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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정국' 단상

지구 반대편 한 구석에서 학교 과제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신세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금요일 밤 서울 한복판에 1만명이 모여 촛불 집회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 참지 못하게 됐다.

 

 

1. 이 사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금요일 밤에 시민들이 1만명이나 모였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집회 장소도 다름 아닌 청계천이라니, 이건 굉장히 상징적이며 아이러니하다. 이쯤 되면 '광우병 정국'이라는 말도 그리 과장은 아니다. 다만 이 정국에 정치인들이 없다뿐이다. 그래서 더욱 '정치적인' 사태다. 왜냐하면 요즘 가장 정치적인 상황은 정치가 실종되고 정치가 위기에 처할 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좀더 풀어서 표현하자면, 시민들이 어떤 위협을 느끼고 정치인들이 이 위기의식에 호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않는다고 느끼는 사태, 이것보다 더 정치적인 사태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계화한 시장의 힘'이 정치를 압도하는 요즘 전세계적 상황 곧 '신자유주의 세계화' 상황에서, 정치의 실종은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이제 바야흐로, 정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안되는 국면에 온 것이다. 이건 정치의 죽음이 아니라 진정한 정치가 살아날 수 있는가 여부를 가를 '결정적 위기 국면'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아주 심한 아이러니로 보이기도 한다. 먼저, 총선의 저조한 투표율, 특히 젊은층의 정치 무관심을 개탄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던 '전문가'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게 생겼다. 이른바 '요즘 젊은이들'은 무기력하지도 않으며, 정치 의제를 제기할 능력도 있으며, 비록 소극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촛불집회'라는 정치적 동원을 성사시킬 의지도 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여기서 '요즘 젊은이'는 이른바 '386세대' 이후를 통칭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거 그리고 정치와 전혀 무관한 다른 상황에서 '정치적인 의지'를 표출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키보드 전사'들을 찬양하는 행위는 곤란하다. 이런 띄워주기는 '천박함'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2. '광우병 정국'은 어떻게 가능했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어떻게 이번 사태가 '광우병 정국'으로 부를 수 있는 상황까지 발전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긴요하다. (우리가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썩은 정치', 부패하고 더러운 정치라는 이미지는 지워버리자. 지금 논하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기존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의제 정치'를 대체할 '급진적 생활 정치", '급진적 참여 정치'쯤이다.)

 

"대통령이 이엠비가 아니었더라도 광우병 때문에 '탄핵'을 운운하는 이 지경까지 왔을까?" 내 대답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태에서 광우병 공포감은 방아쇠일 뿐이라는 뜻이다.

 

지난 몇개월을 되돌아보면 사태의 진전은 분명하다. 영어 교육 논란, 건강보험 논란, 투기꾼 또는 거짓말쟁이 또는 '허공에 떠있는' 부자들이 독차지한 내각 구성으로 이어지는 사태가 남겨준 것은 한마디로 '배신감'과 '절망감'이다. '말만 떠드는 정부'에 질려서 거짓말쟁이든 투기꾼이든 상관없으니 먹고 살기 편하게만 만들어달라고 표를 찍었더니 돌아오는 건 '배신'뿐이다.

 

잠재되어 있던 '영어 컴플렉스'를 자극하면서 영어로 사교육 부담만 잔뜩 지우겠다고 나서더니, 건강보험이 민영화되어 무지막지한 병원비 부담을 떠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게다가 알고보니 그들은 온갖 편법 다 동원한 '다른 세상의 갑부'들인 게 들통났다. 이것만으로도 배신감을 참을 수 없는데, 이제는 무시무시한 광우병의 공포 속에서 '값싸고 질 좋은 미국 쇠고기'를 실껏 드시라고 한다. 이쯤되면 더는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이번 일은 단순히 '광우병 파문'이 아니다. '우리의 절박한 삶'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나라'에 대한 저항이다.

 

 

3.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거리에 나섰나?

 

"천박하다고 비아냥 거리고 '정치의식'이라곤 없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으니 먹고 살기 좀더 편해지고 싶다. 너희들이 해준 게 뭐냐? 양극화를 해결했냐? '88만원 세대'로 상징되는 비정규직 천국을 개선했냐? 역사 바로잡기도 좋고, 남북 관계 개선도 좋지만,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을 만큼 불안하고 힘들다."

 

이것이 바로 '보수화했다'는 한국 유권자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눈 딱감고 '이메가'를 믿어봤다. 그런데 알고보니 상황이 더하면 다했지 나아길 조짐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동안 질리도록 본 '가볍고 즉흥적인 막말에만 능한 대통령'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가벼움'과 '천박함'까지 보여준다. 얼마전 일본 국왕과 악수하면서 고개 숙인 한장의 사진이면 족하지, 뭐가 더 필요한가?

 

이제는 먹고 살만해졌고, 배낭 여행으로 유럽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눈도 높아졌고', 그래서 일본이나 미국에도 꿀리지 않는 '당당한 대한민국', '고상한 대한민국', '세련된 대한민국'을 꿈꾸는 이들이 요즘 젊은 세대다. (사실 젊은 세대만의 바람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의 바람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기를 더욱 더 갈망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잘 살지 못하면 당당하고 고상하고 세련될 방법이라곤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 그들에게 눈앞의 현실은 '독재 시대'를 겪으면서 이전 세대가 느낀 절망감보다 결코 약하지 않은 좌절감을 가져다 준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요즘 한국 사회의 역동적이리만치 '엽기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여론의 흐름,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광우병 정국'은 새로운 정치의 희망과 가능성이기 이전에, '한국 사회'가 안에서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내파'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아주 분명하며 불길한 징후다. 기성 세대는, 제도권 정치는, 그리고 언론은 이 요구과 현실의 괴리를 이해하고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가 내파하고 말 것이냐, 아니면 4.19혁명과 70-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잇는 '강고하고 끈질긴 정치 투쟁의 나라'로 되살아날 것이냐, 이것이 진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젊은이들이 광우병 촛불집회를 새로운 참여 정치의 공간으로 발전시킬 상상력과 감성을 발휘하고, 전략과 전술을 개발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또 그들과 적극 연대하고 그들을 지원할 세력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낡은 감성과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한, 좌파 세력이 끼어들 자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2008/05/03 01:54 2008/05/03 01:54
10 댓글
  1. 미리내 2008/05/03 08:59

    의지도 능력도 관심도 없다는 점에서 저들은 사이코패스와 동질의 심리를 가진 인간들입니다. 사실 4.19도 진보 이념보다는 생활상 정서-못살겠다 엎고 보자는 데서-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이번에 이것을 정치적 승리로 가져갈 핵은 강기갑 같은 분인데 마침 시위 현장에 계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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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NeoPool 2008/05/03 12:25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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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디온 2008/05/03 14:03

    어제 광화문에 다녀왔는데, 이 괴생물체같은 무리들이 어떻게 진화해나가게 될지 궁금해졌드랬습니다. 사건이 터지긴 했는데... 하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드랬는데, 님 글을 보니 시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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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독자 2008/05/03 23:13

    많은 부분 동의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대통령이 이엠비가 아니었으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대통령이 범노무현계 사람 중 하나 였다면 비슷한 일들이 있었을 경우 양상은 매우 달랐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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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marishin 2008/05/04 00:37

    여러분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외국에 있어서 더욱 이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한국이 어떤 임계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참으로 걱정됩니다.

    그리고 독자님, 제 생각을 조금만 부연하자면 이런 겁니다.

    이엠비가 아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거라는 제 말은, 이엠비는 '이젠 개혁도, 남북 교류도 다 일단 제쳐두고 먹고 사는 게 조금 나아지면 좋겠다'는 많은 이들의 바람이 투사되어 집약된 존재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를 배반하니 반감은 더욱 크다는 거구요. 만약 범노무현계가 대통령이 됐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만사 제쳐놓고 먹고 살기'로만 집약된 인물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이 정도의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또 따라서 양상도 전혀 달랐겠죠. 한마디로 이엠비는 요즘 한국 사회의 가장 절박한 요구(먹고 살기 좀 편해지기)가 투사된 집약체이어서 대통령까지 됐는데, 바로 이 점이 그의 발목을 아주 심각하게 잡는 거죠.

    그런데 이 괴리감을 기득권층은 전혀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무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상당수는 노무현과 그로 대표되는 세력이 싫어서 마구 씹었을 뿐이죠) 한국 대다수가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고 그 때문에 얼마나 큰 불안감과 상처에 시달리는지 저들은 상상도 못합니다. 제가 '한국 사회의 내파'를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무튼 여러분 모두 촛불집회 열심히 나가셔서 '새로운 길거리 참여 정치'를 실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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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독자 2008/05/04 00:53

    네. 설명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안티MB 내지는 안티 한나라로 몰고가려는 친노무현 세력이 지금의 흐름에 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치공세적 측면도 분명히 있구요.

    marishin 님과 논쟁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런 측면도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선 노동당이 참패했다던데 시간 날 때 영국의 정치 환경에 관해 글을 올려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시는 일 좋은 성과를 거두시길,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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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foog 2008/05/04 20:20

    저랑 현 정국에 대한 생각이 여러 부분 겹치는 글이라 반갑네요. 다만 저는 표현할 재주가 없고 marishin님은 그 재주가 있는 것의 차이겠네요. ^^;(묻어가는 fo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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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회사원 2 2008/05/06 10:09

    한동안 글이 없으시다 했는데, 좋은 글이 올라왔군요.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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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11 2008/05/13 01:59

    공부하기 싫은애들이 태반인듯...물론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게 살수있는 세상이어야하죠. 쇠고기값낮추고, 한우농가 살리고, 쇠고기값 낮춰야 하는게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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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NeoPool 2008/05/29 00:56

    독자/ 독자님과 논쟁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런 측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_- 촛불시위에서 배포되는 피켓에 찍힌 단체 로고 가지고 조중동따위에서 배후세력이니 어쩌니 시비걸까봐 오늘 사람들 로고만 찢어버렸습니다. 뭘 보시는겁니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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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잡념 : 미국산 쇠고기 개방 사태에 대해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5/04 20:21

    요즘 한미 간에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조건 없는 개방을 합의한 일로 말미암아 민심이반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블로고스피어를 비롯한 인터넷에서 특히 이러한 현상이 심한 것 같은데 벌써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청원에 서명한 사람이 수십만에 달하고 있다 한다. 주요 신문에서 계속하여 중계보도 하듯이 기사로 삼을 정도다.뭐 이 블로그가 특별할 것도 없지만 평소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지라 한두 마디 끼적거릴까 해도 솔직히 지금은 별로 흥이...

  2. Subject: 그냥 냅도라! 안즈라고 강요하지 말고..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5/27 13:02

    marishin님의 ['광우병 정국' 단상] 에 관련된 글. 미친소 파동과 광우병 정국이 만들어내는 것을 68혁명의 코뮨적 상황으로 비교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소 정국이 촛불집회라는 경험자들을 새롭게 정치의 공간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진보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상력과 감성을 발휘하는 부분에서 기존보다 더 많은 상상력과 새로운 집회가 만들어 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 많큼 젊고 상상력이 풍부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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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