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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진보성과 보수성

이 글은 ‘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에 이어지는 글이다. 사실 6월 20일에 써둔 것이어서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다만 이 글을 공개하는 것은 곧 이어서 쓸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 지난, 단순 참고용 글로 생각해주시면 된다. (내가 쓰는 ‘대중’이라는 용어는 ‘지식인’ 따위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의 무리’라는 사전적 의미로 쓸 뿐이다. ‘무지몽매한 무리’라는 비하의 의미는 전혀 없다.)

 

먼저 쓴 글의 핵심을 다시 풀어서 쓰자면 다음의 두가지다.

 

1) 대중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자신들의 희망에 걸맞게 ‘국가를 새롭게 구성하자’고 요구하고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대중은 아주 급진적이다. 이것이 급진적인 것은 ‘모든 기존 권력과 권위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기존 권력과 권위’는 지금까지 ‘한국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던 것들 전체를 의미한다.)

2) 하지만 새로운 국가의 구성 요구는 그 자체로 보수성, 반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목표는 ‘국가를 넘어서는 공동체 구성’ 따위가 아니라 ‘국가 재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희망 사항이 2000년대 이후 발전한 과정을 볼 때, ‘비계급적 국가주의’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 두가지가 현재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 전부이지만, 저 글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풀어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글에 대한 반응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1) 역동적인 대중을 기껏 ‘민족적 자존심’ 또는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거리로 나선 ‘무지몽매한 대중’쯤으로 폄하한다.

2) 계속 변하는 역동적인 대중의 흐름을 관념적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려 한다. 이런 재단은 실천에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

 

1번은 대중의 상태에 대한 인식 차이와 관련되며, 2번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이다.

 

1. 대중의 상태

1-1. 대중의 진보성이 뜻하는 것

내가 ‘무지몽매한 대중’쯤으로 폄하한다는 주장은 사실 내 글에 대한 오해다. 하지만 ‘좌파 이론에 능통한 어떤 논자’도 똑같은 주장을 펴는 걸 보면서, 어쩌면 이런 반응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급진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가의 재구성 요구’는 기대에 못미치는 낮은 수준의 요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말하는 대중의 급진성은 대중을 폄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국가의 재구성 요구’는 건국 60년을 맞는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요구이다. 1980년 광주의 요구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주의였다. 1987년의 요구는 군부독재 타도와 직선제 개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구는 ‘직접 뽑은 대통령’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직접 뽑은 대통령은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운영의 주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가 주인 곧 국민이고, 국가’이니 ‘대리자인 대통령은 우리 말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것은 굉장히 급진적인 요구이며 다양한 가능성과 ‘진보성’을 담고 있다. 이를 직접 민주주의 요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시각은 이 요구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현재 세계의 맥락에서 보면, 이런 요구는 전세계적인 현상 곧 신자유주의 지배에서 비롯된 ‘정치 부재’, ‘경제의 정치 우위’의 직접적인 결과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쇠고기 검역 문제를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야말로 경제 우위를 대변하는 게 아닌가? 보수 야당조차 이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아니 지난해까지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이다. 노무현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고집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 아닌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선거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경제가 정치 우위에 있는 한, 정치가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한, 선거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은 “경제가 하는 말을 듣지, 국민이 하는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전세계적 보편성 측면에서만 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왜 한국의 대중 봉기가 프랑스의 대중 봉기와 다른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제기하는 좀더 한국적인 특성이 바로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다. 이 거부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지배층의 부패는 계속 이어졌다. 땅투기, 이권 개입, 자녀 병역 기피, 이중국적, 논문 표절, 학력 위조, 기타 무수한 거짓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악을 사람들은 봤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우리의 식탁 안전’마저 내어주자, 대중이 폭발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 어떤 놈도 못믿겠으니, ‘국가’를 그들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란거리가 하나 제기된다. 정치의 부재와 권위에 대한 거부는 어떤 관계인가? 이 문제는 좀더 따져볼 문제이며, 나 또한 답이 없다. 다만 질문을 제기할 뿐이다.

 

1-2. 대중의 급진성 밑에 깔린 보수성

‘국가의 재구성 요구’에 담긴 성향은, 이 요구의 동기나 목표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이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구를 부른 동기가 무엇이냐는, 이 요구를 혁명으로 이어지게 할지, 아니면 반동으로 귀결되게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표현하자면, 국가의 재구성이 목표로 하는 것이 ‘훌륭한 국가’냐, 아니면 ‘인민 주권의 전면적인 실현’이냐에 따라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주장은 현재 제기되는 ‘국가의 재구성’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구별이다.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차이는 단지 수사적 차이가 아니다. (앞의 글에서도 주장했듯이, 한국에서 그동안 통용된 ‘민족’이라는 말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남북한 분단을 고려하면 둘의 차이는 극적으로 드러난다. ‘민족’은 남한과 북한을 포괄하지만, ‘국가’는 북한을 배제한다. 이 문제는 남북 관계의 앞날을 생각할 때,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는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물론 ‘국가’가 ‘인민 주권의 전면적인 실현체’가 못되더라도, ‘국가‘가 언제나 반동적인 것은 아니다. 국가는 국민의 범위 한정을 대전제로 하기에, 국민 아닌 이들의 배제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시혜적인 국가’는 국민 아닌 이들을 수용하기도 한다. 국가가 여성의 투쟁에 밀려 여성에게 ‘국민 자격’을 부여했듯이, 이주민들에게도 ‘이류 국민’의 자격을 줄 수 있고 잘 하면 ‘일반 국민 자격’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은 언제나 국가의 목표에 부합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이 점에서 국가는 제한적이며 억압적이며 반동적이고 보수적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국가의 부각이 지니는 보수성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이 국가의 부각이 ‘시민’(또는 ‘국민’)의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내놔도 떳떳할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발견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자격’을 ‘떳떳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명박, 한나라당,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극우 신문이 거부당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그들이 ‘떳떳한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다는 대중의 ‘생각, 인식 또는 느낌’이다.

 

2. 무엇을 할 것인가?

내 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대중이 보수성과 진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이 질문이야말로 내 글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2-1. 실천의 전제

실천과 관련해서 내가 제시할 것은 별로 없다. 이것은 내 한계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실천의 전제를 따지자는 것이다. 대중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제대로 아는 것이 실천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정국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무능력한 좌파들은 책상머리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만 고민하려 한다고 질타한다. (넓은 의미에서 좌파와 우파로 나눌 때, 그리고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좌파’라는 말이 현재 지니고 있는 의미 곧 “진보진영의 좌파”라는 의미에서 볼 때, 내가 ‘좌파’에 속한다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실천이라고는 하는 게 없으니, 이념적인 측면에서만 ‘좌파’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들이 이렇게 질타하는 심정은 이해한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한가하게 있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좌파 또는 진보진영이 지금 상황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역풍을 만난다. 실천 측면에서 시급한 것은 시위에 최대한 결합하는 것, 그리고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최대한 많은 쟁점들을 꺼내고 부각시키며 토론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말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필요한 것이 있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합의를 끌어내려면 그들이 어떤지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지 모르고 떠들어봐야 왕따만 당한다.

 

어떤 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지금은 이 흐름을 최대한 이어가며, ‘내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것’이 필요하지, 상황을 이끌어가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건 이념적으로는 ‘계몽적 구좌파’와 ‘낭만적 신좌파’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1960년대에 전면에 등장한 ‘낭만적 신좌파’들은 전략을 거부했다. 그들은 ‘감정의 분출, 욕구의 발산’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가장 나쁘게 귀결된 지점은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자본의 소비 욕망 촉구를 정당화하는 ‘소비주의’였다.

 

나는 이런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계몽의 시대가 지났다는 걸 인정하지만, 전략의 문제는 ‘계몽’이라는 딱지붙이기로 거부하고 말 정도로 하찮은 게 아니다. 쟁점은 계몽의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집단적, 민주적 실천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지, 전략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이냐가 아니다. 전략 그 자체의 한계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형성하고 실천하는 주체를 어떻게 올바르게 만들 것이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2-2. 중요한 실천의 지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현재 상황이 실천 문제에 제기하는 중요한 함의를 찾는 것은 가능할 듯 하다. 그것 바로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지금 제기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위 현장이 지닌 ‘직접 소통’, ‘진짜 소통’의 장이라는 성격이다. 이에 대해서 흥미있는 분석을 제시하는 이가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다.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자. 사실 그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급진적 뒤르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뒤르켐을 따라서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를 구분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원시 사회에서는 축제 현장이 ‘상징’을 매개로 한 ‘직접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현실’을 접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언론’이 대체했다. 사람들은 언론이 보여주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구경할 뿐이며, 현실을 직접 접할 수 없게 됐다. 대화는 가능하지 않다. 일방적인 전달만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흥미있는 함의를 담고 있다.

 

촛불 시위 현장을 겪은 사람들은 그동안 적대시하던 노조에 대해서도 상당히 열린 반응을 보였다. 화물연대 파업 지원와 지지가 이를 보여준다. 누구는 이를 대중의 진보성과 개방성,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걸로 해석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의사소통의 자연스런 결과다.

 

언론이 보여주는 ‘거짓 형상’ 대신 ‘진짜 현실’을 접하면 사람들은 다른 이의 현실이 자신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쉽게 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진짜 현실을 접하면 변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체제(특히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비루한 현실’은 대중(또는 민중) 누구에게나 공통되기 때문이고,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자신이 느끼는 고통만큼 남의 고통에 반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좀먹는 ‘거짓 형상’을 거둬내는 것이고, ‘거짓 선전’을 극복하는 것이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끼리 직접 소통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진짜 걸림돌은 커뮤니케이션이고 언론이다.

 

이것이 내가 실천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말 전부다. 더 이상의 것은 내게 없다.

2008/07/09 23:25 2008/07/09 23:25
댓글1 댓글
  1. 2008/07/11 12:49

    어서 다음 글을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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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7/09 23:31

    이 글은 '대중의 진보성과 보수성'의 전제가 되는 글이다.

  2. Subject: 썰렁해..ㅡㅡ;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7/13 21:10

    흑흑...ㅜㅜ   "지나가다" 님이라도 오셔서 지금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정당성이라도 마구마구 주장하면서 부디 '리플'을 달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약 3초간이나 했었다.ㅡㅡ;;   열심히 썼는데 말이지...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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