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에서 서양 언론이 한 짓
이 글은 지난해 연말 아메리카에서 조용히 출판된 책 <언론 청소 : 추악한 보도 - 언론과 유고슬라비아의 비극 (Media Cleansing : Dirty Reporting - Journalism and Tragedy in Yugoslavia)> (피터 브로크 Peter Brock 씀)에 대한 상세한 서평을 번역한 것입니다. 저자는 30년 가까이 활동한 탐사보도 전문 기자이고 서평자는 촘스키와 협력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자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인 경제학자 에드워드 허먼(Edward Herman)입니다. 서양 언론들이 얼마나 편파적이고 거짓된 보도로 발칸반도 분쟁을 전세계에 왜곡해 전달했는지, 이 서평만 봐도 기막힐 지경입니다.
이 서평을 읽으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발칸 분쟁에 대한 지식 대부분을 폐기처분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글을 읽고나면 지금도 외신을 통해 꾸준히 전달되고 있는 발칸에 대한 보도 내용도 전혀 다르게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며칠전만 해도 베를린영화제에서 보스니아의 학살과 성폭행을 다룬 영화 <그르바비차>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간단히 전해진 내용을 보면 이 영화 또한 한쪽 진영 곧 세르비아인들의 잔학 행위만 집중 부각시킨 것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최우수 작품상은 고사하고 출품작에 포함되지도 않았을 게 뻔합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군 사령관으로 학살 혐의를 받고 있는 믈라디치 체포설이 흘러나왔습니다. 세르비아의 학살 자체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지만 그들만 학살 행위를 한 게 아닌데, 이 소식을 전하는 어떤 언론도 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책이 나오는 겁니다.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벌어진 발칸지역 분쟁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분들은 발칸분쟁 이해를 위하여를 먼저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서평 글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할 겁니다.
[서평] <미디어 청소 : 추악한 보도 - 언론과 유고슬라비아의 비극> (피터 브로크, gmbooks, 2005) Media Cleansing : Dirty Reporting - Journalism and Tragedy in Yugoslavia, By Peter Brock
서평자: 에드워드 허먼 (Edward S. Herman) 출처: <제트매거진>, 2006년 1월호 (서평 원문 보기)
이 중요하고 가치있는 책은, 다이애나 존스톤(Diana Johnstone)과 마이클 맨델(Michael Mandel)이 쓴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훌륭한 책들(<바보들의 십자군, Fools' Crusade>과 <아메리카가 살인에 대한 처벌을 피한 방법, How America Gets Away With Murder>)을 완벽하게 보완한다. 존스톤은 발칸전쟁들의 핵심 역사와 배경[맥락]을 제공하는데, 이 지역 토착 개입 세력, 그들의 배경과 동기와 전략, 외부 개입자들(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 집단과 홍보 회사들, 오스트리아, 독일, 아메리카, 국제연합과 유고전범재판소[ICTY, 국제형사재판소])이 맡았던 중요한 구실을 분석함으로써 이를 제공한다. 맨델은 최근 아메리카의 침략행위, 이런 행위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국제법과 국제형사재판소의 구실 및 국제법과 국제형사재판소 악용에 대한 두드러진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브로크는 언론매체의 구실에 초점을 맞춘다. 언론매체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나 국제형사재판소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원하는 개인들과 집단들과 정부들의 진행계획 추진에 호위병 구실을 한 '공동 참전자'(co-belligerents)였다. '부대에 배속된'(embedded) 언론인들은 이라크 침략-점령과 함께 나타난 게 아니다. 자발적 배속이 발칸 분쟁을 보도한 서양 언론매체의 지배적인 특징이었다.
브로크가 아주 분명하게 밝혀낸 엄청난 얄궂은 결과는 이렇다. 보통 말하기로 인종 청소와 학살을 중단시킨답시고 더 공세적인 행동을 무자비하게 부추긴 언론계의 공동 참전자들이, 자신들의 호전성과 전쟁 선동이 없었다면 발생했을 사태에 비해 도리어 더 많은 인종청소와 학살을 보장하고 촉발하는 정치적 의제를 추구한 세력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발칸 내부 개입자들과 외부 세력들의 목표와 수단을 주제로 한 존스톤과 맨델의 책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평화에 반하는 '정의'에 초점을 두고 세르비아인들을 악마로 만들고 또 그들을 처벌받아야 할 유별난 집단으로 만드는 행위야말로, 보스니아의 이슬람 지도자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c)와 그의 측근들과 클린턴/올브라이트 및 콜/겐셰[각각 아메리카와 독일의 정부 수반/외무장관 : 옮긴이]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이 사용한 수단이다. 이들은 평화적 타결을 막고 - 가장 중요하게는 1992년 리스본 합의를 깼다 - 무엇보다 이제트베고비치를 위해, 그리고 보스니아의 이슬람계를 위해, 또 코소보해방군과 코소보의 알바니아계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로 하여금 군사적으로 개입하게 만들려는 집요한 시도에 이 수단들을 활용했다. 브로크는 언론매체들이 이런 친 폭력적이고 반 평화적인 목표에 무자비하고도 효과적으로 봉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것이 '패거리 언론(pack journalism)'의 규범적 사례이고 '옹호 언론(advocacy journalism)' 또는 '부속 언론(the journalism of attachment)'이라고 불리던 것이기도 함을 설득력있게 논한다. 언론인들은 선한 쪽이 악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 또는 이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의무이자 덜 위험하다는 생각에 쉽게 설득되어, 이 패거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또 선하다고 하는 쪽과 그쪽 희생자들에 밀착하는 옹호세력이 됐다. 발칸지역에서 이런 현상을 부추긴 요인은, 언론인 대부분이 이 지역 언어와 역사를 몰랐다는 사실과 진정한 언론활동을 시도하면 육체적 위협을 받는 탓에 그들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지역에 모여있곤 했다는 점이다. 한 냉소적인 목격자(루이스 매킨지 장군, Lewis MacKenzie)가 지적했듯이 언론인 대부분은 “홀리데이인 호텔로부터 사방 150미터” 안에서 자신들이 본 것만 보도했다.
이런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뉴스'를 찾는 데 서로 서로에 의존하고, 또 기꺼이 그들을 도와주는 공식 취재원들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언론인들이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이슬람계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머물렀기에, 이들 이슬람계가 아메리카 관리들과 함께 뉴스의 주요 취재원이었다. 또 브로크가 지적하듯이 이 언론인들은 사라예보에 많은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들 가운데 약 5만명이 도시를 탈출했거나 내쫓겼다는 걸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이 패거리는 심지어 유대인들의 사라예보 탈출조차 몰랐다.(131-133쪽) 이 유대인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은밀히 협박을 받았고 (세르비아계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나치 지배 시절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의 살인 행위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이다.
사라예보 (그리고 다른 발칸 지역) 주재 패거리 언론인들은 그래서 아주 조작당하기 쉬운 상태였다. 그들은 더 폭넓은 진실을 미리 알았고, 실질적인 객관성과 균형이라는 개념을 내팽겨쳤으며, 제도화한 편견을 뒷받침하고, 그럼으로써 본사의 편집 책임자들을 기쁘게 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옹호하고 선전하는 대의명분을 주창하는 데 적합한 이야기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데이비드 리프(David Rieff) 로이 거트먼(Roy Gutman) 에드 벌리어미(Ed Vulliamy) 같은 기자들은, 자신들이 더 공세적인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개입 (곧 전쟁)을 촉구하는 운동가이고 자신들만 그런 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사실들과 모든 당사자들의 주장을 따져보고 분쟁 속의 복잡한 사건들을 공정하고도 총체적으로 그려내게 될 진지한 언론인이기를 포기했음을 뜻한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명분을 주창하는 이야기들에 기울고 무비판적인 열정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다루게 됐다. 또 다른 냉소적인 목격자가 묘사했듯이, 이는 곧 이제트베고비치가 “그들을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처럼 다룰 수 있음”을 뜻했고 실제로 그들을 보스니아 이슬람계의 선전과 역정보를 위한 앞잡이로 이용했다. (개중 '균형감 있는' 로이 거트먼은 이슬람계 당국뿐 아니라 크로아티아 정보 기관과 아메리카 대사관에 의해서도 스타라디바리우스처럼 다뤄졌다.)
이 패거리짓과 시류영합 과정은 제 스스로를 먹고 자랐다. 보스니아 이슬람계의 고통을 보여주는 암울한 사진과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세르비아계 희생자들과 사건 맥락을 무시하고 또 이에 상응하는 국제형사재판소와 서방 정치 지배층의 의제와 편견의 지원을 받으면서 보스니아 이슬람계를 희생자로 만드는 데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거의 전적으로 일방적인 악마 만들기의 정책 노선이 꾸준히 강화되었다. (하지만 전직 아메리카 국무부 관리 조지 케니(George Kenney)의 조사 결과는 “각 인종의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은 거의 똑같다'는 걸 밝혀냈고 심지어 국제형사재판소가 후원한 조사 또한 사망자 가운데 세르비아계의 비중은 전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구 중 세르비아계의 비중보다 많이 낮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 Ewa Tabeau and Jacub Bijak, "War-related Deaths in the 1992-1995 Armed Conflicts in Bosnia and Herzegovina: A Critique of Previous Estimates and Recent Results," European Journal of Population/Revue européenne de Démographie, June, 2005를 보라) 속기 쉬운 (심리) 상태와 더 시선을 끌만한 악마의 모습을 원하는 욕구는, “강간 수용소(rape camps)”와 아우슈비츠식 “학살 수용소(death camps)”에서의 희생자 만들기에 대한 무책임한 보고와 주장을 더욱 부추겼다. 이런 언론인들의 책들은 브로크가 “희생 서사시”라고 한 것들일 것이다. 이런 책들은 당파적인 취재원들이 제공하는, 유감스럽게도 “확인 안된(unconfirmed)” 목격담에 주로 의존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별적 희생자 만들기를 담고 있다.
브로크는 강간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주장과 세르비아계가 유독 그리고 군사적 전술 차원에서 강간을 저질렀다는 주장들을 세밀하고도 설득력있게 해부한다. (5장) 그는 분명히 세르비아계의 강간 자체를 결코 부인하지 않지만, 세르비아계의 강간이 보스니아 이슬람계 또는 크로아티아인들의 강간보다 숫적으로 많다거나 더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일말의 증거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강간의 증거를 수집하는 데 상당한 자원이 투여됐음에도 이에 대한 자료보다는 세르비아인 강간 피해자들에 대한 자료가 훨씬 포괄적이고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세르비아쪽 자료는 결코 패거리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인에 대한 전쟁 범죄와 수용소에 관한 세르비아쪽 조사보고서 일체 또한 이들 패거리 언론들에게 같은 대접을 받았다.) 편견은 언론을 혼란에 빠뜨렸다. '강간은 세르비아의 무기였다'(1993년 10월20일)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스>에 글을 쓴 폴 루이스(Paul Lewis)는, 국제연합 보고서가 “800명의 희생자 이름을” 확인했다고 지적했으나 이들이 세르비아계 여성들이었다는 건 언급하지 않았다. 세르비아인에게 강간 당한 피해자가 2만명에서 5만명에 이른다는 추정치는 어떤 근거도 없었다. 강간은 세르비아가 저지른 특별한 범죄라는 신념은, 패거리 언론의 강력한 정치적 편견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이슬람계의 뛰어난 언론 대응과 선전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르비아쪽 증거를 제외한 강간에 관한 모든 문서를 점검한 1994년 1월의 국제연합 보고서는 확인된 피해자 126명을 실었다. 이 확인 결과는 언론의 관심을 끌지 않았다.)
가장 나은 보도라고 해봐야 주장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언급하는 수준에 불과한, 이 광적인 선전 공세에서 언론이 한 것은 그 자체로 치욕이다. 이 사건은 언론이 전혀 제동 걸리지 않았다는 걸 반영하는 동시에 “언론이 이렇게까지 전문성과 윤리가 결여된 걸 본 적 없다”는 국제연합 관리 아라셀리 산타나(Aracelly Santana)의 언급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사라예보에서 언론을 담당했던 국제연합 대표들과 영국 관리들은 패거리 언론인들을 파괴적인 세력으로 경멸했고, 일부는 심지어 '파충류들[비열한 인간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브로크는 트르노폴예(Trnopolje) 통과용 임시 수용소에서 1992년 8월 촬영된 그 유명한 피크레트 알리치(Fikret Alic) 사진에 대해서도 잘 다루고 있다. 이 사례는 적에 대한 중상모략 시도와 서양 기자들과 언론의 도덕관념 결여를 훌륭하게 예시하는 것이다. 영국 아이티엔(ITN; Independent Television News) 방송 기자 두명과 영국 일간신문 <가디언> 기자 한명이 수용소 체류자 가운데서 특히 초췌한 사람을 찾아내서는 철조망이 쳐진 감옥에 갇혀있는 듯 보이려고 세심하게 꾸미고는, 자신들은 바닥에 가는 철사 그물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기둥 두개에 녹쓴 철조망이 걸쳐진 곳 한켠에 자리잡고 반대편에 알리치를 세운 뒤 사진을 찍었음을 보여준다. “카메라기자와 신문 편집자는 셋 또는 네 가닥의 철조망이 강조되도록 알리치 사진의 여백을 잘라냈다.” 통과용 임시 시설이지 수용자 야영 시설이 아닌 이 곳은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피난민들은 마음대로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피크레트 알리치 사진은 곧 서양 언론을 사로잡았고, 벨젠 나치 수용소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대비됐다. 그리고 언론은 이 '학살 수용소'를 광적인 분노와 철저한 사기로 치장해 묘사했다. 이 사진이 선전용 사기 사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토마스 다이크만(Thomas Deichmann)이 제시하자, 언론의 대학살이 벌어졌다. “패거지 언론에 속한 개입주의자들이 행한 반격은 격분과 즐거움 속에 개시”됐으며, 명예훼손 소송으로 이어져 다이크만의 글을 실은 영국 잡지 <리빙 마르크시즘(Living Marxism)>를 파산시켰다. <리빙 마르크시즘>이 소송에서 긴 것은, 이 글의 사실들이 틀려서가 아니고 기자들이 속일 의도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해서였다. 기자 및 편집자들과 서양 지배계층의 편견에 우연히 맞아떨어진 이 거대한 사기 행위는 부주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사기 사진은 악마 만들기 과정과 전쟁 옹호 주장을 촉진하는 데 기적같은 효과를 발휘했고, 심각한 거짓 묘사에서 비롯됐음에도 주류 언론들이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채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에마 브로크스(Emma Brockes)는 최근 <가디언> 기사로 놈 촘스키(Noam Chomsky)를 공격하면서, 아이티엔이 이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겼음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 소송은 의도 문제를 다룬 것이지 사진에 얽힌 사실들이 오도됐느냐 여부를 다룬 게 아니라는 건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패거리 언론인들은 후속으로 부정적인 내용들을, 언제나 일방적이고 맥락이 제거된 내용들을, 종종 위조된 것까지 포함해 계속 내놓게 될 거였다. 브로크는 책의 몇페이지를 오직 잘못 묘사된 것들, 실제로는 세르비아인이지만 이슬람계로 분류된 희생자 사진들(30-32, 122-124, 170-172쪽을 보라)을 나열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또 뻔한 편견들을 예시하는 여러 사례들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 브로크는 패거리 언론인들이 여러 도시, 예를 들어 고라제(Goradze), 모스타르(Mostar), 비하치(Bihac), 부코바르(Vukovar), 스트루가(Struga) 등에 대한 세르비아의 공격을 보도하면서, 이 도시들이 세르비아계에 대한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곳이라는 사실이나 세르비아의 공격은 이전의 공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사실 따위를 언급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규칙적으로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일련의 사건들의 맥락 제거하기와 오도는, 보스니아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쪽 취재원에 대한 무비판적 의존과 편견에 근거한 표준적인 보도 행태였다. (세르비아의 고라제 공격에 관한 거짓말들에 대해선 75-75쪽, 부코바르에 대해선 xiii-xv쪽, 크로아티아쪽 선전의 눈에 띄는 효율성과 스트루가에 관한 <에이피(AP)>와 다른 서양 매체들의 정직성 결여에 대해선 42-45쪽, 세르비아 강제수용소 수용자 숫자에 대한 마이클 고든(Michael Gordon)의 거짓말에 대해선 80-81쪽을 보라.)
브로크는 정책 노선을 따르는 패거지 언론과 다르게 생각하는 언론인들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은 유사한 과정을 통해서 곧바로 공격받고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것이 '언론 청소'이고, 이는 '추악한 보도'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1993년 당시에 이미 확립된 정책 노선을 따르는 언론 보도 행태를 비판하는 글('유고슬라비아 발: 당파적 언론',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1993-94년 겨울호)을 썼던 브로크 자신만해도 패거지 언론인들에게 맹 공격을 받았고, 그의 글을 실은 매체 또한 압력에 그리고 일탈에 대한 위협에 시달렸다. 발칸반도에서 일하다가 분쟁에 대한 아메리카의 불충분한 개입 때문에 사직한, 전직 아메리카 국무부[외교부] 관리 조지 케니는 관점을 바꿔 정책 노선에 대한 진지한 비판자가 되었다. 브로크처럼 케니도 곧바로 더러운 공격의 제물이 됐고 영국 <비비시방송>과 아메리카 주류 언론의 발칸분쟁 논평자에서 배제됐다. 사라예보 주둔 국제연합 보스니아 평화유지군(UNPROFOR) 사령관 마이클 로즈(Michael Rose) 중장조차 패거리 언론인들의 맹렬한 공격 대상이었다. 이들은, 로즈 중장이 패거리들의 잘못된 정보를 자주 공박한 데 분개했다. 또 보스니아 이슬람계를 위한 운동가들로서 이들은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이 세르비아 폭격을 하지 않는 데 분노했다. (로즈에 대한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아메리카 <에이비시방송> 뉴스 앵커: 옮긴이]의 편견에 가득 차고 무지하며 더러운 공격 곧 '평화유지군: 국제연합은 보스니아에서 어떻게 실패했는가', 1995년 4월24일 <에이비시방송> 보도에 대한 브로크의 결정적인 분석에 대해선 175-176쪽을 보라. 제닝스와 <에이비시방송>의 이보다 더 광범한 보도 횡포에 대해선 173쪽을 보라.)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이 리뷰 밑 아래 첨부해놓은 브로크의 책 머릿말을 써준 데이비드 바인더(David Binder)가 당한 일이다. 바인더는 1980년대와 90년대 발칸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 가운데 가장 경험이 많고 지식도 많은 <뉴욕타임스> 기자였다. 그런데 그는 정책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이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들을 몰아내려 한 시도를 직접 목격했으며 이를 보도했고, 알바니아계 코소보인 사회의 요인들이 인종적 정화를 시도했음을 인지한 인물이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책 노선이 확고해지자,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이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때때로 고집하는 그가 신문사 편집자들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게 됐다. 브로크가 거론한 악명높은 사례 하나를 들자면, 바인더가 여러명의 자질있는 국제연합 관계자와 군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기사에 얽힌 사건이 있다. 이 기사는, 세르비아에 대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더 공세적인 행동을 설득하는 데 기여한 사건인,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을 주로 희생시킨 1994년 2월5일의 사라예보 마르칼레(Markale) 시장 폭탄 공격 사건 범인으로 보스니아 이슬람계를 지목하는 내용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기사 게재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바인더는 기사를 스위스 신문 <디 벨트보헤(Die Weltwoche)>와 잡지 <포린 폴리시>('대학살 해부', 1994-95년 겨울호)에 대신 기고했다.
결국 바인더는 발칸반도 보도 담당에서 제외됐고 로저 코언(Roger Cohen), 칼로터 갈(Carlotta Gall), 말리스 시몬스(Marlise Simons), 존 F 번스(John F. Burns)가 임무를 맡았다. 이 기자들은 정책 노선을 추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가끔은 거짓말도 퍼뜨리되 정책 노선과 이 노선의 편견을 강화시킬 거짓말만 퍼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래 존 F 번스에 관한 부분을 보라.) 바인더에 대한 대응은 1980년대 레이몬드 보너(Raymond Bonner)가 중앙 아메리카 보도 담당에서 제거된 일을 상기시킨다. 보너는 아메리카의 후원을 받는 엘살바도르 군의 학살 작전에 대한 글을 계속 보내다가 일을 당했다. 보너 해고는 언론계 일탈자들에 대한 경고로 널리 인식됐다. 바인더를 제거한 것과 브로크 및 케니에 대한 공격은 비슷한 위협 효과를 발휘했다.
패거리 체제 아래서, 그리고 악마 만들기 과정의 승리와 투쟁에 대한 단순한 이원론적 관점이 존재하는 가운데, 대규모의 자발적 배속 행위(embedding)와 언론 기준 붕괴가 나타났다. 무슨 수를 쓰든 악당의 소행을 그려내려는 질주가 벌어졌고, 이 과정은 1999년 6월 코소보전쟁이 끝났을 때도 악명높게 진행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의 패거리 언론인들이 강간 피해자, 주검들, 세르비아의 잔학 행위를 찾기위해 코소보로 몰려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언론의 사기 행위가 넘쳐났고, 언론인이 사심에 찬 선전꾼, 선동꾼들의 표적이 되는 '속아 넘어가기 쉬운 상태'(gullibility)가 심해졌다. 보스니아 이슬람계 관리들이 1992-93년 보스니아 이슬람계 희생자가 20만명이라고 주장하면, 언론(과 클린턴)은 무비판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미심쩍고 앞뒤가 맞지 않고 조지 케니 같은 이들이 의혹을 표시했음에도 그랬다. 국제형사재판소의 후원을 받은 조사자들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모든 분쟁 당사자들의 희생자를 10만명 정도로 낮춤으로써 이 주장을 반박했음에도(앞에 거론한 타보와 빌랴크[Tabeau/Biljac]의 조사 결과를 보라) 오늘날까지 이 수치는 지속적으로 주장된다.(<뉴욕타임스> 2005년 11월25일 사설 '보스니아, 그 후 10년'과 <워싱턴포스트> 11월29일치 '보스니아의 느린 진보'를 보라.) 우리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의 학살자 200만명에 관한 역사를 상기할 수 있겠다. 이 수치는 1977년초 장 라쿠튀르(Jean Lacouture)가 처음 제시했는데 그는 이 수치가 사실무근이라는 걸 인정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악마가 된 적들에 적용되는 규칙은, 명백한 사기라고 할지라도 최악의 것이 믿을만하고 또 그대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로크는, 보스니아 이슬람계 관리들과 심지어는 아마추어 무선사가 주장하는 많은 분쟁 지역의 희생자 수치를 언론들이 확인없이 받아서 전달하는 게 흔히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희생자 수치는 거의 대부분 과장되거나 전혀 사실과 다르지만, 언론들은 미끼를 덥썩 물었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들이 속았음을 알고 실망해도, 정정 기사를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주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지도 않았다. 기자들과 언론이 악마가 된 적들에 대한 보도에서 잘못을 저질러도 실질적인 대가를 치르는 일은 없었다.
브로크는 최선을 다해 <뉴욕타임스>의 존 F 번스와 <뉴스데이>의 로이 거트먼의 기사를 분석한다. 두 기자는 보스니아 보도로 1993년 퓰리처상을 공동 수상한 이들이다. 브로크는, 이들이 상을 받은 건 '부속 언론'과 퓰리처상 체제의 부패상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더 폭넓은 언론 부패상의 지표가 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에게 붙잡힌 세르비아계 보리슬라프 헤라크(Borislav Herak)가 29명의 이슬람교도를 죽이고 8명의 여성을 강간했다고 고백한 내용을 중심으로 장문의 기사를 쓴 공로 등으로 상을 받은 번스의 사례가 거트먼 경우보다 훨씬 극적이고 심지어는 재미있기까지 하다. 번스의 기사는 “보스니아에서 다른 수천명이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평가됐다.
당시 이제트베고비치가 선호하는 인물임이 널리 알려져있던 번스는 소로스의 돈을 받는 영화 제작자와 함께 헤라크를 만나도록 쉽게 허용됐다. (취재 당시 이 영화 제작자가 동행했다는 사실은 번스의 기사에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 헤라크는 아주 공포에 떠는 모습이었고, “부분적으론 수용소 관리들이 옆에 있는 상태에서” 번스에게 이야기를 했다. 헤라크는 한동안 고백을 한 뒤에, 관리들로부터 증언이 끝난 뒤 자신을 때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달라고 번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그가 스스로 주장하는 범행을 확증해줄 주검도, 목격자도 없었다. 헤라크와 함께 붙잡힌 세르비아계 동료는 즉각 헤라크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연합 보스니아 평화유지군 책임자인 캐나다 장군 루이스 매킨지가 그 지역 매춘 구역에서 보스니아 여성들을 강간했다고 헤라크가 비난했으나, 번스와 영화 제작자는 그의 발언 사실을 은폐했다. 번스는, 이런 발언은 헤라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그의 고백 이야기를 훼손할 거라는 점을 매킨지에게 인정했다. 그러나 번스는 거짓임을 알아봤어야 마땅한 거짓말을 옹호하고 직업적 기준을 위반하면서까지 정보를 은폐했다.
몇년 뒤 헤라크는 고문을 당했고 고백할 내용을 암기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말을 바꿨다. 그의 말 바꿈 직후 그가 죽였다던 이들 가운데 두명이 살아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두 사람의 등장을 보도하면서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이 보스니아 이슬람계 정부로선 낭패라고 썼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자신들이 낭패한 것은 깨닫지 못했다. 퓰리처상 위원회가, 고문당해서 한 고백에 근거한 데다가 증거를 감춤으로써 신뢰성을 잃은 기사 때문에 수상한 번스로부터 상을 박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브로크는 번스가 언론 윤리를 어긴 다른 여러 사례들도 제시한다. 번스는 1993년 4월 전쟁으로 숨진 이슬람교도가 14만명이라는 자신의 추정에서 시작해 7월엔 이 수치가 20만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예보 밖으로 나가는 걸 점점 줄이면서, [번스는] 정부가 뻥튀기한 부상자 수치를 일관되게 보도했다.” (1994년 1월10일) '맥닐-레러 뉴스 아우어(MacNeil-Lehrer News Hour)'에서 번스는 사망자 30만명, 부상자 90만명으로 판돈을 더 높였다. (번스의 다른 거짓말, 거짓 묘사, 증거 은폐 사례들에 대해서는 77-80쪽과 187쪽을 보라.)
로이 거트먼의 작업에 대한 분석 또한 마찬가지로 통렬하다. 브로크는, 거트먼이 '학살 목격자'(거트먼이 보스니아발 자신의 기사를 바탕으로 1993년에 낸 책 제목)가 아니라 속셈이 있는 진영들이 직접적, 간접적으로 제공한 선전공세의 중개인이었음을 거부하기 어렵게 보여준다. 그의 많은 취재원은 목격자가 아니라 목격자라고 하는 이들의 떠도는 증거를 전달한 이들이다. 거트먼은 이런 취재원들을 무비판적으로 대했고, 심지어 한 대목에선 “믿을만한 소문들”에 대해 말한다. 그는 세르비아의 잔학 행위 주장에 대해 증거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고, 증거를 얻거나 제공받은 건 더더군다나 적다.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의 수용소에 10만명이 갇혀있다고 주장하면 거트먼에겐 그걸로 족했다. 적십자가 세르비아 수용소에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인을 모두 합쳐 단지 1만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다고 추산한 사실은, 그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거트먼이 선호하는 큰 수치가 '확인되지 않았음'을 뜻했다. 거트먼의 관심은 악당들에게 불리한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는 이 일을 단지 대충 날림으로 한 정도가 아니다. 평판이 아주 나쁜 취재원들의 도움을 받아, 현실의 몇몇 '확인되지 않은' 요소들을 담은 허구의 작품을 썼던 것이다.
거트먼이 대부분의 취재원을 찾아낸 건,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과 아메리카 대사관의 중개자들 도움 덕분이었다. 특히 크로아티아 공보센터(CIC)와, 거트먼이 보기에 “어느 정도 학문적인” 작업을 하는 크로아티아 정부 선전기관으로부터 거의 독점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거트먼은 크로아티아 공보센터의 주요 선전 요원이자 자신의 취재원이 된 야드란카 시겔르(Jadranka Cigelj)를 “우연히” 만났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목격자들( 또는 목격자 소문의 전달자들)을 크로아티아 “자선 재단들”과 아메리카 대사관으로부터 소개받았다는 건 인정했다. 한 비판적 언론인(조앤 필립스, Joan Phillips)이 표현했듯이, 거트먼의 학살 수용소 기사들은 “생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몇마디 설명에 근거한 것이다. 기사들은 소문과 소문의 소문에 의존한다. 여기에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건 관리들의 추측과 짐작이다.”
거트먼은 아주 쉽사리 나치의 벨젠 수용소 및 아우슈비츠 수용소와의 유사성을 거론했고 '학살 수용소'(death camps), '강제 수용소'(concentration camps), '강제 이송'(deportations)을 언급하며, 최대 5000명에 달하는 세르비아 학살 수용소 희생자 추정치를 인용한다. 비록 그의 용어 사용과 수치는 대상이 되는 독자의 지식과 이해력에 따라 변하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엔 망설임이 전혀 없는 게 분명히 드러났고 거짓 진술도 잦았다.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 같았다”는 표현은 거짓말이다.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강제로 옮겨진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이 가스실로 끌려갈 운명이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듯이 말이다. 필립스는 학살 수용소를 찾으려 보스니아로 몰려든 350명의 언론인들이 “수용소를 찾은 바 없고 수용소가 있었다는 증거도 찾은 바 없다”고 지적한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가 만든 수용소가, 거트먼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이슬람계가 만든 수용소보다 더 험하게 사람들을 다뤘다는 증거도 사실 전혀 없었다.
거트먼의 작업에 대한 브로크의 상세한 분석(87-116쪽)은, 언론학도들 모두가 꼭 읽어야 하는 언론 남용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사례연구다. 브로크가 묘사하고 있는 이 터무니 없는 행위가, 역정보 흘리기 측면에서 거트먼의 호적수였던 존 F 번스와 공동으로 퓰리처상을 받게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거트먼은 자신의 책 <학살 목격자>를 “어떤 상황에서건 인용할 수 없다”고 브로크에게 전자우편으로 경고하는 등 브로크의 분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반대신문을 당할 수밖에 없는 헤이그 전범재판 증언을 거부함으로써 재판에 노출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브로크의 책은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홍보 업체들, 독일, 바티칸이 한 일 그리고 물론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도구인 전범재판에 대한 분석 등 이밖에도 많은 훌륭한 논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발칸 전쟁에 대한 비판적 문헌들에 빠져있는 필수적인 부분을 채워주고 주류 언론의 작업을 드러내 알리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제도화한 정책 노선에 도전하는 존스톤과 맨델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주류로부터 무시될 것이라고 덧붙이는 건, 지식인 문화에 대한 서글픈 논평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건, '좌파'라고 알려진 <네이션(Nation)>, <인 디즈 타임스(In These Times)>,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 <머더 존스(Mother Jones)> 같은 매체들에 존스톤과 맨델 책 서평이 실리지 않은 것처럼 브로크의 책도 덜 '논쟁적인' 작품들에 밀리는 똑같은 처지가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적 기획에 관한 공식 정책 노선이 심지어 자칭 좌파들에 의해서도 도전받지 않게 만드는 제국주의의 능력에 대한 증언이다. 이는 가장 세련된 단계의 헤게모니이다.
--- 전직 <뉴욕타임스>의 워싱턴 및 발칸 특파원 데이비드 바인더가 쓴 책 머릿말 ---
5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집필한 이 책은, 아메리카 언론인 피터 브로크의 대형 폭탄 같은 책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터진 전쟁에 대한 서양 언론 보도의 충격적인 기록을 폭로한다.
이 책은, 패거리 언론인들과 특파원들, 편집자들이 쓰지 않을 것이었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바로 그 이야기다.
여기 서로 모순되는 기록들, 업계 전반의 실수들 그리고 한 주권국가에 대한 의도적인 해체 시도와, 여러 정부와 국제연합과 정치인 선동 행위, 여론 조작에 동참했던 기자들의 시인과 고백과 은폐행위가 있다.
이 책은, (워싱턴 소재) 국제 평화를 위한 카네기 기금이 내는 <포린 폴리시>를 통해 저자가 1993년 '유고슬라비아 발: 당파적 언론'을 발표한 이래 아메리카와 유럽의 주류 언론들이 두려워한 책이다. 저 기고문은 공정성과 객관성과 공평함과 진실에 관한 언론 스스로의 환상을 깨뜨리고 언론기관과 언론 유관단체와 학계와 정부 지도자들의 유례없는 반응과 공격을 촉발했고 이로써 유럽에서 거리 시위와 심지어 '언론에 대한 재판'을 유발하는 등 서방 각국 수도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10년에 걸친 내전을 유발한 '인종 청소'의 외침에서 따온 '언론 청소'라는 말은, 어떻게 서양 언론이 바로 그 핵심 전쟁 선전기구가 됐는지 보여준다. 침공, 점령, 후퇴 그리고 선별적 전범재판 기소는, 이른바 '강간 수용소' '강제 수용소' 그리고 의도적인 잔학행위 정책과 대량 학살과 화학전이 유럽 대륙에 다시 도래한 데 대한 언론의 광기에서 비롯됐다. 수십만명이 몇세기동안 자신의 조상들이 살던 고향에서 잔인하게 내쫓겼다. 끔찍한 경제 제재가 의도적으로 가해졌다. 이는 중세시대 이후 본 적 없는, 한 세대 전체를 휩쓰는 질병, 선천성 기형, 만성질환을 초래했고 이는 몇십년동안 지속될 것이다! 농지는 열화우라늄탄에서 나온 방사성 물질들과 유독성 화학물질로 둘러쳐졌다. 광범한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과거 분쟁지역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까지 번졌다. 다뉴브강 유역 하류 600마일의 강 주변 생태계가 영원히 파괴되지 않았을지언정 적어도 붕괴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불발 미사일 탄두들과 복합 클러스터 폭탄 부품들을 포함한 셀 수 없는 지뢰와 폭발물과 실탄들이 방치되어 있다.
오늘날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국가경제와 지역경제는 규모가 더 줄어들었다. 실업자 집단이 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게다가 더 나쁜 건, 이 지역 파벌들이 날로 일촉즉발의 상태로 변해가면서 대통령 암살과 선거 모사품의 실패가 초국가주의의 우려스런 등장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10여년전에 유고슬라비아를 망쳐놓은 극단주의적 응징이 유럽 전체를 다시 불붙이고 불안하게 만들려고 빠르게 되살아나고 있다!
<언론 청소> 이 책은, 신뢰받던 국제 언론 기관들과 전문 언론인들을 소모시키고 지배한 언론 공모라는 병리현상을 추적한다. 면밀한 조사와 공개 기록 분석을 갖추고 행해진 많은 인터뷰들은 특파원들과 편집자들에게 세계를 기만한 자신들의 부주의와 참전 행위와 용인된 공모 행위를 대면하게 강제했다.
--- 저자 소개 ---
브로크의 30년이 넘는 신문 기자 경력을 장식하는 것은 1989년 퓰리처상 공공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을 포함한 17개의 전문 분야 상들이다. 정치 및 환경 분야 작가이자 탐사보도 기자로 높이 평가되는 브로크는 남부 탐사보도 언론상(듀크대학), 워싱턴언론센터의 토마스 L 스토크스(Thomas L. Stokes) 환경언론상 등을 받았다.
그는 1976년 이후 발칸반도, 서중부 유럽, 옛 소련, 중동 등을 두루 다녔다. 발칸전쟁에서 서양 언론이 한 임무에 대한 전문가인 그의 논쟁적인 글들과 보도들은 전세계 많은 신문에 게재됐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관한 전국 대상 텔레비전 토론에 출연했고 수많은 아메리카 국내외 신문과 텔레비전, 라디오와 인터뷰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Philadelphia Inquirer)>에서 기자를 시작한 그는 20년동안 (텍사스) <엘파소 헤럴드포스트(The El Paso Herald-Post)>에서 일했고, 뉴멕시코와 콜로라도와 워싱턴의 신문에서 집필 및 보도 및 편집을 담당했다.
lovewinter 2006/10/19 01:05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입니다. 오늘 부산영화제에서 그르바비차를 보고 웹서핑을 하다가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개봉을 하게 된다면 영화를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