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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은행 국유화의 의미

영국 정부가 노던록(Northern Rock)이라는 은행을 국유화하겠다고 2008년 2월17일(일요일) 발표했다. 국유화라니... 국유화라고 말하면 우파는 경악하고 좌파는 흥분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과잉 반응이다. 노던록 문제는 이렇게 볼 사안이 아니다. 한마디로 투기자본의 시대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그 투기자본이 낳은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영국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 국유화가 상징하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영국의 지배계급 전반이 미합중국에서 시작된 현재의 금융 위기를 얼마나 심각하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유로 통화권은 그나마 미합중국의 한파로부터 조금 떨어져있지만, 영국은 그 찬바람을 직접 맨 몸으로 맞고 있는 나라다.

 

이 사태를 이해하려면 먼저 노던록이 어떤 금융기관인지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영국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1. 노던록은 어떤 금융기관인가?

은행이라고 하니까 한국으로 말하면 제일은행이나 하나은행쯤 되는 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노던록은 이런 금융기관이 아니다. 비비시방송 웹사이트에 올려져있는 이 회사 관련 통계를 보면 뭔가 특이한 기관임을 알 수 있다.

 

예금자 100만명, 주택 담보 대출자 80만명, 주주 18만명, 직원 6천명.

 

국민이 6천만명인 나라에서 예금자는 고작 100만명이다. 게다가 대출자보다 20만명 많을 뿐이다. 직원도 6천명에 불과하다. 직원 규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점이 몇곳 안된다. (2006년 연차보고서를 보면 모든 업무를 하는 일반 지점이 56곳, 주택 담보 대출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지점이 16곳이다.)

 

그럼 이 금융기관은 그냥 동네 마을금고처럼 군소 금융기관인가? 조금 큰 마을금고라고 할 수도 있는 뉴캐슬 인근의 '빌딩소사이어티'(building society, 주택금융조합)에서 출발한 것은 맞지만 하찮은 금융기관은 아니다.

 

차이는, 이 기관이 전통적인 은행과 다르게 아주 '위험한'(투기자본자들 눈에는 '혁신적인') 영업을 한다는 점이다. 영국의 주택 담보 대출 상위 금융기관들은 모두 예금을 유치해서 대출 자금을 마련하지만, 노던록은 다른 방식으로 영업을 해서 주택 담보 대출 기준으로 영국내 5위 안에 드는 기관으로 커졌다.

 

그 방식이란 비용이 많이 드는 예금 유치 같은 '산매'(소매) 방식 대신 금융시장에서 값싼 자금을 '도매'로 빌려다가 집을 사려는 개인들에게 빌려주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금리가 싸고 여유 자금이 많을 때 이 방법은 정말 기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반 예금 같은 산매 자금은 전체 자금의 20% 수준밖에 안된다. (자금 흐름(flow) 기준으로 보면 2006년에 14%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용 상태를 잘 따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줬다.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문제가 없는 한, 더 빌려줄수록 이익이 나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러시앤캐시' 뭐 이런 식의 '돈놀이' 전문 기관이라고 할 수도 있을 지경이다.

이 회사가 한동안은 잘 나갔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합중국의 금융 위기 때문에 자금이 마르게 되자, 노던록은 순식간에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금융기관도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대책이 없었다. 중앙은행에 손을 벌리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고, 정부는 즉각 자금을 투여했다. 이 금융기관은 지점이 몇곳 안되기 때문에 예금을 더 열심히 유치해서 구조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기관이다. 금융시장이 얼어붙이니 ‘기발한 자금 조달 방식'은 이 회사를 아무 대책이 없는 골칫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2.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

노동당 정부가 국유화를 발표하자 대부분의 언론은 '늦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좌파에 해당하는 신문인 '인디펜던트'와 ‘가디언'은 물론이고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스'도 정부 손을 들어줬다. 보수당 지지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라프'조차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머독이 주인인 '더타임스'만 '완벽하게 잘못된 일'이라고 광분하고 있다. (사실 요즘 이 신문은 옛날의 '더타임스'가 아니다. 별로 진지하게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판형조차 요즘은 선정적인 신문들과 같은 타블로이드다. 발행부수에서도 '데일리 텔레그라프'에 한참 못미친다.)

정치권에서는 노동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려는 보수당 혼자 난리를 친다. 자유민주당은 벌써 몇달전부터 국유화를 주장했다. 우파라고 할 자유민주당까지 국유화를 이야기할 정도면 이 문제는 우파-좌파간의 오랜 갈등인 '사유화'-'국유화' 논쟁과는 뭔가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3. 왜 국유화밖에 길이 없었을까?

영국 국가 차원에서 볼 때, 노던록의 파산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금자 100만명도 문제지만, 주택 담보 대출 문제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만약에 주택 담보 대출 5위권의 금융기관이 파산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얼어붙은 주택 담보 대출 시장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동시에 금융 시장 전반도 심각하게 흔들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집값 거품이 엄청나고 금융이 대표 산업들 가운데 하나인 영국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다. 살리는 수밖에...

 

그런데 다른 기관이 인수하는 것도 그리 간단치는 않았다. 몇몇 기관이 협상을 했지만 워낙 헐값으로 넘기라고 한 것 같다. 사실 노던록을 적당한 값에 사들일 기관은 별로 없을 거라는 분석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금융기관의 영업 방식이 이제는 전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은행들처럼 지점을 늘리고 산매 금융을 확대할 수도 없다. 그러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갈 것이고, 이미 추락한 신용 때문에 효과도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언론이 국유화를 비판하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보수당이 난리치는 건 대중적 지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노동당 정부를 이 참에 무너뜨리자는 정치 공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합중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미합중국처럼 온갖 투기적 금융 기법들이 판치는 나라인 영국에서는 이 방법이 아마도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은행 국유화라기보다는, 투기자본의 광기가 낳은 괴물 긴급 처리 문제라고 봐야 한다. 금융 기관의 사회적 책임 따위를 고려한 국유화, 이런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소리다.

 

다만 미합중국처럼 ‘국유화’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정치 문화를 지닌 나라와 좌파 정부의 역사가 있는 영국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 뿐일 것이다.

 

이 사태가 보여주는 진짜 징후는, 세계 금융 위기가 이제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초유의 위기로 향해 가고 있다는 분석을 몇년전부터 계속 내놓고 있는 프랑스의 두뇌집단인 유럽정치예측연구소는 2월16일 미합중국 실물 경제가 2008년 9월께부터 붕괴 단계에 접어들 것이라는 수준까지 예측 강도를 높였다. 예측은 예측일뿐이지만, 이제는 진지하게 검토해볼 가치가 있는 내용이다. 2월16일치 예측(영문)

2008/02/19 08:56 2008/02/19 08:56
9 댓글
  1. 自由魂 2008/02/19 09:27

    휴.. 그런 일이 있었군요. 왜 국내 언론에선 소개가 안됐는지 모르겠네요(제가 못봤을 수도). 서브프라임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네요. 아직 국내선 먼산 불보듯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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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自由魂 2008/02/19 09:56

    에구에구, 오늘 일간지들에 기사가 실렸네요. 어제 일부 신문에도 나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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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arishin 2008/02/19 21:46

    자유혼님 안녕하세요? 서브프라임 사태가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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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궁금 2008/02/20 06:35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USA라는 나라를 '미합중국'으로 지칭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국'도 '미합중국'하고 같은 뜻일텐데, 굳이 별로 쓰지 않는 '미합중국'으로 표기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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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foog 2008/02/20 07:18

    표면적으로 보자면 부실한 채권기관에 국가가 공적자금(우리나라 말로 혈세^^)을 투입한 것이고 그 형식이 국유화였을 뿐인데 유난히 국유화라는 것 때문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더군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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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ishin 2008/02/20 07:19

    궁금/ USA가 '아메리카합중국'인데, 너무 길어서 미합중국으로 썼습니다. 이양이면 정식 국가 명칭을 불러주자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시작은 '미국'이라는 표현이 싫다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밑바닥에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이 깔려있는 용어여서 저는 싫습니다. '미국'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는 우리의 '기준점' 또는 '이상형'까지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용어는 한국인들에게는 그냥 한 나라의 명칭 이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용어를 씁니다. 낯설게 만들기 효과도 조금은 고려했습니다. 이는 객관적 거리를 확보할 여지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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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arishin 2008/02/20 07:24

    foog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한국에서도 공적 자금 투입하고 은행장을 채권은행에서 지명하고 했죠. 이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일이죠. 요즘 영국이 어떤 나라인데, 그 옛날의 의미에서 '국유화'를 하겠습니까? 한국은 '국유화'라는 말이 어마어마해서 표면상으로 약간의 차이를 두면서 이 말을 피해가고, 영국은 정치 문화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영국 보수당은 '국유화'라는 말 한마디를 붙잡고 정치 공세를 펴고 있는 걸 보면, 정치는 여기나 저기나 비슷한 측면이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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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b2 2008/09/18 10:34

    전에 이 글을 읽고 (늘 그랬듯) 문제점을 잘 짚어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고 지금까지 잊고 있었는데요.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글을 찾아 읽다가 퍼뜩 다시 생각났습니다.

    지금의 사태가 '붕괴'라고는 단언할 순 없지만 굉장한 위기 상황인 건 부정할 순 없겠죠. 9월부터 붕괴단계로 진입할 거라던 저 예측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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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marishin 2008/09/18 11:50

    b2님, 반갑습니다. 요즘 미합중국에서는 그리스 출신 루비니 교수가 정확하게 위기를 예측했다고 호들갑이지만 사실 유럽정치예측연구소가 한참 전부터 계속 경고하던 내용이 지금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번 위기가 정말 미합중국의 헤게모니를 깨뜨리는 쪽으로 갈 것인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 여부일 겁니다. 물론 이 위기의 방향은 각 세력이 어떻게 개입하고 참여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죠. 그저 지켜보고만 있으면 되는 '드라마' 같은 것은 아닐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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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돌려읽기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2/19 12:28

    marishin님의 [영국 은행 국유화의 의미]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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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