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남의 고통을 볼 수 있는 길

현상적 세계의 총체성을 드러내주는 계몽은, 우리가 먼저 서로 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때만 주어진다. 모든 사회 운동은 전체 고통의 부분적 관점만 제공한다. 홀로그램의 파편처럼, 각각은 특정 관점에서 비롯된 굴절된 전체의 모습만을 담고 있다. 한 개인은 이 고통을 보고 그것이 노동자 착취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두번째 사람은 그것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로 본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인류를 노예로 삼고 대량 학살하는 것으로 본다. 이 가운데 누구도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각각은 전체 억압의 특정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측면을 지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 방에 모여서 각자의 전망을 공유하게 되면, 각자 총체성에 빛을 비춰줄 자신의 ‘촛불’을 들게 되면, 그들은 실천 행위 속에서 서로 의존적인 전체에 대한 다른 사람의 공통 작업을 보게 된다. 하나로 뭉칠 때만, 그들의 서로 다른 지각 영역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다. 함께 그들은 전체의 지도를 그릴 수 있고 그럼으로써 권력의 양식들, 공통의 저항 전통, 자신들의 이념적 통일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여성들의 대상화가 노동자의 대상화와 같다는 걸 보게 된다.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노동자들의 굴욕과 불명예가 동성애자 폄하와 같다는 걸 보게 된다. 유대인들과 유색인들은 동물을 노예처럼 다루고 폭행하고 고통을 주는 학대가 바로 자신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의 논리적 지평이자 전형적인 실습 행위임을 보게 된다. 핵심은, 이들 각자 나름의 관점들을 결합하는 것만이 서로 흩어진 저항 세력들이 자신들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와 정신적 도전 과제를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John Sanbonmatsu, The Postmodern Princ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4), pp. 201-202.
2005/01/27 11:11 2005/01/27 11:11
댓글0 댓글

트랙백1 트랙백
먼 댓글용 주소 :: http://blog.jinbo.net/marishin/trackback/117
  1. Subject: 기억하고 싶어서 먼 댓글 보내온 곳 2005/01/27 16:01

    * 이 글은 marishin님의 [남의 고통을 볼 수 있는 길] 에 관련된 글입니다. 기억하고 싶어서 트랙백으로 연결을 시켰습니다. 두고 두고 읽어보고 싶어서요.

앞으로 뒤로

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