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는’과 ‘이/가’도 모르는 것들?
“‘은/는’과 ‘이/가’도 모르는 것들”, 많은 사람이 쉽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거 쉽게 할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글은 ‘은/는’과 ‘이/가’에 대한 글이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조금 돌아서 갈 예정이다. ‘돌아가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엔 사정이 있다.
전문 번역가 이희재라는 분이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을 썼다. 꽤 호평을 받고 있다. 나는 처음 이 책에 대해 알았을 때, 별로 탐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글쓴이가 머리말을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출판사의 책소개에서 인용.) 사실 어쩌면 상투적이면서도 상식적인 말인데, 나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20년 번역한 사람이 마음 먹고 번역에 대해 책을 쓸 때는 이런 말로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라면 “번역을 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한국어를 모르는지 알았다”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인터넷 서점에 공개된 내용과 책을 읽은 사람이 옮겨놓는 부분만 봤다. 앞으로 나올 인용문들은 토닥토닥이라는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마디 가지고 뭘 그리 꼬투리를 잡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글의 첫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김훈은 이걸 잘 표현하고 있다.
내가 쓴 장편소설
<남한산성>(<칼의 노래>; 원 인용자가 잘못 인용한듯.)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다의 기별> 140-141쪽.)
하지만 나는 우리말답게 문장을 잘 쓰고, 번역도 우리말답게 잘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는 <번역의 탄생>이 시답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말답게 글을 잘 쓰는 건 항상 강조할 일이다.
그래도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말이 계속 걸렸다. “한국어를 제대로 모르면서 번역을 했다는 소릴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한국어를 모르면 외국어가 제대로 번역이 안된다. 외국어를 번역하면서 한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다고 하면 모를까. 그러던 가운데 '토닥토닥'이라는 블로그에 인용된 대목을 보면서,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게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일본의 오노 스스무라는 언어학자는 기지의 정보, 미지의 정보라는 개념으로 일본어조사 は(한국어 ʻ은/는’에 해당)와 が(한국어 ʻ이/가’에 해당)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연단에 올라가서 “저는 오노입니다.” 하면 ʻ저’라는 사람은 청중 앞에 있으니까 청중 입장에서는 이미 아는 정보, 곧 기지의 정보지요... 반대로 연단에 올라가서 “제가 오노입니다.”라고 말하면 ʻ오노’는 청중이 이미 아는 정보, 곧 기지의 정보인데 여기다가 ʻ저’라는 미지의 정보를 덧붙이는 형식이 됩니다... 한국어 조사 ʻ은’과 ʻ는’은 실제로 이렇게 이미 아는 대상을 나타낼 때 씁니다...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거나 “경찰관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라고 하면 이것은 ʻ시험ʼ이 어떤 시험이고 ʻ경찰관ʼ이 어떤 경찰관인지를 듣는 사람이 안다는 사실이 전제된 표현입니다. (<번역의 탄생> 187-188쪽.)
정리하자면 듣는 사람이 이미 안다고 여겨지는 정보를 내놓을 때는 정관사 the를 앞에 붙이고 듣는 사람이 아직 모르는 미지의 정보를 내놓을 때는 부정관사 a를 앞에 붙인다는 것이 영어에서 the와 a를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기지의 정보를 제시하는 한국어 조사 ʻ은/는ʼ’은 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하고 미지의 정보를 던지는 한국어 조사 ʻ이/가ʼ는 영어 부정관사 a/an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역의 탄생>189쪽.)
그런데 이런 구분법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간다/ 나는 간다” 이 두 문장이 어감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또 ‘내가’의 ‘내’는 “미지의 정보”이고 ‘나는’의 ‘나’는 “이미 아는 정보”라고 하면 초등학생도 비웃는다. 김훈이 말하고 있는,“꽃이 피었다/ 꽃은 피었다”를 봐도 분명하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내가 번역한 것을 출판사 편집자가 바꿔 버려서 내가 되돌려놓은 경우다. “미국 지식인들이 전쟁을 지지하다/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하(한)다” 이 두 문장(사실은 어떤 글의 제목)이 다른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꽤 많은 한국인은 (설명은 못할지언정) 느낄 수 있다. 앞의 ‘미국 지식인들이’는 누군지 모르는 지식인이고, 뒤의 ‘미국 지식인들은’은 이미 아는 지식인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시험이 어렵지 않았다”는 모르는 시험 이야기고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는 아는 시험 이야길까? 턱도 없다. 둘 다, 듣는 사람이 아는 시험이다. (듣는 사람이 모르는 시험을 저렇게 불쑥 말하면 돌아오는 말은 “뭔 시험?”이라는 퉁명스런 말뿐이다.)
적어도 이 대목만 보면, 이희재는 외국어를 너무 많이 다루다보니 한국어를 오해하게 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전반적으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은/는’과 ‘이/가’에 대해서만큼은 그렇다.)
전문 번역가조차 ‘은/는’과 ‘이/가’를 구별해 설명하지 못하다니... 일부에서 극찬하는 작가인 김훈은 알겠지. 그런데 그 또한 기대에 못미친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에 이어지는 대목을 보자.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바다의 기별> 140-141쪽.)
이희재보다는 훨씬 낫다. 조사 ‘이/가’가 “객관적 사실”을 진술한다는 말은 대체로 맞다. 하지만 ‘은/는’이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다는 말씀은 많이 부정확하다.
(내 주장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 추가한다. 먼저 국어사전부터 보자.)
은: 자음으로 끝난 체언에 붙여 쓰이어, 그 말을 한정 또는 지정하거나, 다른 말과 대조하거나, 때로는 강조하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동아새국어사전, 1994)
은: 1.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합성 동사의 선행 요소 따위의 뒤에 붙어))어떤 대상이 다른 것과 대조됨을 나타내는 보조사. 2. ((받침 있는 체언 뒤에 붙어))문장 속에서 어떤 대상이 화제임을 나타내는 보조사. 3.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일부 연결 어미 뒤에 붙어))강조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여기까지가 나중에 추가한 부분이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보자. “내가 간다”는 객관적 사실인가? 아니다.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은/는’이 주관적 정서를 담은 것이라는 김훈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례다. “아프리카여 기다려라. 내가 간다.”라는 예를 보면 분명해진다. 여기서 “아프리카여 기다려라. 나는 간다.”라고 하면 바보가 된다. 반대 경우를 보자. “아프리카여 잘 있거라. 나는 간다.”는 말이 되지만 “아프리카여 잘 있거라. 내가 간다.”라고 쓰면 바보다. 여기서 ‘는’은 “한정” 또는 “양보”를 표현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여전히 사람도 많고 동물도 많지만 그리고 그들이 남아있는지 그들도 떠날건지 나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 떠난다”는 뜻이다. (앞의 ‘간다’와 뒤의 ‘간다’가 정반대의 뜻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대목이다.)
김훈의 소설 첫문장을 보자.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꽃’에 한정해서 말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버려진 섬마다 새가 사는지, 뱀이 사는지는 알 바 아니고(또는 나는 모르겠거나 관심 없고) 적어도 꽃은 피었다”는 뜻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꽃에 한정하기 때문에 김훈은 이를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었다고 표현한 것 같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이/가’라고 해서 꼭 언제나 “사실”만을 함축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어떤가? 이 경우는 공통된 사실 곧 “(이유는 모르겠으나) 버려진 섬에는 모두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가’는 ‘은/는’보다 훨씬 어렵다. 1인칭 곧 “내가”는 대체로(!) 당사자의 의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2인칭은 또 조금 다른 경우도 있다. “네가 가도록 해/ 너는 가도록 해”를 보자. 앞의 문장은 ‘너’라는 주체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가도록 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뒤의 문장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너’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말고 아무튼 너는 가도록 해”라는 뜻이다. ‘너’에 한정해서 말하다보니, ‘너’라는 주체를 강조하는 효과도 일부 있지만 “네가”를 쓸 때와는 분명 다르다.
3인칭의 경우는 또 다르다. 김훈의 설명처럼 대체로(!) “사실”을 진술할 때 ‘이/가’를 쓴다고 보면 무난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앞의 예를 다시 가져봐오자. “미국 지식인들이 전쟁을 지지하다/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하다” 여기서 앞의 문장은 어떤 뜻을 함축하고 있는가? “사실”을 진술하되, 여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에는 미국 지식인들 “일부”가 전쟁을 지지한다는 것도 담겨 있다. 다만 이는 뒤의 문장과 비교할 때만 그 의미가 또렷해진다. (따로 떼어놓으면 이게 잘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다.) 뒤의 문장 곧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하(한)다”는 미국 지식인 “모두”가 전쟁을 지지한다는 걸 함축한다. ‘은’의 “한정 효과”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다 몰라도, 적어도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미국 지식인 전체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를 지칭하지 않으려면 “미국 일부 지식인들은”이라고 분명하게 써야 한다.
‘은/는’이 “한정 효과” 때문에 전체를 지칭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건 다음의 예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빵이 맛있다/ 빵은 맛있다” 앞의 문장은 단순히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모호한 문장이다. 하지만 뒷 문장은 훨씬 더 분명하다. “(내 눈 앞에 있는 빵집의 빵을 말하는 건지, 빵 일반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모든 빵이 맛있다”는 뜻이다.
반복하자면, ‘은/는’은 “한정” 또는 “양보”를 함축한다. 그래서 어떤 집단이나 무리가 주어인 경우 그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효과까지 발휘한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은/는’과 ‘이/가’, 특히 ‘이/가’는 생각보다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하다. 게다가 사람마다 느끼는 차이 곧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그래서 한국어 알고 보면 굉장히 어렵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명심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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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은/는’과 ‘이/가’에 대해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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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9 16:38
‘은/는’과 ‘이/가’의 차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쓴다.
황석준 2009/03/13 22:13
형식적 의미에서만 보면 [이/가]는 화자의 인식을, [은/는]은 판단을 서술합니다. 그 순간의 대상을 서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인식이고, 거기에다 종합된 경험이 전제된 것이 판단입니다.
marishin 2009/03/13 23:18
암호 같기도 하고 잠언 같기도 한 말씀을 툭 던지시니, 낑낑거리며 길게 쓴 제가 머쓱해지는군요. ^^
유배지 2009/03/14 02:14
이희재와 김훈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습니다. '은/는'과 '이/가'를 구분하는 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marishin 님이 그렇지 않은 '예'를 든다고 해서 그들이 말이 '엉터리'가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희재와 김훈이 한 얘기는 '은/는'과 '이/가'를 구분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저들만의 중뿔난 '주장'이 아니라 국어연구가들이 말하고 있는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남영신의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 같은 책만 읽어 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희재의 구분법(기지-미지)은 34쪽, 김훈의 구분법(객관-주관)은 30쪽에 나옵니다.
marishin 2009/03/14 02:47
구분하는 방법이 하나가 아닌 것은 맞습니다. 저도 썼듯이, 저 조사들은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더 보편적인 설명력을 지닌 것이냐 입니다. 김훈은 부분적으로 부정확하게 표현했고, 이희재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는 걸, 보편적인 기준이랍시고 내세운 겁니다. 특히 이희재가 제시하는 사례는 사실, 이희재가 자신이 제시한 사례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구분법을 내세우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제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면, 제 구분법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국어 문장 사례를 제시하시면 됩니다. 제시하시고 제가 답할 수 있느냐를 한번 보시죠.
그리고 핵심이 설명력이기 때문에, 남영신의 책에 나오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만, 제가 말하는 내용은 남영신의 책 수준이 아니라 국어사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치하지만 누가 더 신빙성있는 출처를 뒤에 깔고 있느냐로 경쟁해도 제가 더 우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은: 자음으로 끝난 체언에 붙여 쓰이어, 그 말을 한정 또는 지정하거나, 다른 말과 대조하거나, 때로는 강조하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동아새국어사전, 1994)
은: 1.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합성 동사의 선행 요소 따위의 뒤에 붙어))어떤 대상이 다른 것과 대조됨을 나타내는 보조사.
2. ((받침 있는 체언 뒤에 붙어))문장 속에서 어떤 대상이 화제임을 나타내는 보조사.
3.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일부 연결 어미 뒤에 붙어))강조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이희재식 기지-미지, 김훈식 주관-객관은, 두개의 국어사전에서는 뒷순위에서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군요.
marishin 2009/03/14 03:46
그리고 조금 찾아보니, 남영신 또한 제 주장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http://www.barunmal.com/board/korstory/korstoryview.php?no=18&infono=17&nowpage=14&searchword=&key=&ref=&boardname=korstory
황석준 2009/03/14 02:48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이희재나 김훈은 틀렸지요.
각설하고, 신체가 안 좋으니 천천히 답변 하겠습니다. 기대는 마십시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주제와 연관된 문제이니까요.
민노씨 2009/03/14 04:35
처음에는 꽤 지루한 글이겠거니 하면서 읽었는데, 굉장히 흥미롭게,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이/가'와 '은/는'의 차이는 그 자체로 보편적인 차이를 갖는다기 보다는 그 의미요소가 한 문장에서 다른 의미요소와의 관계속에서 역동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다양한 언어적 감수성을 가지는 한국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저런 다양한 가변인자들 속에서 그 '이/가'와 '은/는'을 서로 달리 채택해서 사용해 왔을텐데, 그것이 연역적인 원칙하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의 불확정적인 감수성에 의해 사용되어 왔고, 그것을 '지금/여기'에서 확정하는 문제는 본문에 말씀하신 어떤 '정답'에 가까운 해석을 찾는 과정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변수들(그 '이/가' 혹은 '은/는'이 한 문장에서 어울리는 다른 의미 요소들)과의 변화 가능한 용례를 찾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런 용례들, 유형들을 구별하고, 확정하는 문제일 수는 있어도 위 황석준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편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혹은 어떤 '정답'에 가까운 '정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의문입니다.
marishin 2009/03/14 13:09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호한 게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처럼 변화합니다. 그래수 '은/는'과 '이/가'도 다양한 용례가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일반적인 구분법, 설명법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이건 무슨 깊은 철학적 이야기나 단순 논리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매일 매일 쓰는 문제이기 때문에 아주 현실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렇게도 분류할 수 있고, 저렇게도 분류할 수 있다는 식은 곤란한 태도입니다. 그나마 김훈은 적어도 틀리게 말하지 않았고, 다만 오해의 소지가 큰 부정확한 표현을 썼다는 문제는 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작품 해설 같은 성격이니까요.
그러나 이희재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최소한의 설명력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조사, 보조사를 단정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설명력"입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이 논의는 무의미합니다.(민노씨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배지 2009/03/14 06:31
http://blog.naver.com/uvz/40063839140
글을 올리는데 자꾸 오류가 나서 링크로 대체합니다.
닉네임을 누르셔도 해당 글로 연결됩니다.
marishin 2009/03/14 15:29
이희재와 제가 말하는 게 다르다는 걸 설명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궁리해서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국어연구자니 남영신이니 하는 외부의 '권위'를 끌어들인 건 제가 아닙니다. 남영신 또한 저와 똑같은 말을 한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일 뿐입니다.)
유배지 2009/03/14 16:47
<이희재의 말이 marishin 님의 말과 다르다>는 건 제가 궁금한 사항이 아닙니다. '효과적인 방법'이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저는 님과 이희재의 말이 '거의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도 볼 수 있다고요. '똑같다'고는 말 안 했어요. 따라서 비슷하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어 그 부분을 확대하면 님은 이희재의 말과 얼마든지 다르게 꾸미실 수 있습니다. 저에게 하라고 해도 할 수 있겠어요. marishin 님이 위의 댓글에 쓰신 것처럼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호"하니까요.
그러나 님과 이희재의 차이를 잘 설명해냈다고, 그게 곧 이희재의 말이 '엉터리'가 되는 게 아닙니다. 둘 다 옳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서로 '배치'되는 주장이 아니니까요.
정작 제가 궁금한 것은 왜 이희재의 말을 '최소한의 설명력도 없는 이야기'라고 단정지어 말씀하셨는가 하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저는 이희재의 말은 "설명력"이 충분히 있다는 주장과 근거를 제 블로그에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marishin 님은 '자신과 이희재의 차이'에 대해 논하실 것이 아니라, 제가 블로그에 쓴 <1.기지-미지>가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백 마디를 해도 '이희재의 말은 최소한의 설명력도 없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의 요지는 <한국어에서는 '미지'의 정보가 주어의 자리에 있을 땐 '이/가'를 쓰고 '미지'의 정보가 서술어의 자리에 있을 때는 '은/는'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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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남영신'이니 하는 권위를 끌어들인 게 잘못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니가 먼저 끌여들었으니 나도 끌어들인 것이이라는 뉘앙스의 말씀을 왜 하시는 거죠? "국어학자도 이희재와 똑같은 말을 하더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이희재의 주장은 그만의 중뿔난 주장이 아니라 국어학자도 하는 얘기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게 이상한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러는 님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사전'에 있는 내용을 긁어오지 않으셨나요? 사전의 권위는 되고 (사전 편찬자인) 남영신의 권위는 안 됩니까? 그리고 사전에서 없거나 뒷순위에 있으면 이희재의 말이 '엉터리'가 되는 겁니까? 무슨 해괴한 논리입니까? 그럼 사전에 김훈이 말한 '주관-객관'에 대한 설명은 나오나요? 위에 긁어 오신 걸 보니 안 나오는 것 같군요. 근데 댓글을 보니 김훈의 주장은 '엉터리'가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인정하신 것 같은데요? 요컨대 사전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는 <이희재의 말은 엉터리>라는 주장에 전혀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은/는/이/가'에 관한 세밀한 얘기는 사전에 안 나옵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질까봐 거론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뤄지고 있는 논의의 기본 출발점은 '주어'와 '주제어'의 특성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어는 그 특성상 영어처럼 '주어+동사'만 가지고는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제어'라는 개념을 학자들이 고안해낸 것입니다. 그리 해보니까 '은/는'과 '이/가'의 몇몇 쓰임새에서 발생하는 차이점이 대체로 설명되더라는 겁니다. 이희재의 주장도 그런 맥락 중 하나고요. 그런데 '주제어'에 관한 얘기는 사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marishin 2009/03/15 01:26
남영신이니, 뭐니 권위를 끌어들이는 문제는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닙니다. 뭐가 문제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잘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다면, 아마 문제가 없는 걸 겁니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건 '유치한 짓'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희재와 제 주장이 뭐가 다른지 보여주겠다는 것은, 이희재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뜻입니다.
creep23 2009/03/14 20:52
김훈의 소설 중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되는 것은 <<칼의 노래>>입니다. <<남한산성>>의 첫 문장은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입니다. 인용하실 때 혹시 실수를 하신 건 아닌지요?
marishin 2009/03/15 01:27
토닥토닥이라는 블로그에 <남한산성>이라고 인용되어 있습니다. 저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제가 직접 김훈의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인용했습니다. 역시 잘못된 것이군요.
토닥토닥 2009/03/25 13:42
아...이 덧글과 블로그를 보고서야 제가 실수한 걸 알았네요. 지적 고맙습니다.
백당시기 2009/03/21 09:57
맞고 틀리고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논리가 지칭하는 대상이 어떠하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은/는', '이/가'의 변별력은 김훈이나 이희재나 신기섭이나 남영신이 어떻게 주장하더라도 실제 사용례에 있어서 어떻게 활용되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언어는 문법보다 사용례가 훨씬 중요하다는 주장도 많이 있다.
그런데 글쓴이가 규정한 것처럼 '은/는', '이/가'가 그렇게 엄격하게 규정되어 쓰여질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한국어가 원초적으로 모든 사용례가 엄격하게 규정되어 만들어진 인공어가 아니라면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되어질 수 없다. 말을 사용하는 언중의 하나하나가 각각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쓰는 것이고, 때로는 잘못쓰기도 하고 오해도 하고 일부러 바꿔쓰기도 한다. 따라서 글쓴이처럼 엄격한 분류는 결코 될 수 없다.
남영신, 김훈, 이희재의 분류가 일말의 맞음과 더불어 일부의 틀림을 함께 가진다.
흄은 지식이란 개념에 관한 것(수학 등)과 실재에 관한 것이 있다고 하면서, 실재에 관한 것은 결코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다양하게 생동하는 언어를 그렇게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반영하고, 언어습관을 반영하는 그런 구분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기 보다 대체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글쓴이는 너무 욕심을 내지 마시길.
백당시기 2009/03/21 10:17
"아프리카로 간다"라는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오스틴이나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하나의 발언은 동시에 3종류의 행위일 수 있다.진술적발언, 수행적발언 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위의 "내가 간다"는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내가 가고있는 상황을 나타낸다.상황을 진술 혹은 기술하고 있다.
둘째, 말로써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내가 간다'고 하는 것으로 행위를 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계약이나 약속을 할 상황인데 '내가 간다'고하면 상황이 완결되는 경우에 내가 간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 나의 의도가 표출된 것이다. 그것이 행위를 위한 것이던, 사기치기 위한 것이던.
거듭 말하지만, 모든 이론은 완결성도 있어야 하지만, 개방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