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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를 둘러싼, 지식인과 민중의 대립?

좌파 또는 급진주의자라고 하면, 현존 질서의 지배계급에 대해 반감을 갖기 마련이다. 현실 세계는 뭔가 잘못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책임은 지배계급에게 있다. 그리고 노동계급( 또는 민중 또는 대중)은 지배계급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이 세계의 진실이다.

 

그래서 대립 구도가 나오게 된다. 지배계급 곧 자본가와 그들에게 기생하는 '유기적 지식인' 대 노동자, 민중, 대중의 대립 구도가 그것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가와 지식인은 악, 노동자와 민중은 선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선, 악 이분법은 사실 어떤 좌파도 자유롭지 못한 설정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발생시키기 시작한다. 파시즘, 전체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 따위가 등장하면 특히 그렇다. 선하다고 상정한 민중이 파시즘, 전체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를 움직이는 실제 동력으로 작동하는 걸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가장 흔한 해법은 '선한' 민중이 '선전선동'과 '강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동원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법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 약점을 가장 잘 간파한 것이 이른바 '우리안의 파시즘론' 따위인데, 이 파시즘론은 더 근거가 허약해서 한동안 유행하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는 '극우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민중을 악으로 몰아가니 극우세력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끝이 아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의 열광, 2007년 '이무기 나오는 영상'에 대한 열광 따위의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또 어떻게 풀 것인가? 명백하게 어디에도 강압이 없었다. '선한' 민중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선전선동'도 내세우기 곤란하다. '이무기'의 경우 '선전선동'은 거의 없었고, 월드컵 축구는 모든 언론이 총 궐기하다시피 했지만 이 정도의 선전선동에 몇백만명이 거리로 나섰다고 말하는 건 '선한 민중 또는 대중'에 대한 모독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복잡해지고 급기야 맥락을 잃기도 한다. '예술은 취향'이라거나, '제 취향을 경멸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반발'이라는 말 따위가 그 징후다.

 

민중은 과연 선한가? 서구 사상사에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한 첫번째 인물이 프랑스의 루소다. 그리고 그 이후 좌파는 거의 대부분 '루소의 후예'다. 이 '루소의 후예'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의 후예'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후예가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역사이고, 루소에게 그것은 악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은 선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비참해서 '폐기'되어야 할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루소처럼 선하지만 억압받고 있기에 해방된 뒤 영원히 보존할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 '제 자신을 폐기함으로써 세상을 해방시켜야 할 운명'이 노동계급(민중)의 운명이다. 선, 악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후예라면, '이무기에 열광하는' 민중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할 방법을 찾을 게 아니다. 필요한 것은 분석이다. '강압'도 '선전선동'도 아니라면, 자본주의의 무엇이 민중(대중)들로 하여금 이무기에 열광하게 만드는가?

 

글 쓴 뒤에 덧붙임: 물론 분석만 해선 안된다. 필요한 것은 연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후예'가 연대하는 태도는 시몬 베유(베이유)가 보여준다. 베유는 “노동 계급과의 완벽한 연대가 노예상태와 누추함을 전제하고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와 루소의 대립을 전면적으로 제기한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에머슨 파머(E. P) 톰슨을 공격한 페리 앤더슨이었다. 그리고 최근 헝가리 학자 G. M. 터마시(Tamás)가 거의 잊혀졌던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6년판에 실린 그의 글 '계급에 얽힌 진실을 말하기'(Telling the truth about class)를 보라. (수정: 애초에 “2-3개월쯤 기다리면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될 것 같다”고 했으나 1년이 훨씬 지나도록 한글로 나오지 않고 있다. 2008년 하반기에는 정말로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의 번역본은 <<진실 말하기>>(갈무리, 2008)에 실려 있다.)

2007/08/27 16:34 2007/08/27 16:34
5 댓글
  1. 민노씨 2007/08/29 04:53

    '자발성'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촉발'되거나, 유도된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주도적으로 이끈 건 역시나 미디어와 상품 마케팅이죠.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고민할 만한 '가치를 갖는' 의미에 대한 공적인 담론 유통 시스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 거대 미디어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마케팅과 점점더 결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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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7/08/29 09:34

    당연한 말씀입니다. 마케팅이 전부인 세상이고 미디어가 마케팅의 한 축을 이룬다는 건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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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karma 2007/08/29 23:20

    그동안 '좌파 진영'에서 나왔던 디워 관련글 중 가장 공감했습니다. 파시즘, 반지성주의 혹은 김규항씨의 말대로 반엘리트 감정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의 일면적 속성들일 뿐이지 결코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배후에는 지금의 자본주의 현실 혹은 '먹고 살기'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개해 주신 글 빨리 읽고 싶네요.

    (우연히 찾아 들어온 후로는 틈틈이 다시와서 번역해 놓으신 글을 읽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번역은 엄두도 못내고 게시해 놓으신 글도 그나마도 낑낑 대고 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읽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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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7/08/30 00:37

    karma님 반갑습니다. 글은 넉넉잡고 두달이면 책으로 나올 겁니다. 그리고 제 번역이 도움이 됐다니 저로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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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푸... 2013/04/06 20:43

    "이무기 영상"의 본질만 나오면 이리들 헛발질들을 하는군요
    사실 사람들은 "이무기 영상"에 그리 열광하지도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걸 까는 사람들에겐 분노했지만...
    그냥 심형래가 독특한 영화 하나 만들었네 하고 넘어갈 일을
    애국주의 대 좌파 지성의 대립 구도에서 활약하길 갈망하는 자들이 판을 마구 키운 겁니다
    디워 흥행의 일등 공신은 진중권 씨죠.
    지식인은 때로 적을 필요로 하죠. 적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니까.

    김규항 씨 글을 보면서 "디까"를 짜증나게 생각한 이 중 하나로 본질을 정확하게 짚은게
    보이더군요. 물론 나도 디워를 보러 가서 기술력과 내용 구성이 저리도 크게 차이
    나는 영화가 있나 했고요.

    어째서 그렇게도 대중이 늘 타인으로 보일 수 있나요.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어떤 면에서도 대중이 아닌 사람은 없어요.
    좌파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과학이나 기술의 문제 앞에선 대중의 일원일 뿐이에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디워를 까는 대신에 영구 아트에 연구원으로 들어가려 했을 거에요.
    여러 분야에 호기심이 엄청난 사람이었으니..
    심형래 씨에게 "저거 어떻게 한 거에요" 라고 물어보려 했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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