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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는’과 ‘이/가’에 대해 다시 한번

‘은/는’과 ‘이/가’의 차이에 대해서 나는 아래 글에서 두가지 분류법을 비판했다. 하나는 ‘은/는’은 “듣는 사람이 이미 아는 정보”인 경우 체언 따위에 붙여서 쓰는 조사(보조사)이고 ‘이/가’는 “듣는 사람이 모르는 정보”인 경우 사용하는 조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번역가 이희재가 최근에 나온 자신의 책에서 주장한 것이다. 두번째는 ‘이/가’는 “객관적인 서술”에 쓰이고 ‘은/는’은 “주관적인 시각 따위를” 담을 때 쓴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소설가 김훈이 자신의 책에서 주장했다.

 

그리고 내 주장의 요점은 ‘이’는 객관적인 서술에 쓰이는 조사라는 것은 대체로(!) 맞는 이야기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은’은 대체로(!) 또는 일반적으로(!) 논의를 특정한 대상에 “한정”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보조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정”이 뜻하는 바는, 특정한 대상을 뺀 나머지를 제외시키는 ”배제”이기도 하고 특정한 대상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은’은 바로 앞에 위치하는 명사나 대명사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김훈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부정확하다”고 했다. 김훈의 분류법에서 문제는 ‘은’은 “주관적인 시각 따위를” 담을 때 쓴다는 대목이다. 하지만 김훈 이야기를 여기서 상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가 객관적인 서술에 쓰인다는 것은 대체로 맞는 이야기고, ‘은’은 “주관적인 시각 따위를” 담을 때 쓴다는 부분은 부정확하고 모호하지만 틀렸다고까지 말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이른바 “이희재식 분류법”이다. ‘유배지’라는 분은 이희재식 분류법이 틀리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런 ‘유배지’의 주장에 반박하려고 한다. (유배지라는 분의 글 보기)

 

그런데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실 ‘은/는’의 용법은 많으며, 어떻게 보면 이른바 이희재식 분류법이 먹혀드는 듯 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극도로 예외적이고, 이런 극도로 예외적인 경우 또한 다른 분류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게 내 주장이다.

 

이른바 이희재식 분류법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이 분류법의 비논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은/는’과 ‘이/가’의 차이는 “듣는 사람이 이미 아는 내용이냐 아니냐”에 있다는 주장의 비논리성

이희재식 분류법의 특징은, 기준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있다는 점이다. 말을 하는(글을 쓰는) 사람이 ‘은’과 ‘이’를 선택할 때는 먼저 말을 듣는(글을 읽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그나마 이 문제가 덜 심각하지만, 글을 쓸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많은 경우, 글을 쓰는 사람은 ‘은’과 ‘이’ 가운데 뭘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이제 한국어 문법에서 ‘은’과 ‘이’의 올바른 용법을 가르는 기준은 세울 수 없게 된다. 듣는 사람의 지식 여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대체로 한국인 대다수는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걸 안다. 그러므로 이희재식 논법을 제대로 따르면 “수학능력시험이 11월 중순에 실시된다”는 문장과 “수학능력시험은 11월 중순에 실시된다”는 문장의 차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앞의 문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인 대다수는 수학능력시험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 경우는 무조건 '은'을 써야 한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두 문장이 “뭔가 다른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앞의 문장은 수학능력시험의 실시일을 “담담하게 서술한” 것이고, 뒤의 문장은 “담담하게 서술”하지 않고 있다. 뒷 문장에는 뭔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수학능력시험을 뭔가로부터 구별해서 한정하려는” 의도다. 여기서 “뭔가”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상황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그건 대입 일정을 설명하는 와중이라면 “대입 수시 면접일”일 수 있고, 아니면 말하는 사람이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시험(운전면허시험이든 뭐든)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이 뭔가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데, 이 경우라면 “은”은 정확하게 말하면 “한정”이 아니라 “강조”를 위해 쓰였을 것이다. (사실 강조와 한정은 무관한 게 아니다. 강조하려니, 한정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를 들자면, “청와대가 (뭐라고 뭐라고) 밝혔다”라는 문장은 옳은 문장이 아닌 게 된다. 무조건 “청와대는”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소리인가?

 

여기까지 오면, 이희재 또는 ‘유배지’라는 분이 할 수 있는 “합당한” 말이라곤 “이 경우는 이희재식 분류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다”라는 것뿐이다. 다만 문제는 적용되지 않는 사례가 너무 많아질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수많은 고유명사는 이런 예외적인 사례에 들어간다. 웬만한 연예인, 상당수의 운동선수, 정치인, 학자, 기업인 이름 따위 말이다. 또 웬만한 추상명사도 모두 예외에 포함되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희재식 분류법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주 예외적인 사례를 설명하는 방법일까?

 

국어학자 남영신이 설명하는 것을 봐도, 이런 분류법이 비논리적임을 알 수 있다. ‘유배지’라는 분이 그의 책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를 언급했기에 서점에 들렀다가 잠깐 봤다.

 

남영신은 ‘이’과 ‘은’의 차이를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과 ‘독자가 모르는 내용’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는 2001년 9월에 발행된 한 일간 신문의 기사를 사례로 설명한다. 그 기사는 이런 내용이다.

 

한빛소프트 등 9개 기업이 12일 코스닥 등록 예비심사를 통과했다. 함께 심사를 받은 액토·시스폴·다코스정보통신은 보류 판정을 받았다.

 

남영신의 서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영신은 앞의 ‘기업이’는 ‘독자에게 새로운 내용’이기 때문에 ‘이’라는 조사를 썼다고 한 뒤, 다음 문장의 “의도”는 3개 업체가 보류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설명하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거론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어서 ‘다코스정보통신’은 이미 독자들이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은’을 썼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코스정보통신을 이미 독자들이 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또 다코스정보통신을 이미 아는 독자들이 왜 한빛소프트는 모를까? 남영신은 무슨 근거로 ‘독자들이 이미 안다’고 주장하는가?

 

남영신이 인용한 기사를 잘 보자. 기자는 왜 코스닥 예비심사를 통과한 업체 9곳 가운데는 ‘한빛소프트’만 명시한 반면, 남영신이 ‘독자들이 이미 안다’고 주장하는 업체들은 왜 일일이 이름을 썼을까? 보류된 업체가 어디인지 독자는 모르고, 자신은 그것을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남영신이건 이희재건, 이런 분류법을 옹호하는 이들이 말하는 “듣는 사람이 알고 있다”는 문장은 분명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부터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그들의 주장은 출발점도 제대로 잡지 못한 꼴이다.

 

2. ‘은/는’과 ‘이/가’가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

실제로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은’과 ‘이’를 나눠쓰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례는, 글을 쓸 때 맨 앞에서는 ‘이/가’를 쓰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 명사나 대명사가 다시 나올 때는 ‘은/는’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마리신이 13일 이희재식 분류법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배지’라는 분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마리신은 14일 댓글을 달았고, 이에 대해 유배지는 또 댓글을 달았다. 논란이 지속되자 마리신은 다시 한번 이희재식 분류법의 문제점에 대해 글을 썼다.”

 

언뜻 보면 이것이 이희재식 분류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둘은 다른 것이다. 이번 경우는 ‘은’이 ‘이’의 자리를 대신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은’은 쓰지 않아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을 다음처럼 바꿔도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마리신이 13일 이희재식 분류법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배지’라는 분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마리신이 14일 댓글을 달았고, 이에 대해 유배지가 또 댓글을 달았다. 논란이 커지자 마리신이 다시 한번 이희재식 분류법의 문제점에 대해 글을 썼다.”

 

‘은’은 ‘이’를 대신해서 쓸 수 있지만, 대신하지 않아도 상관없음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희재나 유배지라는 분은 이런 식으로 ‘은’이 ‘이’를 대체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3. ‘유배지’라는 분이 든 사례가 보여주는 것

이제 마지막으로 ‘유배지’라는 분이 내 주장에 반박하려고 든 사례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그가 든 첫번째 사례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이다. 1) 철수와 영희가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2) 철수와 영희는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그는 “1)에서 듣는 사람에게 새로운 정보는 '철수와 영희'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면에 2)는 '철수와 영희'가 서류를 넣은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이고, 청자가 알고 싶은 것은 서류심사의 '통과' 여부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논법은 남영신과 거의 똑같다. 도대체 ‘유배지’는 2번 문장에서 “듣는 사람이 철수와 영희를 이미 알고 있기에 실제로 알고 싶은 것은 서류심사의 통과 여부”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는 아마도 특정한 상황에서의 “대화”를 염두에 두기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글에서는 과연 어떨까도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안녕하세요? 마리신입니다. 철수와 영희가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라고 썼다. 이 경우 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철수와 영희’를 모르는 사람일까? 결코 아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철수와 영희도 알고, 이 두사람이 어떤 서류를 제출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다. 만약 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철수와 영희를 모르지만 어떤 서류심사에 대해 안다면 나는 이렇게 써야 한다. “안녕하세요? 마리신입니다. 철수와 영희라는 두 사람이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또 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철수와 영희도 모르고 어떤 서류심사에 대해서도 모른다면 나는 이렇게 써야 한다. “안녕하세요? 마리신입니다. 철수와 영희라는 두 사람이 한국대학교 수시전형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이번엔 내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첫 문장이 “철수와 영희가 서류심사를 통과했다.”라면, 이 경우 독자는 철수와 영희가 서류를 넣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똑같은 ‘철수와 영희가’도 어떨 때는 듣는 사람이 아는 사람들이고 어떨 때는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 곧 이희재, 유배지, 남영신의 주장은 “극도로 맥락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 여부로 ‘이’와 ‘은’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차이는 ‘이’와 ‘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희재, 유배지, 남영신이 모르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2009/03/19 16:35 2009/03/19 16:35
14 댓글
  1. 유배지 2009/03/20 00:30

    http://blog.naver.com/uvz/40064155284
    글자 수 제한이 있어서 링크로 대체합니다.
    닉네임을 누르셔도 해당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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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09/03/20 01:19

      정말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의 의미 차이가 “맥락” 때문이라구요? '은'과 '이'의 차이가 아니구요? “언어는 모두 맥락 의존적이다”는 말은 이렇게 명백한 '은'과 '이'의 용법 차이를 무시하는 핑계로 써먹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언어의 근본적인 모호성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유배지 님과는 더 논하는 게 불가능하군요. 님 말마따나 미리 “예상”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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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유배지 2009/03/20 02:21

    님이야 말로 황당한 주장은 그만하세요.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가 맥락 의존적이 않으면 뭣 때문에 구분해서 씁니까. 아니 ‘맥락’을 배제하고 어떻게 ‘은’과 ‘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애초에 작가가 맥락을 고려하여 ‘은’으로 쓸지 ‘이’로 쓸지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의 말이 <명백한 ‘은’과 ‘이’의 용법 차이>를 무시하는 핑계로 써먹는다는 건 도대체 또 어디서 나온 말입니까? 저는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님의 주장, 이희재의 주장, 김훈의 주장 모두 인정합니다. (이희재의 주장을) 무시하는 건 오히려 님이지요.

    그리고 하지 못한 말이 있어서 한 마디만 더 합니다. 님은 이희재의 주장은 거의 부정하고 김훈의 주장은 제한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은/는’의 ‘한정’이니 ‘강조’니 하는 용법에 대해서는 거의 ‘명백하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그러니까 사전에 있는 내용까지 긁어가며 강조하셨겠죠.

    그러나 ‘한정’이니 ‘강조’니 하는 용법도 맥락에 따라 모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님의 주장처럼 전혀 명백하지 않아요. 예를 멀리서 들 것도 없습니다. 님이 <2.>에서 주장하신 글이 바로 님의 주장을 무색케 할 용례입니다. 님은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대해 반론하시기 위해서 아래와 같은 두 단락을 비교하셨죠.

    “마리신이 13일 이희재식 분류법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배지’라는 분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마리신은 14일 댓글을 달았고, 이에 대해 유배지는 또 댓글을 달았다. 논란이 지속되자 마리신은 다시 한번 이희재식 분류법의 문제점에 대해 글을 썼다.”

    “마리신이 13일 이희재식 분류법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배지’라는 분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마리신이 14일 댓글을 달았고, 이에 대해 유배지가 또 댓글을 달았다. 논란이 커지자 마리신이 다시 한번 이희재식 분류법의 문제점에 대해 글을 썼다.”

    님이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라고 예를 들기 위해 제시한 문장이 왜 저에겐 ‘은/는’의 ‘강조’와 ‘한정’의 용법의 예로 보이는 것이죠? 저는 앞서 이희재의 주장과 님의 주장이 거의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님은 뒤에 나오는 ‘마리신은’과 ‘마리신이’ 또는 ‘유배지는’과 ‘유배지가’는 뜻의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두 표현은 차이가 없죠.

    그런데 저는 님이 ‘정보’라고 말하는 것을 ‘한정’ 또는 ‘강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 안 됩니까? 앞에 나온 문장의 말을 다시 ‘한정’ 또는 ‘강조’한다고 말입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틀렸으면 틀렸다고 답해 주세요. 그렇게 보면 님이 ‘명백하다’고 보는 ‘은/는’의 한정 용법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게 정말 명백합니까? 아니면 이건 또 ‘극도의’ 예외적인 예이고, 일반적인 예는 따로 있습니까?

    님이 이희재의 말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으시면, ‘은/는’의 한정(강조)용법도 그만큼은 헐겁기 짝이 없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에 따라 님은 이희재의 주장도, 김훈의 주장도, ‘한정(강조)’의 용법도 모두 ‘엉터리’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희재의 경우만 따로 떼어내어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계시기 때문에 황당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본인의 주장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시겠습니까? 더 설명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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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행인 2009/03/20 22:51

    논의의 핵심은 어떤 설명이 더 '보편적인가'가 될 것 같습니다.
    두 개에 걸친 포스트의 요지는, marishin설명(편의상 이렇게 부릅니다)은 상당히 보편적인 설명력을 가지는 반면 이희재설명은 상당히 제한적인 설명력을 가진다는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반박을 하시지 않는 이상, '극도', '맥락의존적' 같은 단어를 붙잡고 아무리 많은 얘기를 하신들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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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배지 2009/03/21 00:54

    행인 / 지금까지 제가 그거 '반박'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다시 읽어 보세요. 그리고 왜 제가 지금 <'극도'의 '맥락의존적'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게 마리신 님 주장의 핵심 아닙니까? 마리신 님이 며칠 간 고심하셔서 내놓은 답변이 <'극도'의 '맥락 의존적'> 아닙니까? 근데 제가 지금 그걸 붙잡고 얘기하지 그럼 뭘 붙잡고 얘기합니까? 저는 지금 딴 얘기할 필요 없어요. 그것만 얘기하면 됩니다. 뜬금없이 '생산적인 논의' 운운하지 마세요. 이 논의에 생산적인 결론이 날 일은 없습니다. '극도'와 '맥락 의존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부터 이미 생산적인 논의는 물 건너 간 거예요.

    그리고 저는 님의 말마따나 '생산적인 논의'와 무관한 댓글은 남의 블로그에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앞에서 대부분 다 했고요. 제 얘기가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답변을 올렸습니다. '생산적인 논의'를 계속하고 싶으시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신 후에 댓글을 달아주시길 바랍니다.

    ------

    덧) 행인 님의 글을 보니 아직도 제 얘기를 이해 못하고 계신 분이 있으신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올립니다. 이것이 세 번째 글이고, 마지막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uvz/40064216259

    닉네임을 누르셔도 해당 글로 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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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국어학도 2009/03/22 13:15

    이 주제에 관심이 많아 마리신님과 유배지님이 올리신 글들을 아주 흥미읽게 있었습니다. 국어학에서 조사는 일반적으로 체언의 격을 나타내는 격조사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첨가하는 기능을 가진 보조사로 구분합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이/가'는 격조사, 그 중에서도 주격조사로, 반면에 '은/는'은 대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보조사로 설명하고 있지요. '은/는'이 한정(강조)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마리신님의 견해는 이휘재님의 견해보다 이런 일반적 설명에 좀 더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일반적 설명이 완전히 확립된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배지님이 세번째 글에서 잘 지적하셨듯이 맥락에 따라 '이/가'도 얼마든지 한정(강조)의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 "[다른 사람도 아닌] 스님이 고기를 먹다니!").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국어학에서 일반적으로 '이/가'와 '은/는'을 각각 주격조사와 대조 보조사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별로 탐탁치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영신님이나 이휘재님의 견해는 또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있지만, 마리신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엉터리'(마리신님이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견해라는 데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군요. 제가 보기에는 '이/가'와 '은/는'의 다양한 차이점 중 분명히 중요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겐 유배지님의 반박이 더 설득력 있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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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국어학도 2009/03/22 14:38

    참고로 제가 왜 '이/가'를 주격조사로, '은/는'을 대조(강조, 한정) 보조사로 보는 일반적 설명에 대해 탐탁치않게 생각하는지 좀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영어 문장 "Heidegger is a philosopher"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문장에서 'Heidegger'는 단순히 주어로 쓰였고 별다른 대조나 강조, 한정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길 경우

    (1) 하이데거는 철학자이다.
    (2) 하이데거가 철학자이다.

    중 (1)을 선택하지 아무도 (2)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극도로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경우 (1)번 문장 "하이데거는 철학자이다"에서 쓰인 '는'은 단순히 주격을 나타내는 조사로 쓰이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오히려 (2)번 문장 "하이데거가 철학자이다"에 쓰인 조사 '가'는 맥락에 따라 강조의 뜻을 가진 문장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하이데거가 철학자이다"를 만드는 보조사로 쓰일 수도 있지요.

    '은/는'이 대조, 강조, 한정을 나타내지 않는 단순한 주격조사로 쓰이는 경우는 사실 굉장히 많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논리학에서 늘 예로 드는 다음의 전형적인 삼단논법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위의 세 문장에는 모두 조사 '은/는'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대조나 강조, 한정의 뜻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화자의 주관적 의도나 시각을 나타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모두 주격조사로 쓰였고 그야말로 사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지요. 사실 삼단논법만큼 무미건조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문장을 쓰는 경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예들을 고려해볼 때 '이/가'를 주격조사로, '은/는'을 대조 보조사로 보는 일반적 설명은 매우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신님은 이 설명을 그나마 가장 낫다고 보시는 듯 합니다만, 조금만 곰곰히 더 생각해보시면 별로 나을 것도 없는 문제점 투성이의 설명이라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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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ualia 2009/09/02 04:16

      국어학도 님, 제가 판단하기에, 국어학도 님의 위 논증에는 심각한 허점이 있어 보입니다. 즉 국어학도 님께서는 다음 두 가지 (유사) 오류를 저지르셨습니다.

      ① 맥락/상황/앞뒤 문맥 따위가 전혀 전제되지 않은 고립된 사례를 끌어와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오류
      ② (명제적 진술 · 언명과 관련된) 기본적 사실 관계에 대한 명백한 오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 국어학도 님께서 우리말 조사 “은/는/이/가”에 대한 일반적 설명의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 드신 영어 문장 “Heidegger is a philosopher”의 번역 사례는 전혀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맥락/상황/앞뒤 문맥도 없는 이 단문은, 국어학도 님의 위 주장과는 달리, 그 어떤 형태로든 번역이 가능(혹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Heidegger is a philosopher”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하이데거는 철학자다〉뿐만 아니라 〈하이데거가 철학자다〉라는 번역 중 어느 것이든 가능하달 수 있습니다(혹은 둘 다 불가능하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Heidegger is a philosopher”라는 단일한 발화 · 언급 · 문장은, 국어학도 님의 사례에서처럼 맥락/상황/앞뒤 문맥 따위가 완전히 제거된 진공 상태에서는 어떠한 번역도 가능한 동시에 그 어떠한 번역도 불가능하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Heidegger is a philosopher”라는 하나의 특정한 발언 · 문장이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맥락이나 상황 혹은 앞뒤의 문맥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Heidegger is a philosopher”(가 함축하는 언외)의 미묘하고도 진정한 의미를 확정할 수도, 번역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실제의 사용 맥락 · 상황 · 문맥에 따라, 이 문장의 강조점은 주어인 “Heidegger”에 올 수도 있고, 보어인 “philosopher”에 올 수도 있고, 그 밖의 다른 성분에 올 수도 있고, 혹은 아무데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각각의 경우마다 그 (함축적)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따라서 위에서 국어학도 님께서 〈'Heidegger'는 단순히 주어로 쓰였고 별다른 대조나 강조, 한정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 옳고 그름이 경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당연히 우리말 번역도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우리말에서 이 의미의 미묘하고도 섬세한 분화를 매우 효과적으로 수용하여 처리해 주는 문법형태소가 바로 보조사/도움토씨인 것이죠.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하이데거는”이든 “하이데거가”이든, 실제의 맥락 · 상황 · 문맥에 따라 어느 것이든 채택 가능할 수도 있고 또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더불어서 조사 “는”과 “가”의 정확한 문법적 지위도 그것이 쓰이는 맥락 · 상황 · 문맥에 따라 (단순) 주격조사와 보조사 사이를 오락가락할 것입니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주격조사의 기능과 보조사의 기능을 함께 아우르는 새로운 조사 개념을 규정하고 정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국어학도 님의 위 번역 사례는 전혀 타당한 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번역 사례를 논거삼아 전개한 국어학도 님의 논의는 그 내용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제/전거/논거가 그르다면(옳지 않다면/참이 아니라면/거짓이라면), 결론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필연적으로” 그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국어학도 님께서는 아전인수식 해석(즉 “Heidegger is a philosopher”를 “하이데거는 철학자이다”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일방적인 단정)의 명백한 오류를 저지르셨습니다.

      ② → 국어학도 님께서는 〈'은/는'이 대조, 강조, 한정을 나타내지 않는 단순한 주격조사로 쓰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하시면서 다음의 유명한 삼단논법을 그 사례로 드십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즉 국어학도 님께서는 위 세 명제에 각각 쓰인 조사 “은/는”은 모두 대조나 강조, 한정의 뜻이 없는 단순 주격조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명백한 오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는 하나의 “특정한” 사실을 지목해서 말하고 있는 주장/언명/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는 우주의 하고많은 사물/생물/존재 따위 중에서 특별히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생물종을 “선택”해서 발언하는 문장입니다. 이때 문제의 조사 “은”이 주격조사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대조 · 배제 · 선택 · 한정 · 강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와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에서의 조사 “는”도 같은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참 ·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명제와, 그런 명제들을 가지고 수행하는 추리 · 논증에서 대조와 배제와 선택과 한정 따위는 필수입니다. 우리말에서 그런 대조 · 배제 · 선택 · 한정의 기능을 (주도적으로) 하는 문법형태소가 바로 보조사 “은/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위 삼단논법에 쓰인 조사 “은/는”이 〈어떤 경우도 대조나 강조, 한정의 뜻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라는 국어학도 님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③ 이상 살펴보았듯이, 국어학도 님께서는 위에서 제가 지적한 ①과 ②라는 잘못된 논거에 기초하여 논지를 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습니다. 따라서 국어학도 님께서 〈'이/가'를 주격조사로, '은/는'을 대조 보조사로 보는 일반적 설명은 매우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최종적으로 내리신 결론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덧말: 네이버에서 “번역비평”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마리신(marishin) 님의 블로그에 찾아오게 되었고, 그래서 위 논쟁/토론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이 2009년 09월 02일이니 위 논쟁이 벌어졌던 지난 3월달로부터 거의 6달이 지난 시점이군요. 좀 뒤늦은 시점이지만, 위 논쟁의 주제들은 저한테도 매우 관심을 끄는 것들이라, 방앗간의 참새처럼 그냥 지나쳐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위 졸문을 올려봅니다. 많은 회초리 바랍니다. 참고로 이 댓글은 제 블로그(http://blog.aladdin.co.kr/qualia)에도 올립니다.]

      지금 2009. 09. 02. 수요일. 새벽밤 04시 13분. 맑은 듯.
      콸리아 / 퀄리아 / qu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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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arishin 2009/03/23 00:03

    국어학도/제가 하려는 말은, '은/는'이 “대체로”(!) '한정'으로 쓰인다는 것이지, '서술'에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는 '은/는'이 '이/가'보다 도리어 더 '단순 서술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되는 것은 '은/는' 때문이라기보다는 '이/가' 때문인 측면이 강합니다. (이 말은 “내가”라는 게 한국어에서 얼마나 “특별히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따져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는’과 ‘이/가’가 상당히 어렵고 미묘하다는 것, 특히 더 어려운 것이 '이/가'라는 점을, 이미 첫번째 글 마지막에서 쓴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예로 드신 사례들의 '은/는'이 단순 서술이라고 단정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특히 삼단논법은 그 본질상 절대로 '단순 서술'이 아닙니다.)

    따져볼 여지가 있는데, 다만 이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사람마다 느낌이나 언어 감각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국어학자들끼리 “전문적인 차원”에서 논하는 걸로 족한 문제일 겁니다.

    하지만 '은/는'의 용법이 “말을 듣거나 글을 읽는 사람이 정보를 알고 있느냐 여부”에 달렸다는 주장은 여전히 “엉터리”이고 “언어의 기본”을 부인하는 비논리적인 주장입니다. 그건 “'은/는'의 용법은 '논리적 선후 관계 측면에서 보면' 글이나 말을 읽거나 듣는 사람의 정보 '사전 인지' 여부에 따라 사후적으로 결정된다”는 '비논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논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은,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는 주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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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유배지 2009/03/23 02:58

    마리신 님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이번이 마지막 설명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uvz/40064327795

    닉네임을 눌러도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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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국어학도 2009/03/26 15:45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마리신님이 답변 댓글을 다셨군요. 저도 답변을 달아보겠습니다.^^

    마리신님은 '은/는'의 용법이 "말을 듣거나 글을 읽는 사람이 정보를 알고 있느냐 여부"에 달렸다는 남영신과 이휘재의 주장이 "엉터리"이고 "언어의 기본"을 부인하는 비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하셨습니다. 밑에 독심술 얘기를 하신 걸 보니 왜 이렇게 강하게 비판하시는지 알겠습니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청자(독자)가 아니라 화자(저자)인데, 화자(저자)가 독심술사도 아닌 이상 도대체 청자(독자)가 무슨 정보를 알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만약 남영신이나 이휘재가 말하는 '청자(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글자 그대로 청자(독자)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라면, 마리신님 말씀대로 두 사람의 주장은 비논리의 극치가 될 것입니다. 청자(독자)가 뭘 알고 있는지 도대체 화자(저자)가 어떻게 압니까?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청자(독자)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가 아니라, 청자(독자)가 알고 있음이 '확실한' 모든 정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심술은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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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국어학도 2009/03/26 16:20

    청자(독자)가 알고 있음이 '확실한' 정보는 크게 세가지 유형 정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공통 정보가 있습니다. (가령 한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 두번째,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미 앞에서 청자(독자)에게 언급한 정보가 있습니다. 세번째, 말을 하는 특정 맥락에서 청자가 알고 있음이 확실한 정보가 있습니다. (가령 어떤 검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어느 골목에서 화자와 청자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검은 고양이). 청자(독자)가 알고 있음이 확실한 이런 정보들을 언급할 때는 (대체로!) '이/가'가 아니라 '은/는'을 쓴다는 것이지요.

    이 세가지 경우 중 첫번째 경우는 가장 불분명합니다. 어디까지가 공통 정보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경우에는 기지의 정보에 '은/는'을, 미지의 정보에 '이/가'를 쓴다는 원칙이 잘 들어맞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두번째 경우는 가장 분명합니다. 앞에서 정보를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 청자(독자)가 알고 있음이 확실하지요. 그래서 이 경우에는 기지의 정보에 '은/는'을 쓴다는 원칙이 꽤 잘 들어맞습니다. 가령 다음 문장을 봅시다.

    "강릉 여대생 살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수원시에 거주하는 전휴철씨가 긴급 체포되었다. 전휴철은 강원도 동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다른 부녀자 살해 사건들에 대한 혐의도 받고 있다."

    여기서 첫번째 문장에서는 전휴철이라는 사람에 대해 독자가 알고 있지 않음이 확실하므로 '가'를 썼습니다. 반면 그 다음 문장에서는 전휴철을 이미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독자가 알고 있음이 확실하므로 '은'을 썼습니다. 만약 위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쓴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확실히 이상해지지요.

    "강릉 여대생 살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수원시에 거주하는 전휴철씨는 긴급 체포되었다. 전휴철이 강원도 동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다른 부녀자 살해 사건들에 대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제 세번째 경우를 봅시다. 가령 검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는 골목에서 화자와 청자가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화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저 검은 고양이는 주인이 있을까?"

    이 경우 '는' 대신 '가'를 붙여서

    "그런데 저 검은 고양이가 주인이 있을까?"

    라고 하면, 말이 아주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어색하지요.

    위에서 제가 든 두가지 사례를 남영신-이휘재의 '기지의 정보 언급 / 미지의 정보 언급' 구분 방식 대신 다른 방식으로 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 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전 그 다른 방식이 뭐가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이면, 물론 저는 '기지의 정보 언급 / 미지의 정보 언급' 구분에 근거해서 '은/는'과 '이/가'의 용법을 구분하는 것이 '유일한' 구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는'이 '이/가'에 비해 (대체로!) 한정/양보/대조의 뜻을 나타낸다는 마리신님의 구분도 분명히 '은/는'과 '이/가'의 다양한 차이점 중 하나를 드러내는 훌륭한 구분입니다.

    단지 제가 주장하는 것은, '기지의 정보 언급/ 미지의 정보 언급'이라는 구분 역시 '은/는'과 '이/가'의 다양한 차이점 중 유의미한 차이점 하나를 드러내는 쓸모있는 구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신님도 이 정도는 인정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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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국어학도 2009/10/02 21:33

    퀄리아님 블로그에 퀄리아님 반론에 대한 답변을 올려놓았습니다. 아래 주소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http://blog.aladdin.co.kr/qualia/3071338#C171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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