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down)

 

강곤 | 기자

토요일 저녁시간에 비까지 한차례 쏟아진 터라 도심교통은 말이 아니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타고 홍대로 가자고 했더니 기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오늘 내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곡예운전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도 있고 외국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기도 하는데 나는 아직껏 이주노동자가 모는 택시를 타본 적이 없다. 짐작컨대 택시운전이 아직은 괜찮은 직종이어서가 아니라 이 땅 이주노동자들의 처지가 빠리나 뉴욕 같은 데에 비길 바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솜씨 좋은 기사 덕분에 약속시간에 얼추 맞춰 홍대전철역 근처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다행이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도 하나 둘 모이고 있는 중이었다.



5인조 다국적 이주노동자 밴드


Stop crackdown! 흔히 ‘단속추방 반대’로 번역된다. 이주노동자의 집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어쩌면 세계에서 ‘Stop the war!’와 함께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는 이 만국공용의 구호를 당당하게 단체이름으로 걸고 있는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은 네팔에서 온 미누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해리, 버마 출신 소모뚜와 소띠아, 그리고 한국인 송명훈으로 구성된 5인조 다국적 밴드다.


굳이 이주노동자 집회가 아니어도 다양한 투쟁현장에서, 그리고 각종 문화제에서 이들을 만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연을 제외한 일로 다섯 명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오늘의 만남도 겨우 자투리 시간을 얻어 마련한 자리다.


“지난 11월 4일 울타리 없는 노래콘서트에서 ‘버마를 위한 기도’라는 공연을 했어요. 오늘은 그날 수고해준 사람들과 같이 밥도 한 끼 하고, 그날의 공연 수익금을 버마국민운동촉진위원회에 전달하는 날이죠. 또 지난주가 소띠아 아들 돌이었어요. 늦었지만 축하도 해줘야지요.” 드럼을 맡고 있는 명훈은 막내이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밴드에서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다.
‘울타리 없는 노래콘서트’는 스탑 크랙다운이 매년 해오고 있는 정기공연으로 “군부독재와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버마 민중들을 위해 힘닿는 대로 뭐든지 해야겠다”는 멤버들의 생각이 모아져 기획된 콘서트였다. 기타를 맡은 소모뚜는 버마 출신일 뿐만 아니라 이번 버마 민주화운동 상황을 한국에 널리 알리고 다양한 지지, 지원을 조직했던 단체, 한국에 있는 버마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모임인 ‘버마민중학살규탄과 민주화운동지지 긴급행동(버마액션)’에서 활동하고 있다. “버마 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 나서면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잠시 움츠리고 있는 거죠. 버마 민주화 운동은 계속 될 거예요. 결국 버마는 승리할 겁니다.” 버마 상황을 전하며 소모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왼쪽부터 베이스 소띠아, 기타 소모뚜, 건반 해리, 드럼 송명훈, 보컬 미누. 사진 | 강곤



농성장에서 지어진 이름, 스탑 크랙다운!


스탑 크랙다운은 2003년 겨울, 정부의 광기어린 단속과 강제추방에 맞서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했던 서울 태평로의 성공회대성당에서 결성되었다. 한국에 온지 14년째인 보컬 미누는 농성 중에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민중가요도 부르고 공연도 하는데 우리 이주노동자들에게 딱 맞는 노래가 없어요. 몇 명이 모여서 우리가 직접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자고 했죠. 소모뚜도 그 전에 유레카란 밴드를 했었고. 그래서 밴드가 그 자리에서 결성이 되어버렸어요. 이름을 뭐로 할까 하다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가장 절실한 문제였으니까 강제추방 중단하라! 스탑 크랙다운으로 되었죠.”


다섯 명의 멤버들은 락(Rock)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있지만 약간씩 음악적 취향이 다르다. 출신국가가 다른 만큼 문화적 차이도 있을 것이다. 명훈은 그것이 스탑 크랙다운만의 장점이라고 한다. 나이는 비밀이라는 밴드의 맏형 미누도 “우리 음악이 락이지만 뭐랄까, 냄새가 좀 달라요. 말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어요. 동양적인 냄새를 풍기는 락이라구 해야 하나?”라며 거든다.


지난 2004년 그 말 많았던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공연에 참여해 부른 ‘손무덤’은 스탑 크랙다운의 대표곡이 되었다. 당시 노동자 문예운동을 박제화하고 상품화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던 이 공연에 그나마 20년 전 한국 노동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함께 했기에 면피가 되었다는 평을 읽은 적이 있다. “밴드 이름이 워낙 강하다보니 방송국에서 섭외를 하면서도 어려워해요. 너무 강한 노래는 부르지 말아달라고 대놓고 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고. ‘손무덤’은 안 된다고 해서 출연을 접은 적도 있어요.” 명훈은 그와 같은 검열과 개입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사실 1집 앨범이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대변하다보니 무겁고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욱 정성을 기울인 2집 앨범이 지난 6월 제작되었다.


사실 공연도 그렇지만 음반 제작도 쉬운 일이 아니다. 미누와 함께 작곡을 하고 있는 소모뚜는 “이메일로 작곡한 것을 보내면 서로 의견을 말하고 덧붙이고 해서 노래를 만든다”고 창작 과정을 설명한다. 연습도 공연 당일 리허설에서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꽤나 유명하다는 대중음악 밴드들도 살림이 어려워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고는 한다는데 이들이야 오죽할까. 명훈은 “2집 앨범은 그동안 공연에서 받았던 출연료를 걷어서 만들었어요. 많이 팔아서 그 수익금을 다시 나눠야죠.”라며 그나마 밴드활동에 개인적인 비용 부담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한다.



가장 인상 깊은 건 한국사람?


10년 동안 봉제공장 등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해온 미누는 현실에 저항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주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을까”하는 것이 요즘 고민이다. 그는 밴드 활동 외에 캠코더 촬영에 열심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직접 발언하기 위해 만든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에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2005년 밴드에 결합하여 건반을 맡고 있는 해리는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된 뒤 노동운동의 소식통인 노동네트워크에서 웹디자인을 하고 있다. 스탑 크랙다운의 홈페이지도 해리의 작품이다. “웬만한 일은 다 자급자족”이라는 소모뚜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베이스를 담당하고 있는 소띠아는 컴퓨터 조립판매를 하고 있으니 밴드 구성원 모두 한 가닥씩 하는 재주꾼들인 셈이다.


2003년 농성장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우선주 씨와 결혼한 소띠아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이란 뻔한 질문에 “모든 공연은 다 감동적이죠. 특히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공연은 더….”라는 대답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공연장에서 한국인 스텝들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차별할 때라고 한다. “야, 이리와 봐.” “이거 맞춰봐.” 그러면 한 ‘성질’ 하는 미누와 소모뚜는 “아저씨, 우리 반말하는 거 존나 싫어하거든.”하며 정색을 한단다. 그러면 대부분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거나 말을 돌린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데 왜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그래?”하는 비아냥거림은 이미 익숙해졌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활동을 하니까 좋은 한국 사람을 많이 만나죠. 하지만 공장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다 못 된 사람인 줄 알아요.”라며 해리는 “한국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 이미지 관리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한편 소모뚜도 버마액션에 몸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장이 좋은 사람”인 탓에 지금도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주말에 밴드 활동할 시간을 보장해주는 대신 평일에 작업을 더 해주는 조건이니 사장이 크게 선심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음반이 나오면 구입해서 직원들에게 선물까지 한다고 하니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서는 부러움을 듬뿍 살만한 행운이다.



어느새 삼겹살집은 하나 둘 모여든 버마 민주화운동 단체 사람들, 이주노동자 영화제에서부터 자원활동을 했던 대학생들, 스탑 크랙다운의 팬클럽이자 후원인들로 들어차 왁자지껄하다. 무슬림이어서 삼겹살을 못하는 해리의 주 메뉴인 계란말이가 늦자 소모뚜는 아주머니가 닭 잡으러 간 모양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 소띠아의 애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미누는 다들 소개를 시켰는데 애기는 왜 차별을 했냐고 사회를 보는 명훈을 타박한다. 버마 민주화를 위해, 스탑 크랙다운을 위해 건배가 잇따른다. 이미 12월 내내 주말마다 공연이 잡혀 있다. 밴드 이름을 바꾸는 날이 오기 위해 노래를 한다는 이들은 오늘의 힘으로 다시 무대에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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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22:39 2009/06/01 22:39
[다문화가정] 우리가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   기본 처우부터 국적취득까지… 한국은 ‘좁은 문’   최영진 기자 yj7401@paran.com
 
올해로 13년 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사누 파라자파티(39)씨는 네팔이 고향이다. 그는 현재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인도·네팔 전통음식점 ‘안나푸르나 레스토랑’을 한국인 부인 이금옥씨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빨간 티셔츠를 입은 두 사람이 밝게 인사를 한다. 피부색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한눈에 부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네팔에서 사업 실패로 많은 빚을 져 결국 돈을 벌기위해 한국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누씨. 그는 96년에 산업연수생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주로 원단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36시간동안 잠 한숨 안자고 일했던 적도 있어요. 그렇게 일해도 사장은 월급을 잘 안 줬어요. 3개월 넘게 밀리기도 하고, 일부만 주기도 하고.” 지금은 괜찮다면서도 속상했던 이야기들을 계속 내어 놓는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많이 무시했어요. 입에 욕을 달고 살았고요. 툭하면 ‘야, 이 새끼야’했죠. 참 속상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오히려 우리가 그 욕을 그대로 배우기도 했어요.” 한숨 쉬며 말하는 사누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막말로 무시하고, 각종 차별 대우에 생존의 위협까지. 이주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또 다른 사례를 들었다. “택시를 타는데 외국인이라 그런지 일단 반말부터 하더라고요. ‘어디서 왔냐? 돈 많이 벌었어?’기분이 나빴지만 처음엔 그냥 넘어갔죠. 그런데 기사가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도 않고 중간에 내리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시끄럽다며 내려서 걸어가라 하더군요. 그래서 세게 항의를 했죠. ‘당신 신고하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함부로 하지 마라’ 한국말을 꽤 하는 모습을 보곤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요.”
 
 
그들이 한국에서 결혼 못한 이유

결혼생활이 궁금해졌다. 2000년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다는 사누씨와 금옥씨는 2003년에 네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다시 왔단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등록 상태인 사누씨의 신분 때문에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는데, 6개월 출국했다 들어오면 다시 올 수 있다는 어느 신문기사를 보고, 네팔로 나가 결혼해서 7개월을 살고 왔다고 한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 2004년 11월에 레스토랑을 내고 5년째 살고 있다면서 결혼과정을 설명한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거라는 사누씨는 아직 한국 국적이 아니다. 한국인과 2년 이상결혼생활을 하면 국적 취득을 신청할 수가 있어서 2년이 지나 신청을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단다. 아직 자녀가 없는 탓에 위장결혼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자녀가 있어서 그런지 한국 국적이 나왔어요. 아이가 없다고 우리가 거짓으로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현재 사누씨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고 한국말이 서투른 사람들을 대신해 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지역 내 단체와 함께 한 초등학교에서 네팔을 소개하는 교육을 맡기도 했단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누씨와 금옥씨 부부의 행복을 빌어 본다.
 
 
당신에게 소중한 자유는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두 번째로 만난 소모뚜씨는 올해 34살이다. 그는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 down band - 탄압을 중단하라)’에서 기타를 치면서 버마행동 총무도 맡고 있다. 일터에서 퇴근하고 나온 그를 만났다. 인사를 하며 건네는 명함 위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유를 나누어 주세요’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1995년, 스무살 때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모뚜씨에게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게 된 계기를 물으니 버마 군사정권하의 정치상황을 전한다. 숨도 쉴 수 없는 감시, 탄압 속에서 버마(미얀마)를 벗어날 기회만 엿보다가 한국으로 오게 됐단다.
소모뚜씨는 처음 8년 동안 김포에 있는 박스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군사정권하에서 살아와서 처음에는 노동이라는 것이 법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생각을 못했단다.  “근무시간은 6시 반까지였는데, 매일 밤 10시까지는 거의 연장근무를 했어요. 사장 맘대로 새벽 1, 2시까지 일을 시키기도 했죠. 그런데 시급이 4,000원이라면 연장근무 할 때는 3,000원만 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지만 그때는 몰랐죠.” 그렇게 8년을 일하고 2003년 서울에서 있었던 이주노동자 농성 투쟁에 결합했다는 그는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단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일을 배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면서 지금은 실력도 있고, 인정도 받고 있다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소모뚜씨도 처음에는 다른 이주민들처럼 얼토당토않은 질문들을 많이 받았단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옷은 입고 다니냐? 너희 나라에 해는 있냐? 달은 몇 개냐? 이런 식의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농담으로 나뭇잎으로 옷 만들어 입는다고 그랬더니 진짜로 믿더라고요….” 그의 눈에 한국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무시하고, 영어 쓰는 서양인들은 다가오기만 해도 겁내며 손사래를 치는 한국인들의 이중성이 느껴져 씁쓸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

그는 지금 어떤 신분일까. “2005년 난민신청을 했는데 지난 9월에 난민신청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죠. 물론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버마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다만 버마 상황이 불안하니까 인도적 체류허가는 하겠다고는 했어요. 근데 버마상황을 누가 판단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버마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정부가 판단하면 우리는 쫓겨나겠죠. 우리는 여기서 쫓겨나면 정말 위험해요. 우리 입장을 누구 기준에서 판단한다는 건지….”
소모뚜씨는 현재 사귀고 있는 한국여성이 있다고 한다. “바빠서 만나지도 못해요. 지금 하는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라며 계면쩍게 이야기 한다. 버마에 있는 가족과는 전화만 하고 14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는 그에게 한국은 앞으로 얼마를 더 살아야 할 지 모르는, ‘두 번째 고향 같은 나라’가 돼 가고 있다.
소모뚜씨는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그도 9년 동안 미등록인 상태로 생활했는데 예전에는 등록, 미등록의 차이가 그렇게 없었단다. 2003년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서 살인적 단속, 인간사냥이 자행된 것이다.
고용허가제는 노동허가제와 달라서 회사와 1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회사의 동의 없이는 직장을 옮길 수 없다. ‘입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식이다. 못 견디고 나오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돼 버리고, 바로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 후엔 살인적인 단속, 그에 따르는 추방밖에 남지 않는다.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추락사 하는 등 죽어나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지난 9월28일에는 버마 노동자가 출입국사무소에서 심장통증을 호소했지만 조치를 제대로 취해 주지 않아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고용허가제가 계속되는 한 한국사회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붙은 ‘불법’ 딱지는 바로 아이들에도 붙어버린다. ‘불법’이 되어 교육, 의료 등 모든 것이 사각지대에 내몰린 그들에게 삶은 전쟁이다.
 
 
피부색 다르지만 피 색깔은 모두 같아요

두 명의 이주민들에게 각각 한국인들에게 바라는 점을 물어보았다. 사누씨는 “지킬 건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월급 제대로 안 주는 사장들이 많아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 등이 더 심각해지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생각해 보세요. 한국 사람들, 대학생들 힘든 일 안 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주 노동자들, 한국 사람들이 안하는 정말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부른 거 아닙니까. 싼 임금에 일 시키려고요. 외국 사람이라 피부색과 얼굴은 다르지만 피 색깔은 모두 같아요.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많이 바뀌긴 했지만 인간답게 대우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소모뚜씨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인식이 나빠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해서 그런지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아요. 한때 한국의 이주노동자 활동가가 네팔을 방문했는데 네팔사람들이 한국인이 왔다고 굉장히 분노했다고 해요.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나서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를 도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고 수습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인식이 안 좋아요. 배 타고 돌아다니는 선원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도 떠돌아요. 선원들이 러시아 등 현지에서 결혼하려고 하다가도 한국인이라면 결혼을 거절하더래요. 인정하고 싶건 아니건 이제는 정말 따로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서로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될 거에요. 우리 모두 서로 존중하고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진정으로 친구가 되어야 해요. 한국인들도 이제 시야를 넓혀야 해요. 오히려 그게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닐까요?” 그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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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22:33 2009/06/01 22:33

나의 사랑, 나의 한국

-스톱크랙다운밴드를 통해 본 이주노동자 이야기


최지수(서울,취재2기)


스톱크랙다운 밴드를 아십니까?


 4 월 26일. 자그마한 호프 집 ‘슘’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비가 쏟아지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모인 이들은 서로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이들은 모두 MWTV에서 주최한 이주 노동자 후원의 밤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피부색, 말투는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가족을 만난 것처럼 얼싸안거나 환한 얼굴로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마다 고단한 일주일을 마감하는 토요일임에도 모인 사람들은 지친 기색 없이 즐겁기만 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 밴드입니다.”

 유 창한 한국말의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랜 시간 술과 음식으로 회포를 풀던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환영 의사를 밝혔다.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기대는 점점 커져갔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울렸다. 지금껏 자리를 지키던 이들은 모두 기립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진정 흥을 낼 수 있는 무대가 펼쳐졌다. 절박한 이들을 음악으로 보듬은 건 스톱크랙다운밴드의 몫이자 역할이었다. 노래가 시작 되었다. 그것은 네팔 어도, 영어도 아닌 한국어로 된 노래였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자국의 언어가 들리지 않아도 스톱크랙다운밴드면 모두가 즐거운듯 했다. 좁은 공간은 금세 열기로 가득 찼고, 이주노동자의 밤은 지금까지의 서러움을 알기라도 하는 듯 화려한 시간으로 물들었다. 오직 열정 뿐 인 밤이었다.

 <이주노동자의 밤>

 

  스 톱크랙다운밴드는 각각 네팔, 미얀마, 인도네시아, 한국 출신의 기타, 보컬, 드럼, 베이스, 키보드로 이루어진 다국적 이주노동자밴드다. 최초 이주노동자 밴드였던 유레카 밴드의 소모뚜와 강라이와 미누의 미누가 합쳐 만든 밴드로서 꾸준한 앨범발표와 공연 활동을 하고 있으며 언더 뿐 아니라 메이저에서도 음악성을 인정받아 행사와 콘서트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입니다.”

 무대에 있을 때만큼은 노동의 고통도 힘겨움도 잠시 잊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그들, 유명세만큼이나 다양한 사건들도 많았지만 그 전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이기에 음악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자꾸만 무대가 줄어들어요. 현실적 어려움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설 곳이 점점 없어지고 당연히 저희도 한가해지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공장 사장님들이 단체 활동 싫어한다고 많이  탈퇴 하더라구요.“

 스 톱크랙다운밴드에서 기타를 맡고 있는 소모뚜가 씁쓸하게 말했다. 아무리 권리와 인권이 있어도 결국 남의 집 살이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누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는 음악가이기 전에 작은 소화기 공장의 노동자였고, 체류자였기에 진실을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꾸준히 활동 중인 스톱크랙다운밴드>

 

 4 월 27일, 종각역 앞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인정 관련으로 최저 임금법 통과 농성회가 열렸다. 누구보다 3D업종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들은 각종 위험과 재난에 노출 된 상태에서도 최저 임금법에 훨씬 못 미치는 대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단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 되는 처사들이 타당하게 이루어졌다. 누구보다 세계화에 발맞추자는 우리로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좀 지나면 더 좋아 지겠죠.”

 소모뚜는 기타를 챙겨 쓸쓸히 연습실을 나섰다. 이제 가리봉에 자리 잡은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내일 8시까지 출근하려면 괜히 마음이 바빴다. 한국의 삶이 나아지리란 기대, 일말의 희망도 빡빡한 시간 안에서 꿈꾸기엔 벅찼다.

 이주 14년 째, 한국은 여전히 냉담했지만 소모뚜는 정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지켜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갈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최저 임금법 농성회, 종각역에 모인 이주 노동자들>

소모뚜의 일상

 아 침 7시, 소모뚜의 하루는 바쁘게 시작 된다. 집 근처에 있는 공장까지 8시 안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동안 미뤄 두었던 작업 때문에 늦게 끝나는 날이었다. 월 11만원,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던 소모뚜는 한쪽 구석으로 이불을 걷어 놓고 두 세 벌 안되는 옷을 뒤적였다. 어떤 식이든 절약해야 생활 유지가 가능하다던 그의 월급은 딱 최저 임금 수준.

 “이번 공장에서 일한지는 4년째예요. 여기 사장님이 좋아서 무리한 잔업은 잘 안 시키죠. 지난번 8년 일한 공장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매일 피곤했어요.”

  오래 일할 수 있는 비결을 묻는 말에 조금의 차별을 감수 하면 된다고 덧붙였지만, 그의 표정은 짐짓 밝았다. 잦은 상처에 마음조차 굳은살이 되어 단단해져 버린 것일까? 소모뚜는 그래도 일 할 공간이 있어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힘찬 하루를 시작하는 출발을 알렸다.  

<출근 중인 소모뚜, 공장 들어 가기 전>

  가산 디지털 단지 내 자리한 스탠다드 엔지니어링, 소모뚜는 이 곳에서 소화기 압력계 제조하는 일을 한다. 특별한 자격증이 필요 없어 수월하게 일 하게 된 공장, 꽤 오랫동안 식구로 있어서인지 처음에 편견을 가지던 공장 사람들도 이제는 동생처럼 대해 준단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소 모뚜의 비자는 망명, 체류는 합법이지만 노동은 불법이었다. 그의 나라가 안정 될 때까지 한국에서 신분을 보호 해주겠다는 망명 각서는 그에게 있어서 선악과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인데, 그것의 경계는 참으로 모호해 모순적 문제점을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일 하지 않으면 밥 먹고 살 수 없는데 한국 법은 좀 이상하죠?”

 애 매하게 웃던 그의 얼굴은 곧 굳어버렸다. 웃으면서 말하기에 자신의 처지는 한국의 법만큼이나 모순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체류 허가 내용은 어렵지 않았다. 소모뚜의 고향, 즉 미얀마가 안정 될 때까지 무기한의 체류를 허가 한다는, 그렇지만 체류 기간 내 노동은 허가 외  항목이었기에 그의 처지 또한 안전한 건 아니었다. 소모뚜의 억지웃음은 그만큼 힘겨운 사항을 대변하는 듯 우울했다. 그래서 그런지 불법 체류자 단속이 올 때면 간이 콩알만 해 지는 건 둘째 치더라도 공장 사장님부터 걱정이라는 것이다.

 “제가 목 잡혀서 끌려가는 건 상관없는데 사장님한테 많이 미안하죠. 괜히 일 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떼 쓴 건 저니까요.”

 그는 결국 씁쓸한 얼굴로 공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저녁처럼 홀연한 발걸음 뒤로는 어두운 삶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일 을 하다 보면 어느 새 하루가 다 간다. 완연히 땅거미가 지고서야 소모뚜는 집으로 돌아온다. 대문도 없는 현관문에 달랑 하나 걸려 있는 자물쇠를 풀고 나면 좁고 어두운 그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3평 남짓한 월 11만원 짜리 방, 부엌도 욕실도 없지만 그래도 집이 최고라는 소모뚜는 대충 세수를 마친 뒤 컴퓨터 앞에 앉기 바빴다. 그동안 미뤄 온 작곡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음악을 대 할 때면 번쩍 정신이 든다던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소모뚜는 다른 때보다 열심히 몰두 했다.

 <소모뚜의 집>

 

 

하 루 중 자는 시간이 제일 좋다던 소모뚜의 이불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바닥에 깔렸다. 비닐로 막아 둔 창문 너머 희끄무레하게 달이 걸리고 나서야 그는 노곤한 몸을 이불 속에 누였다. 정신 없이란 표현이 딱 어울렸다. 소모뚜는 피곤에 절인 파김치처럼 잠든다. 불규칙하게 내 쉬는 숨은 집, 공장, 일, 공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구성 된 그의 일상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로 살아가기   

 

 “채불 임금과 산업 재해에 관해 실질적으로 일 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은 보상 받기가 힘듭니다. 바꾸자는 목소리는 커져 가는데 정작 바뀌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소 모뚜는 현 이주노동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에 대해 이 두 가지를 꼽았다. 실로 이주노동자 단체 모임에 가면 사고를 당한 이들이 꽤 많고, 그들은 무지하고 순박해 보상은  커녕 당연히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줄 안다고 했다. 옆에서 지켜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국은 선진국인데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오겠다고 택한 이유도 같은 아시아권이라서가 아니라 잘 사는 나라라는 느낌이 강해서 인데, 이 나라 사람이 아니면 소용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더 불어 그는 불법 체류자 단속 중 끌려가지 않게 위해 옥상에서 뛰어 내린다거나 차도로 뛰어들어 사고가 나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 사상자들을 보면 자신도 고국으로 돌아가 버릴까 고민하기도 한다고. 동료의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 하고도 남아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밝혔다. 잘 살고 싶다는 굳은 심지만 아니라면 벌써 몇 번이고 숨 가빴을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채 불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월급은 몇 달이고 밀리기 일쑤, 그러나 일부 업주들은 미안한 기색하나 없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두, 세달 치 월급을 받지 못하고 해고당하는 경우도 허다한 건 한국인들이 모르는 그들의 일상적 현실이었다. 소모뚜는 막 한국에 들어 왔을 10여년 전,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는 듯 굳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에 정 들었어요.”


  비 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그를 다시 만났다. 다른 때보다 들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보였다. 내일 있을 공연 때문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며, 연습 때문에 휴가 허락 까지 받았다는 것. 오랜만의 주말 휴가라 그런지 소모뚜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날씨만 아니라면 팔짝팔짝 뛰어다녔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이는 그에게 행복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나라 같은데, 한국은 내가 자기 나라 사람 같지 않나 봐요. 나는 정말 한국이 좋은데…”

 말 끝을 흐리는 그에게 아니라는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구름처럼 흐릿한 미소도 잠시, 그는 빠르게 지하철에 올랐다. 목적지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 여성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마라톤 행진 행사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서는 무대로 더욱 흥분된다는 그는 도착하자마자 멤버들과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거의 2~3주 만에 얼굴을 본다던 멤버들은 반가운 기색을 숨길 수 없을 만큼 역력했다. 열광적인 무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스톱크랙다운밴드, 그리고 소모뚜. 보기만 해도 끈끈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준비 됐습니까!”

 보 컬 담당 미누가 목소리를 높이자 주변은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운동에 앞서 공연을 즐기려던 참가자들은 앞 다투어 대답하며 스톱크랙다운밴드의 무대를 환호했다. 타이틀 월급날과 박노해 시인의 시를 가사로 쓴 손무덤, 2곡을 부른 그들의 무대는 대낮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다.

<공연 중인 스톱크랙다운밴드>

 

 

 소 모뚜는 무대 소감을 묻는 말에 막무가내로 좋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활짝 웃는 모습에서 이주노동자로서 힘겨운 삶을 영위해가는 단면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직 관객을 위해서 노래하고 기타를 친다던 그는 한국에서 한국 사람을 위해 노래하는 음악인일 뿐이었다.

 5 시, 공연을 마친 그는 멤버들과 아쉬운 인사를 하고 쓸쓸히 전철에 올랐다. 가산디지털단지 까지 저녁 전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즐거운 주말이 끝나가는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그의 어깨는 유난히 무겁고 쓸쓸해 보였다. 내일이면 다시 이주노동자의 하루를 시작해야 하기에 더욱 그런 지도 몰랐다.

 “ 하루 빨리 저희도 살기 좋아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정부도 점차 변하고 있어요. 변하는 김에 더욱 빨리 변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아시아 화합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사업이나 국립전당사업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정부가 아시아에 두는 관심의 첫 걸음 같은 거요. 훌륭하게 완성 돼서 저희 스톱크랙다운밴드도 무대에 설 수 있길 바랍니다.”

 소 망을 묻는 말에 소모뚜는 그다운 소박함이 묻어나는 대답을 했다. 그의 바람대로 한국 정부도 이주노동자 인권에 점차 귀 기울이고, 교류 사업 확대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스톱크랙다운밴드의 무대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소모뚜의 얼굴에 진정한 웃음이 번지는 날이 머지 않았으면하고 희망하면서 말이다. <취재 기간 4월 22일부터 5월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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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01:26 2009/05/29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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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10가지 말 ◑

 

1. 참 좋은 친구를 두었군

2. 우리 , 조금 느긋해지자

3. 자네의 장점이 바로 이거군!

4. 역활 모델을 찾아보게

5. 좋은 결정에는 책임이 뒤따르네

6. 3가지 유혹에 넘어가지 말게

7.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이야

8. 발표도 능력이지

9. 리더는 질문해야 해

10. 미래는 실천하는 자의 것이야!

 

 ---사람이 모이는 리더는 말하는 법이 다르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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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00:53 2009/05/27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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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끌어가는 수레에 한 사업가와 노예가 함께 타며 밀림을 건어  이동 하고 있다.
그 때 수 많은 여우들이 나타나 그들을 물어 먹으러 힘껏 따라 온다.

말에게 최고의 속도로  뛰게 하면 살아 남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인과 노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인간이라는 먹이를 놓치지않으러고
있는 힘을 다 써서 뒤 따라오고 있는 여우들...

밀림에는 살고자 하는 사람들과 먹이를위해 노력하는 여우들의 모습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성장 하러 하는 새싹들의 꿈을 깨지게 하고 있다.

이 때 노예가 갑자기 달리고 있는 수레에서 뒤 따라 오고있는
여우들 사이로 뛰어 내렸다.

여우들이 자기를 뜯어 먹고 있는 시간에 자신의 주인이 더 멀리 도망갈 수 있게
아니면
주인에게 최고의 선물로 자기의 삶을 희생 해주는 뜻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않다.
진정한 영웅은 남을위해 희생을 하는 것에 느리지않다.
진정한 영웅은 세상을 위해 용감한 자살을 해도 후회 하지않다.

이런 영웅은 살아 있지않아도 수 많은 사람들의 심장에
그의 모습이
영원히 새겨져 있다.
영원히 지워지지않는다.

한 인생에
탄생이란 책의 첫 페이지 이며
죽음은  막지막 페이지 뿐이라 그리 대단하지않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그책 속의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책을 어떤 내용으로 채워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그 길을 따라 갈건가요?

영웅으로?
아닌 무엇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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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5 00:53 2009/05/25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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