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헌법은 헌법의 자격이 없다
이른바 유럽헌법에 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가 지난 5월29일과 6월1일 각각 부결된 걸 전후해서 수많은 전망과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발리바르와 네그리 이 글을 보시면 일부 관련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글들은 많고 말들도 많지만 무엇이 진정한 쟁점인지를 보여주는 건 별로 없습니다. 이른바 헌법 논의와 유럽연합 변천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다룬 글이 있습니다. 영국 학술지 <뉴 레프트 리뷰> 2005년 5-6월호에 수전 왓킨스(Susan Watkins)가 쓴 '대륙의 떨림'(Continental Tremors)입니다. 이 학술지는 보통 editorial(사설)이라는 게 없는데, 이 글은 5-6월호 사설입니다.
글을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유럽헌법이라는 이름은 적합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건 일반적인 헌법이 아니라 유럽연합 작동에 관해 그동안 합의된 세세한 규정들을 모두 모아서, 유럽 시민들로부터 사후 추인을 받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 유럽연합 구성 조약(이른바 헌법)이 통과되면 유럽이 아메리카 초강대국에 대한 민주적인 견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헛소리일 뿐이라고 왓킨스는 주장합니다. 하버마스나 네그리 같은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겁니다.
나머지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유럽연합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구성 조약을 거부했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비교적 명쾌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원고지 120장 분량의 글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결국 유럽연합 지배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을 목표로 했던 반대 투표는, 다시 한번 좌파 대표성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네덜란드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들은 유권자 대다수에 단호하게 맞섬으로써 정치 영역을 주변 세력에게 남겨줬다. 그로써, 신자유주의 기획에 맞서는 전반적인 대안 프로그램의 건설이 여전히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2005년 여름에 친 번갯불은, 이 프로그램의 부재를 조명하는 가운데 그것이 존재할지 모르는 미래의 지평선을 잠깐동안 깜박하고 드러내 보였다.
대륙의 떨림(Continental Tremors)
수전 왓킨스(Susan Watkins)
뉴 레프트 리뷰 2005년 5-6월호 (원문 newleftreview.org/?view=2559)
유럽 관련 조약들은 그전에도 거부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계절에 예정에 없이 나타난 유럽연합 내부 과정에 대한 대중의 불만 분출은 전례가 없는 것이다.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 투표에서 유럽연합 구성 조약(왓킨스는 이것이 헌법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이렇게 번역한다 : 옮긴이)이 거부된 것은, 아일랜드가 2001년 니스 조약(유럽연합 확대에 따른 위원회 구성 및 의결 방법 개정안을 담고 있다 : 옮긴이)을 부결시킨 때나 덴마크가 2002년 유로 도입을 부결시켰을 때 보였던 냉담함과 불만의 혼합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르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거의 투표율은 꽤 높았다. 각각 63%와 70%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두 나라가 마찬가지인데, 비공식 좌파의 상대적인 주변부 세력이 조약에 반대하는 논쟁을 부추기는 데 중심 구실을 했다. 투표 결과가 분명한 계급적 성격을 보인 것도 똑같다. 저임금 노동자, 노동당(네덜란드의 PvdA) 또는 사회당 지지자 다수가 당 지도부에 반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젊은이들은 확고하게 반대했다.
유럽연합 내부의 사태 진전이 하나의 논리를 따르는 일은 좀체 없다. 경쟁 관계의 국가 이익, 정치적 운명, 서로 틀린 경제들, 외부 세력 사이의 다각적인 상호 작용이 특히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의 법칙으로 기울게 만든다. 2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장래 유럽연합의 기능과 회원국 추가 확대에 대한 이번 여름의 제동이 가져올 결과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이번 투표 결과에 대한 유럽연합 지도자들의 첫 반응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이 반응이란 국민투표를 축소하고 대신 홍보를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유럽 모델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다. 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와 기독민주주의 시대에 창설된 유럽연합은 자유주의 헤게모니 시대에 돌연변이해서 다른 종류의 기구로 확장됐다. 2005년 국민투표는, 유럽연합에 대한 지표가 되는 다른 어떤 조사보다 더 훌륭하게 대륙의 새로운 정치적 풍경을 폭로했다. 이번 투표는 널리 언급됐듯이 유권자와 지배집단의 간격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질서 너머의 정치학을 그려내는 문제들도 드러냈다.
찬성 진영
첫눈에 이미, 공식적인 구성 조약 옹호론은 매력적인 듯했고 충분히 그럴 듯했다. 그리고 정치 지배 기구와 언론 기구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조약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유럽연합을 더 민주적이고 더 효율적인 동시에 합리적이며 더 투명하게 만들 것이라고들 주장했다.(1) 이는 유럽의회에 권한을 부여하고 중요한 결정에 대한 개별 국가의 거부권 사용을 제한하며, 공통의 외교 및 방위 정책의 기초를 다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 결과는 아메리카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중재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더 강한 유럽이라는 것이다. (영국 현대사 연구자) 티모시 가튼 애시는 프랑스 투표 전날 <르몽드> 독자들에게 이 조약이 없으면 초강대국 아메리카가 다시 '독자 행동을 할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에서 찬성 운동은 2005년 2월28일 상, 하원 의원들이 조약 비준을 위해 특별히 베르사유에 모여 만장일치의 화려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시작됐다. 완전 무장한 언론들이 운동을 주도했다. 세르지 알리미는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 라디오 방송에서 단 하나의 의견 차이도 없이 “스테판 파올리가 베르나르 게타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그는 또 피에르 르 마르크에게, 르 마르크는 또 장-마르크 실베스트르에게 넘긴' 모습을 묘사했다.(2) 페리 앤더슨이 달콤한 연합(union sucrée)(3)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전형적으로 동원해서, 공화국 대통령과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 및 사회당 지도부, <피가로>와 (주간) <렉스프레스>로부터 <르몽드>와 <리베라시옹>, (월간) <르누벨옵세르바퇴르>에 이르는 언론의 논설위원들, 뉴스진행자들과 토론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조약에 찬성하는 기라성같은 명사들, 영화배우들, 유명 축구선수들과 함께 텔레비전 스튜디오에 총집합했다. 스페인 총리, 폴란드 대통령, 독일 총리는 시라크 대통령을 지지하기 위해 날아왔다. 중립적이라고 보통 믿는 정부의 유권자 안내 우편물은 노골적인 조약 옹호 선전물이었다. 교육부가 각급 학교에 보낸 소책자도 마찬가지였다. 케스 데파르뉴 뮤추얼펀드의 회장은 '유럽 덕분에' 투자자들에게 수익률을 올려 주게 될 거라고 선언했다.
주3: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Union Sucrée', London Review of Books, 2004년 9월23일
이 모든 작업에도 반대 유권자가 여론조사에서 상승하기 시작하자, 어조가 더 위협적으로 바뀌어갔다. 조약에 반대하는 이들은 외국인 혐오자, 인종차별주의자, 반 터키 세력, 반 폴란드 세력, 반 유럽 세력이 됐다. 자유주의 언론의 지면들은 아메리카 초강대국에 대한 '유럽적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찬성 투표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서양 양쪽의 목소리들로 가득찼다. (시인) 볼프 비어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영화감독) 알렉산더 클루게, (작가) 귄터 글라스 등 (11명의 독일 지식인)이 서명한 '우리의 프랑스 친구들에게'라는 호소문이 <르몽드>에 실렸다. 이 글은 반대는 프랑스를 '치명적인 고립'으로 몰아가되, 중부 유럽국가들에게 그리고 아메리카와 관계에 '재앙적인 결과'를 안길 것이라고 논했다. 찬성 투표는 도덕적 의무였다. “우리는 우리의 무분별한 전쟁과 범죄적 독재의 희생자 수백만명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4) 이런 히스테리 상태가 고조됐음에도, 조약은 5월29일 55% 대 45%로 부결됐다.
네덜란드에선 헤게모니의 구조가 더 소박한 형식을 취했다. 언론, 정당 지도자들, 교회들, 노조 지도자들, 사용자 단체들, 심지어 여행 클럽까지 찬성 투표를 촉구했다. 처음 국민투표를 주장했던 의회는 구성 조약을 찬성 85%로 승인했다. 패배의 분위기가 나타나자 다시 한번 공식적인 수사법은 점점 더 종말론적인 어조를 띠었다. 발케넨데 총리는 아우슈비츠의 유령을 불러냈고 경제부 장관은 '빛이 꺼져가는 것'을 이야기했고 법무부 장관은 발칸반도화와 전쟁을 이야기했다. 6월1일의 국민투표는 62% 대 38%로 부결됐다.
조약 읽기
두 나라에서 처음 반대 투표를 집결시킨 핵심 요소는 조약 그 자체였다. 네덜란드의 반대 운동은 사회당(5)의 투사 4만명이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회당의 '날아가는 토마토' 포스터는 관료주의와 자유시장 정책을 동시에 공격했다. 네덜란드에서 조약에 대해 '잘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85%는 조약에 반대한다고 사회당은 지적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프랑스 금융거래과세운동연합(ATTAC) 운동가) 베르나르 카상이 묘사한 것을 보면, 프랑스에서 논쟁은 집중적인 교육 캠페인에 의해 뜨거워졌는데, 이 캠페인은 애초 조약에 찬성하던 다수의 태도를 바꿨다. 기존 체제가 전한 말 곧 아메리카에 대한 대안을 더 잘 제시할 수 있는 더 민주적이고 효율적이며 투명한 유럽이라는 주장은 조약 문구 그 자체와 심하게 모순됐다.
왜냐하면 이 조약은 1957년 만들어진 유럽연합의 독특하게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구조를 사실상 전혀 바꾸지 않은 채 유지한다. 입법 발의권을 독점한 초국가적인 집행위원회는 여전히 회원국 정부의 외교적 거래에 의해 임명된다. 유럽의 유권자들은 유럽연합 집행 기구 구성을 결정할 어떤 권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날로 권한이 강화되는 정부 수반 모임인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 통상 관련 소송을 주로 담당하는 유럽사법재판소, 중앙은행, 정부간 각료회의가 이런 신봉건적 기구 지형의 다른 특징들을 이루고 있다.(6) 유럽의회는 입법을 저지하거나 발의할 의미있는 권한이 박탈당한 채 대체로 자문기구적 성격을 계속 유지하게 되어 있다. 비록 이제 법 개정안을 제안할 수는 있지만, 집행위원회는 자신들이 적당하다고 판단하면 이를 취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더 민주적인' 요소였다.) '합리화'가 지칭하는 건, 각료회의에서 여러나라의 가중 투표권에 대해 이뤄진 거래다. 특히 2000년 합의가 도출된 것을 말하는데, 내용은 프랑스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독일의 비중을 높이고, 스페인과 폴란드의 비중도 약간 줄인 것이다. 자비에르 솔라나의 업무가 고위 대표에서 외교관들의 지원을 받는 외무장관으로 바뀐 것, 전직 총리 한명을 임기 6개월의 각료회의 의장 서리 대신 임기 30개월의 의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빼면, 구성 조약에는 새로운 게 거의 없다.
이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한때 희망한 '토대 설립의 정치적 행위'가 아니었다.(7) 이는 또 서로 다른 정책들의 토론 틀이 되고 그 정책 결정의 근거가 되는 법적인 체제라는 의미에서 헌법이 아니다. 도리어 정책들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를 상품과 용역의 자유 무역의 미세한 작동에까지 상세하게 기술해 선포되는 조약이다. 집행위원회, 유럽재판소, 중앙은행은 이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끝까지 밀고나갈 책임을 부여받았다. 아메리카에 반대할 수 있는 독자적인 외교 정책과 방위 정책의 기초를 놓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 조약은 모든 안보 문제를 북대서양조약기구 지도부에 종속시켰고 외교 문제에 대한 개별 국가의 거부권을 유지했다. 영국 또는 라트비아가 아메리카에 반하는 어떤 전략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조약은 유럽이 연방이건 아니건 민주적인 헌법을 결코 갖지 못하게 보증했다. 도리어 이는 냉전시대 이후 유럽이 마스트리히트 조약, 암스테르담 조약, 니스 조약을 거치면서 진화해온 것 전체를 새롭게 성문화했다. 그 내용은 통화동맹을 향한 노력, 자유시장 의제를 밀어붙이기 위한 유럽연합 법률의 사용, 유고슬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공통 외교 정책'의 현실적인 규정, 소련 진영의 붕괴 이후 동진 정책 및 워싱턴과 유럽의 관계 재건이다. 사실상 찬성 투표는 이 조약이 헌법화하려고 하는 이 모든 발전 과정을 소급 승인하는 것이다.
12개 회원국
유럽연합 기획의 합법화를 위한 새로운 처방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 낡은 처방을 확장할 수도 없었다. 1980년대 말기 유럽공동체는 독특한 혼합물이었다. 유럽의 북미자유무역협정 격인 1986년의 단일유럽의정서(Single European Act)는 12개 회원국의 시장을 상품, 자본, 노동, 용역의 족쇄없는 이동을 위해 개방함으로써 낡은 관세동맹을 자유무역 지역으로 탈바꿈시킴을 선포했다. 유럽 통화 체제의 회계 규율은 국민경제들이 공공분야 축소와 국유 재산의 사유화로 향하도록 내몰았다. 그런데 이념적으로 보면, 자크 들로르의 집행위원회가 평화적인 연합이라는 유사 칸트적 목적론, 기술관료적 지식, 기민-사민 전통의 사회적 연대를 결합시킴으로써 번영과 안보와 진보라는 막연하지만 고귀한 전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경제적, 정치적 연합은 민주적이며 그래서 유럽의회에 진정한 입법권한을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들 확신했다. 1980년대에 이 이념적 처방은, 강력한 공산당과 혁명 전통을 지닌 나라들인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국가주의 독재를 서구 안보 연합 안에 안전하게 정착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국가로 재편하는 유럽공동체의 작업에 있어서 아주 성공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1989년부터 유럽의 지정학이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쟁점은 통일 독일의 등장이었다. 세계 3위 경제 대국인 독일은 1억5000만명의 인구가 사는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이론적으론 그 자신의 조건을 내걸고 모스크바와 협상할 수 있다는 점이 쟁점이 된 것이다. 두번째로 소련의 탱크가 우랄산맥쪽으로 돌아감으로써 더 이상 유럽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존재 논거가 분명치 않게 됐다. 마지막으로, 경제 상호 원조 회의(코메콘)와 바르샤바 조약의 붕괴가 서구에 경제 원조와 안전보장을 요청하는 한 묶음의 국가들을 남겼다. 중부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한반도 등 냉전 국경지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형식의 질서를 부과하는 문제에 직면한 아메리카로선, 유럽에서 최우선 과제가 독일을 서방 연합세력에 더 강하게 묶어둠으로써 본과 모스크바의 어떤 화해 가능성도 봉쇄하는 것이었다. 또 독자적인 유럽 안보 정책을 향한 어떤 시도도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유럽공동체가 지중해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했듯이 중부 유럽 경제들을 개방 자본주의 시장들로 재조직하게 (그리고 이 작업에 자금을 지원하게) 만드는 것도 아메리카의 최우선 과제에 해당했다. 동유럽에서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촉진하는 것은 유럽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소명'이라고 (전 아메리카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유럽 지도자들에게 말했다.(8) 아메리카는 중부 유럽 국가들의 유럽공동체 가입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스스로를 그들의 주요 동맹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유럽공동체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건 허약한 연방적 구조를 무리하게 확대하고 도시 벽 안으로 새로운 목마 무리를 들여놓음으로써 정치적 통합을 배제하고 그로써 유럽공동체가 독자적인 지정학적 세력으로 떠오르는 것도 방해할 것이다.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독일통일에 대한 다른 세력들의 즉각적인 외교적 승인을 위해서라면 값비싼 대가도 치를 용의가 있었다. (서독 화폐 : 옮긴이) 도이치마르크의 포기는 별것 아니었다. 통일된 독일은 공통의 선을 위한 통화 연합과 정치 연합의 강철같은 선에 묶일 용의가 있고 그래서 독일의 힘은 '모두에게 이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89년 12월 들로르의 중앙은행 이사회는 유럽통화동맹(EMU)을 위한 계획과 일정표를 제시했는데, 이는 그 후 2년동안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기초를 형성하기 위해 수정될 예정이었다. 이 논리는 벗어날 수 없는 듯했다. 통화 연합은 일종의 정치 연합을 수반해야 했고 이를 통해 책임의 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집행위원회는 외교 정책과 내부 문제에 대한 심화된 청사진을 준비했고, 이 청사진은 유럽연합이 될 기구의 '기둥'이었다.
마스트리히트와 사라예보
그러나 1989년 이후의 정치 연합은 통일된 독일이 인구 규모와 경제적 무게로 유럽 국가들의 민주적 연합체를 지배할 위험을 해결해야 했다. 프랑스 권력집단은 이 과제를 내켜하지 않았다. 영국이 더 긴밀한 연합체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이는 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향한 그 어떤 진정한 과정도 안건에서 빠지는 걸 뜻했다. 이와 함께 입헌 민주제의 기회 또한 안건이 안되는 걸 의미했다.
'공통의 외교 정책'을 향한 유럽의 첫걸음은, 워싱턴의 새로운 세계 질서의 전선들이 전 지구에 깔려가던 바로 그 때에 비슷하게 편협한 전망을 드러냈다. 1991년 1월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의 화력의 효과가 중동 걸프지역에서 전시되던 때에 사막의 폭풍 작전 뒤를 충실하게 따라 행진했다. 1989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세계은행의 지시에 따라 연방정부가 실시한 충격 요법이 50만명 이상의 잉여 인력을 남겼고, 이는 그 이후 연방내 공화국들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승리를 안겼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서 가톨릭계 종속국을 확보하려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분리독립을 부추겼다. 다민족 공화국 내부의 소수 민족이 분리에 반대할 것이 분명했는 데도 말이다. 1991년 8월 크로아티아와 유고인민군 사이에 격렬한 교전이 벌어지고 크로아티아와 크라이나(Krajina)의 세르비아계 사이에서도 충돌이 빚어지자, 콜과 (외무장관) 겐셔는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호할 포괄적인 정치적 해결을 촉구하는 대신 크로아티아에 대한 유럽공동체의 즉각적인 승인을 요구했다. 1991년 12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앞선 밤샘 교섭 동안, 콜은 (영국 총리) 메이저에게 유럽통화동맹 참여와 사회헌장 제정 의무를 피할 권리를 제시함으로써 크로아티아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비슷하게,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독립적으로 3만5천에서 5만명으로 유럽군을 창설하자는 프랑스의 계속된 제안도 잠정적으로 독일의 지지를 얻었다.(9)
아메리카는 독자적인 유럽군이라는 개념을 분쇄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고, 1992년 12월에 이런 형태의 군대는 실제에 있어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지휘 아래 놓일 거라는 합의를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끌어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를 향한 첫발을 재촉한 유럽공동체의 행위는, 클린턴 행정부가 보스니아 독립 인정을 위해 외교 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는 길을 열고 말았다. 이 부분은 콜과 겐셔조차 주저하던 것이다.(10) 크로아티아의 독립 전쟁은 20만명의 난민, 35만명의 이주민, 2만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1992년에서 1994년 사이,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거의 200만명의 난민을 만들어냈고, 보수적인 추산으로도 7만명의 사망자를 유발했다.(11) 이념적으로 이는 유럽공동체가 스스로 주장한 임무인 구대륙에서의 전쟁 종식 임무의 종말이었다. 전략적으론, 유혈의 결과가 유럽 지도력의 무기력을 드러냈다. 사라예보 포위는, 프랑스와 영국, 독일,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이 아메리카의 개입을 눈물로 호소하는 걸 보게 했다. 그들은 이제, 오직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화력의 위협이 투사들에게 분별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메리카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제트기로 뒷받침하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군대를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에 맞서 단결시켰다. 독일의 기본법(헌법)은 독일 공군 조종사들이 (아메리카의 지휘 아래) 비행금지 구역을 지키는 걸 허용하기 위해 개정됐다. 1993년 4월 파리와 본은 소련의 위협이 사라졌음에도 유럽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계속 종속될 것임을 표시했다.
주11: Woodward,
유러머니
유럽통화동맹은 그래서 정치적 연합이 배제되고 외교 정책은 워싱턴의 거부권 아래 종속된 채 진행됐다. 다툼이 있었지만 이 분야에선 공통의 이해를 반영하는 프로그램 중심으로 뭉치는 게 상대적으로 더 쉽다는 걸 유럽 지배자들은 깨달았다. (영국 경제학자) 윈 고들리는 마스트리히트 계획 아래 포기된 경제 관리 유형들을 유창하게 기술했다. 포기된 것들은 공적인 식량지급, 세금 부담, 세출 배정, 그리고 적자의 한도와 충당의 적정 수준을 결정하고 이자율, 환율, 인플레이션, 성장, 고용, 소득과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데 개별 정부가 발휘할 수 있는 구실이다.
마스트리히트 계획에는 독자적인 중앙은행의 설립과 운용방식(modus operandi)의 청사진은 포함되었지만, 놀랍게도 빠진 것이 있다. 그건 유럽공동체가 쓰는 용어로 표현된 중앙 정부의 대체물에 대한 청사진이다. 그런데 ... 이런 기구가 없으면 유럽통화동맹은 개별 국가의 유효한 행동을 막으면서 그를 대신할 것을 마련하지 않게 된다.(12)
사실상, 유럽의 권력집단은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암묵적인 정책 연합을 선택했다. 단일 통화 체제의 엄격한 예산 상한제와 환율 상한제, 마스트리히트 '수렴 기준'과 안정화협약은 평가절하의 선택권과 적자 충당 여지를 배제시켰다. 그래서 유로권의 이질적인 12개 국가 경제는 노동의 양보를 쥐어짜는 것을 빼고는 다른 경기순환적 조정 장치가 없는 상황에 처했다. 궁극적으로, 유로권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는 저임금,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 시장화한 용역이라는 앵글로색슨식 주주 경제적 의제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경기 침체기에도 유럽중앙은행의 금리는 '인플레이션 억제' 수준에 묶여있었다. 이런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논리라고는 불굴의 회복력을 갖춘 라인강 모델을 분쇄하는 것뿐인 듯하다. 독일의 내수는 침체 상태였고 실업률은 높고 성장률은 낮았다. 2002년 1월 새로운 통화의 도입 그 자체가 더 깊은 침체를 동반했다.
이것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스스로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 '신자유주의적 조약'을 둘러싼 날카로운 계급적 분열의 맥락이다. 네덜란드에서 노동당 지지자의 58%가 당 지도부의 방침에 반대표를 던졌다. 학력으로 보면 '저학력'의 71%와 '중간 학력'의 64%가 반대표를 찍어, 52%였던 '고학력'과 대조를 이뤘다. 1990년대 빔 코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 시절과 2002년 이후 발케넨데 정부 아래서, 네덜란드는 부동산 거품, 가구 자산의 주식화, 산업과 공공부문 일자리의 저임 서비스 부문에 의한 대체 측면에서 볼 때 영국보다 더 앵글로색슨적이 됐다.(13) 그 결과는 승자와 패배자의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긴장 고조였다. 부유층 지역인 헴스테데(Heemstede)와 블로에멘달(Bloemendaal)에서는 유럽연합 조약에 대한 투표 결과가 전체 결과와 정반대로 나왔다. 찬성률이 각각 57%와 61%를 기록한 것이다.
프랑스에선 사회당 지지자의 56%가 반대표를 던졌는데, 육체 노동자의 경우 반대가 79%였고, 실업자는 71%였다. 마르세유의 가장 가난한 지역과 노르파 드 칼레의 탄광지역에서 반대표가 각각 78%와 84%에 달했다. 한달 수입이 1500유로(187만원) 이하 가구의 반대 비율은 66%였다. 반대 투표자의 다수인 52%는 반대의 주된 이유로 “현재 프랑스의 경제와 사회 상황에 대한 불만”을 들었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반대는 35%였다.)(14) '프랑스 사회 모델'이라는 개념은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사회당 출신 총리) 조스팽과 그 아래서 재무장관을 지낸 스트로스칸과 파비위스는 큰 덩치의 공공 자산을 사유화했고 고소득층의 재산세율과 기업에 대한 할증세를 크게 낮추고 공공 지출을 줄였다.(15) (우파 출신 총리) 라파랭은 이 과정을 이어갔다. 법률적 노동세력 보호장치들이 더 많지만 노조 가입률은 영국보다 훨씬 낮다. 또 외국인 직접 투자와 노동 생산성은 눈에 띄게 높다. 무엇보다, 유럽연합 경제정책의 반노동 기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높은 실업률은 저소득층과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대조적으로, 프랑스 중상류층은 신자유주의로부터 아주 큰 이득을 봤다. 자산 가치가 치솟은 파리 중심 지역에선 찬성률이 66%에 달했다. 월 소득이 4500유로(561만원) 이상인 이들의 찬성률은 74%였다. (자본의 거리인 파리 서쪽) 뉠리(Neuilly)에서 찬성률은 82.5%에 달했다.
주15: Sebastian Budgen, 'The French Fiasco'(프랑스의 큰 실수), 뉴 레프트 리뷰 17호, 2002년 9-10월.
2003년의 유럽
구성 조약의 존재 이유는 유럽연합 확장이다. 애초 이것이 아메리카의 정책이었다면, 초기부터 독일과 영국이 지지했다. 1993년 집행위원회는 가입 조건을, 작동하고 있는 시장 경제, 안정적인 사회 제도, 유럽연합 규정을 지킬 능력으로 설정함으로써 빗장을 낮췄다. 1990년대 내내 어느 나라를 승인할 것인가를 두로 정부간 다툼이 벌어지면서, 9만7천쪽의 유럽연합 법률 공통 지식에 이행규정이 더해졌다. 확장된 유럽연합에 맞춰 조약들을 어떻게 개정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 없이, 핵심 국가들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 '강화된 협력' 선택사항을 밀어붙였다. 이로써 다양한 속도의 통합이 허용됐다. 유럽연합 확장 이후 투표 절차에 대한 결정은 2000년 니스 정부간 회의로 미뤄졌다.
니스 회의 준비 과정에서 주요 3국은 자신들의 방침을 입안했다. 2000년 2월 훔볼트대학 연설에서 (독일 외무장관) 피셔는 유럽 국민국가들의 민주적 연합체, '실질적 입법권한'을 지닌 유럽 차원의 의회, 각국 의회에서 선출된 이들로 구성되는 제2의 의회, 집행 권한을 지닌 연방 정부와 대통령 그리고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시라크는 그해 6월 의회 연설에서 이에 응수했다. 그는 연방 정부에 반대하고 다수결에 기초한 의사결정 구조를 지닌 강력한 국민국가 연합을 제시했다. 그는 새로운 헌법 제정 요구를 지지했다. (자크 상테가 이끄는 집행위원회 전원이 1999년 비리 혐의로 어쩔 수 없이 사퇴한 이후 브뤼셀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였던) 유럽연합 근본 권리 헌장을 성안했던 기구와 비슷한 형태의 대표자회의가 초안을 만들게 되어 있었다. 대등한 상징적 연단을 모색하던 블레어는 바르샤바 증권거래소에서 자신의 개입을 알렸다. 영국의 관점에서는, 헌법을 둘러싼 논쟁이 꼭 실제 헌법 제정으로 마무리될 필요가 없었다. 조약들의 조약이면 족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거부권한이 있는 유럽이사회가 유럽연합의 정치적 방향을 유지해야 한다. 2000년 12월 니스 정부간 회의는 2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유럽연합의 투표권 비중 배분에 합의했다. 또 2004년을 '유럽 헌법을 설정하는' 최종 조약 시한으로 정했다. 이 때엔 발트해 연안 3국, 폴란드, 헝가리, 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몰타, 사이프러스가 유럽연합에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작은 국가들 총리들의 야심이 추진시킨 유럽의 미래를 위한 회의가 2002년 2월 브뤼셀의 유럽연합 의회 건물에서 소집됐다. 그러나 걸프지역과 발칸반도의 전쟁이 마스트리히트 협상의 배경을 장식했듯이, 이번에 지스카르 데스탱과 그의 동료들의 심사숙고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폭격과 점령에 막혀 소진됐다. '젊은이와 시민 사회'가 회의에서 발언하는 동안, 게르니카(전쟁의 잔인함을 그린 피카소의 그림 : 옮긴이)가 내걸렸고 대량살상무기 신화가 제조됐고 함대가 지중해에 집결했다.(16) 런던에서 100만명 이상이, 마드리드에선 200만명이, 로마에선 300만명이 아마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행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아스나르,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포르투갈의 바로소, 영국의 블레어, 덴마크의 라스무센, 헝가리의 메드제시, 폴란드의 밀러, 체코공화국의 하벨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발표한 공동 선언에서 이라크 침공 지지를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위르겐 하버마스와 자크 데리다가 '핵심 유럽'에 대한 공동 호소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17) “얼마나 많은 주거 지역과 병원과, 집들과 시장들을?”이라는 말로, 전쟁 기계의 '도덕적으로 불쾌한' 준비와 냉정하게 계획된 죽음과 파괴의 '문명화한 야만'을 환기시키면서 두 철학자는 “이 전쟁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공통 외교 정책의 실패를 의식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아메리카의 침공의 정당성에 대한 전세계적 논쟁은 '앵글로-아메리칸 국가', 중부 및 동부 유럽국가, 그리고 '늙은 유럽' 사이의 단층선을 더 예리하게 만들었다고 두 사람은 느꼈다. 유럽연합이 나뉘지 않으려면, 인도주의적인 핵심 국가들이 암스테르담에서 합의된 '강화된 협력'의 장치를 통해 다시 한번 국제법의 규범에 근거한 유럽 외교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나아가는 유럽연합의 기관차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이미 핵심 국가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내보였다. 그들이 주도해 결정한 확장은 유럽연합내 권력의 균형을 영구히 변경시켰다. 국제연합 안보리 결의안 1441호가 결의되기 한달 전인 2002년 10월 새로운 나라들의 가입이 정식으로 합의된 바 있다. 안보리 회의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드빌팽의 낭랑한 항변에 뒤이은 행동은, 두번째 결의안은 어쨌든 필요없다는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의 재확인과 시라크의 아메리카 폭격기의 프랑스 영공 통과 허용이었다.(18) 투생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부터 아이티 독립선언을 한 지 200년 되는 그 다음해 봄, 시라크와 드빌팽은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를 합동으로 침공함으로써 부시 및 파웰과의 타협을 확실히 했다. 브뤼셀 회의가 유럽의 첫번째 목표로 평화 증진을 공표하는 동안 슈뢰더는 아메리카의 고문실이 완비된 북대서양조약기구 점령 아프가니스탄에 두번째로 많은 군대를 주둔시킨 나라가 되려 준비하고 있었다.
블레어와 시라크
유럽 미래를 위한 회의에서 런던은 다시 한번 초안 작성 책임을 맡았다. 전 외무장관인 존 커는 회의 사무국을 지휘해 구성 조약의 후속 개정판들을 썼다.(19) 놀라울 것도 없지만, 영국 언론들은 2003년 12월에 최종 산물이 거의 바뀐 게 없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유럽이사회 규칙은 지지를 받았고, 세금과 사회 보장 정책, 외교 정책에 대한 거부권은 유지됐다. 또 '강화된 협력'은 방위와 관련된 영역에 적용될 수 없었으며, 심지어 노동자의 파업권은, 헌장에 간직되어 있었음에도 오직 “개별 국가 법률에 따라서” 부여됐다.
반면, 유럽연합 회원자격 취득의 세부 사항은 다른 곳에서 합의됐다. 새로운 회원국은 이류 자격이 부여되고, 공통 농업 정책에 따른 직접 보조금은 서방국가의 25%만 적용받으며, 노동 이동성은 제한되고, 구조개편 기금 지원금은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의 절반 이하로 결정됐다. 가중 투표권한에 대한 협상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토차 역 폭탄 테러와 아스나르의 이 사건 악용이 2004년 3월 총선에서 사파테로의 사회당 정부를 출범시키게 되기까지 여전히 정체되어 있었다. 여덟 용병(huits mercénaires) 가운데 두나라인 스페인과 폴란드가 니스에서 확보한 투표권한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사파테로의 첫번째 행동은 스페인의 투표권한 감축을 제안한 것이다.
바로 이 때,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에게 휘둘린 블레어는 구성 조약을 (2005년 영국 총선 이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선언했고 시라크는 2002년에 공표했던 자신의 국민투표 실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프랑스가 유럽연합 문제에 관해 실시했던 마지막 국민투표를 가까스로 통과한 바 있다. 그러나 그때는 지배층이 분열되어 있었다. 세갱이 이끄는 드골주의 우파가 조약에 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이제는 브뤼셀에서 돌아온 영-불 관계의 연료인 지스카르를 중심으로 지배층이 뭉친 듯 보였다. 초기 여론조사는 우호적이었다. 시라크의 계산은 충분히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투표에 부쳐진 지 10년이나 지났다. 그 사이 마스트리히트가 대표하는 모든 것 또는 이 조약의 이름으로 그 이후 정부들이 이 나라에 부과한 모든 것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꾸준히 깊어져, 사회당 지도부의 순응주의자들조차 하나로 뭉칠 수 없는 지점에 다달았다.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당내 자신의 경쟁자들을 쓰러뜨릴 걸 기대한 파비위스가 당 노선을 무시하기로 선택하자, 고상한 의견의 합의 여론이 깨졌다. 나머지는, 놀라운 규모와 창의성을 보여준 금융거래과세운동연합(아탁)과 이 연합의 협력 집단이 세력을 집결해 처리했다.
성문 안의 야만인들
프랑스와 네덜란드 투표 결과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다시 한번 놀랍게도 똑같았다. <리베라시옹>을 따르자면, 반대 투표는 병적인 것이 아니라면 비합리적인 것이었고 '고통, 두려움, 고뇌, 격분'이 촉발한 것이었다. <르몽드>는 투표가 '심한 퇴화'를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에게 이는 '정체성 위기'였다. <가디언>에게는 프랑스가 “깊게 나뉘고, 불안하며, 두렵고, 의심에 차고... 괴롭고 불행했다.” 티모시 가튼 애시의 눈에 이는 “공포의 거부, 이민에 대한 공포. 변화에 대한 공포”였다. 조약에 반대한 다수가 사회당 지지자, 넓은 의미에서 중도좌파인 게 명백했음에도, 그들은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 독단론'에 휘몰렸고(르몽드), '상상할 수 없는 외국인 혐오'(리베라시옹)에 휘몰렸다. 이는 '프랑스인을 위한 프랑스'였다.(가디언) 동시에 그들은 '유치하고' '퇴행적'이었다. <가디언>의 한 칼럼니스트를 따르자면 “이는 피터팬의 정치였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상관 관계를 인정했을 것이다”고 (프랑스 철학교수) 알랭 바디우는 내비쳤다. “찬성(oui)는 계몽된 여론(언론인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전문가)의 선택이었고, 반대(non)는 무지한 이들의 선택이었다. 국민투표를 하기로 한 시라크의 결정에 대한 비판들도 똑같은 논지를 취했다. 유럽처럼 중요한 문제는 무지한 대중에게 맡겨서는 안됐다.” 이런 맥락에서 반대 투표자는,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야만인'으로 낙인찍히는 게 불가피했다.(20)
영어를 쓰는 평론가들이 보기에, 시라크와 프랑스 정치 지도력은 비난받아 마땅했다. 경제 개혁이 예정에 못미쳤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어찌 되었건 베를루스코니가 훨씬 꾸물거렸으니까. 요점은, 그들이 유권자들에게 대안은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그들은 희망의 조짐이었다. 프랑스 중도 좌파는 위기에 빠졌다. 단지 사회당 지도부의 대부분이 대부분의 유권자들에게 버림받은 것만이 아니다. 6월4일 프랑수아 올랑드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파비위스와 그의 동료들을 당 집행위원회에서 축출함으로써 당내 분열을 심화시켰다. (집권당인) 중도 우파 대중운동연합(UMP)의 위기도 사회당만큼이나 중대하다. 그러나 워싱턴이 선호하는 후보인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권력 누수 현상을 보이는 시라크와 드빌팽의 정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슈뢰더가 자신의 개혁 공과 때문에 독일에서 기민당에 의해 축출된다면, 2007년까지 유럽의 지도력을 파리와 런던, 베를린의 훨씬 믿을 수 있는 친아메리카 3인방으로 재정리할 수 있다. 그 결과 대서양 양쪽의 관계가 훨씬 부드러운 시기가 나타날 것이다.
(독일 기민당의) 메르켈이나 사르코지 정부가 얼마나 믿을만 한 것으로 드러날까? 2005년 5월 북부 라인-베스트팔리아에서 사민당의 패배는, 기민당으로 여론이 기운 것 못지않게 슈뢰더의 기업 세금감면과 실업자 복지 축소에 실망한 사민당 지지 유권자의 기권 때문이었다. 메르켈은 이념적으로 슈뢰더보다 더 대서양을 중시하지만, 그녀의 당 진영은 라인강 모델의 중심을 차지하는 중견 독일 기업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르코지가 2007년 당선된다면, 지난 20년동안 규제를 완화하고 사유화를 추진하는 정부들을 첫 임기 말에 내?음으로써 책임을 물은 프랑스 유권자 문제에 여전히 직면할 것이다. 2005년 5월, 카페와 거리와 모임 장소에서 자신들을 위한 정치 교육을 확보한 새로운 프랑스 젊은이 세대를 목격했다. 도시에서 야만인들을 내모는 건 아마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진짜 두려움은”
반대 그 자체가 새로운 유럽 정치 권력집단 안에서 유발됐다는 두려움이다. 인민들이 더이상 그들의 '탈-정치' 전망에 쉽사리 설득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그렇듯이, 반대는 희망의 전언이자 표현이다. 이 희망은 정치가 여전히 살아있고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에는 긍적적인 선택이 있었다. 선택 그 자체의 선택, 우리에게 오직 자신들의 전문가의 지식을 승인하거나 아니면 '비합리적인'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을 유일한 선택지로 제시하는 새로운 권력집단의 협박을 거부하는 선택이었다.(21)
주춤거리는 헤게모니
'유럽 헌법'의 서거로부터 어떤 결론들이 도출되어야 하는가? 먼저, 유럽연합, 또는 그것의 핵심이 여전히 아메리카에 비해 더 인도주의적이고 사민주의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독립된 권력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환상은 매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건 이제 냉전 종식에 비유할만한 지각 변동적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유럽 권력집단은 세계대전 이후 시기의 사회민주주의적 유산을 약탈할 유럽연합의 사법 및 행정 권력을 유사 새처주의적인(대처주의적인) 단일유럽의정서에서 도출해 배치했다. 공공 부문을 시장화하고 노동력을 유연화하고 국민 경제를 전지구적 금융 자본에 개방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유럽'은 사회적으로 텅빈 배가 되었다.
이의 필요적 귀결은 워싱턴이 지시하는 용어에 따라 아메리카의 전세계적 지도력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1989년 이후 유럽연합이 거쳐온 길은 대체로 앵글로-아메리칸 처방을 따르는 것이었다. 자유화와 (유럽연합) 확장은 브뤼셀에서 아메리카 기업들이 펼치는 로비에는 꼼꼼하게 귀기울이되 자신들의 시민의 소망을 무시하는 데 있어선 무자비한, 엉금엉금 기며 흐느적거리는 존재를 만들어냈다. 지난 15년동안 등장한 '다양한 속도'의 유럽연합 곧 유로통화권 12개 나라와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19개 나라, 2004년 가입이 수용된 나라들의 차별적 지위가 합쳐진 연합은 유럽 통합 실패의 척도다. 이는 게다가 워싱턴이 고를 수 있는 연합 매개체의 선택 폭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현재 유럽연합 주요 3국 곧 영국, 프랑스, 독일은 자신들이 열심히 보호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핵 무기에 비교하면 아이들 놀이에 불과한 핵 프로그램을 단념시키기 위해 이란을 상대로 우격다짐을 시도하고 있다.
무역 전쟁에선, 유럽연합이 아마도 아메리카의 점보 제트기 또는 중국의 티셔츠를 둘러싼 치고 받기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권력 측면에선, 냉전 이후 시대는 유럽이 아메리카의 헤게모니 체제 내부의 종속적인 지위에 묶여 있음을 봐왔다. 이것의 기능 하나는, 발칸반도와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 동유럽과 소아시아에서 청소와 정권창출 서비스의 확산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종종 아메리카의 군사적 약탈 또는 자신들의 약탈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벌어졌다. 전형적으로 이런 작업은, 핵심 부처에 요직의 자문관을 심어넣고 선거로 뽑힌 지방정부 또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를 외부 자금 지원을 받는 비정부기구로 대체하기 위해서 대의제 구조를 무시한 채 진행됐다. 지난 세기는, 노동 세력을 규율하고 권력집단을 지도하고 시장을 아메리카와 유럽 자본에 개방하는 사회 공학의 '자연스러운 소명'의 활용이 유럽연합의 넓은 주변 지역 너머로, (블레어의 자문인) 로버트 쿠퍼가 쓴 찬사를 인용하자면 '주변의 제국주의' 너머로 확장되는 걸 목격했다.(22) 이 과정에서, 궁극적인 유럽연합 회원 자격에 대한 희망이 터키 노동자들로 하여금 연금 수령 연령의 상향 조정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폴란드 노동자들로 하여금 연금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핵심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럽연합 헤게모니의 주춤거림이 유럽연합의 자유시장 관리-훈련 팀 기능 약화를 예언하는 것일 수 있을까? 이 작업을 맡은 고위 실행자 한명은, 베오그라드에서 유럽연합 투표결과를 받아들이는 축하 분위기와 세르비아인들이 더 이상 “유럽의 모든 요구를 아무 생각없이 수용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정서를 위기감 속에 지적했다.(23) 딱 어울리게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유럽연합 구성 조약을 거부하던 바로 그 주에, 점령된 이라크를 위해서 구성 조약과 유사한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기 위해 유럽연합의 한 무리가 바그다드에 도착하는 걸 목격했다. 이라크인들이 자신들의 헌장과 군사적 후원자를 브뤼셀의 사람들이 먼저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보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중들의 유럽 조약 거부는 브뤼셀이 유도한 전반적인 정치적 마취의 효과가 이제 실패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회적 규율 세력으로서 유럽연합은 오래전부터 시장화와 재구조화와 전쟁에 허비해온 들로르 시절의 이념적 자본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 사회적 진보의 목적론은 사라졌다. 대안이 없는데 어떻게 더 나은 미래가 있을 수 있는가? 대중 매체와 소비주의 그리고 무관심이 간격을 잇는 걸로 간주되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유럽연합이 당신들에게 이동전화와 값싼 항공료를 선사했다”고 사르코지는 지난 5월 젊은 프랑스 청중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반대표는 1990년대 이탈리아 뇌물 파동인 탄젠토폴리 사태 와중에 물러나는 정치인들에게 던져진 작은 동전들을 상기시킨다. 반역의 크기를 과장해서는 안된다. 영국, 폴란드, 아일랜드, 덴마크에서 유권자들은 국민투표 취소를 온순하게 수용했다. 하지만 유럽 유권자들과 신자유주의적 권력집단 사이의 간격은 이보다 더 넓게 벌어진 적이 없다. 블레어는 2005년 5월 영국 유권자들로부터 단지 21%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유럽연합 지배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을 목표로 했던 반대 투표는, 다시 한번 좌파 대표성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네덜란드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들은 유권자 대다수에 단호하게 맞섬으로써 정치 영역을 주변 세력에게 남겨줬다. 그로써, 신자유주의 기획에 맞서는 전반적인 대안 프로그램의 건설이 여전히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2005년 여름에 친 번갯불은, 이 프로그램의 부재를 조명하는 가운데 그것이 존재할지 모르는 미래의 지평선을 잠깐동안 깜박하고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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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그래서]발칸분쟁 이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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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2 23:45
TONG하고 통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