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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독특한 하이데거 비판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1.23)는 프랑스에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9.26~1976.5.26)의 나치 협력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되기 10여년전인 1975년 하이데거의 철학에 숨어있는 정치적 함의 곧 보수혁명의 철학화를 규명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들은 논란이 거세게 진행되는 와중인 1988년 프랑스에서 <하이데거의 정치 존재론>(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r, Minuit)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다. 한국어판은 지난 6월 <나는 철학자다>(김문수 옮김, 이매진, 2005, 1만2천원)라는 약간 이상한 제목으로 나왔다. 왜 이런 제목을 썼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위치를 철저하게 철학자로 설정했고 그래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에른스트 윙어 등의 보수혁명적 정치론을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묘사했다는 게, 부르디외의 주장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부르디외가 철학자라는 건지, 하이데거가 철학자라는 건지 알 길이 없다.)

 

1) 시간성 이론의 핵심에 감춰져 있는 사회보장 국가에 대한 저주, 2) 방랑에 대한 저주로 승화된 반유대주의, 3)나치 참여 - 그 흔적은 융거(윙어)와 나눈 대화에서 빙빙 돌려 표현된 여러 암시들에 역력히 남아 있다 - 에 대한 참회의 거부 4)초 보수혁명주의 - 이것은 근본적 극복이라는 철학적 전략을 체택하는 데서나, 히틀러 체제와 단절하는 데서나 주요한 영감이 된다. 특히 히틀러 체제와의 단절은, 휴고 오트가 보여 주었듯이, 철학적 지도자의 사명을 떠맡으려는 철학자의 혁명적 열망이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환멸로 인한 것이다. (한국어판 10쪽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이데거가 정치적 함의를 철학화한 것의 한가지 예를 부르디외는 이렇게 묘사한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논의에 따를 때] 다음과 같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사회보장은 구호(救護) 대상자를 '위해'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 '배려하는' 것이며,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라는 짐을 덜어주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에게 태만함, '안이함', '경박함'을 정당화할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보장의 숭고한 변종인 철학적인 배려(Fürsorge)가 현존재를 염려(Sorge)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거나, 혹은 사르트르가 1943년에 말했던 것처럼, 대자[자기를 의식하는 존재]를 [감당하기 힘든 무한한] 자유에서 해방시켜 그를 '자기기만'이나 '비본래적' 실존의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던져 넣는 것과 매한가지다. (중략)
텍스트에 폭력을 가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무례하거나 무지한 것으로 금지하기 위해 모든 것이 가동된다. 그런데, 정작 하이데거 자신이 칸트에게 이러한 폭력을 가할 때 그는 이 폭력만큼은 정당하다고 인정하며, 이러한 폭력만이 “낱말을 넘어 그 낱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도록” 해 준다고 인정한다. (150-151쪽)
 

난 부르디외의 책을 평가할 능력이 없지만, 색다르고 묘한 시도에 관심있는 이들은 흥미를 느낄만하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추가: 제대로 된 서평이 나왔다. 강유원씨의 서평 보기

2005/10/04 17:52 2005/10/0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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