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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방송 이야기

영국 방송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아무래도 비비시(BBC)다. 광고가 전혀 없고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 방송이다. 영국 방송계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방송이다. 이런 비비시를 유지하기 위해 시청자들이 부담하는 비용은, 한국 기준으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에서 텔레비전 시청료는 월 2500원, 1년이면 3만원이다. 하지만 영국의 시청료는 1년에 135.5파운드, 한국 돈으로 26만원 정도다. 한국의 8배가 넘는다. 영국의 일상 생활용품 가격이 품목에 따라서 한국의 2배 내지 3배쯤 된다고 봐도 월등히 비싸다.

 

이렇게 시청료를 내면 일반인이 볼 수 있는 지상파 채널은 모두 5개다. '비비시1', '비비시2'가 있고 상업방송인 '채널4'와 '파이브'가 있다. 아이티브이는 전국에 지역별 제휴사를 통해 방송된다. 그래서 지역마다 이름이 다른데, 내가 사는 리즈의 경우 '요크셔텔레비전'이 아이티브이 방송을 송출한다.

 

영국은 요즘 지상파 채널의 디지털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2012년까지 아날로그 방송을 완전히 없애고 모두 디지털로 바꿀 예정이다. 전환 작업이 진행중인 지금도 아날로그 방송과 별도로 디지털 방송이 송출되고 있는데, 이를 보려면 5만-6만원쯤 하는 셋톱 박스를 사서 텔레비전에 연결해야 한다. 위성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에 가입해도 디지털 방송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디지털 방송이 도입되면서 채널이 급격하게 늘었다. 비비시만 해도 디지털 전용의 '비비시3', '비비시4'를 오후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내보낸다. 간판 방송인 비비시1과 다큐멘터리, 예술, 드라마 등을 중심으로 꾸며지는 비비시2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로 동시에 24시간 방송된다. 또 6살부터 12살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 채널 '시비비시'(CBBC)와 유아들을 위한 '시비비스'(Cbeebies)가 디지털 전용으로 송출된다. 방송시간은 각각 오전 7시,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다. 더 어린 아이들을 위한 방송이 한시간 먼저 시작하는 것이 특이하다. 이밖에 디지털 전용 '비비시 뉴스 24'와 '비비시 팔러먼트(의회)'도 있다. 각각 24시간 뉴스 전문 채널, 의회 소식 전문 채널이다.

 

상업 방송들이 운영하는 디지털 전용 방송도 20개가 넘는다. 아이티브이가 디지털 전용 채널 몇개를 따로 운영한다. '아이티브이2' 내용을 그대로 한시간 뒤에 재송출하는 '아이티브이2+1'라는 채널도 있다. '채널4'도 'E4', '모어4' 같은 자매 채널들을 내보내고 있다. 그밖에 눈에 띄는 방송 채널로는 '비비시 뉴스 24'와 경쟁하는 뉴스 전문 채널 '스카이 뉴스', 스포츠 뉴스만 내보내는 '스카이 스포츠 뉴스', 역사 전문 채널 '유케이티브이 히스토리', 미국 드라마만 방송하는 '파이브 유에스' 등이 있다. 교사를 위한 '티처스 티브이'라는 것도 있고 홈쇼핑 채널도 몇개 있다.

 

재미있는 것은 홈쇼핑 채널 가운데 두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내려가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품목의 값과 수량을 제시하고 시작하되, 시간이 지날수록 값을 조금씩 내린다. 60파운드짜리가 1파운드까지도 떨어진다. 시청자로서는 기다릴수록 값이 싸지지만 무작정 기다리다가는 품절이 될 수 있으니, 적당한 시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프라이스드롭 티브이'와 '비드 티브이'가 이런 방식을 도입하고 있는데, 소비자를 유혹하는 방식치고는 참으로 기발하다.

 

지상파 방송인데도 유료 성인 방송까지 있다. '티브이 엑스/레드 핫'이라는 방송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에서 잡히는 아날로그/디지털 또는 디지털 전용 채널이 모두 40개다. 재미있는 것은 텔레비전 수상기로 디지털 라디오 방송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디지털 방송은 아마도 유럽 공통 방식을 따를텐데,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동시에 송출한다.

 

이렇게 방송이 많으니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질 좋은 내용도 꽤 많다. 하지만 이방인인 나로서는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도박성 채널이다. (사실 도박이라는 말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사는 11살짜리 어린이가 한 말이다. 함께 보다가 “아빠, 이건 도박이잖아”라고 한마디로 정의를 내려줬다.) 약간의 비용을 부담하고 거액의 횡재를 노리라고 시청자를 유혹하는 프로그램들을 상업 방송들이 다양하게 내보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에서도 케이블방송에서 선보인 적 있는 '딜 오어 노 딜'이다. 돈 액수가 안쪽에 적혀있는 밀봉된 상자를 하나씩 배당받은 출연자들 가운데서 한명을 뽑아서 나머지 사람들의 상자를 골라서 하나씩 열게 한다. 각각의 상자에는 1페니(20원)부터 10만 파운드(2억원)까지 적혀 있다. 몇개의 상자를 열고 나면 전화가 오고 받아갈 돈을 제시한다. 제시되는 돈은 남아있는 액수를 고려한 것이다. 10만 파운드짜리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면 출연자가 그 액수를 받을 확률이 남아있으니 제시되는 액수가 그만큼 크고, 그 반대라면 그 만큼 거액을 챙길 확률이 낮으니 제시되는 액수가 적다. 출연자가 끝까지 거래를 거부하고 계속 가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자에 적혀 있는 액수만큼 받아가게 된다.

 

이건 사실 약과다. 진짜 황당한 바보 같은 프로그램은 '아이티브이'가 매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내보내는 '아이티브이 플레이: 메이크 유어 플레이'(ITV Play: Make your play)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단어 맞추기다. 이런 식이다. 'BOOK _____'이라는 문제를 제시하고 빈 곳에 들어갈 단어를 맞추라는 것이다. 보통 5개 정도의 답이 준비되어 있는데, 초반에 이 가운데 하나를 맞추면 500파운드(96만원) 정도를 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상금이 줄어든다. 시청자는 유료 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마구잡이로 단어를 말한다. 운 좋게 맞으면 돈을 버는 거고 아니면 통화료만 날린다. 힌트라곤 전혀 없다. 눈감고 돌을 던져서 목표를 맞추면 성공이고 아니면 실패인 격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노라면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한밤중에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특히 한심하고 안쓰러워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진행자다. 스튜디오에 혼자 나와서 고작 '북 뭘까요? 전화하세요?'를 되뇐다. 중간 중간에 별 의미없는 잡담을 하면서 한시간 정도를 진행하는 진행자가 정말 안쓰럽다. 참 먹고 살기 힘들다.

 

이외에도 퀴즈 형태를 빌린 유사 도박성 프로그램들이 수없이 많다. 복권 당첨 번호 추첨 프로그램도 거창하게 진행된다. 가수가 나와서 번호 추첨 중간에 노래 부르고 하면서 꽤 오래 진행된다.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퀴즈 프로그램도 꽤 많다. 영국 사람은 아무래도 퀴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영국 방송의 도박성 프로그램은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 하다. 사실 리즈 시내에 가보면 도박을 할 수 있는 가게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경마, 축구도박, 로토 등 종류도 다양하다. 래드브로크스(Ladbrokes)라는 도박 전문 업체는 텔레비전 광고까지 한다.

2007/10/12 21:54 2007/10/12 21:54
4 댓글
  1. 심장원 2007/10/15 01:31

    북마크할 곳이 하나 더 늘었군요.
    좋은 글 보러 자주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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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바리 2007/10/29 10:41

    어찌나 이렇게 궁금한 점만 쏙쏙 뽑아서 재미나게 얘기해주시는지!
    "어린 아이들을 위한 방송이 한시간 먼저 시작하는 것이 특이하다."
    <-- 어린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이점은 확실히 이해가 가네요. 아기를 키운지 오래되셔서 잊어버리신 것 같지만, 아기들은 일찍 일어난답니다. 진경이는 보통 5시가 기상시간이었어요. 고문이었죠 ㅠㅠ (한살 더 먹고 겨울이 오면서 요샌 7시대까지 늦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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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arishin 2007/10/29 20:28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유아용 방송을 일찍 시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진경이는 잘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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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7/10/29 20:29

    심장원님, 글을 자주 쓰지 않기 때문에 가끔씩 오셔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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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당신은 진보적입니까? 먼 댓글 보내온 곳 2007/10/30 22:58

    안녕하세요? 논쟁과 소통이 있는 메타블로그 맞짱입니다. 맞짱에 대해서 궁금하시죠? - 맞짱은 어떤 곳이죠? 맞짱은 진보적 논쟁, 토론을 지향하는 메타블로그 입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자기 블로그에서 멤돌고 있는 진보적 블로거들의 논쟁공간이자 안식처로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 맞짱에서는 뭘 하나요? 맞짱의 주된 컨텐츠는 말 그대로 '맞짱 논쟁'입니다. '블로그 vs 블로그' 라는 이름의 컨텐츠 이지요. 주제를 정해놓고 찬반 토론을 벌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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