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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 뭐 어쨌다고?

말과 글의 차원에서 보면, 2000년 이후 한국 상황은 말이 타락하고 글이 망가져서 '말과 글이 엉망진창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끔 '반짝'하는 뭔가를 보여주는 글을 만나면, 기쁨을 넘어 설렘을 느끼게 된다. 대필 논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택광의 글을 만날 때도 비슷했다.

 

“대필 작가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문화의 징후다”, “여전히 대중은 모름지기 글이라면 작가의 영혼이 스며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않은 글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이는 결국 글은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거다. 자본주의의 합리화가 날로 속도를 더해갈수록 사람들은 형이상학의 세계를 갈구하게 된다.... 어쩌면 대필 논란은 상품화의 그물망을 벗어나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보전하려는 대중의 필사적 노력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반짝하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 시드는 걸 보면 안타깝다 못해 괴롭다. 표절, 양날의 칼 -- 표절 논란을 지켜보며가 그렇다. 이 글은 '자본주의 비판' 또는 저작권의 자본주의적 함의 비판에 집착하다가 망가진 '엉망진창'의 전형과도 같은 글이다.

 

먼저, 비판적 지식인이라면 계기가 되는 사건을 제대로 분석하고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글의 계기가 된, 조경란 아니 '주이란의 <혀> 표절 논란 사태'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글은 “논란은 진위공방을 넘어서서 이제 문단권력의 문제로 번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만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은 애초부터 문단 권력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회피하는지 아니면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감추고 만다.

 

조경란이 이번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단 주이란의 말이 사실일 경우를 가정해보자.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전적으로 조경란 탓이다. 그는 입을 열어서 자신의 혐의를 벗어야 한다. 나는 결코 조경란이 표절했다고 전제하지 않지만, 이 사태를 논하려면 지금까지 드러난 이야기(대부분 주이란의 주장) 안에서 할 수밖에 없다.)

 

주이란의 주장대로라면, 왜 조경란은 마구잡이로 표절했을까? 첫째 주이란의 소설은 신춘문예에 응모한 수백개 습작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이 습작은 예심 심사위원이었던 조경란 외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문학계에서 조경란과 주이란의 위치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게다가 조경란은 주이란보다 훨씬 글을 매끄럽게 쓸 '능력'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논란이 벌어져도 조경란은 버틸 수 있다. 문단권력의 영향력 밖에 있는 사람만 용기를 내어 발언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참고: 김곰치의 글)

 

사태의 본질 부분을 어물쩍 넘어가면서 이택광은 쟁점을 표절에 대한 도덕적 비난으로 옮겨간다. 그는 왜 '윤리적'이라고 하지 않고 '도덕적'이라고 하는가? 그건 다 이유가 있는 듯 하다. 표절은 지적재산권의 문제이고, 자본주의에서 지적재산권은 뒤에 있는 놈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차는' ('비윤리적인' 게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의 제도화일 뿐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문제는 표절이라기보다 그 표절을 근절시킬 수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구조이다.”

 

자본주의의 구조, 멋지지 않은가? 다만 그 자본주의의 구조란, 기껏 “상품의 그물망에 갇히는 순간 문학작품은 하나의 ‘객관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에서 객관물로 변화하는 문학작품은 ‘물화’(reification)의 산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상의 진술이 필요없는, 어떤 '괴물'이다. 그리고 이제 문학권력은 '문화상품유통의 독점화', '하나의 실체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텅 비어 있는 실체의 자리에서 회전하는 징후', '브랜드화에 대한 욕망'이 된다.

 

이 멋지지만 공허한 말 속에서,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의 '문학권력', 주이란의 '명예훼손적 주장'에 대해 변변한 반박조차 거부하는 조경란에게 '2008년 동인문학상'을 안긴 '종신 심사위원들' 곧 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 오정희, 신경숙의 '문학권력'은 '상품의 그물망에 갇힌' 불쌍한 '욕망'으로 구제받는다. (수정: 애초 종신 심사위원은 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였는데, 2007년 박완서가 사퇴하면서 오정희가, 2008년에는 이청준이 몸이 아파 신경숙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박완서와 이청준은 올해 조경란에게 상을 주기로 결정한 인물들에 속하지 않는다.)

 

이런 불쌍한 '욕망'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건' 얼마나 부질없단 말인가!!!

 

이택광은 이제 정말 담대해져서 이렇게 외친다. “창작물의 표절은 일정부분 ‘공동창작’이라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너무나 유토피아적이어서 '표절로 점철된 거짓의 제국, 한국 사회' 위에서 '구름속 산책'을 하는 쾌감까지 제공한다.

 

논문의 본질은 애초부터 '공동창작'이다. 다만 '공동창작'임을 주석에 표시하는 걸 '잊으면' 안된다. (주석을 단 이상, 누구도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용이 지나치게 많으면 평가를 못받을 뿐이다.) 그리고 문학작품에서 '공동창작'임을 밝히는 방법은 표절이 아니라 '공동창작자'의 동의를 전제로 '지은이' 항목에 이름을 올려주는 것이다. 아니면 작가의 글을 통해서, 남의 작품을 토대로 삼아 쓴 글이라고 당당히 밝혀야 한다. 인류의 유산으로서 '앞선 문학의 성과' 또는 '앞선 연구 결과'에 대해 적절하게 알리고 표시할 때라야 이택광이 말하는 '공동창작'의 의미를 주장할 여지가 생긴다.

 

자본주의 아래서 저작권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없다. 하지만 표절은 이 '악마'에 맞서는 데 있어서 어떤 함의도 지니지 못한다. 이 악마에 맞서는 방법은, 저작권자의 동의없이 그냥 이용할 수 있는 권리 곧 '공정한 사용'(Fair Use)의 범위를 넓히려 싸우는 것이지, '표절에 숨은 욕망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몇가지 재미있는 부록도 제공한다. 1. “독점이 진행될수록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내가 보고 배운 게 없어서 그렇겠지만, 듣보잡이다. 듣도 보도 못한 잡소리라는 뜻이다.) 2. “논문표절의 경우는 논문의 특성상 데이터 도용을 뜻”한다 (논문은 과학 논문 뿐인가?) 3. “대개 논문을 베끼는 경우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논문을 쓸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 문학작품 같은 창작물의 표절은 이와 다르다. 창작물의 표절은 작품을 쓸 능력이 있는 경우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 조경란이 작품을 쓸 능력이 있어서 6년동안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고, 그렇게 오랜만에 내놓은 작품이 문학동네 편집부로부터 “이거, 조경란 소설 맞아?”라는 반응을 얻었구나. 출처: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있는 '출판사 제공 책소개')

2008/11/02 15:40 2008/11/02 15:40
8 댓글
  1. 민노씨 2008/11/12 12:10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본격적인 '비판글'을 쓰신 바에야 비판대상이 되는 글의 '반론권'을 최소한 확보하는 방법으로, 댓글이나 트랙백을 통해 이 글의 존재를 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깜빡 하셨나 싶어서 굳이 알려드립니다.

    추.
    본문 중에서 '윤리 / 도덕'을 구별하신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윤리가 사회적 규범성이 강하다면, 도덕은 개인적 규범성이 강하다는 의미로 쓰신 것인가요? 저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양자의 구별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아서, 평범한 독자들을 대신해서 질문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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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8/11/12 20:13

    이 글과 이 글이 비판하는 대상 글의 관계에 있어서는 '반론권'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히 발언하고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썼을 뿐이고, 이를 두고 저 글을 쓴 사람과 '토론'할 생각도 없고 토론의 가치도 못 느낍니다.

    윤리과 도덕은 절대적 가치를 목표치로 하는 규범적인 문제(윤리)와 '대체로'(!) 상대적인 함의를 지니는 '관습'의 문제(도덕)로 구별해서 썼습니다. 윤리는 '구체적인 도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둘의 차이가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긴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글이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http://goodking.new21.net/bbs/rgboard/view.php?&bbs_id=0004&page=11&doc_num=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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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민노씨 2008/11/14 07:02

    토론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씀은 의외네요.
    비판 자체가 일종의 '대화' 혹은 '관계'에 뛰어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자(이택광)와 독자, 비평가의 삼각형에서 독자를 위해, 비평가(마리신)를 위해서만 썼을 뿐이다, 뭐 이렇게 되는건가요? 좀 헷갈리네요...

    윤리/도덕에 대한 설명과 관련링크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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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8/11/14 09:35

    확대 해석은 위험합니다. 토론의 가치를 못 느낀다는 게, 비평가만을 위해 썼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누구를 위해 썼느냐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구요.)

    말 그대로 “토론의 가치를 못 느낀다”는 겁니다. 조금 부연하면, 이 문제를 두고 저와 제 비판 대상이 '왈가왈부'하는 건 가치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제가 공개적으로 쓴만큼,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생각하고 판단하면 그걸로 족하다는 소리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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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민노씨 2008/11/15 01:08

    딴지 거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 죄송스런 감정도 생기지만, 정말 궁금해서 여쭙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 중에 한 문학비평가가 대담 중에 간단히 답한 것이 있는데요. 발췌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텍스트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독서'는 끊임없이 텍스트에 접근한다. [....] 비평은 어떤 목적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필요에 의해 바흐찐이 말한 대로 저자의 목소리와 비평가의 목소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텍스트의 최종적 해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또 제가 늘 반대해 온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사고방식이고요. (김성곤, T. 토도로프, '탈구조주의와 문학비평의 새 지평', [미로속의 언어], p. 155, 서울:민음사, 1986.)

    마리신님께서 답해주신 바에 대해 일견 수긍이 되는 바도 있습니다. 마리신님께서 대화의 가능성을 아무리 추론하더라도 일말의 가능성이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하시고, 그저 자신을 돌아보는 차원에서 스스로와 대화하며 글을 쓰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것이 '만약'이라는 가능성, 재해석(대화)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창조적인 균열 따위의 생명력을 닫아두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더욱이 '섬광'과도 같은 것. 기쁨과 설렘의 기억을 준 대상에게 너무 쉽게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리고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라는 문제는 공개적으로 무엇인가를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극단적으론 자기 자신만 읽기 위해 쓰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문신처럼, 아니 피부나 살처럼 벗겨낼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 그것이 의식적인 목적성을 갖지 않더라도 저절로 내면화되는 어떤 것...이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이 글에는 답을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고민을 괜히 마리신님께 억지로 의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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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ishin 2008/11/15 10:06

    민노씨께서는 너무 생각이 많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때로 문제는 너무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창조적인 균열'이니, '저절도 내면화되는 어떤 것'이니, 이런 어려운 말들을 동원할 필요도 없는 것들입니다.

    제 말은 단순합니다. 1. 나는 '누구'가 아니라 '어떤 글'에서 '섬광'을 느끼고 '엉망진창'을 봤으며 2. '엉망진창'인 글을 쓴 사람과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없으되 3. 그 '엉망진창'임을 공개적으로 지적함으로써 내 글을 읽은 사람이 뭔가 나름대로 느끼고 판단하기를 기대한다.

    이건 무슨 대단한 이론이나 해석을 들이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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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일우 2009/01/02 23:42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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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marishin 2009/01/05 12:19

    굳이 알려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알려주시면, 저도 블로그를 찾아가서 글을 읽어볼 수 있으니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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