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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만에 찾은 서점 풍경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서점을 구경했다. 1년만에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값싼 책들의 등장이다. 5천원-6천원 정도 하는 문고판 형태의 책들이 이것저것 보였다. 심지어 1만원에 팔리던 책이 문고판 형태로 다시 편집되어 4500원에 팔리고 있었다. 경기가 나빠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책 값이 싸지는 현상은 나쁠 것이 없다. 책을 호화롭게 만들어서 값을 올리는 건 권할 일이 못된다.

 

이것저것 둘러본 책 가운데 단연 관심이 가는 책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치글방, 8000원)이었다. 강정인 교수가 1994년에 영어 번역본을 처음 중역했고 2003년에 개정판을 냈는데,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마키아벨리 연구자(김경희)가 참여해서 이탈리아어 원본을 바탕으로 다시 고쳤다. 지난 5월에 출판됐으니 철 지난 이야기지만, 출판사는 “최초의 군주론 원전 번역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초인지 여부를 나는 모르겠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늦게라도 나온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역자 후기에 설명된 내용으로만 판단하자면, 이 <군주론> 번역작업은 고전 번역의 모범적인 작업 형태가 아닐까 싶다. 마키아벨리에 관심이 많은 정치학자가 (비록 영어본 중역이지만) 번역을 하고 아마도 그 밑에서 공부했을 후배 학자들이 여러명 참여해서 고치고 다듬고, 결국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마키아벨리 연구자가 이탈리아어 원본과 비교해서 또 손을 봤다. 그 과정이 대략 15년이다. 고전을 번역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달만에 뚝딱 번역을 마쳐야 하고 그나마도 다시 손볼 기회를 얻지 못하는 나같은 '비전문가' 번역자로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전공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번역이라는 결과물로 연결시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려면 이런 작업을 하는 이들을 좀더 격려해주며 그 공로를 인정해줘야 한다. 그래야 변변한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고 고되기만한 번역 작업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와 다른, 웃기는 이야기 한가지. 서점에서 확인한 묘한 현상 하나는,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학자인 프랑스의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화려하게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30년 전에 쓴 그의 첫번째 책 재번역본과 지난해 나온 책 번역본이 서가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는데, 웃긴 것은 지난해 나온 책의 제목이다.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처음에 이 제목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혹시 저자가 내가 아는 레비와 동명이인인가 싶었다. 레비가 좌파라니,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혹시나 해서 뒤져보니 역시나다. 원 제목을 한국말로 하면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라고 한다. 영어판 제목은 '좌파의 유산' 쯤이라고 한다. (역자후기에 나와있는데 정확하게 기억이 안난다) 이런 제목이 대륙을 건너와서 '나는 좌파다'로 바뀐 것이다. 독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려는 게 아니라면, 제목을 이렇게 바꿔치기 하는 건 곤란하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있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정보를 보니, 레비가 요즘 '좌파'들과 놀고 싶기는 한가보다. 세월이 워낙 험난하고 최소한의 사회적 가치나 이상조차 자본의 발 아래 짓밟히는 시절이니, 레비가 좌파들과 놀고 싶은 마음까지는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데리다와 비슷해지고 싶어한다면 착각이다. 데리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하게 현실에 개입하고 발언했는데, 죽기 직전에는 권위있는 좌파 매체 <르몽드디플로마티크>의 초대를 받아 어느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는 유언과 같은 연설문을 남김으로써 '전통적인 좌파'들에게도 어떤 영감을 줬다. 레비도 비슷해지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으나,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언젠가 좌파들이 불러줄지도 모를 일이니, 노력하는 것까지 나무랄 것은 없겠다.

2008/09/18 16:14 2008/09/18 16:14
11 댓글
  1. gaudium 2008/09/18 20:20

    5, 6천원짜리 문고판 책들, '이렇게 싸게 만들 수 있을거면 왜 그동안은 그렇게 비싸게 받아먹었는가'라는 원성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 독자들에게 배신감을 줄 수 있다는 게 출판업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언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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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라비 2008/09/18 23:35

    '나자빠'가 '나는 좌파다'의 줄임말인가보군요.

    그나저나 이 기회에 '군주론' 한번 더 읽어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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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arishin 2008/09/18 23:55

    gaudium/저도 사실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세라비/'나자빠'가 뭔가 한참 생각했습니다.^^ 저도 새로 읽어볼까 했다가, 김경희씨가 쓴 3판 번역자 후기에 그 전의 번역본을 많이 고칠 게 없었다는 말이 있어서 당장 읽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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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hongsili 2008/09/19 01:10

    앗, 완전히 귀국하신 건가요, 아님 잠시 들르신 건가요? 벌써 1년이 흐른 거죠? 한 해가 빛의 속도로 가버렸네요... 전자건 후자건, 어쨌든 환영합니다! 세렌게티도 울고갈 약육강식 생태계로 귀환하신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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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marishin 2008/09/19 01:40

    완전 귀국입니다. '약육강식 생태계'를 벌써 실감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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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회사원 2 2008/09/19 10:28

    몹시 당황스러운 나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럼 이제 다시 칼럼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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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arishin 2008/09/19 13:58

    신문에서 칼럼을 읽으실 수는 없을 겁니다. 다른 일(독자의 의견을 듣는 일)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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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지나가는 이 2008/09/19 19:36

    얼핏 보기에, 군주론 새 개역판과 이전 판과의 뚜렷한 차이는 '경어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주요 술어 등에 대한 차이도 있습니다. 15년의 세월이 어떤 태도를 불러왔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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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marishin 2008/09/21 00:01

    아, 그런 차이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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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유리우스 2008/09/22 17:05

    안녕하세요. 눈팅만 하다가 의아한게 있어서 그런데요, 군주론 원전 번역은 예전에 임영방 교수가 했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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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marishin 2008/09/22 17:23

    저는 모릅니다. 출판사에서 3판을 내면서 최초 원전 번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초라는 주장은 받아들이는 쪽에서 조심해야 하는데, 제가 본문에서 따옴표를 쓰기는 했는데 마치 최초 원전 번역이 분명한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겠군요. 아무래도 수정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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