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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이라는 대중적인 현상

지난주 화요일(3월18일) 내가 다니는 영국 리즈대학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회가 열렸다.(지젝이 누군지 모르는 이들은 알라딘 같은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저자 소개 검색해보면 충분할 것이다. '먹물들의 연예인'이라고 할 철학박사다.)

 

나는 지젝이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내가 듣는 과목의 강사가 열심히 추진한 강연이라 참석했다. 부활절 휴가가 막 시작되어 학교가 한산한 편인데, 강연에는 500명이 훨씬 넘는 이들이 몰렸다. 청중은 20대의 젊은 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교수까지 다양했다. 지젝의 인기를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강연회장 입구에 학생회가 설치한 지젝 책 판매대 바로 옆에 '사회주의노동자당'(영국의 국제사회주의자들이다. 한국의 다함께가 이들과 아마 자매단체쯤 될 것이다.)이 책 판매대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지젝도 여기서는 '급진 좌파' 계열에 드는 듯 하다.

 

먼저 지젝의 강연회 모습 따위를 찍어 편집한 영상이 상영됐다. 지젝이 알몸으로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철학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는 대목도 나온다. (참 안쓰럽다. 이렇게까지 해야 먹고 사는가.) 아주 재미있는 영상이었다. 지젝은 코미디언으로 나서도 될 듯 하다.

 

오후 6시쯤 지젝이 직접 등장해서 거의 두시간쯤 말을 했다. 우선 이 연예인, 사람 혼을 빼놓는 데 특기가 있다. 말을 하면서 거의 1분에 한번 꼴로 자기 코를 만진다. 또 약 3-4분에 한번 꼴로 옷을 만진다. 게다가 영어 발음은 죽음이다. 나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정말 고역이다. (예컨대 '폼(form)'을 '포름'이라고 발음한다.) 정신이 사나워서 집중이 안된다. 게다가 이 사람 정말 수다쟁이다. 딱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말을 참 수다스럽게 한다. 그리고 사용하는 영어 단어는 꽤 한정되어 있다. 영어가 외국어니 어쩔 수 없다. 덕분에 나같은 사람도 금방 적응이 됐다.

 

이 강연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 사람이 라캉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마르크스 팔아먹기, 재미있는 농담으로 청중 웃기기, 영화 이야기로 흥미 유발하기를 적절히 결합해서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먼저 마르크스 팔아먹기다. "내가 너무 나이브하게 마르크스주의자로 말하는 것 같죠", "나는 프로이드-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따위의 주장으로 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는 걸 암시한다. "모든 포스트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언론의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다" 따위의 주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거리를 두는 것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이미지 형성 효과를 발휘한다.

 

급진적이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깝지만 고루하거나 꽉 막히지 않은 좌파, 그러면서도 '불온하거나 과격하지 않은 좌파' 이것이야말로 지젝의 판촉 핵심이고, 지젝이라는 '서양 먹물들의 대중적인 열기'의 본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른바 포스트주의자들이 결정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다. (이제 누가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을 좌파라고 하는가!)

 

강연은 미합중국의 이라크, 이란 정책 비판으로 시작해서(별 내용은 없다. 그저 흔한 이야기다.), 역시 영화 이야기로 이어진다. 1988년 존 카펜터가 감독한 미합중국 영화 '데이 라이브(They live)'를 언급했다. 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가난한 노동자 이야기다. 어떤 색안경을 쓰면 미합중국 자본주의의 본질이 보인다는 내용이다. 색안경을 쓰는 순간, 거리의 화려한 광고판에 '복종하라'는 메시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를 두고 "전통적으로 철학은 눈을 가리는 막을 벗어야 진실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안경을 써야 진짜 자본주의 이념이 보인다고 말한다"고 논평했다. (카펜터 감독이 심오한 생각에서 이렇게 만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안경을 벗으면 세상의 진실이 보인다는 걸 표현하기는 곤란하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려고 살짝 비틀어서 우연히 얻은 색안경을 쓰니 진실이 보인다고 한 게 아니겠는가? 여기에 무슨 대단한 진실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조금 우스꽝스럽다. 이미 이 세상은 자본주의 이념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안경을 쓴다는 행위는 존재 조건인 자본주의 이념을 벗어버리고 '진짜 맨 눈'으로 보는 것의 영화적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어서 자신이 최근에 쓴 책 '폭력'에 대해 약간 언급했다. 주장의 핵심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 또는 '관용'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것',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상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고 떠드는 것, 그것이 진짜 폭력이라는 이야기다. 밑바닥의 인종 차별적 인식을 감추는 은폐 도구로서 '관용', '포용' 대신 솔직하게 서로 다르다는 걸,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다만 이 거리두기는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화의 의미에서 거리두기라고 한다. (이 부분은 약간 흥미있다. 다만 '정치적 올바름'에 지치다 못해 진저리를 치는 '1990년대 서양 사회'라는 아주 특정 시기,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렇다. 아직도 생짜배기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 그리고 생짜배기 폭력이 '테러리즘'이라는 초강력 무기를 들고 다시 등장하고 있는 요즘의 미합중국과 유럽 사회에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시효가 끝났다. 지젝은 너무 늦게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아니면 요즘 미합중국이, 영국이 어떤지, 서유럽이 어떤지 진짜 따져들어가는 건 '너무 불온'하기 때문일까?)

 

이어서 지젝은 프랑스 학자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를 언급했다. (이 학자는 지젝이 비판하는 자크 데리다의 제자이고, '헤겔의 미래'라는 책을 썼다. '말라부는 데리다의 후속판이다'는 말까지 나온다는 것 같다.) 솔직히 지젝이 말라부에 대해서 한 말은 잘 모르겠다. 말라부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어서 그렇다. 그저 말라부의 분석이 일리가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는 정도다. 강연을 들을 때는 대강 어느 부분을 비판하는지 감을 잡는 정도였는데, 메모를 해둔 것도 없고 지금은 기억이 전혀 없다. 지젝이 데리다와 '각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라부를 언급하는 맥락을 짐작할 수 있다. 말라부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다음의 인터뷰를 읽어보시라. 영어로 된 것이다. (말라부 인터뷰(pdf 파일))

 

마지막으로 지젝은 역시 마르크스를 '전유'함으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그는 마르크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빼앗긴 존재이고, 다시 표현하면 '실체 또는 본질 없는 주체'(subject without substances)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세가지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생태 측면에서 박탈당하는 존재, 두번째는 상징적으로 박탈당하는 존재, 세번째는 내적 의식 측면에서 박탈당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말해 21세기 인간의 조건은, 생태적으로 착취당하고, 상징적으로(권력과 미디어의 상징 조작 때문에) 착취당하고, 마침내 의식 내부 차원에서까지 착취당하는, 무산계급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더는 이대로 세상이 지속될 수 없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게 뭔지는 나도 솔직하게 모른다." 그리고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반세계화주의자들의 행사인) 세계사회포럼의 일각이 주장하는 '작은 지역 공동체의 회복'은 해법이 아니다. 작은 공동체를 회복하기는 너무 늦었다. 보편적이고 큰 싸움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내가 공감한 딱 두가지 대목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한 대목은 "포스트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언론의 이름 붙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마지막으로 지젝 숭배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지젝은 자신의 적수를 기껏 주디스 버틀러로 설정하고 있었다. (자기 입으로 '에니미(enemy)'라고 직접 말했다.) "어떤 좌파가 주디스 버틀러를 두려워하랴!"

2008/03/24 23:51 2008/03/24 23:51
30 댓글
  1. yoonta 2008/03/26 01:44

    영국에 계신거였군요.

    지젝을 단순히 좌파지식을 팔아먹는 장사꾼정도로 여기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좌파지식을 팔아먹지 않는 진정성?있는 좌파이론가는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있나요? 오늘날 말이죠.

    어차피 우리가 지젝에 관심있어하는 것도 그의 이론때문이지 그의 정치활동이나 실천활동때문은 아니지 않나요? 그런점에서 지젝이나 들뢰즈나 데리다나 다 마찬가지로 좌파지식을 어떤 면에서는 팔아먹는 이론가들일 뿐 아닌지. 차이는 단지 스타일상의 차이일 따름이고..혼자서 혁명의 기치를 높이 치켜든다고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좌파적 혁명을 선도할수있는 시기도 아니고..또 설령 그렇게 한다고 그를 높이 평가하지도 않을 마당에 지젝의 행동의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 것인지 솔직히 좀 이해가 안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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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8/03/26 02:05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만도, 테리 이글턴, 데이비드 하비, G.M. 터마시가 있군요.

    지식 장사꾼의 '행동'에 못마땅할 것이 무엇입니까? 굳이 있다면 '지식 장사'라는 '행동'에 있다고 할까요. 이른바 '지식 장사꾼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면 제가 쓴 글 본문에 담겨 있으니 따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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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onta 2008/03/26 02:22

    테리이글턴이나 데이비드하비나 지젝이나 제가보기엔 다 똑같은 이론가일뿐입니다. 자기 지식을 포장하는 방법이 지젝과 다를뿐. 좌파적인 정치적 활동을 자국에서 얼마나 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한국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이론만 놓고봤을때는 테리이글턴의 이론이 지젝보다 독창적이며 흥미로운가라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아니올시다라는 답변이 나오는군요. 저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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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8/03/26 03:20

    '진정성'이 있는 이론가를 말하라고 해서 예를 들었더니, 이론가는 모두 똑같다고 하시는 군요. (이론가라고 분류한다면 당연히 똑같죠. 동어반복인 셈이니까요.) 그리고는 '독창적이며 흥미로운가'라는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시는군요.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 받아서는 아무런 소득이 없겠습니다.

    진정성을 논하시겠으면, 제가 예를 든 이들의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그들의 진정성을 '동유럽 연예인'과 비교해서 논해야 합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독창적이며 흥미로운가' 문제를 논하자고 하셨어야죠. 그러면 저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 진짜 독창적인 이를 찾기는 쉽지 않고, 흥미로운가라는 기준은 개인 취향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주관적인 것이니 진지한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겠습니다. 게다가 이론의 문제에 있어서 흥미로운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 적합성이죠. (진정성도 문제가 될 수 있겠구요.)”

    라고 답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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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yoonta 2008/03/26 03:41

    그러니 제 말은 누가 진정성이 있는가? 라는 논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입니다. 결국 그들이 생산해논 이론적 결과물이 우리에게 얼마나 "현실적합성"이 있을까가 중요해지는것일텐데요..
    바로 그 현실적합성이란 측면에서 테리이글턴과 데이비드하비등이 더 현실적합적이다라는 말씀이시네요.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이론도 역시 현실적합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론의 영역별로 그 현실적합성을 추구하는 방식과 기준이 조금 다른것도 사실아닌가요? 테리이글턴이나 데이비드하비등과 지젝의 차이도 어느정도 이러한 차이에서 오는것 같은데요.

    기회가 되신다면 테리이글턴과 데이비드하비등의 학자들이 왜 지젝보다 더 "현실적합적"인지 포스트 해주시면 감사히 읽어보겠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바 말씀드리면 저도 지젝같은 글쓰기스타일은 그닥 선호하지 않습니다. 재탕삼탕하는 혐의가 짙은 글쓰기방식이랄지 위에서 지적하신것처럼 별것 아닌 이야기를 과대포장하는 것이랄지 하는 것등등 말이지요. 하지만 (라캉을 통한) 헤겔의 재전유랄지 라캉정신분석의 정치적 독해 그리고 영화와 같은 현실문화영역에서의 이론적, 비평적 개입과 같은 나름의 활동등은 평가해줄 만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제 말투 혹은 글이 별로 맘에 안드신가본데..위처럼 감정적으로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님에게 아무런 사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님 글들이 흥미롭고 관심이 있어서 댓글다는 사람일 뿐이니 오해없으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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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ishin 2008/03/26 04:40

    저는 괜찮지만, 한국은 한밤중일텐데.. (혹시 한국이 아니신가요?)

    yoonta님에게 저는 감정 없습니다. 그냥 할 말만 짧게 말하는 스타일 때문에 그렇게 느끼실 수 있지만, 오해입니다. (할 말만 짧게 하는 이유는, 원래 스타일이 군더더기 싫어하는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길게 쓰다보면 오해를 유발하기 쉽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yoonta님과 댓글을 주고 받는 게 약간 힘이 듭니다. yoonta님이 그냥 제 글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시면 훨씬 쉬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진정성'있는 좌파 학자를 이야기하라기에 이글턴, 하비, 터마시를 말한 것뿐입니다. 이들의 이론이 현실 적합성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했습니다. 이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논하자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검토하고, 전제하고, 규정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가능하면 엄밀히 따지고 말하자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논의가 '산으로 가고' 소득은 없는 일이 되고, 의사소통도 잘 안되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냥 재미삼아 이런 말 저런 말 주고 받는 것이 쓸데 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저도 그런 거 좋아합니다. yoonta님이 지젝의 느낌이 어땠느냐거나, 청중의 반응은 어땠느냐 따위를 가볍게 물어보셔도 재미있게 답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문제이고, 이양 시작할 바에는 엄밀하고, 정확하고, 명료하게 하자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진정성을 묻고 나서 사람 이름까지 언급하니, '진정성'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면,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그럼 yoonta님은 소용도 없는 진정성에 대해 저에게 물어보셨단 말입니까? 어떤 이름을 과연 말할지, 아니 이름을 말할 수나 있을까, 그냥 시험해봤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앞으로 저에게만은 이런 식으로 말고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돌아가지 않고 직접,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게 저로서는 훨씬 좋습니다.

    혹시나 이글턴의 현실 적합성에 관심이 있으시면 추천할 글이 하나 있습니다. 2006년호 소셜리스트 레지스터에 실린 'on telling the truth'입니다. 이것을 읽어보시고 이글턴이 보는 시각이 과연 현실 적합성이 있는 관점인지 생각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영문을 읽기 싫으시면, 몇개월 기다려보십시오. 테리 이글턴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어보면 '진정성'은 물론이고 (은근히 비꼬는) '재미'에다가 현실적합성도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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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yoonta 2008/03/26 13:11

    글로서만 소통하는데서 오는 사소한 오해인것 같네요. 전 님이 지젝을 비판하시면서 그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관점으로 그를 비판하신걸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성과 같은 불투명한 기준보다 "현실적합성"으로 비판하신거라는데 저는 뭐 달리 첨언할 것은 없고요. 다만 그 현실적합성의 기준이 저마다 다를수 있고 위에서 님이 언급한 지젝이 보는 현실적합성 즉 그러한 현실적합성의 '다름을 인정하는" 현실적합성이 적절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한단거죠. 님이 생각하시는 오늘날의 바람직한 현실적합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은데 가능하신지 모르겠네요.

    여긴 한국이고요. 님과 대화하다보니 날밤새는줄도 모르고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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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marishin 2008/03/26 17:30

    이번 댓글은 단지 yoonta님께만 드리는 답변이 아닙니다. 제가 ‘진정성'을 기준으로 ‘동유럽 연예인'을 비판했다는 yoonta님의 해석을 물리침으로써, 제가 글을 쓴 본 의도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동유럽 연예인'을 비판한 대목을 먼저 봅시다.
    1. 침대에서 알몸으로 철학을 논한다.
    2. ‘데이 라이브'라는 영화의 ‘안경 쓰기'에 과잉되게 의미를 부여한다.
    3. 서구의 정치적 올바름을 ‘폭력'의 핵심으로 놓는 시각이 시대착오적이다.
    4. 마르크스를 ‘전유'함으로써 ‘정통 좌파'를 자처하지만 기껏 ‘주디스 버틀러'를 적으로 여기는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여기서 yoonta님이 말씀하시듯이 ‘진정성'을 기준으로 비판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1번뿐입니다. 그런데 1번 비판의 기준이 yoonta님의 말씀처럼 ‘불투명한 기준'입니까? 알몸으로 철학 논하기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전혀 불투명하지 않습니다. 이건 ‘진정성'의 문제 이전에 코미디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살려면 코미디언이 되는 게 좋겠다고 한 것이죠.

    그리고 yoonta님의 ‘재해석'처럼 ‘현실 적합성'을 기준으로 비판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단지 3번뿐입니다. 사실은 거창하게 ‘현실 적합성'이라고 할 것도 아닙니다. 그저 ‘동유럽 연예인'이 요즘 돌아가는 현실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는 ‘게으름'을 스스로 폭로할 뿐이라는 겁니다.

    이밖에 2번은 ‘영화에 대한 과잉 집착 또는 과잉 해석'을 문제삼은 것이고, 4번은 ‘좌파'라는 자기정체성과 ‘버틀러'를 적수로 삼는 행위의 ‘자기 모순'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성'으로 ‘동유럽 연예인'을 비판했다는 ‘독해'도, ‘현실 적합성'을 기준으로 비판했다는 ‘재해석'도, 모두 제가 애초 쓴 글과는 무관한 독해입니다.

    진정으로 yoonta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한가지 있다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행위는 ‘텍스트를 텍스트 그대로 객관적으로 읽기'라는 겁니다. ‘텍스트 읽기'에서부터 다른 뭔가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텍스트는 구제받을 길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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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yoonta 2008/03/27 01:21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 적합성이죠"

    위에서 님이 하신 말씀입니다..저의 "재해석"이라고 하시면 좀..-_-

    글이란게 뭐 원래 항상 동일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라는 것은 압니다만 자신이 직접하신 말씀을 잊고 글을 쓰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구제받을 길이 없어"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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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marishin 2008/03/27 01:46

    yoonta님이 저를 비판하시려면, 이렇게 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음과 같이 비판해야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겠습니다.

    “당신은 왜 평소 자신의 생각인 '이론의 현실 적합성'을 기준으로 삼아서 지젝을 비판하지 않았는가? 지젝 비판과 자신의 평소 생각의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해서야, 이 비판 글이 구제받을 길이 있겠는가?”

    그럼 이에 대한 제 대답은 “저는 이론 또는 이론가 측면에서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강연 내용만 가지고 이론 측면에서 비판하는 건, 무모해도 한참 무모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맥락에서 4가지로 그를 비판했는지는 바로 위에 요약해서 썼으니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해 이론에 대한 제 평소 생각과 이 비판 글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론 측면에서 그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 사람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할 텐데, 그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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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yoonta 2008/03/27 01:51

    뭔가 오해하시나본데 전 님을 비판할 생각별로 없고요..
    글을 읽다가 의문점이 드는 부분을 물어본다는 취지에서 댓글다는 것뿐입니다. 너무 오바하시는것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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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marishin 2008/03/27 02:01

    알겠습니다. 이만 하죠. yoonta님이 처음 제기한 의문점인 '진정성'부터 시작해서 '이론의 현실 적합성'까지 참으로 멀리까지 갔다왔지만, 안타깝게도 서로가 얻은 소득은 별로 없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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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yoonta 2008/03/27 02:04

    그리고 왠만하면 텍스트를 잘 읽어라 마라..이런 훈계조는 지양하시죠.
    상대방이 잘못 읽는것같으면 "아 내생각은 그게 아니라 이러이러합니다"라고 말하면 족한것을 말이죠. 남 감정 일부러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현실적합성"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물론 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이표현이 본문글에서 중요한 대목으로 사용하지 않은것이라고 하더라도 댓글에서는 그의 이론은 현실적합성이 없다라는 평가의 의미로 사용한것 아닌가요? 전 이에 대한 대꾸를 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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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marishin 2008/03/27 02:25

    결국 인터넷 댓글의 전형적인 수순인 '감정' 대립으로 가려는 군요. 안타깝게도요. 훈계조라고 생각하시니, 훈계조는 피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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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yoonta 2008/03/27 02:28

    감정대립은 님이 먼저하신거같은데요. 이래라저래라라고 말하는것자체가 감정상해서하는 말이죠. 안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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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marishin 2008/03/27 02:30

    이 또한 인터넷 댓글의 수순 아닙니까? 알았습니다. 감정대립은 제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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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yoonta 2008/03/27 02:31

    인터넷댓글의 수순인가? 이런 토를 달 필요없습니다. 님이 잘못하신것 같으면 순순히 인정하시면 됩니다. 기본 예의의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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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marishin 2008/03/27 02:36

    그래요 저는 기본 예의가 없어서, 제가 먼저 감정 대립을 시작했으면서도 아닌 척 했고, 제 잘못은 순순히 인정할만큼 도량도 넓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감정이 상하셨으면 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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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yoonta 2008/03/27 02:45

    감정 풀고말것도 없고요. 님이 인정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본인도 계속 나의 의도를 잘못 짚고 계시면서 마치 상대방만 본인의 텍스트 혹은 의도를 잘못 짚고있다는 식이니 무슨 대화가 됩니까? 대화하다보면 서로간의 오해는 불가피하게 생깁니다. 그래서 필요한게 최소한의 예의인데.. 제가 다른 닉네임으로 님 블로그에 댓글을 달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알라딘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으로 글을쓰는것도 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위한 일환이었던 건데...그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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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marishin 2008/03/27 03:42

    지금까지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이 궁금해서 한가지 물으려고 합니다. 알라딘 닉네임을 쓰신 걸 저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알라딘의 닉네임으로 상징되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인가요? 알라딘 이용자들의 정체성에 관심이 있어서 묻는 것이고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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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yoonta 2008/03/27 04:08

    뭐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여기서도 사용하는것 아니겠습니까? 님도 알라딘에서도 제 닉네임을 보셨을테고 한때 들락거렸던 강유원홈피에서도 보셨을테니 유령같은 정체불명의 닉네임하고 상대시는것보다는 님이 저를 상대하기에 훨씬 수월하겠다 싶어 사용했던겁니다.
    전 이만 취침해야겠네요. 먼곳에 계신데 괜히 님블로그에 들락거려서 소란스럽게 한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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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marishin 2008/03/27 07:43

    아,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세요. 앞으로는 더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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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gg 2008/04/18 22:41

    참, 지젝에 대한 완벽한 오해는 어쩔 수 없다 쳐도, 고작 버틀러를 주적으로 삼는 걸로 지젝을 비판하고 있다니..ㅎㅎ 님 말대로 버틀러를 두려워할 좌파는 없겠지만, 버틀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좌파를 넘어서 지젝의 통찰이 새로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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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marishin 2008/04/19 02:30

    제 글에 대한 완벽한 오해는 어쩔 수 없다 쳐도, 고작 버틀러를 주적으로 삼는 걸로 저 '동유럽 연예인'을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다니... (그 다음 문장은 비논리적이어서 비꼬기도 못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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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marishin 2008/04/19 03:33

    비아냥으로 대응하는 것은 사실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gg님이 쓴 말을 그냥 돌려드린 것은, 이런 식의 댓글에 대한 비판의 뜻입니다.

    먼저 '완벽한 오해'로 치부하는 방식은 아주 비생산적입니다. 상대의 말을 막는 전형적이고 나쁜 방식일 뿐이죠. '완벽한 오해'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고 합리적인 대응은 "당신도 내 글을 전적으로 오해했다"뿐이죠.

    게다가 gg님이 제 글을 전적으로 오해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합니다. 저는 '동유럽 연예인'을 '오해'할 처지가 못됩니다. 그의 글을 읽은 적도 없고 그의 주장은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 오해하고 말 것이 있겠습니까? 이 점은 글에서도 분명하게 썼는데 말이죠.

    저는 그저 강연회장에서 보인 '동유럽 연예인'의 행태를 4가지로 나눠 비판했습니다. 이건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지, 오해하는지와 전적으로 무관한 일입니다. 침대에서 알몸으로 떠드는 것을 비판하는데 무슨 '이해'가 필요하며, 영화에 대한 과잉해석을 지적하는데 무슨 '이해'가 필요합니다. 폭력을 이야기하는 책에 대해 소개하면서 기껏 '관용'을 문제삼는 것을 비판하는 데도 '이해'까지는 필요없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국가나 경제체제가 유발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이른바 '주체가 있는 폭력' 곧 개인들의 폭력과 대비한 책을 써놓고, 막상 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엉뚱하게 '관용', '다문화주의'를 주로 논하는 행태입니다. 이런 책을 썼으면,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자국내 이주민들에게 폭력을 자행하는 서유럽 정부들의 행태를 먼저 거론하는 것이 상식이죠. 지금 유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동안 '댜문화주의'를 내세우던 정부들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다른 문화'를 억압하고 감시하는 현실입니다. '다문화주의'를 논한다고 하더라도, 진짜 논할 문제는 국가의 행태이지, 일반 개인의 '위선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 '지젝에 대한 완벽한 오해'라는 비판은 전적으로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아니면 제가 쓴 글을 읽지 않고 하는 소리일 겁니다. 저를 비판하려거든 '지젝의 대한 이해' 말고, 4가지 지적을 반박할 '상식'이 필요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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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gg 2008/05/21 17:47

    ㅎㅎ 그냥 웃지요. 좌파 강박증밖에 없는 대답에 김이 빠졌네요.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봤던 글인데, 그냥 우스워서 한마디 남깁니다. 난 좌파예욤~ 그러니 이러저리 쑤셔대는 연예인 지젝이 미워보이는건 사실이예욤~ ㅎㅎㅎ 전형적인 좌파 강박증이네요. 가서 프롤계급의 혁명을 위해서나 싸우세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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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gg 2008/05/21 17:54

    보세요, 비판한 내용들에 정합성까지 없잖아요. 그냥 지젝 까면서 세웠던건 오히려 님이 좌파라는것 딱 그거 하나 밖에 없어요. 왜 관용논자와 싸워욤? 왜 들뢰즈같은 다수성을 찬미하는 애들하고 싸워욤? 버틀러같은 애들은 정신분석학자아닌가욤?ㅋㅋㅋ 이거 전부 좌파 강박증에서 나온 소리죠? 비판하기 위해서는 구도가 있어야 하는데, 님은 딱 좌파라는 입장에서 아무 근거없이 지젝을 까대고 있는거예요. 그것도 책을 팔아대는 자본주의적 태도를 비꼬면서 말이죠ㅎㅎㅎ 보세요. 님 글에 지젝의 개념이나 내속적 논리의 비판이 어디에 들어가있기나 하나요? 없어요. 그러니 깔것도 심지어 예의를 갖추며 말할것도 없는거죠. 왜? 좌파 강박증에서 보면 딱 나올만한 소리들이니까. 그러니 나는 좌파 강박증에 기댄 님 글을 보고 비웃을 수 밖에 없는거예요. 돈키호테를 보는 마농처럼..ㅎㅎㅎ 왜. 제 댓글을 보고 한 단락을 물고늘어저 비난하실건가욤? 어떻게요? 저는 지젝주의자라서 님이 꼬아 보이는데? 님이 좌파 강박증 안에서 그런 말밖에 하지 못하는것처럼 말이예요.

    그리고 님아. 지젝이 다중-관용, 이거 비판하는거 맑스주의자들을 위해서죠? 들뢰즈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없는 혁명을 되살리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왜 좌파라는 분이 까고있나요? 왜? 님에겐 아직도 지젝이나 라캉이 포스트모던 철학자인가욤?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웃지요. 지젝이 더 맑스스럽다는 사실은 모르는 1인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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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marishin 2008/05/23 02:52

    한달만에 덧글을 다셨군요. 너무 간격이 길어서 대화 또는 논의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답변을 하죠.

    - “지젝의 개념이나 내속적 논리의 비판이 어디에 들어가 있기나 하나요?”
    = 당연히 없죠. 그리고 없다는 사실과 이유는 한달 전의 댓글에서 썼습니다. 같은 소리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 “전형적인 좌파 강박증이네요”
    = 좌파 강박증은, 제가 아니라 지젝의 소유물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지젝의 좌파 강박증을 비웃는 사람입니다. gg님이 이런 제 취지를 납득하지 못하신다면, gg님 잘못이 아니라 제가 글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만큼 잘 쓰지 못한 탓일 겁니다. (글을 쉽게 잘 쓰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니, 양해 바랍니다.)

    - “난 좌파예욤~ 그러니 이리저리 쑤셔대는 연예인 지젝이 미워보이는 건 사실이예욤~”
    = 저는 이리저리 쑤셔대는 연예인은 모두 미워합니다. 학문 비슷한 것 가지고 장난치는 것들은 좌파건 우파건, 모두 말입니다. 그건 제가 좌파여서가 아닙니다.
    또 우파라도 이사야 벌린처럼 진지하고 수준 높은 학자는 '존경'합니다. 그건 제가 좌파가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 “지젝이 다중-관용, 이거 비판하는거 맑스주의자들을 위해서죠? 들뢰즈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없는 혁명을 되살리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왜 좌파라는 분이 까고있나요?”
    = 마치 모든 것의 기준이 좌파냐 우파냐, 맑스주의자냐 아니냐, 혁명을 위한 것이냐 아니냐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저는 이런 사고방식은 너무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제 블로그에서는 가능하면, '좌파예욤~', '님아', '1인 ㅋㅋㅋㅋ', 이런 '난삽한' 어투는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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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부정변증법 2009/05/12 22:40

    지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죄다 뒷북이라는 것입니다. 저 강연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참신하게 느끼셨던 분들은 1969년에 나온 마르쿠제의 저작을 읽어보시면 40년 뒷북의 위력을 느끼실 겁니다. 차이의 철학? 그건 저의 닉네임인 50년 전에 나온 부정변증법을 읽어보시면 몸서리치게 느끼실겁니다. "존재"라는 공통성마저 동일성으로 거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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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marishin 2009/05/13 00:16

    부정변증법님의 덧글을 보니, 이글턴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글턴은 어떤 글에서,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은 스코투스나 아퀴나스 같이 이들의 책을 읽지 않으니 자신들이 중세 유명론자의 후예 곧 “근대의 저능아”들인 것을 모른다고 비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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