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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번역할 때의 심리 변화

책을 번역하는 사람의 심리 변화라는 제목으로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썼다. 흥미있지만, 나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아마도 내가 전문 번역가가 아니어서 그럴지 모르겠다. (원문은 http://blog.aladdin.co.kr/kellyin/2279311)

 

1. 어떤 책의 번역 의뢰를 받았을 때 : 두근두근 기대가 된다. 특히 내가 관심있던 분야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면 더욱 그렇다. 정말 잘 해보리라 마음먹는다. *--- 이건 나도 마찬가지다. 정말 잘 해보리라 마음먹는다.

 

2. 1/4 정도 번역했을 때 : 신나게 번역한다. 이런 표현이 좋을까, 저런 표현이 좋을까 고민 또 고민하며 워드 파일 여는 것이 즐겁다. *--- 나는 신나게 번역할 수가 없다. 악전고투한다. 이렇게 번역해도 될지 고민 또 고민을 하긴 마찬가지다. 아직 어떤 식으로 번역할지, 어떤 표현을 쓸지 확정하지 못하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책 한권을 번역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름대로 일관된 문체 또는 표현 방식을 확립해야 하는데, 이 단계에서는 보통 이것이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때가 가장 힘든 단계다.

 

3. 2/4 정도 번역했을 때 : 원서를 펴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슬슬 의무감으로 번역을 하는 빈도가 늘어난다. 표현을 두고 고민하는 사치 따위는 벌써 쓰레기통에 버린지 오래;  *--- 표현을 두고 고민하는 일이 많이 줄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어찌됐든지 이 단계에서는 통일적인 표현 방식을 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슬슬 번역의 속도가 붙고 책 내용에 익숙해지면서 번역 작업도 쉬워진다. 그래서 재미를 조금 느끼기도 한다.

 

4. 3/4 정도 번역했을 때 : 책을 찢어버리고 싶다 -_-;;;;;;; *--- 나는 이 단계에서 후회가 마구 밀려온다. 내가 번역 실력이 없음을 절감한다. 다시는 번역 안한다고 다짐한다.

 

5. 번역을 마무리할 때 : 데드라인이 다가오면서 따따블로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 원서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_- 점점 끝으로 갈수록 광속 (날림?) 번역이 된다; *--- 점점 날림 번역이 되어가는 것은 나도 비슷하다. 한편으로는 이 엉터리 번역을 어떻게 손볼까, 막막해한다. 이제 와서 어쩌겠느냐는 자포자기 상태에 접어든다. 원문의 뜻을 뒤바꾸는 짓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 마감을 늦출까, 아니면 이 괴로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 그냥 대충 마무리할까,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한다.

 

6. 편집자의 수정본을 다시 검토할 때 : 될대로 되라...왠만하면 그쪽에서 수정한 대로 넘긴다. 좋은게 좋은거지. -_- *--- 두가지로 나뉜다. 엉터리 편집자를 만난 때라면 열을 잔뜩 받는다. 이런 부분을 손봐달라는 이유는 도대체 뭔가, 독해력이 있는 편집자인가, 또는 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번역문에 손을 대냐, 뭐 이런 심정이 된다. 그리고는 편집자가 혹시라도 표시하지도 않고 바꿔놓았을 부분을 이 잡듯이 뒤져 원래대로 고치거나 새롭게 손본다. 꼼꼼하고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편집자를 만난 때라면, 미안한 생각, 부끄러운 생각이 마구 든다. 내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했을까, 정말 쪽팔린다, 이런 심정이 된다. 믿을만한 편집자이니, 왠만하면 저쪽에서 하자는 대로 따라주자는 마음도 들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꼼꼼하고 훌륭한 편집자를 만나는 일은 많지 않다. 보통은 엉터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나와 맞지 않는 편집자를 만나기 십상이다.

 

7. 역자 후기를 쓸 때 :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오역이 많으면 어떡하지, 문장이 이상하면 어떡하지. 좀 더 꼼꼼히 할걸...하고 후회한다 ㅠㅠ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 *--- 나는 역자 후기를 쓸 때는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다. 훌륭한 편집자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손을 본 뒤이거나 엉터리 편집자와 씨름하느라고 녹초가 된 때이기 때문이다.

 

8. 출판된 책을 받아볼 때 : 엄청 고생한건 몽땅 잊어버리고 무지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표지고 본문이고 쓱쓱 쓰다듬어본다. 어서 빨리 다음 책을 번역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햄토리 챗바퀴도 아니고...바보다...) *--- 상품 출고 직전의 품질 검사원처럼 어디 잘못된 부분이 없나 곳곳을 훑어본다. 뿌듯함이나 자랑스러움 따위는 자리잡을 틈도 없이, 책을 던져버린다.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딱 한사람(내 딸 아이)에게 내 이름으로 책이 나왔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그럼 그 사람은 책 표지 따위에 대해 간단하게 촌평을 한다. 가끔은 책 내용을 물어봐 나를 난감하게 만든다.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게 책 내용을 설명해줄 능력은 내게 애초부터 없다.) 책 나눠줄 사람들 명단을 뽑아보면서, 다시는 번역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굳게 다짐한다. 하지만 이 다짐은 몇달이 못간다. 몇달이 지나면 이미 내가 번역하고 싶은 책이 생기거나, 번역할만한 책을 찾아봐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서 책을 뒤지고 있다. 그리고 또 조금 지나면 지겨운 번역의 챗바퀴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2008/09/18 18:52 2008/09/18 18:52
6 댓글
  1. EM 2008/09/18 23:43

    한국에 돌아오셨군요. ^^
    책뿐만 아니라 짤막한 논문 하나를 번역할 때도 위와 비슷한 과정을 겪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번역이란 게 묘한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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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8/09/19 01:41

    번역 참 못할 일이지만, 떨쳐버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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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해미 2008/09/19 10:34

    아하... 지금 제 심리랑 똑같군요. 미쳤지 내가 왜 번역을 한다고 덤볐을까 왕창 후회하고 있는 중인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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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8/09/22 09:28

    그렇군요. 일단 한번 번역에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축하한다고 해야할지, 위로를 해야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시작한 이상 훌륭한 번역을 선보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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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최재훈 2008/09/22 16:02

    저만 그런 게 아니군요.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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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ishin 2008/09/22 17:29

    웬만한 번역자는 모두 비슷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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