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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사건의 뒷면

지난해 12월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법의학의 세계>(이윤성, 살림지식총서 35, 살림출판사, 2003(초판 1쇄), 2005(초판 3쇄), 3300원)를 샀는데, 93쪽밖에 안되는 이 책에 뜻밖의 사실들이 담겨있었다.

 

1991년에 한 대학생이 시위 도중에 사망한 사건이 생겼다. 강군은 학교 앞에서 시위하던 도중에 '전경한테 붙들려 뭇매를 맞고 사망하였다.'...(12쪽)

 

강군의 이마 왼쪽에 찢어진 상처가 있었는데, ... 모두들 그것이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생긴 것이며, 그 때문에 뇌에 손상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13쪽)[저자는 검찰쪽 의뢰를 받은 부검의였다고 한다.]

전신을 모두 CT 검사를 하고 보니 역시 머리에서는 손상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사망원인이라고 할 만한 소견이 하나 나왔다. 혈심낭이었다... 강군의 가슴 CT 사진에서는 심장운동을 억누를 정도로 액체가 차 있는데 그 액체는 혈액인 것같았다... 유가족과 대책위원회는 이제 사망원인을 알았으니 “부검은 필요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부검은 필요했다.(14-15쪽)

 

상황을 보건대 심낭에 혈액이 고인 이유가 외상 때문이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혈심낭'을 만든 외상이 분명하지 않았다.(16쪽)

 

젊은 사람에서는 심장이나 주변 혈관에 병이 생기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드물지만 그럴 수도 있다.(이제는 추측에다 비약까지 덧붙인다.) 어릴 때 감기라며 지나친 카와시키병 후유증으로 심장의 관상동맥 일부분에 꽈리처럼 부푼 동맥류가 생겼다... 부검을 해서 확인하지 않았으니 추측에 비약임을 다시 밝힌다. 만약 이 비약대로라면 강군 스스로 지닌 병도 사망원인에 일부 책임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살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17, 18쪽)

 

아래 부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같다. 마지막 부분을 잘 읽어야 오해가 없다.

 

1987년 1월 14일, 이른바 “탕!”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생겼다... 만약 박군의 사망원인이 '폐결핵'이고, 사망기전은 폐결핵 병소에서 비롯한 '폐출혈이 기관지를 막은 질식'이라고 했다면 우리 나라 현대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근거가 있다. 부검결과에는 '폐출혈'이 있었다. 이 '폐출혈'의 원인은 - 아마 박군 자신도 모르고 있던 - 폐결핵이었다. 박군의 오른쪽 폐에는 활동성 폐결핵이 있었고 (아마도 고문 도중에 급격한 호흡 때문에) 결핵이 있던 자리에서 출혈하기 시작하여 적어도 몇 번은 속으로 혈액을 흡입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부검의사는 목 근육에 있던 출혈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폐결핵 병소에서 나온 출혈을 부수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부검의사가 목에 있던 흔적을 못보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더라면 박군의 사망원인은 '폐결핵'이 되고, 사망의 종류는 '병사'이므로 실제 부검에서 밝혀진 것처럼 물고문 도중에 목을 압박하여 사망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게 된다.(33-34쪽)

 

눈길을 끄는 사건이 하나 더 있다.

 

1989년에 어느 저수지에서 경찰이 쫓던 대학생이 부패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연히 “권력이 고문하다가 죽으니까 저수지에 갖다 버렸다”는 주장과 “아니다”라는 주장이 있었다... 직접 관여하지 않아서 정확한 것은 모르겠으나... 수사 결과는 '혈액에서 알코올이 검출된 점과 기타 등등을 고려할 때, 변사자는 술을 마시고 저주시 근처에서 발을 헛디뎌 익사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결과에서 전제가 된 '혈액에서 검출된 알코올'은 주검이 부패하면서 생긴 알코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변사자가 술을 마시고 사고로 익사하였다는 수사 결론에서 '술을 마시고'라는 전제 부분도 인정하기 어려워진다. 부패한 주검에서 검출된 알코올은 달리 생각해야 한다. (51-52쪽)

 

이 책은 값도 비싸지 않으니 한 권씩 사서 보시길 추천한다.

2006/01/04 17:23 2006/01/04 17:23
8 댓글
  1. 행인 2006/01/05 12:20

    책 소개를 보니 꼭 보고싶었는데, 저자를 보니 왠지 보고싶지 않아지더라는... 몇 차례 토론에서 맞붙은 적이 있는데, 생각이 아주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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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6/01/05 13:22

    아, 그렇군요. 책은 그냥 법의학 이야기 개론 수준입니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는 정도죠. 시국사건과 관련된 부분은 그냥 뒷얘기 수준으로 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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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재유 2006/01/05 16:50

    행인님 얘기를 들으니, 책 사보기가 좀 망설여지는데요^^... 그래도 함 사서 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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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6/01/05 20:39

    이재유님, 나중에 후회해도 저는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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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최용준 2006/01/08 21:48

    재미있는 책인 것 같아 책방에서 읽어봐야겠군요. 저자는 제가 배운 적은 있지만 이념이나 가치관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개론서를 썼다면 쉽게 잘 썼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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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ishin 2006/01/09 14:43

    최용준님 반갑습니다. 저분에게 배운 적이 있으시군요. 그럼 한권 사주세요. 책방에서 읽어봐도 무방하지만 3300원밖에 안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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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최용준 2006/01/09 19:43

    네. 저도 사서 읽고 감상문을 블로그에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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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전김 2006/01/09 22:46

    ㅋㅋ..중용의 길을 가야겠군요. 도서관에서 함 빌려보아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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