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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 원인을 무시하는 결과론자들

그냥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두개의 블로그에 묘하게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렸다. 한쪽은 스스로 '비급 좌파'라고 하는 이고 다른 쪽은 (그런줄 몰랐지만) 자칭 '보수주의자'다.

 

좌파와 보수주의자는 각각, 공영방송이라는 <한국방송>이 '인민' 또는 '우리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인민의 방송'이 아닌 '공영방송 지키기'를 해야 한다는 게 슬프다는 좌파와 공영방송을 누가 장악하든 어차피 변할 게 없다는 보수주의자의 주장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주장이다.

 

나는 이런 논리가 참으로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는 냉소로 비칠 수도 있고 패배주의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과정과 사태의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결과만 논하는 태도다.

 

보수주의자에 대해서는 딱 한마디면 족하다. 공영방송과 '우리 사회' 변화상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공영방송 하나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애초부터 부당하고 가능하지 않는 의무를 공영방송에 부과한 뒤 그 것이 실현될 수 없기에 별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일 뿐이다. (아니 공영방송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계몽주의'니 '엘리트주의'니 하고 욕이나 해대지 않을까?)

 

이런 식의 논리가 가장 판치는 때는 보통 선거 때다. 어떤 이들은 선거 때만 되면, '선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뒤, 어차피 이 전제가 실현되지 않을 테니 만날 선거 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유권자들을 속이기 위해 기득권자들이 꾸준히 퍼뜨려온 신화일 뿐이다. 이 신화를 거부할 때, 선거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고, 진정 선거가 세상을 바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신화를 거부할 때, 유권자는 단지 몇년에 한번씩 표를 던지고는 모든 걸 잊는 '투표 기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비급 좌파의 주장도 비슷하다. 신화와 같은 또는 비현실적인 전제를 깔고서 그 전제가 실현이 안되니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격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과연 언제 한국에서 공영방송이 '인민의 방송'인 적이 있는가? 아니 이 세상 공영방송 가운데 '인민의 방송'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가? (어쩌면 베네수엘라에는 있을지 모르겠다.) 또 '인민의 방송'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공영방송은 그 사회의 힘 관계 또는 계급 관계와 무관하게 혼자 인민을 위한 방송이 될 수 있는가? 공영방송을 '인민의 방송'으로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가만 둬도 <한국방송> 직원들이 알아서 하는가? 아니면 <한국방송> 직원을 모두 바꿔버리면 될까? 그럼 직원 교체는 누가 하는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은 전제를 깔고서 현실을 개탄해봐야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 고민할 것은, 공영방송이 더 나빠지는 걸 막는 싸움의 과정에서 진정한 공영방송의 의미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서 싸움을 질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른바 '좌파들'이 싸움의 본질을 바꿀 능력, 의지, 전략이 있느냐지, 이 싸움의 본질이 아니다. 싸움의 본질은 한번 정해진 뒤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위한 투쟁은 사장 지키기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퍼뜨릴 수 있다면, 이 싸움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2008/08/10 02:01 2008/08/10 02:01
댓글1 댓글
  1. 늦달 2008/08/10 04:06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글이네요.
    맞습니다. 처음부터 선을 그어놓고 좋고 나쁘고를 결정한다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과연 몇 개나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선이 아니라 그 선을 그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투쟁이 있었는가 겠지요.
    지금의 싸움이 작은 전진을 위한 선이라면 이 다음 선은 분명 그 앞이 될 겁니다.
    설사 후퇴하더라도 분명히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러기에 이 가망없는 싸움을 냉소적으로 힐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투쟁하는 것이겠지요.
    냉소와 조롱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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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무덤덤에 붙이는 어덴덤 (addendum)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8/10 16:45

    방송의 공영성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8216;사적 이해집단과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8217;과 &#8216;비용의 수신자 부담&#8217;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8216;정부의 국정철...

  2. Subject: KBS, 공영방송, 민주주의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8/14 13:51

    marishin님의 [과정, 원인을 무시하는 결과론자들] 에 관련된 글. 애초 하고싶었던 말을 marishin님이 얼추 다 해주셨기에 걍 입닥치고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KBS 문제를 거론하기에는 감정적인 부분이 좀 있었고, 거기 더해서 몇 년 전에 있었던 대형사건의 트라우마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점도 있었다. 몇 년 전 사건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노무현 탄핵사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을 잡고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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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