니 된다. 재상의 진심을 헤아리고 그 정성에 감동할 때에만 왕은 스스로를 돌아볼 것이다.

 

재상에게 너무 많은 권세가 얹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누군가가 권세를 쥐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천지만물의 움직임과 국방의 엄중함에 무관심한 왕이 아니라 풍부한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지닌 재상이다. 권세만큼 업무도 막중하니 재상은 단 한순간도 사사로움을 추구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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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無知)와 이심전심(以心傳心)

역사소설 <<혁명>> 제1권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서너 개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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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문 밖에서부터 누렁이 한 마리가 쫓아왔다. 송아지만 하다. 돌아보면 무심한 척 딴청을 부렸지만, 이 길에 저와 나 둘뿐이니 바라는 것도 없이 따르진 않으리라. 내가 더디 걸으면 저도 더디 걸었고 내가 바삐 걸으면 저도 네 다리를 분주히 놀렸다. 멈추면 멈췄다. 50보보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고 100보보다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녀석이 혹시 내 엉덩이 살점이라도 물어뜯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완만한 언덕을 올랐다. 언덕바지에서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녀석을 눈을 끔뻑거리며 던질 테면 던져 보란 식으로 길 가운데 서 있있다. 졸졸 따라왔다는 이유만으로 개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지나치다. 녀석이 사람이라고 해도 돌팔매질을 할 것인가. 돌멩이를 내려놓고 언덕을 넘었다.

 

불그스름하던 기운이 점점 검어졌다. 산책을 접고 돌아갈까. 흘끔흘끔 고개를 돌려 누렁이를 곁눈질했다. 어둠에 젖은 누렁이는 황소보다도 크고 늑대보다도 사나워 보였다. 누런 빛깔에 담긴 착함, 둔함, 게으름은 사라졌다. 내리막길의 끝에서 누렁이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뛰면 나도 달리리라 결심했지만 호랑이를 만난 하룻강아지처럼 꼼짝달싹 못했다. 타닥타닥 흙을 차는 경쾌한 소리가 가까워졌고 밀려드는 후회도 그만큼 커졌다. 다섯 걸음 앞에서 누렁이는 뒷발을 밀며 뛰어올랐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누렁이는 내 어깨를 훌쩍 뛰어넘더니 도깨비처럼 나타난 동자에게 안겼다. 긴 혀로 동자의 뺨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어 댔다. 비슷한 또래 아이가 둘 더 있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접고 웃옷은 아예 벗어 어깨에 돌돌 말아 걸쳤다.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누렁이가 여기까지 마중을 나왔단 말인가.

 

"네 녀석이 키우는 개냐?"

 

동자가 누렁이의 머리를 저만치 밀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동네를 떠도는 놈이에요."

 

누렁이가 거머리처럼 동자에게 들러붙었다. 침이 뚝뚝 동자의 벗은 목덜미에 떨어졌다. 다른 두 아이도 누렁이의 뒷다리와 꼬리를 붙잡고 흔들며 즐거워했다. 누가 개고 누가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뒤엉켜 놀았다. 50보 이상 거리를 두고 나를 따르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주인도 아닌 너를 어찌 이렇듯 반기느냐?"

 

"찬 밥 반 덩이를 네댓 번 줬습니다요. 이래 봬도 기억력이 비상합니다. 한 번 거둬 준 사람에겐 꼬리를 치며 반깁지요. 나린 이 녀석에게 아무 것도 준 게 없나 봅니다요."

 

"무작정 쫓아만 오니, 왜 그런지 따질 틈도 없었고...."

 

변명 아닌 변명이 동자들의 비웃음에 묻혔다.

 

"무슨 일이든 꼭 그렇게 따져 봐야 압니까? 척 보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쫓아오는 이율 알았네 몰랐네 따질 일이 아닙지요. 누렁이는 걸음걸음 도움을 청했지만 나리가 듣질 않으신 겁니다."

 

"도움을 청했다고? 하면 너는 척 보고 알아차렸단 말이냐?"

 

"그럼요. 배를 곯아 본 이라면 어찌 모르겠어요. 똑같은 눈길로 날 쳐다보는데. 나린 간절히 도움을 청한 적이 없나 봅니다. 녀석의 눈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셨다니. 오늘은 나리가 참 불쌍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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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의 상(常)

이번에는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혁명>>(김탁환 지음,  민음사, 2014) 중 제1권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발췌했다(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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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바람벽으로 윙윙거린다. 천 길의 부끄러움, 만 길의 후회. 벼랑을 등지고 처절하게 싸우다가 떨어져 흔적 없길 바랐건만, 잡념 더미에 눌려 숨통이 막히는 것보다 한심한 최후가 또 있을까. 마주 잡았던 손을 토막토막 자르고 혀를 뽑고 눈을 파내는 이 초옥(草屋)에선 입은 옷도 옷이 아니요, 먹은 밥도 밥이 아니다. 망상이다.

 

불안을 달래는 나만의 처방은 간단하다. 물비린내 나는 문장을 골라 입에 털어 넣고 술안주로 씹기. 지금 가장 멀리 갔다가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 요놈이다. 인(仁)은 인(人)이다. 그 둘을 합하여 말하면 도(道)다.

 

도(道)! 그 길을 떡하니 막는 것도 문이요, 확 하니 여는 것도 문이다. 만남의 가(歌)와 이별의 곡(曲)이 문고리를 흔들고 이마를 비벼 대듯 잦다. 쓸데없다. 출렁이는 연(緣)을 미리 에둘러 피하고 건너뛰고 때론 부수며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았는가. 지워지지 않는, 심장으로 뛰는, 뜻을 펴기에 합당하지 않은 날이면 되짚는 문들이 있긴 하다. 정말 문(門)은 문(問)으로 통할까! 누구나 외로움 밴 물음을 몇 개쯤은 품고 산다. 그러나 대부분은 모른다, 정녕 외로움에 풍덩 빠질 때란 스스로 답할 수밖에 없는데도 물음을 던지는 순간임을. 답을 해도 달라지는 것이 쥐뿔도 없는,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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