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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제주의를 향하여

편집인 일동

<먼슬리 리뷰> 2000년 7/8월호

 

이 잡지 편집인 (폴 스위지와 해리 매그도프) 명의로 쓴 글이며, 이들은 1999년 11월 시애틀 시위 이후 확산되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이 새로운 국제주의의 희망을 주고 있다면서, 날로 세계화하는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한 급진적 대중운동의 과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은 <뉴 레프트 리뷰>의 2000년 1-2월 지면 혁신호에 페리 앤더슨이 쓴 '갱신'에 대해 "너무나 패배주의적"이라고 언급하는 등 낙관론을 보여주면서도, 세계화 때문에 일국 차원의 투쟁이 무의미해졌다는 자본의 이념 공세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과제라고 지적합니다.

 

이 번역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계시는 최원씨가 절반 정도 번역해 올린 것을 바탕으로 마무리지은 것입니다.


 

 

역사는 마치 만족하려는 그 어떤 경향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경고하려는 듯 역설들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몇 달 전, 20세기의 마감은 금융세력의 관점이 지배하는 가운데 "종말론(endism)"과 함께 다가왔다 - 계급투쟁의 종말, 혁명의 종말, 제국주의의 종말, 불화의 종말, 심지어는 역사의 종말.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천년은 우리가 이 모든 것과 작별했다는 것, 그리고 더 부드럽고 친절하고 가상적인 자본주의로 인도할 정보화 시대의 신 경제에 기반한 무한한 진보의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주된 걱정은 Y2K로 알려진 기술적인 고장이었다. 2000년 1월 1일에 컴퓨터들이 세계적인 기능 이상에 맞닥뜨릴 것인가?

 

따라서 1999년 11월 말 수백 개의 조직들과 4000명 이상의 사람들 - 노동자들, 환경주의자들, 학생들, 종교집단들 등 - 을 포함한 대규모 항의시위가 단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세계무역기구(WTO) 시애틀 회의를 갑작스레 멈추게 만들었을 때 권력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 전에도 세계무역기구와 그 자매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에 대항한, 지구화(globalization)에 대항한 큰 전투적인 항의시위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놀라왔던 것은 그런 대규모의 전투적인 항의시위가 지구적 자본주의의 본거지인 미국에서 발발했다는 점이었다. 시애틀 항의시위는 - 그리고 더욱이 "요새 미국(fortress America)"이라는 이미지를 전파했던 억압의 힘들의 폭발은 -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마 오래 잊혀졌던 어떤 것, 즉 미국에도 저항과 국제적 연대의 힘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 항의시위들은, 미국은 사회적인 모순 없는 헤게모니 권력이라는 조심스럽게 배양되고 널리 투영된 이미지가 거짓말임을 폭로했다. 갑자기 새 천년과 함께 대안적인 미래를 위한 투쟁 곧 새로운 국제주의에 대한 희망이 밝아왔다. 갑자기 고작 일년 전에 다니엘 싱어(Daniel Singer)의 책 "누구의 천년인가 - 그들의 것인가, 우리의 것인가?"에 의해 영웅적으로 제기된 질문이 그의 책으로부터 역사 그 자체의 페이지들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였다.

 

시애틀 그 자체는 이제 지나간 뉴스이다. 그러나 이어진 몇 달 동안 그것 덕분에 현실화한 희망의 빛들은 죽지 않았다. 그 빛들은 재빨리 성장하는 운동처럼 보이는 것과 나란히 하면서 증폭되기만 했다. 2000년의 처음 몇 달 동안 학생들은 나이키, 리복, 갭, 디즈니와 같은 제3세계의 노동착취공장에 의존하는 기업들과 기술 이전 계약을 맺는 대학에 항의하는 등 대학 및 단과대학의 인상적인 시위가 전국적으로 나타났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반대하는 4월의 워싱턴 대중시위는 이러한 자본의 지구적 기관들을 계속 작동하기 위한 특별 조처가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 늘어나는 반역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발전의 하나는 마침내 새로운 경로를 그리려는 시도의 기미를 보이는 노동 운동의 부분적인 부활이다.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 (AFL-CIO; American Federation of Labor-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가 시애틀의 반-세계무역기구 항의시위에서 중심을 이뤘다는 사실은 이것의 구체적인 징후였다. 새 목소리(New Voices) 지도부가 제기한 조직화에 대한 강조는, 조직 노동운동이 마침내 불새처럼 자신의 잿더미에서 날아오르는 희망과 장기간에 걸친 회원 감소가 반전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새롭게 했다. 또한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는 반-북미자유무역협정 투쟁의 결과로 처음 나타난 변화, 곧 좀더 광범한 노동 국제주의의 길을 열면서 냉전시대 노동 협력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에서 발을 뺐다. 1930년대 이래 볼 수 없었던 종류와 규모의 노동-대중 운동 동맹의 출현이 지금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저항의 시대를 뚜렷이 구별되게 만드는 것은, 그 저항이 (60년대처럼) 국가가 아니라 지구적인 기업들과 국제적인 경제 기구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이 계급 권력 및 제 3세계 노동자들과의 국제적인 연대에 관한 근본적인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구화 경제의 위협에 대처함에 있어 노동운동, 환경주의자들 및 다른 좌파 세력들이 협조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투쟁에 참여한 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지구화에 대한 그들의 비판(criticisms)을 지구적 자본주의 비판론(critique) 일반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에 대한 도전이 성공하는 데까지는 걸림돌이 상당하다. 아마도 가장 큰 걸림돌은, 이런 대중 봉기들을 권력의 기본 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특정한 제도 개혁을 위한 거의 무의미한 노력으로 만들려는 자본주의 질서가 발휘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항의 이런 새로운 물결이 어떤 뚜렷한 형태를 취하는 한, 그 물결의 상당 부분이 - 미국에서는 대부분이 - 지구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업의 지구화에 맞춰지는 현실에 곧바로 부닥치게 된다. "지구화"라는 개념을 둘러싼 혼란 상당 부분은 - 특히 그것을 현재의 경향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으로 고려할 때 - 지구화가 종종 자본주의, 민족-국가, 제국주의, 계급투쟁을 대체한 현실처럼 보여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구화는 커다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문화적으로 정의된 이상형이 된다. <뉴욕타임스> 해외 정세 칼럼니스트면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의 저자인 토마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프리드먼의 사실 왜곡에 대한 비판 글 번역문 참고)과 같은 제도권 전문가들에게 지구화는 과거의 모든 것을 휩쓸어 내는, 마이크로 칩에 기반하고 금융투자자 및 다국적 기업의 "한 무더기의 전자적인 집단"이 지배하는 새로운 기술-경제 체계이다.

 

자연스럽게, 지구화의 비판가들은 모든 저항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이러한 협소하고 기술 결정적 관점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지구화라는 실체가 어느 정도 현재 세계를 변화시키는 밑바탕에 깔린 힘이라는 통념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은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좌파들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어떤 특정한 가정들을 내재적으로 담고 있다. 1) 현재의 세계 경제 질서에 대한 어떤 대안도 없다. - 혹은 다시 말해서 (지구화와는 구별되는) 자본주의 그 자체는 더 이상 의문시 해야할 것이 못되며 사회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가능성이 못된다. 2) 지구적 경제의 전망은, 다국적 기업, 국제 금융, 그리고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같은 소수의 국제 경제 기구들에 의해 주로 형성된 형태를 띄고 있다. 3) 유일한 실재적인 반대 세력은 "지구적 시민 사회"를 대표하는 비정부 조직들의 집합이다. 4) 목표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뒤집고, 기업들과 주요 국제 경제 기구들을 더욱 민주화하며 인권에 더욱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가끔 토마스 프리드먼의 주장의 급진적인 반대의 모습에서, 마이크로 칩의 등장과 그에 이은 지구화와 함께 나타난 변화란 자본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조라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단지 민족-국가만 경제적으로 대체된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민족적인 투쟁도 대부분 효과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작동에 관한 혼동은 오늘날 국제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걸림돌이다. 수십년의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개편 시기는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악화시켰고 국제주의의 갱신을 위한 객관적인 기초를 다져 왔다. 노동자들은 2차 대전 이후 그 어떤 때보다도 더 큰 국제적 연대를 건설할 필연성과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화에 관한 생각은, 변한 것이란 미국 공장들이 제 3세계로 이전함에 따라, 제 3세계 경제와 사람들이 미국 및 다른 부유국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다고 암시하는 방식으로 흔히 번져갔다. 이는 진정한 국제연대를 촉진하기보다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약화시키는 형태를 유발하는 경우가 잦았다. 최근 일련의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듯이 현재 미국민 절반 정도가 (반 지구화 정치가 상당한 유권자를 끌어들일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지구화와 세계무역기구에 비판적이라면, 이것의 의미에 유의할 이유가 여러가지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들 상당수는 강한 민족주의 관점에 바탕을 두고 그런 태도를 취해온 것인데, 이런 관점은 제국주의 현실을 모호하게 한다. 사실 이런 모호화 현상이 더 심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지구화가 주 관심 영역이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반대하는 4월 16일, 17일 시위 바로 며칠 전에 중국의 최혜국 대우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반대하는 집회를 워싱턴에서 열기로 한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의 결정은, 많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민족주의, 역-제국주의의 공포, 심지어 외국인 공포증을 악용하는 경향을 상징했다. 확실히 이러한 태도는 (비록 중국 노동자들과의 강한 연대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이뤄지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권리와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서 취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데도 강력하게 한 몫 했는데, 왜냐하면 노동운동은 반-국제통화기금과 반-세계은행 시위의 뒤에 강하게 자리잡는 대신에 중국에 최혜국 및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지위를 주기를 거부하는 공화당 우익과 손을 잡고 반-중국 로비에 무게 중심을 두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의 고어에 대한 초기의 지지가 보여주듯이, 미국의 조직 노동은 민주당 곧 산업계의 정당의 한쪽 날개로 여전히 결합해 있다. 총연맹의 전체 구조와 강조점은 여전히 사무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의 하나다. 총연맹은 아직 자신을 정치, 사회 운동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객관적인 힘들은 노동운동을 새로운 급진주의를 향해 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확실히 급진적인 현장 노동운동가들은 이런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떤 때보다 진정한 국제주의가 빠르게 노동운동층에서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미국 노동운동의 미래 곧 국내의 계급투쟁과 지구적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더 광범한 국제적 투쟁의 효율성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운동 내부의 투쟁 곧 사무적 조합주의와 민주적 조합주의간 및 경제적 민족주의와 국제주의간 투쟁이다.

 

지구화와 위기 (Globalization and Crisis)

급진적 투쟁의 재등장 전망은 궁극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더 광범한 변화에 좌우된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작동 법칙을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식은 전체 체계 차원의 변화와 그 체계의 작동방식의 변화가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을 제거했다고 보는 지배적인 관점에 굴복하는 것이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우리 행동을 옥죄는 새로운 제약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이어서도 안된다.

 

자본주의는 과거에도 언제나 지구화하는 체계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지구 구석구석에 침투하는 경향을 띈다. 20세기초 몇십년동안 세계 무역과 자본 흐름이 각각 세계 생산과 저축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규모면에서 오늘날과 비교될 수준이었다. 이런 국제 경제적 연결고리를 깨고 들어온 것은, 제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대변되는 위기의 시대였다. 국제 무역과 자본 흐름이 각각 세계 생산과 저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규모로 늘어난 것은 최근 몇십년 사이의 일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은, 경제 활동의 지구화와 위기의 지구화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국적 경제 활동의 증가는 이 체계의 운동법칙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지도,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을 극복했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이는 이 체계가 지구화하면 할수록 위기의 지구적 파장의 위험이 더 커진다는 것을 밝혀준다.

 

가장 가까운 시기로는 1997년 7월 이 점이 상당히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 때, 미국의 영향력 있는 두개의 정기 간행물이 경기순환의 종말과, 정보기술 혁명에 뿌리를 둔 거의 무한한 경제 확장 과정의 등장 문제를 제기했다. 두 간행물 가운데 하나는 미국 외교정책을 이끄는 잡지인 <포린 어페어스 (Foreign Affairs)>인데, '경기순환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제시하는 답은 의문부호를 떼어버려야 한다는 것 곧 "생산과 소비의 지구화가 선진 산업국 경제활동의 변덕을 줄였다"는 것이었다. 다른 잡지는 정보혁명과 이른바 "신 경제"의 의기양양한 낙관론의 상징이 되어버린 <와이어드 (Wired)>다. 이 잡지의 광고문구 같은 기사에서 독자들은, 세계경제 성장률의 지속적인 증가를 가져올만한 "네트워크 경제와 지구촌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랑거리가 된 "장기 호황: 미래의 역사"에 대한 광란적인 논의를 접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역사의 수많은 역설의 하나가 개입했다. 1997년 7월2일, 경기순환이 끝났다고 선언한 두 기사가 발행된 바로 그 달의 두번째날 타이가 바트화를 평가절하했다. 이는 꼬리를 물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어져 전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뒤흔든 아시아 경제위기의 이른바 "최절정 국면"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지구화는 새로운 안정적 세계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공황 이후 보지못했던 전세계 규모의 자본주의 위기의 지구화를 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지구화를 세계 자본주의의 합리화 과정으로 보는 주요 가설 각각에 대해 즉각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마치 갑자기 자본주의의 장막이 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나라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이며 제국주의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은, 핵심국가의 자본들이 동남아시아의 "잔류품 대처분"을 이용해 자산 사냥에 나선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거부됐다. 지구화하는 세계경제에 개별 국가들이 개입할 능력이 없다는 점은, 말레이시아가 자본을 통제하기로 결정하고도 이 조처로 예상되는 재앙을 겪지 않음으로써 의문시됐다. 지구화 압력에 직면한 계급 투쟁의 종말과 노동계의 약화는, 한국 노동자들이 국제통화기금에 맞서 대규모 투쟁을 벌임으로써 부인됐다. 지구 환경 문제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순조로운 지구화 과정이라는 이미지는, 인도네시아의 밀림이 인도네시아 경제 위기의 속도처럼 빠르게 불에 휩싸임으로써 상징적으로 약화됐다. 지구화가 한줌의 기업, 국제 기구, 프리드먼이 말하는 "한 무더기의 전자적 집단"이 통제하는 과정이라는 환상은, 경제적 참상이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러시아, 브라질 등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드러난 축적 위기의 체계적 성향과 광범한 금융투기에 의해 격퇴됐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시장의 자율규제에 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는, 공통의 목표를 위한 도구적 합리성의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이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 아시아에 집중됐던 세계 경제 위기는, 경제잡지 <포춘>이 (2000년 5월15일치) 지적했듯이 "최근 빈곤에서 벗어난 이들이 대부분인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기 전이 아니라 몰아넣은 뒤에야" 완화됐다. 2년전 아시아 위기 때문에 명백하게 흔들렸던 세계 권력구조는 이제 어디로 보나 대부분 잊혀졌다. 하지만, 주류 평론가 폴 크루그먼 조차 자신의 "불황 경제학의 복귀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에서 불안정을 유발하는 근본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단지 3막짜리 연극의 제 3막을 기다리고 있다고 상기시킨다. 제 1막은 1995년 멕시코 위기이고 2막은 1997년과 1998년의 아시아 위기이며 3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제 3막은 이미 시작된 것 같다. 왜냐하면 진짜 3막은 (분명히 다시 도래할) 경제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반란의 부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위기의 폭발에 따른 지구화의 손상된 이미지와 이 이미지가 전세계 사람들 곧 한국 노동자에 이어 멕시코 학생들, 다시 미국의 반-세계무역기구 시위대에게 촉발시킨 전투적인 대응은,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 전능하지도 그렇다고 사회관계가 완전히 정지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줬다. 이는 <뉴 레프트 리뷰> 2000년 1-2월호에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앤더슨의 글에 대한 카칼리츠키의 비판 "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 번역문과 그의 비판에 대한 타리크 알리의 반박 번역문 참고) 이 피력한 견해와는 대조적일 수 있다. 그는 "현재 그것의 [자본의] 형평상태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세력은 과학적 진보 자체 곧 생산력뿐인 것 같다. 이는 (생산력을 뜻함 : 신기섭) 사회운동이 아직 살아있던 때에 생산관계가 가장 우선한다고 확신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아주 인기가 없던 것이다."고 말한다. 앤더슨에게는, 더 이상 혁명적 사회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의 생산력이 최고의 자리에서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패배주의적인 태도다. 우리는 새롭게 등장해 증가하고 있는 투쟁의 국제주의적 양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투쟁이 나타나고 있으며 점점 더 체제 자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세계 수백만명이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사회 관계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렸거나, 절망에 빠져 (일국적 투쟁은 불가능하고) 오직 지구적 투쟁만 가능하다고 생각을 바꿨거나, "지구적 시민 사회 (global civil society)" 처럼 세계주의적 용어로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좌파들은, 지구화가 모든 변화 가능성을 없앴다고 설교하는 이들의 변증법적 쌍둥이일 뿐이다. 진정 사라진 것은, 냉전시대에 칭송되던 중간층 중심의 혼합 경제 부류다. 계급타협의 결과로 보통 인식되는 사민주의적, 케인즈적 전략은 오늘날의 지구적 신자유주의 아래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반대로 이 모든 것은, 운동을 향해 갈 유일한 길인 각국의 현실과 투쟁에 뿌리를 둔 훨씬 더 급진적이고 보편적이며 국제주의적인 전략의 필요성만을 제기한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조직적, 전략적 쟁점들은 우리가 이번 특집호에서 제기한 다음과 같은 주제들과 직접 관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특집호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피터 마쿠스 (Peter Marcuse, 한글 번역문)는 용어의 가장 흔히 통용되는 개념과 연관된 이념적 묶음을 지적하면서 "지구화"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빌 탭 (Bill Tabb)은 "지구화에 반대하는 요즘 운동의 본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마틴 하트랜스버그 (Martin Hart-Landsberg)와 패트릭 본드 (Patrick Bond)는 이 운동이 채택할 새로운 전략이 무엇일지 모색한다. 데이비드 베이컨 (David Bacon)과 칼릴 하산 (Khalil Hassan), 마이클 예이츠 (Michael Yates)는 "노동운동이 과거 냉전시대의 침체를 깨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합한 더욱 급진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투쟁 양상을 만들어낼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엘리자베스 마르티네스 (Elizabeth Martinez)와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는 인종 분리와 제국주의가 만들어놓은 분열을 넘을 방법을 논하고, 존 포스터 (John Foster)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국제주의의 역사적 유산은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큰 위험은 이런 조직적, 전략적 쟁점을 잡아낼 수 없다고, 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일어날 수도 없다고, 또는 대안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일어나라는 역사의 역설적인 외침을 듣고 있다. 반-세계무역기구 항의시위 이후, 또 4월의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대한 항의 시위 이후 주류언론은 늘어나고 있는 풀뿌리 운동 노력을 조롱하느라 애쓰고 있다. 이 운동이 버릇없는 젊은이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처럼 희화하면서 말이다. 이런 태도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스위크>, <타임>과 다양한 공중파 방송에서 볼 수 있다. 지구화반대 운동은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사태의 향후 추이와도 무관한 기껏해야 단지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길가의 걸림돌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훨씬 더 빈틈없는 <포춘>은 (2000년 5월15일치에서) 이런 항의에 대한 지지가 상당히 폭넓어서, 체제의 일부 구성원들조차 이 행진을 앞질러 가거나 행진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이들의 의견 일부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잡지는 "이 운동은 다리가 있는 것 같다. 세계의 금융 및 업계 엘리트들은 여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익살스럽게 말한다. '포춘'에겐, 자본주의 지구화 자체가 아니라면 지구화의 방향이라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잡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새 기술은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되든지 상관없이 앞으로도 세계를 더 좁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경제 통합은 여전히 상당 부분 이와 무관한 정치적 결정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규칙은 이미 확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 (Dani Rodrik)은 말한다. 그는 또 '지구화는 다른 별에서 갑자기 우리 무릎 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포춘>이 이 강력해지는 운동에 맞닥뜨린 자본의 두려움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면, 우리의 임무는 더 많은 사람들 곧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미래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희망을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희망 이상의 것이 요구되고 있다. 좌파에게는, 많은 것이 분석과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번 먼슬리리뷰 특집호를 다름 아닌 이 목표에 바친다.

 

** 이글은 최원씨께서 번역해서 진보평론 등의 자유게시판에 올려놓은 것에 상당히 의존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최원씨는 전체 글의 절반 정도만 번역을 하셔서 나머지는 신기섭이 직접 번역했습니다. 앞 부분도 큰 줄기는 최원씨의 번역을 유지했지만 상당 부분은 신기섭 취향에 따라 고쳤습니다. 이 때문에 이 번역문의 오류는 신기섭 책임입니다.

원문: www.monthlyreview.org/700editr.htm

번역: 신기섭

2004/07/11 18:59 2004/07/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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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가 프랑스의 검열관들에 도전하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9년 12월호

 

이 저명한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가 자신의 책 <극단의 시대>가 5년동안 프랑스어판으로 번역되지 않다가 가까스로 1999년 10월에 프랑스에 선보인 것에 대해 쓴 글입니다. 이미 20여개 국가에서 번역출판된 이후의 일입니다. 이 책이 20세기를 평가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뉘우침"이 없는 태도를 보여, 프랑스의 출판사들이 그동안 번역을 거부했다는 군요. 하지만 프랑스 지식 계층의 반마르크스주의 분위기를 비웃듯, 한달만에 4만권이나 팔렸답니다.


 

 

에릭 홉스봄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책 `극단의 시대 (Age of Extremes)'가 프랑스어로 나오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그 사이 20개 언어 이상으로 이미 번역됐다. 번역서 출판 한달 뒤인 1999년 11월까지 이 책은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면서 4만권이나 팔렸다. 이 전체 사건은 프랑스 지적 생활을 둘러싼 동요와 모호성을 드러내준다. 누구도 이 책의 품질을 부인하지 않았다. 재정상의 고려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홉스봄의 생각, 특히 좌파에 대한 뉘우침없는 그의 태도였다. 오랫동안 `스탈린주의화'를 겪은 뒤에 가까스로 빠져나온 프랑스에서, 이념적, 지적 분위기가 이 책 출판에 적절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출판사들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퓌레(Franc?is Furet)의 생각 곧 20세기가 공산주의와 나치주의로 떨어졌으며 둘은 위험한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똑같다는 생각을 옹호하는 책들을 선호했다.

 

홉스봄의 책을 번역하기로 결정하면서, 에디시옹 콩플렉스 (Editions Complexe) 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역사를 단 하나의 공식 이론으로 축소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어를 쓰는 독자들은 이런 태도를 칭찬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이제 막 끝나가는 이 세기의 역사에 대한 풍부하고 복잡한 논쟁에 기여했다. 여기, 홉스봄이 책 출판에 얽힌 문제를 설명한다.


 

<극단의 시대: 짧은 20번째 세기 1914-1991>은 1994년 영국에서 출판됐고 곧 바로 미국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 주요 언어로 출판됐다. 딱 한 언어를 빼고.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유럽판과 미주판으로), 이탈리아어, 중국어 (타이완어와 본토어로), 일본어, 아랍어로 말이다. 러시아판은 곧 작업에 들어갔고, 다른 모든 유럽연합 국가 언어판도 - 딱 하나를 빼고 -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부와 동부 유럽의 대부분 과거 공산국가 언어도 마찬가지다.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슬로브어,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알바니아어)

 

그러나 지난 10월까지는 프랑스어판이 나오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인구 370만명), 몰다비아 (430만명), 아이슬랜드 (27만명) 등의 출판사들과 달리, 프랑스 (5840만명)의 출판사들은 `극단의 시대'를 자국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같아 보였다. 하지만 리뷰 <르 데바 (논쟁, Le Debat)> (1997년 1-2월호)가 비판적 심포지엄에 100쪽 가량을 할애할 정도로 이 책은 충분한 중요성이 인정됐다. 100쪽에는 저명한 프랑스 출판인들이 왜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판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글 몇쪽도 포함됐다. 그러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벨기에 출판사가 주도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여전히 프랑스어를 쓰는 세상에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30여개 나라 출판인들과 달리 혼자서 프랑스 출판인들이 `극단의 시대' 번역에 저항한 것은 기묘하다. 놀란 이는 저자만이 아니다. 나의 이전 책 대부분은 프랑스어로 번역됐고 실로 몇몇은 최근에 프랑스에서 재판까지 나왔다. 나의 3권짜리 19세기 역사책을 - 이는 아직도 출판되고 있는데 - 출판한 이가 이 연작의 완결판인 `극단의 시대' 출판을 아무런 말도 없이 거절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프랑스 출판인들이 암시하듯, 이 책이 (다른 내 책 프랑스어판과 달리) 손해를 볼 것 같은가? 이 책이 출판된 다른 나라들의 반응과 판매로 판단하건데, 대중의 관심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 출판인들이 집단적으로 이 책 출판을 거부한 것은 다른 설명을 요구한다.

 

반마르크스주의자 편향 (Anti-Marxist bias)

가장 간략한 설명은 지성계의 논쟁과 추문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미국 학술잡지 <링구아 프랑카 (Lingua Franca)>에서 제시했다. 뉴욕대학의 역사학자인 토니 주트 (Tony Judt)는 "25년전이었다면 <극단의 시대>는 한주만에 번역됐을 것이다. 그래 뭐가 바뀌었나? 3가지 힘이 이 책 출판을 막는 데 공모한 것이 명백하다.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의 독설적 반마르크스주의의 성장, 인문학 출판 예산 삭감, 그리고 특히 이런 흐름에 도전하기 싫거나 두려워하는 출판계.(1) 주트는 "(<극단의 시대>와) 대등하게 20세기 역사를 야심차게 다루며,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다루는 방식이 현재 파리의 취향에 훨씬 더 가까운" 프랑수아 퓌레의 대성공을 거둔 책 <환상에서 벗어남 (Le Pass? d'une Illusion)>이 나오기 직전에 이 책이 나왔다는 점은 아마도 "홉스봄의 책 같은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프랑스 출판인들이 조심스러워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와 베를린의 비센샤프트스콜레크 (Wissenschaftskolleg), 일본의 선토리재단이 후원하는 지식교류위원회의 `뉴스레터'도 비슷한 설명을 제시했다.(2) 뉴스레터는 현재 파리의 지적 유행은 좌파에 대한 홉스봄의 뉘우침없는 태도가 "당황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은 갈리마르출판사 (Gallimard)의 피에르 노라 (Pierre Nora)가 프랑스 출판인들이 보는 상황을 권위있고 투명하게 설명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모든 출판인들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들어가 있는 지적 환경과 이념적 환경을 고려할 의미감을 느낀다. [홉스봄의] 책이 지적, 역사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직면할 것이라고 생각할만한... 심각한 이유가 있다. 이것이 시도해보길 꺼려하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깊게 스탈린주의화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 경향의 침체는 평범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과거 친 소비에트, 친 공산주의 시대를 적건 많건 회상시킬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적개심을 두드러지게 한다. 에릭 홉스봄은 혁명적 대의에 대한 애정을, 거리를 둘지언정, 자부심의 지점으로 키운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에서는 이런 태도가 심하게 추락했다."(3) 이 출판인이 스스로를, 저자의 태도가 "심하게 추락한" 나라 프랑스의 일부분이라고 느끼는지, 또는 느낀다면 어느 정도까지 느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런 주장에 비춰볼 때 독자들은 아마 <극단의 시대>가 - 퓌레의 `환상에서 벗어남'처럼 - 본질적으로 심하게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으로 논쟁적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식이 아니다. 독자들이 금방 발견하겠지만 결코 같은 종류의 책이 아니다. 이 책은 포괄적인 20세기 역사책으로 책 자체의 가치에 따라 평가되기를 요구한다. (이 책은 혁명의 시대 18세기 말 이후 지금까지 세계의 역사를 구성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시작된 연작의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을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타이완, 이스라엘, 시리아, 캐나다, 한국, 브라질처럼 정부와 지적 유행이 전혀 다른 광범한 나라에서 인정했고 진지하게 다뤘다. 저자와 출판사들을 경제적으로 아주 만족하게 하면서, 이 책은 3개 대륙에서 아주 폭넓게 팔렸고 읽혔다. 사람들은 적어도 프랑스만큼 심각하게 "스탈린주의화했던" 나라의 출판인들을 무사히 통과한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또 훨씬 더 극적으로 "침체"를 겪은 나라 - 이른바 옛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이 책 출판을 주저하지 않았음을 목격할 수 있다. (공산 정권 시절, 내 역사적 작품은 러시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

 

<극단의 시대> 프랑스어판 출판은 이제, 피에르 노라가 노골적으로 평가한 프랑스의 지적인 상태가 암시하듯, 프랑스의 독자들과 지적인 독서 계층이 다른 나라와 정말로 다른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일로 독자들은 프랑스에서 <극단의 시대> 출판을 계속 거부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적으로 이용한 다른 주장 곧 번역이 끝날 시점에는 이 책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질 것이어서 읽을 가치가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개정판을 낼 때는 아직 안왔다. 세계 상황이 1990년대 중반 이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만약 나의 일반적인 역사 분석과 세계 관찰이 이 세기 말에 책을 많이 고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은 (책을 쓴) 이후의 일들이 이 책 내용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국제 상황은 여전히 이 책의 19장 앞 부분에 간략히 묘사한 것과 똑같다. 중앙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서 (과거의 자이레에서) 벌어진 극적이고 끔찍한 일들은 이 묘사에 실례를 더하는 것이다. "짧은 20세기"가 단순히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체제의 일반적 위기 속에 끝난다는 것이 이 책 주장의 핵심이다. 이는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세계적 자본주의 경제 위기인 1997-1998년의 분출로 확인됐다. 실로, 이 위기는 저자가 세계 경제가 "이 천년이 끝나기 전에 번영하는 확장기에 새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내비쳤을 정도로 너무 낙관적임을 암시한다. 물론 저자가 "새로운 확장기로 들어가는 것이 당분간 소비에트 사회주의 붕괴의 부수 효과와 세계의 일부 지역이 무정부 상태와 전쟁으로 빠져들고 세계적인 자유 무역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것 등 3가지 때문에 방해받을 것"이라고 - 이는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 덧붙였음에도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저자의 관점은, 저자의 20세기 해석의 장점과 약점은 - 적어도 지금까지는 - 1994년 이후 벌어진 일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프랑스 독자들에게 내놓은 글은 최소한의 수정을 빼면 처음 출판된 원문 또는 다른 나라말로 번역될 내용 바로 그대로다. 나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어쨌든, 나는 프랑스어판이 가능하도록 해준 에디시옹 콩프렉스, 길고 어려운 영어 문장을 훌륭하게 번역한 P.E. 도자 (Dauzat)와 다른 번역자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또 1990년대의 `올바른 생각 (비앙팡상, bien-pensant)' 유행이 거부한 작가의 책을 자국민들이 읽는 것을 모든 프랑스 지식인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난 몇년동안 보여준 파리의 친구들에게도 감사한다.

 

 

* 역사학자, <극단의 시대: 짧은 20번째 세기, 1914-1991>, <자본의 시대, 1848-1875>, <제국의 시대, 1875-1914>의 저자. 3권 모두 아버커스 (리틀, 브라운)에서 출판했다.

Historian. Author inter alia of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 The Age of Capital, 1848-1875, and The Age of Empire, 1875-1914, all published by Abacus (Little, Brown)

 

(1) "Chunnel Vision", Lingua Franca, November 1997 pp 22-24. ("터널 비전", `링구아 프랑카', 1997년 11월 22-24쪽.)

(2) "Furet vs. Hobsbawm", Newsletter, Fall/Winter 1997-98, p 10. ("퓌레 대 홉스봄", `뉴스레터', 1997-1998 가을/겨울호, 10쪽.)

(3) Pierre Nora, "Traduire: necessité et difficultés, Le Débat, Paris, no. 93, January-February 1997, pp 93-95. (피에르 노라, "번역하기: 불가피한 것과 어려움", `르 데바(논쟁)', 파리, 93호, 1997년 1-2월호, 93-95쪽.)

 

원문: mondediplo.com/1999/12/05hobsbawm

번역: 신기섭

2004/07/11 18:41 2004/07/1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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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의 유고 공습은 유럽 사민주의의 배신의 상징

이그나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9년 4월호

원 제목 = 사민주의의 배신 (Social democracy betrayed)

 

이 잡지 사장이자 출판 최고책임자가 쓴 이 글은 유엔을 거치지도 않고, 최소한의 국제법적 절차조차 무시하고, 미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유고 공습에 동참한 서구 사민주의 정권들을 맹렬하게 비난합니다.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럽 사민주의 정권의 이념적 변질을 지적합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인 `무늬만 사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유럽 사민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역사의 뒤안으로 몰아내고 이 시대의 우파가 됐다고 선언합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가 1949년 창립된 이후 처음으로, 자국 국경 밖에서 어떤 공격행위도 하지 않은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또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의 군대가 다른 유럽 주권국가에 폭격을 하고 있다. 99년 3월23일 발표된 전쟁 개시 결정을, 한 때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였던 야비에르 살라나 나토 사무총장은 "도덕적 의무"라고 표현했다.

 

살라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의 수상이며 현재 유럽 사민주의의 유력 인사들인 리오넬 조스펭, 게르하르트 슈뢰더, 마시모 달레마, 토니 블레어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 모두는 워싱턴이 제안한 군사적 해결책이 코소보 평화협정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데 동의했다. 91년 미국이 이라크와 벌인 전쟁에서 확인됐듯이 이런 위기는 공습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지상군을 파견해 코소보를 점령하는 것은 인명 피해 측면에서 너무 대가가 큰 데다가 발칸반도 전체로 분쟁이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상식에 해당하는 데도 말이다.

 

이 위기는 주로 유고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에 폭넓은 정치적 자치권을 주는 걸 거부해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코소보가 문화적 이유 때문에 세르비아에 속해야 한다고 믿고, 코소보의 소수 세르비아계 사람들에 대한 연대감을 느끼는 세르비아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전쟁은 나토가 우리에게 선전하는 것과 달리, 고립된 밀로셰비치 대 연합군 및 해방을 갈망하는 세르비아 국민의 대립이 아니다.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솔라나는 이 결정이 유럽에 속한 국가의 국민들을 독재 정권이 계속 탄압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데 근거한 것이라고 합리화했다.(르몽드 1999년 3월25일치) 그렇다면 우리는 유럽 국가이며 나토 회원국인 터키한테 쿠르드족에게 자치권을 주고, 쿠르드족 시민 수천명을 이미 숨지게 한 탄압도 중단하라고 호소해야 하는가?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가?

 

장 조레와 국제법 존중 전통의 후예인 사민주의 지도자들이 워싱턴의 압력에 굴복해 한치의 국제적 합법성도 없는 엉뚱한 군사행동을 시작할 수 있는가? 이 지역에서 군 병력 사용을 허용하는 국제연합의 명시적 결의도 없고, 국제 분쟁의 최고 중재자인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공습 시작 전에 자문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세르비아에 무력을 사용하라는 이사회의 동의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국의 지도자가 자국 의회한테 전쟁 전에 상황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 분쟁에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의회의 승인은 아예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거대한 인류 화합의 신화인 사회주의는 다시 한번 유럽 사민주의 지도자들한테 배신을 당했다. 99년 3월12일 독일 재무장관 오스카 라폰테인의 사임은 이미 사민주의 파산의 극적인 증명이기에 충분했다. 또 이 사임 사건은, 193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의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있게 해준 케인스적 접근조차 너무 좌파적이라고 여기는 신자유주의 정통에 대한 대안을 사민주의가 제시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스카 라폰테인은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퍼붓는 5가지 중요한 죄를 뒤짚어 써야했다. 유럽의 재출발을 원한 죄, 공정한 세제를 옹호한 죄, 유럽중앙은행을 위태롭게 한 죄, 국제 금융통화체제의 개혁을 요청한 죄, 그리고 이에 앞서 대부 비용을 줄이고 소비를 촉진하며 실업에 대항하려고 이자율을 낮추도록 독일중앙은행에 요구한 죄다.

 

그의 퇴임이 사민주의의 이념적 붕괴의 또 다른 신호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은 완전히 방향을 잃었다. 기껏해야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다음번 위기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건전한 이론적 기반도 없이 방향을 돌리는 데 불과하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그들이 포기한 것과 반칙한 것의 목록을 따지지 않을 때나 가능한 평가지만. 블레어의 자문 교수 안토시 기든스의 `제3의 길', 슈뢰더의 조언자인 보도 홈바흐의 `올바른 선택'같은 것이 그렇다.

 

유럽 주요국가에서 동요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민주의 관점에서는, 정치는 경제를 뜻하며, 경제는 재정을 뜻하며, 재정은 다시 시장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사민주의가 사유화와 공공 분야의 해체, 거대기업의 합병과 집중을 열심히 권장하는 이유이다. 사민주의는 사회계약을 기꺼이 폐기하려 하며, 완전 고용이나 빈곤 퇴치, 유럽연합의 1800만 실업자와 5000만 빈곤층의 어려움을 개선한다는 생각을 이미 포기했다.

 

사민주의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지식계층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패배했고, 귀족정치가 1789년 이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듯 역사의 장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좌파는 정치 지형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체제순응주의 또는 보수주의의 껍데기가 사민주의자들 앞에서 무너진 지금 말이다. 사민주의는 이제 새로운 우파다. 사민주의는 공허한 기회주의 정신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길들이는 역사적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지금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내일은 자신의 이웃과 싸워야할지 모른다. 사실주의의 이름 아래. 배를 흔들리 않고, 무엇보다 현재 상태를 교란하지 않으면서.

 

 

원문: mondediplo.com/1999/04/01leader.html

영어로 번역: 바바라 윌슨(Barbara Wilson)

한글로 번역: 신기섭

2004/07/11 18:24 2004/07/1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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