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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추장이 모든 이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원저작자의 저작권이 없는 글이기에 번역문의 활용이 자유롭습니다. 번역문을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 불허, 개작 허용 1.0’ 조건에 따라 마음껏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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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쿼미시 인디언의 추장 시애틀은 1800년대에 미국 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 편지에서 시애틀은 모든 사물 속에 깃들어있는 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는 세계 모든 나라의 부모들과 자녀들 가슴에 깊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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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땅과 하늘을 사고 팔 수 있나? 이 생각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신선한 공기와 물방울이 우리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사가겠다는 건가?

 

이 땅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반짝이는 소나무 잎, 바닷가 모래밭, 짙은 숲속의 안개, 수풀과 지저귀는 곤충들 모두가 우리 민족의 기억과 경험 속에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 속을 흐르는 수액을 잘 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다. 향기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피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팔면, 이 땅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숫물에 비치는 모든 것은 우리 민족 삶 속의 사건과 기억을 말해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고 우리의 카누를 옮겨주고 우리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니 당신들은 형제를 대하듯 강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

 

우리가 땅을 당신에게 판다면, 기억하라. 공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공기는 모든 목숨 있는 것들에게 정신을 나눠준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을 쉬게 해준 바람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둬갔다. 바람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의 정신을 불어넣어준다. 그러니 우리가 땅을 팔거든, 이 땅을 신성하게 세속에서 분리시켜둬야 한다. 사람들이 찾아가서 꽃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음미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하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당신도 당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칠건가? 땅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땅에 일이 생기면 땅의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생긴다.

 

우리는 안다. 땅은 사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모든 사물은 우리 몸을 연결하는 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인생의 직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 한가닥일 뿐이다. 이 직물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의 신은 당신들의 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땅은 신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땅을 해치는 것은 땅의 창조주를 경멸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운명이 어떨지 모르겠다. 들소가 모두 몰살당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야생마가 길들여지면 어떨까? 숲속의 신비한 구석이 사람들 냄새로 가득하고, 말하는 데 쓰는 전선(전화줄)으로 언덕의 전망이 얼룩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귀뚜라미는 어디에 거할까? 사라져버린다. 독수리는 어디 사나? 가버린다. 잽싼 조랑말에게 인사하고 사냥에 나서는 것은 뭔가? 삶의 종말과 살아남기 경쟁의 시작.

 

마지막 남은 빨간 사람(인디언인듯: 옮긴이)이 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의 기억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그림자가 될 때, 그래도 해안과 숲은 여전히 여기 있을까? 우리 민족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

 

갓난 아이가 엄마의 심장 고동 소리를 사랑하듯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가 땅을 팔면, 우리가 했듯이 사랑해주라. 우리가 했듯 돌봐주라. 이 땅을 받았을 때처럼 땅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라. 모든 아이들을 위해 땅을 보존하고 사랑해주라. 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가 땅의 일부이듯 당신들도 이 땅의 일부다. 이 땅은 우리에게 소중하며, 당신들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안다. 신은 하나라는 것을. 빨간 사람이든 흰 사람이든 사람은 나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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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을 올린 이의 말: 위의 글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시애틀 추장이 실제로 말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글의 감동을 생각해 고치지 않았다.

 

번역: 신기섭

2004/07/09 21:08 2004/07/0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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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슬리 리뷰 공동 편집인 엘런 메익신스 우드 인터뷰

크리스토퍼 펠프스(Christopher Phelps)

<먼슬리 리뷰> 1999년 5월호

 

리오 후버만과 폴 스위지가 먼슬리 리뷰의 기초를 다졌고 1968년 리오 후버만이 숨진 이후 스위지가 해리 매그도프를 맞아 잡지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면, 두 사람이 모두 은퇴할 나이가 된 1997년부터 엘런 메익신스 우드에게 먼슬리 리뷰 2세대의 책임이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은 몇년만에 편집인을 그만뒀습니다.

 

1997년 먼슬리 리뷰의 사상 4번째 편집인이 된 이 여성 학자가, 오늘날 먼슬리 리뷰가 미국 좌파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과제를 말합니다. 또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포스트주의자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먼슬리 리뷰의 길이 계속 지켜질 것이라는 점도 명확히 밝힙니다. 원고지 125장 분량의 대형 인터뷰입니다.

 


 

 

역사학자이며 정치이론 비판가인 엘런 메익신스 우드 (Ellen Meiksins Wood)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와 몇년 동안 가깝게 일 한 뒤 1997년 3월 공식적으로 해리 매그도프 (Harry Magdoff)와 폴 스위지 (Paul Sweezy)에 합류했다. 먼슬리 리뷰로서는 30년만에 새 편집인을 맞은 것이다.

 

1942년 부모가 정치적 피난민으로 뉴욕에 온 지 1년만에 뉴욕에서 태어난 엘런 메익신스 우드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자랐다. 1962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슬라브언어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곧 이어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분교 정치학 대학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이 여성은 1970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7년부터 1996년까지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다.

 

우드는 6권의 책을 썼다. `정신과 정치학: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개인주의의 의미에 대한 접근 (An Approach to the Meaning of Liberal and Socialist Individualism)'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 1972), `계급에서 후퇴 (The Retreat from Class)' (버소, 1986), `농민-시민과 노예 (Peasant-Citizen and Slave)' (버소, 1988), `자본주의의 초기 문화 (The Pristine Culture of Capitalism)' (버소, 1992),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Democracy Against Capitalism)' (캐임브리지대학 출판부, 1995), `자본주의의 기원 (The Origin of Capitalism)' (먼슬리 리뷰 출판부, 1999)이 그가 쓴 책이다. 남편 닐 우드 (Neal Wood)와 함께 쓴 책으로는, `계급이념과 고대 정치이론 (Class Ideology and Ancient Political Theory)'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1978), `선동의 승리: 정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상승, 1509-1688(A Trumpet of Sedition: Political Theory and the Rise of Capitalism, 1509-1688)' (뉴욕대 출판부, 1997) 등 두권이 있다. 마지막으로 여러 동료와 함께, `역사를 옹호하며 (In Defense of History)' 모음집(1997), `자본주의와 정보시대 (Capitalism and the Information Age)' (1998), `잿더미에서 일어나기?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 (Rising from the Ashes? Labor in the Age of "Global" Capitalism)' (1998)을 편집해 먼슬리 리뷰 출판부에서 냈다. 우드는 영국의 사회주의 잡지 뉴 레프트 리뷰 (New Left Review)의 편집위원회에서 1984년부터 1993년까지 일했다. 또 1988년에는 `자본주의에서 후퇴'로 이사크 도에쳐 기념상 (the Isaac Deutscher Memorial Prize)을 받았다.

 

아래 인터뷰는 1998년 11월23일 뉴욕시에서 크리스토퍼 펠프스가 진행한 것이다.

 

먼슬리 리뷰에 도달함(ARRIVING AT MONTHLY REVIEW)

질문: 당신은 먼슬리 리뷰 50년 동안에 4번째 편집인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이뤄졌습니까?

 

우드: 정말 어찌된 일인지 저도 모릅니다. 조금씩 조금씩 지나다보니 가능해진 거죠. 전에 저는 뉴욕에서 열린 사회주의 학자 컨퍼런스에서 해리와 폴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제가 두 사람과 상당한 동안 대화를 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카브타트 (Cavtat)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컨퍼런스에서 였습니다. 이 때는 모든 것이, 단지 컨퍼런스뿐 아니라 그 나라까지 망가지기 직전이었죠. 해리와 패티 (Patti)는 이런 컨퍼런스에 정기적으로 다녔고, 해리와 베디 (Beadie)는 이런 때 전통적으로 사람들을 호텔 방에 초대해 술을 마시며 토론하곤 했습니다. 이런 모임은 특히 제게는 컨퍼런스의 주요 행사였죠. 컨퍼런스 폐막 저녁식사 때 저는 우연히 해리 옆에 앉았고, 그는 먼슬리 리뷰의 미래에 대해서와 잡지를 이어갈 사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슬리 리뷰의 이런 문제를 생각해본 첫번째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이가 저를 염두에 두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아니었어요.

 

제가 먼슬리 리뷰에 처음으로 쓴 글은 뜻밖의 것입니다. 줄리어스 시저에 대한 책 서평이었으니까요. 다음에 쓴 글은 시장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잡지의 비공식 편집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다른 것을 불러오게 마련이죠. 특히 따뜻한 개인적 유대관계가 형성된 겁니다.

 

질문: 그래서 당신 관점에서는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 거군요?

 

우드: 네. 물론 상당히 떨리는 가운데 이 일을 맡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지만요. 떨린 것은 제 글을 계속 쓰고 싶은 생각이 컸는데, 이 일은 책임이 크기 때문이죠. 정치적으로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몇년 동안 뉴 레프트 리뷰에서 일한 이후 저는 먼슬리 리뷰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특히 잘 이해할 수 있는 처지가 됐습니다. 이보다 더 나은 위치는 없습니다. 뉴 레프트 리뷰는 할 일이 많고, 지적으로도 도전을 줍니다. 그 외에도 많은 장점이 있죠.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 잡지와 관련해 가장 주목할 것의 하나를 예로 들면, 제가 위원회에 있는 동안 내내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폭발한 중요한 때 - 광부들의 파업, 그리고 이어지는 웨핑 대파업 (the big Wapping strike) - 뉴 레프트 리뷰를 읽으면 이런 일이 생겼는지 거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한 불만을 지적하는 내부 문건을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10년의 잡지 목차와 기사에 대한 분석을 곁들여서요. 노동계급이 빠져있다는 것은 정말 주목할 일입니다. 제게는 이 것이 지금 먼슬리 리뷰의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노동운동을 다루고 노동좌파와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 말이에요.

 

질문: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더 이상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회에 있지 않기 때문에 먼슬리 리뷰로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군요.

 

우드: 네, 그렇죠. 이런 면에서 먼슬리 리뷰는 저 같은 사람에게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저는 뉴 레프트 리뷰 이후에 다른 정치적 출구를 절실히 찾고 있었고, 제 정치적 개입은 주로 저의 지적인 작업 곧 글쓰기입니다. 글쓰기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죠. 그러나 누군가 해야할 일이고,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 글쓰기입니다.

 

빨간 수건 (RED DIAPERS)

질문: 정치적 성향은 부모님께 물려받으셨나요?

 

우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제 부모는 정치적 난민으로 이 나라에 온 독일계 (Bundist)입니다. 이 나라에 온 덕분에 다른 유럽 유태인들이 겪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죠. 부모님이 이 나라에 온 것은 1941년입니다. 그 전 1930년대 말 제 아버지는 사회주의 젊은이 단체를 이끌다가 체포될 즈음에 라트비아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단체의 다른 사람들은 라트비아의 토착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은 이후 체포됐어요. 저는 전쟁통에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질문: 정치적인 가정이군요?

 

우드: 저는 좌파 사상에 둘러싸인 채 성장했습니다. 부모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작은할아버지도 그랬어요. 그 분은 부모님의 이민을 지원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유태인 사회주의 잡지 데어 베커 (Der Vecker)의 편집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했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 그 분 집에서 오래 지냈습니다. 부모님이 미국에 오신 지 오래지 않아서, 어머니는 유태인 노동위원회 (the Jewish Labor Committee)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가족을 빼고 가장 먼저 접하게 된 사람들이 노동운동가들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부모님이 헤어지게 됐는데, 유태인 노동위원회에서 어머니를 내어쫓긴 사람들과 일하라고 독일로 보냈습니다. 거기서 4~5년쯤 계셨는데, 그 동안 저는 한 때는 미국, 다른 때는 유럽의 기숙 학교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때가 한번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백컨대, 어머니는 미국으로 돌아와 저와 함께 캘리포니아에 정착하고는 민주당 활동가가 됐습니다. 어머니는 전국 유색인진흥협회 (NAACP) 회원도 됐습니다.

 

아버지는 국제연합에서 일하셨고 오늘날까지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아버지는 먼슬리 리뷰의 충실한 독자입니다. 하지만 나름의 독특한 관점이 있어요. 특히 자본주의에 대해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누구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군요. 우리가 지금 나누는 이야기가 별로 그렇지 못해 아버지를 실망시킬까봐요. (웃음)

 

캐나다의 장점 (CANADIAN VANTAGE)

질문: 60년대 말에 캐나다로 옮기셨죠. 그 때는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똑같이 운동이 상당히 활발해진 때인데요. 캐나다에 산 것이 생각에 영향을 줬다고 보십니까?

 

우드: 캐나다는 아주 흥미롭게도 유리한 지역입니다. 미국에 아주 가깝고 어떤 면에서는 60년대 문화도 똑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비판적인 거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캐나다는 어떤 면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동반자이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도 합니다.

 

우리 학생들은 60년대 미국 학생들이 하던 일을 했습니다. 시위도 하고 성토대회도 했습니다. 캐나다는 징병 거부자들의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닐과 저는 우리 아파트에 징병 거부자들을 머물게 했습니다. 닐의 아들도 그 중의 하나였죠. 또 캐나다로 선생 일 등을 하려고 오는 많은 이들 또한 전쟁 때문에 온 미국인들이었습니다.

 

많은 캐나다인들은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을 미국 주도권에 반대해서 설정하게 됐습니다. 많은 캐나다 학자들은 미국인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신경 쓰게 됐고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한면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닐과 제가 캐나다에 온 이후 처음으로 출판한 것에는 정치학의 미국화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캐나다 대학의 미국화에 관한 책에 실렸습니다. 이 글의 요지는 캐나다인들이 정치학을 하는 방식이 미국을 지배하는 이념적, 방법론적 원칙에 완전히 물든 것이라면 이 문제를 국가적 쟁점으로 만들기 위한 핵심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 글은 민족주의의 한계에 대한 짧은 강의인 셈입니다.

 

우리 학과가 의식적으로 미국식 정치학, 행동주의 등으로 모양을 갖추고 출범하기는 했지만, 몇몇 이유 때문에 금방 북미 대학에서 가장 마르크스주의적인 학과로 변신했습니다. 이는 제 개인의 지적인 발전 측면에서 많은 뜻이 있습니다. 제가 만약 미국 대학에 있었다면 제 작업의 첫번째 밑바탕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종신 교수직을 빼고도 말이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미국 대학에서 가르쳤다면 제 지적 발전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띄었을 겁니다.

 

여기에 더해, 말하기는 싫지만, 많은 면에서 미국은 아주 변방입니다.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이 마치 우주의 중심이라도 되는 듯합니다. 미국은 스스로에 너무 집중하며, 미국이 직접적인 방법으로 세계와 부딪힐 때를 빼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한번 보세요. 아니면 뉴욕타임스를 보든지. 캐나다에서는 사람들이 세계에 상당히 열려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국제적인 인식을 합니다. 캐나다에는 미국에 없는 온건 좌파가 주류를 이루는 전통이 있고, 사민주의당 등등이 있고, 이에 비례해 더 크고 전투적인 조직 노동운동이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말입니다.

 

옛 세대와 새 세대(GENERATIONS OLD AND NEW)

질문: 1995년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Socialist Register)에 실린 논문에서, 당신은 대공황, 파시즘,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형성된 영국의 새 좌파를 - 당신의 표현으로는 첫번째 새 좌파를 - 다뤘습니다. 여기에는 랄프 밀리밴드 (Ralph Miliband) 같은 이들이 포함됩니다. 또 특히 E. P. 톰슨 (Thompson)이나 존 새빌 (John Saville)처럼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지만 여전히 사민주의의 왼쪽에 있고 노동운동과 계급정치학에 여전히 헌신하는 반체제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지요. 이들은 한 가지 전통을 형성했는데, 당신의 경향과 맞으며 당신 스스로도 그 전통 안에서 움직인다고 깨달았죠. 물론 당신과 다른 세대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우드: 이 두 세대 곧 영국의 첫번째 새 좌파와 두번째 새 좌파에 관한 문제의 요점은 자본주의 접근 방식입니다. 물론 세대 문제에 마술적인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이 세대 변천은 실제 역사상의 단절과 부합합니다. 저는 대공황과 전쟁 중에 정치적 의식을 형성한 세대와 이른바 자본주의 황금시대 곧 전후 장기간의 호황기에 성장한 세대의 차이에 놀랐습니다. 두 세대는 자본주의체제의 정상적인 것에 대한 개념부터 다릅니다. 한 세대에게 정상은 경기침체와 전쟁이지만, 다른 세대에게는 번영 등등이 정상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이 이 번영에서 소외되고 있지만요.

 

어쨌든 이 점은 영국의 사례에서는 특히 흥미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새 좌파는 - 특히 뉴 레프트 리뷰와 연관된 이들은 - 영국 자본주의는 뭔가 결함이 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영국의 예외성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발전시켰습니다. 결함이 있다고 가정한 것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번영을 영국이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다른 말로 하면, 영국이 잘못된 것, 영국이 쇠퇴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잘못된 자본주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제가 제 책 `자본주의의 초기 문화'에서 도전을 제기한 것 쟁점입니다. 어쨌든, 세대 변천이 미국에서는 다르게 작동했습니다. 물론 똑같은 구별이 있었지만요. 그 구별이란 물론 경제 공황과 전쟁이 자본주의의 정상 상태를 대표한다고 느끼는 이들과, 전후 "황금시대"가 형성한 이들간 구별이죠.

 

질문: 영국에서 첫번째 새 좌파라고 불린 이들과 유사한 것이 미국에서는 먼슬리 리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여기서는 먼슬리 리뷰를 옛 좌파 잡지라고 보지만요. 이 잡지의 편집인들도 대공황, 파시즘,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공산당 운동에 끌려 들어갔거나 한 때는 상당히 교감했습니다. 물론 점차적으로 이런 정치방식을 넘어가게 됐고 그럼에도 좌파의 좌파로 남았지만요. 그러나 에드워드 톰슨, 폴 스위지, 해리 매그도프를 한통속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을 겁니다.

 

우드: 그렇죠. 아마도 미국의 첫 세대라면 C. 라이트 밀스(Wright Mills) 같은 사람을 꼽겠죠.

 

질문: 하지만 그 이는 전혀 다르죠. 밀스는 "마르크스와 `노동 형이상학'을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우드: 맞아요, 맞아요. 다른 1세대 새 좌파 지식인으로는 허버트 마르쿠제가 있겠군요. 물론 이민 온 미국인이지만요. 그도 학생과 지식인을 혁명적 전위대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노동 계급이 소비자 자본주의에 완전히 흡수됐다고 봤기 때문이죠. 그러나 영국의 새 좌파는 노동운동에서 분리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비자 자본주의의 영향 때문에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지적, 문화적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여전히 지적, 정치적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미국 새 좌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슬리 리뷰 편집인들이 영국의 첫번째 새 좌파와 본질적인 면에서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당신의 지적이 흥미롭군요. 공통점 가운데 몇몇은 아마 먼슬리 리뷰의 마오주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약화될 겁니다. 영국 새 좌파들에게는 이 관심이 아주 생소하거든요.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유용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 당신은 지금 말씀하신 세대 변천의 예외 같군요. 당신은 전후 호황기 세대이면서도 초창기 좌파 세대에 가까우니까요. 이것이 영국 마르크스주의에 관여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부모님 영향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요? 당신 자신은 대공황이나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물론 어린 시절을 통해 굴절된 모습은 있겠지만.

 

우드: 저 같은 사람 곧 대학살로 많은 가족을 잃고 파시즘을 피해 이민 온 부모를 둔 1세대는 부모 세대의 경험과 더 직접적인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독일에 가서 전쟁의 명백한 결과를 봤습니다. 저는 그 때 기숙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분명 자신의 경험과 가족들에게 생긴 일 때문이겠는데, 유태인 노동위원회가 보내면서 부여한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제 경험은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세대 변천에 대한 제 생각은 자본주의에 대한 접근법의 차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영국과 먼슬리 리뷰의 첫번째 새 좌파적 접근법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그냥 발견하게 된 겁니다.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방식에서 첫번째 새 좌파의 생각이 더 현재 상황에 맞습니다. 이들이 사물의 방식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제시합니다. 단지 두번째 새 좌파와 비교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뒤를 잇는 포스트모던 좌파와 비교해서도 말입니다. 포스트모던 좌파는 현재의 전세계적 위기 속에서 완전히 수렁에 빠져 버렸습니다.

 

질문: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먼슬리 리뷰에는 세대 변천이 없을 것 같군요. 횃불을 다음 세대에 넘기는 것조차도 말입니다.

 

우드: 제가 전형적인 제 세대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겠죠. 그러나 이를 과장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튼 저는 미국에서 나서 미국에서 주로 컸고 제 세대 사람들과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전 세대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제가 성장한 시간과 장소가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잡지로서는 오늘날 좌파의 지적, 정치적 문화가 제 세대 사람들이 형성한 문화에 여전히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질문: 자본주의 "황금 시대"의 문화, 말하자면 영원하고 보편적인 풍요에 대한 전망이나 환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드: 아마, 풍요함과 이것의 보편적 가능성에 대한 환상이겠죠. 명백히 더 어두운 현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좌파 세대가 이를 인식하는 방식은 특히 극적입니다. 그들은 전체 인구 중에 특정한 부분 전체가 여기서 소외됐고 그래서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여기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쓴 글에서 저는 자본주의 "황금시대"가 영향력을 형성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몇몇 예외는 있지만 60년대 좌파의 주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되지 않았다고 제시했습니다. 60년대 급진주의자들은 어떤 면에서 자본주의의 실패보다는 표면적인 성공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습니다. 그들은 복지와 소비자 자본주의가 이런 저런 형태로 여기 머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몇은 여기서 소외된다는 것도 인식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변환시키는 것이나 우리가 사회주의로 인식하는 어떤 것보다도 소외된 이들을 동참시키는 것이 아마 이들의 세계관의 중심을 차지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했지만요. 저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더 민주적이고 제국주의적이지 않으며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자본주의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이 전망의 부정적인 측면은 그들이 자주 자본주의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제가 그 동안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겠는데, 그들이 그전 세대 좌파가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소외된 계층에 관심을 집중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더 이상 끌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옛 좌파,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종과 성 차별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을 저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 다른 이들만 못했다는 생각에 강하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제 세대가 과거에 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는 그들의 실패의 윗면, 그들의 해악의 미덕입니다. 자본주의를 전체로 보지 않고 일시적 번영에서 소외된 이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특히 인종차별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 투쟁에서 말이죠.

 

또 다른 요점은 50년대 이른바 황금시대에 중산층의 전반적인 번영이라는 그림을 취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냉전이 있었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때는 정기적으로 공습대비 연습을 했고 복도에 앉아서 핵폭탄이 터질 때 눈과 머리를 보호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진짜 효과적인 이념 전략이었으니까요. 하워드 패스트 등이 쓴 책들은 도서관에서 추방당하던 시절입니다. 반사회주의 이념이 정말 깊이 침투했고 제 세대 이후 세대 전체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의 처음이자 가장 극적인 정치적 기억은 로스앤젤레스의 슈린 (Shrine)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전국유색인진흥협회의 대규모 집회입니다. 이 집회는 1955년 미시시피에서 살해된 흑인 청소년 에미트 틸 (Emmett Till)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큰아버지와 시카고에서 이 분과 함께 온 목사님 한분이 연설한 이 집회를 저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저는 이 살인사건이 인권운동 발전에 핵심적인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세대가 성장하던 시기의 긴장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런 것들이 함께 뭉쳐서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줬습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번영에 휩싸여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번영에서 소외되는 일을 목격했습니다. 오지 (Ozzie)와 해리에트 (Harriet)가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바로 그 때 에미트 틸이 살해된 겁니다. 그 동안 내내 핵심적인 대안인 사회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명백한 방식으로 배제됐고 악마의 화신으로 여겨졌습니다.

 

운동과 계급 정치학(MOVEMENTS AND CLASS POLITICS)

질문: 당신이 그 세대가 관심을 갖는다고 설명한 쟁점은 이른바 신사회운동의 쟁점입니다. 인종차별 반대, 여성주의, 생태학, 반전 및 반핵 운동, 노동운동에 제한되지 않고 가끔은 기존 노동운동에 대해 불편해하는 모든 운동 말입니다. 어떤 계열에서 당신 같은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당신이 이런 다양한 종류의 문제에 무관심한 계급 근본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우드: 접근법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근본적인 현실은 자본주의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관계가 무엇입니까? 계급. 자본과 노동의 계급 구별이 없이는 자본주의도 없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겁니다. 기적을 통해 인종차별, 성차별을 제거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남습니다. 이런 다른 관계는 계급관계처럼 이 체제를 구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체제가 변혁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체제를 구성하는 관계의 뿌리를 건드려야 한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체제의 뿌리 곧 계급 = 옮긴이)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제 관점을 이런 식으로 요약한 것이 적어도 한번 이상입니다. 노동계급 스스로의 해방이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는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노동계급이 백인, 남성, 생산직 노동자로 구성된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또 정교한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도 저는 전혀 모릅니다. 저는 옛 좌파가 잘못된 비난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역사를 둘러보세요. 사회주의운동보다 더 인종차별 해방, 여성 해방 등등을 위한 싸움에서 일관된 운동은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큰 태만이나 생략이 있었다거나 사회운동이 우리가 배울 교훈을 가르쳐줬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우리는 그 역사를 가슴에 새겨둬야 한다고 봅니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그 어떤 것 - 말하자면 정체성 정치학 (identity politics) - 과 계급 정치학을 결합하는 것의 한 측면은, 노동 계급은 언제나 이 다양성을 꼭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과거에도 결코 성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이는 쟁점의 한 측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계급의 단결을 이루는 길이 이 뿐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중요하지만 명백하게도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사회주의자는 모든 종류의 인간 해방에 깊이 헌신해야 합니다. 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동전의 또 다른 면은 이런 투쟁 가운데 어떤 것도 단독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저는 모른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다른 체제들은 할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는 인종과 성의 형식적 평등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는 체제라고 저는 믿습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구성하는 계급 불평등을 뺀 다양한 불평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심오하게 중요한 점입니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을 분열시켜서 많은 이득을 얻습니다. 또 하층계급을 형성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얻습니다. 이런 문제는 깊은 이념적 효과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자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불러오는 자본주의의 폐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전 체제의 역사적 차이와 억압을 이용할 이유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본주의 자체의 목적을 위해 이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런 투쟁에 대항한 싸움이 결국은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계급: 후퇴와 복귀 (CLASS: RETREATS AND RETURNS)

질문: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차이와 분열 등등을 찬양하거나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당신의 비판의 핵심이군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세대의 원초적인 생각의 가장 고상한 형태가 , 적어도 학자 사이에서는 말이죠,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이라고 당신은 보는 것 같군요. 제 생각에, 당신의 책 `계급에서 후퇴'로 보면, 당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옮은 방향인 것 같아서 그 쪽으로 움직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서 도망친 이들에 대항하는 논객으로 비춰졌습니다.

 

우드: 예, 저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전략, 이념 두 측면에서 자신들의 해방 프로젝트의 관점을 스스로 포기했다고 여깁니다. 저는 최근에 `계급에서 후퇴'의 최신판 서문을 다시 썼습니다. 제 책을 되돌아보니 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분열, 차이 등등 우리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시키는 것들을 강조했고,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와 연결시키는 계급정치, 보편정치를 거부했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여전히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념적인 방식으로 말하던 진짜 보편주의적인 어떤 것이 남아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하던 단계에서 에르네스토 라클로 (Ernesto Laclau), 찬털 모페 (Chantal Mouffe)같은 이들은 "급진 민주주의" 개념 같은 보편주의적 원칙 비슷한 것을 여전히 끌어내려고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작업의 사회적 기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공허하고 관념적인 방식으로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프로젝트를 부수고 투쟁을 분열시키고 계급이 너무 통합적인 개념이라는 말을 하면서 너무 멀리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당시에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생각했고, 이런 작업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게 하는 최소 공통분모를 찾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작업을 하나로 묶기 위한 사회적 기반을 그들이 허물었지만요. "급진 민주주의"는 완전히 관념적이고 공허한 생각의 가장 생생한 예이며, 다양한 투쟁에 모두 적용될 최소 공통분모의 생생한 예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적 보편주의와 전체화를 공격했지만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덜 역사적 특성에 바탕을 둔 훨씬 더 관념적인 보편주의를 제안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이런 모호한 보편주의조차 해체했고 그래서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것은 분열과 차이뿐입니다.

 

저는 사람의 다양성을 찬양하는 데 전적으로 동조합니다. 사실, 저는 마르크스주의 프로젝트의 힘이 차이와 특성을 인식하고 진짜 사회적인 말 속에 프로젝트의 기반을 세우면서도, 삶의 경험에 바탕한 통일적 원칙 - 계급 - 을 갖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백히 계급은 모든 해방 투쟁을 포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 해방 투쟁에 일종의 통일적 원칙을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이는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의 전망에 완전히 결여된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을 그들의 공통된 노동 및 착취 경험과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공통 관심에 기초해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공동 계급 프로젝트, 공통 반자본주의 프로젝트는 제가 보기에 급진 민주주의라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개념보다 훨씬 실제적이고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민주적 프로젝트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을 연결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봉쇄하는 아주 넓은 사회 영역, 자본의 힘이 직접 또는 이른바 시장법칙으로 간접 통제하는 모든 영역에 대중의 힘이 침투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물론 계급 연합과 투쟁은 자동적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조직적, 지적 작업을 많이 요구합니다.

 

질문: 계급이 보편적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당신은 60년대 운동의 쇠퇴와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퇴조를 연결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출발의 순간이라고 쓰셨습니다. 급진적 변화 전망이 수그러들자 이런 공상의 분방함이 더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훨씬 더 심각한 불안의 증거와 함께 말입니다. 이는 비록 고르지는 않지만 세계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이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마르크스가 돌아왔다고 말하고, 리차드 로티 (Richard Rorty)는 계급정치의 복귀를 요청합니다.

 

우드: 맞아요. 심지어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조차 신경질적인 소음을 내고 있습니다.

 

질문: 과거 방식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뒷문으로 계급이 살짝 돌아오는 방식이지만요.

 

우드: 옳은 말씀입니다. 저는 최근의 좌파 지성계의 유행이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 황금기와 그 시대가 생산한 것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호황의 성격은 전형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형적이지 않은 때에 성장했고 그 때를 자본주의 표준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때가 끝나고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전체 세대의 의식에 격변이 벌어졌습니다. 호황이 대학의 성장과 함께 두터운 학자층을 형성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60년대 급진주의자들은 자본주의 황금기가 끝난 뒤에 교수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제각각으로 반응했지만 강한 조류 하나는 정치학을 실체 없는 학문적 과제로 변환시킨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죠. 대중 투쟁으로 사회 혁명을 이루는 대신 지식인들이 문서적으로 해체하는 겁니다. 마치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복 활동이나 되는 양 말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다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말은 모르겠어요. 아직 때가 이르거든요. 객관적 실제가 의식에 점차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리고 현재 지적 흐름이 공급해줄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계급 정치의 분출: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 곳곳에서 거리로 뛰어나옵니다.

 

지구화를 묻기 (QUESTIONING GLOBALIZATION)

질문: 이제 당신이 편집인으로 참여한 이후 벌였던 격렬한 논쟁 곧 지구화 논쟁으로 말을 돌릴 적절한 시기군요. 먼슬리 리뷰는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서 머리를 모래에 박는 타조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인종과 계급 (Race & Class)'의 최근 글은 먼슬리 리뷰가 무엇보다 "마르크스가 글을 쓰던 당시 산업자본주의 시절에 주로 속하는 이론과 개념에 아무 생각 없이 집착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우드: 보세요, 먼슬리 리뷰가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먼슬리 리뷰는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계속 그랬어요. 자본주의 본성에 중요한 변화가 계속 생겼다는 점을 우리가 부정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먼슬리 리뷰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최근 발전에 대해 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발전을 갑자기 발견했지만. 먼슬리 리뷰가 몇십년 동안 쓴 과잉생산 위기를 경제신문들이 요즘 거론하는 방식은 거의 코미디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구화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을 명쾌히 설명하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단지 다른 이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경계했을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가 그 동안 강조한 것뿐입니다. 지구화 자본주의 아래 국가에 대해 사람들이 제기하는 가정; 지구화 자본주의 아래 자본가 계급의 단결에 대해 제기하는 가정; 그리고 변화를 "신기원적 변천 (epochal shift)"이라는 뚜렷하고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이것들은 온갖 종류의 이념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계 자본주의 통합, 초국가 기업의 존재 등등이 아무래도 민족국가를 부적절하게 한다는 가정은 많은 것을 함축합니다. 전통적인 정치 투쟁의 대상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구화라고 부르는 경향의 결과로 국가가 중심 위치에서 물러났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저는 자본이 세계 경제를 항해하는 데, 국가가 아주 본질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원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부적절해졌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 국제 자본기구에게 주권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완전한 신비화이며 정치적으로 아주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 특히 미국에서 명백한 사실입니다. 후진 국가들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통화기금 같은 이른바 국제기구의 억압 대상인 것이 분명합니다. 국제기구는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오늘날 과거와 다른 형태를 띈다는 점과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른 국가나 지방 정부와 협력하지 않고는 국경을 넘어 침투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구화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국가라는 매체를 통해 작동합니다. 또 저는 제3세계 국가들이 직접적으로, 자발적으로 제국주의 세력 및 초국가 기업과 결탁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수행해야 할 중요한 투쟁이 있다고 봅니다. 모든 것이 국제기구와 국제 자본의 손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여지를 없애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새로운 형태의 국제주의가 지금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국제주의를 찾는 것은 지역적, 일국적 투쟁을 포기하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경향 곧 지구화를 자본의 통합 강화로 이해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시시한 생각입니다. 지구화가 뜻이 있다면 이것은 자본의 모순을 증가시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강화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군사력을 동원해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도하고 자본주의가 서지 않은 지역을 흡수하는 탈출로를 이제는 손쉽게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본주의가 훨씬 보편화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는 - 외채와 금융체제를 통한 - 과거의 제국주의가 하지 않던 방식으로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시아 위기 이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자본의 보편화와 함께 나타난 깊숙하고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모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의 강력한 힘과 그것에 반대할 권리의 상실을 과시하는 자본의 확산, 보편화를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본주의의 보편화가 예를 들면 자본의 이동력을 더 높여 투쟁을 억제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자본주의 모순의 보편화로 생각하고 이와 함께 생기는 모든 투쟁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질문: 아마 논쟁의 초기 구성 또는 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이 단지 지구화에 대한 어떤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구화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고 여기게 됐습니다. "오래된 자본주의 그 자체와 다름없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는 거죠. 제게는, 지구가 어느 때보다 더 자본주의화했고 자본주의가 과거에는 침투를 꿈꾸기만 하던 영역에 드디어 침투했지만 자본 자체는 여전히 지구적이지 않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 같은데요.

 

우드: 글쎄요. 흥미로운 표현이군요. 저는 사람들이 두가지를 혼동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미 지적했지만, 생산은 여전히 한 국가에 주로 바탕을 둔 기업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강조해야 할 것은, 제가 계속 시도했던 것인데, 국가 자본은 - 특히 미국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더 그런데 - 민족국가의 지지를 여전히 받고 있다는 겁니다. 초국적 범위의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경제의 지속, 한 국가에 근거를 둔 자본, 민족국가 등등은 제가 자본주의의 보편화라고 부르는 것 곧 자본주의 논리가 선진 자본주의 사회, 공간적으로는 전세계적으로 더 깊이 침투하는 것과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일관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보편화는 자본주의적 번영, 성공, 산업화 또는 발전의 보편화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는 자본주의적 양극화의 보편화를 뜻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가 보기에 이미 일어났습니다. 지구화의 중요한 효과 하나는 주변부에 남겨진 나라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질문: 당신이 지금 했듯이 변화를 거대한 가지치기와 함께 위치 짓는 것과 신기원적인 변천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저는 당신이 체제 논리는 변하지 않았고 지평만 거대하게 확장한 거라고 믿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면 당신이 비판하는 설명들은 자본주의 논리 자체가 새로운 시대를 맞아 다른 것으로 대체됐다고 암시하는 듯합니다. 다른 한편, 당신은 지구 자본주의의 작용 방식에 거대한 변화가 있다고 믿잖아요.

 

우드: 네, 거대한 변화가 생겼죠.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 처음부터 있던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수직, 수평 두면 모두에서 확장과 통합의 논리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화가 신기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방식으로 사건이 돌아가게 된 순간을 1972년으로 지정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먼슬리 리뷰 지면에 쓴 이 주제에 관한 첫번째 글에서, 1970년대 초를 특별한 순간으로 구별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밝힌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때가 그들이 의미하는 신기원적 변천보다는 전후 호황의 끝이라는 점과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뭔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를 보편화의 장기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질문: 체제 차원에서 연속이 불연속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죠?

 

우드: 네, 적어도 우리가 연속을 지속적인 변화와 모순을 뜻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에서 말이죠. 그러나 저는 왜 사람들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새로운 과정의 시작으로 인식하게 강요받는 느낌을 갖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는 꾸준히 변화한 역사였습니다. 저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특정한 순간을,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 계속 발생한 변화와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역사적 단절을 표현하는 것으로 구별함으로써 얻는 것이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런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빛의 속도로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면 좋습니다.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역사적 순간을 그 고유한 관점에서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물론 차이가 있죠. 또 정치적 과제도 다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뚜렷하게 구별되는 시기로 나누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지구화라는 생각에는 중요한 이념적 현상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변화를 분석하는 것과 다릅니다. 제가 시도한 것은 이것이 사람들 정신 속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지 물은 겁니다. 왜 묵시록적이고 신기원적인 용어로 말합니까? 제가 보기에 이것이 분석적이기보다 정치적입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분석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에 실제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제 마음에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른바 지구화의 신기원적 변천에 대한 집착이 자본주의에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는 그 세대의 정치적 궤도와 더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0년대 초를 신기원적 변천으로 지칭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 이야기되는 방식은, 전후 호황이 자본주의의 내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묻어버리면서 종말을 고했을 때 좌파의 정치적, 지적 생활에 혼란이 생기며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자의 미래 (CAPITALISM AND SOCIALIST FUTURES)

질문: 이 말이 제게는 당신 작업 곧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의 안내선 같군요. `자본주의의 초기 문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같은 책에서, 당신은 부르주아를 자본가와 분석적으로 구별했고, 근대성도 자본주의와 구별했습니다. 또 자본주의를 초기 시장형태와도 구별했죠.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서 과거 어떤 사회에도 없던 독특한 사회체제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우드: 네, 정확하게 맞는 말씀입니다. 제 지적 작업과 제 교수 활동에 단 한가지 프로젝트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특이성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정치적 프로젝트에 절대적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맞서 싸우려면 꼭 필요한 것인 이 체제의 작동 방식의 인식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 형태라는 생각을 우리의 심층 의식 속에 집어넣는 것 말이죠.

 

질문: 당신 작업의 상당 부분은 역사적 주제에 관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보다 훨씬 먼저 나타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같은 것 말입니다.

 

우드: 물론 그것이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다른 형태와 구별되는 특정한 사회 형태로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본주의를 역사적 맥락에서 자리매기는 것이라고 언제나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너무 빠져 있어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자신의 궤도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더 긴 역사적 관점을 갖는 것이 현재 세계에서 한발짝 물러나 이 세계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작업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그것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무엇보다 그리스 민주주의와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개념 차이에 흥미를 갖게 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변화, 특히 자본주의가 유발한 변화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보편적인 시민권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이를 덜 중요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정치적 권리를 지니는 것이 아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경제적 함의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가는 예를 들어 봉건 영주가 농부들을 착취하기 위해 필요했던 정치적, 군사적 힘이 없어도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습니다. 시민권은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을 위해 파는 것을 막아주지도 않습니다. 봉건주의는 그 정의상, 보편적인 시민권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보편적인 성인의 참정권이 있는 봉건주의를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민주주의와 공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잉여를 모두 챙기는 지배자와 잉여를 생산하는 백성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동등한 시민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 우리의 삶 상당 부분이 민주적 책임의 범위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본가의 착취는 계속되고, 자본 축적의 요구는 계속 작용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상당 부분은 다른 부분 곧 분리된 정치 영역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전체 의미를 바꿨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면, 과거에 정치적 권리가 없던 사람들에게로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는 것이 쟁점이 아닙니다. 이는 이른바 경제적 요청 곧 직접적인 자본 계급의 힘뿐 아니라 시장의 강제를 민주적 힘으로 대체하는 문제입니다. 제가 주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야인 초기 근대 유럽 정치 사상사를 봅시다. 이는,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번영에 대한 생각 및 가치와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제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입니다. 자본주의적 번영 개념 같은 새로운 가치관들이 생겨나고 이 가치관이 다른 가치들의 전면적인 저항을 받으면서 그 가치들을 대체하는 과정을 보면,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거나 그것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부르주아와 자본가의 차이, 근대성의 관념에 대한 제 글을 언급하셨습니다. 제가 시도한 것은 근대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한통속으로 묶는 다양한 역사적 발전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근대성과 연관짓는 것 가운데 몇몇은 자본주의와 무관합니다. 제가 이런 구별을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명백하게 하자는 거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습니다. 하나로, 근대성의 징표로 여겨지는 이른바 계몽 프로젝트를 내다버리는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행을 생각해 봅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버리려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 프로젝트에 담겨있는 정치적 이념적 문화적 승리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진정으로 해방적인 사상입니다. 저는 이런 사상 곧 이른바 계몽 사상이 자본주의가 손상시킨 것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특정한 사회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지적 유행 가운데 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명백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것이 뜻하는 바는 이런 지적 조류가 자본주의 현실에 심하게 흡수되어서 더 이상 자본주의 현실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 상당 부분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자본가 이념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존재 가능한 유일한 형태라고 당연시하는 바로 그 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환경인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보지 못하고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는 것과 꼭 같습니다. 저는 제가 역사 관련 작업에서 시도한 것이 자본주의를 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자본주의가 현재의 많은 좌파 사상가의 세계 전망에서 사라짐에 따라 그의 이면으로 정치적 프로젝트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5~8년전 "사회주의의 사망" 합창이 나오던 때와 지금은 서로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사회주의라고 불리던 나라들의 몰락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순간을 살고 있지만요. 정치적 프로젝트로 사회주의가 다시 부활할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드: 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의 반으로서 사회주의는 계속 의제가 될 거라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순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험 속에 불어넣은 이념적 짐이,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인지하고 그것을 다루고 직면하는 능력을 방해하는 방식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최소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세대로 돌아가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고 이런 습관의 상실은 공산주의 붕괴보다 훨씬 이전 일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 세대는, 아니면 적어도 그 세대의 유산은 여전히 좌파의 정치적, 지적 문화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소진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가끔 저는 비관적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객관적 실체가 사람들의 인식에 각인될 때는 이미 우리가 그 순간을 이용할 지적, 정치적, 조직적 자원을 잃어버린 뒤 일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더 나쁜 역사적 순간도 생각합니다. 파시즘이 나타나고 그 때 좌파의 전망이 스스로를 다시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젊은이들이 지금 지배적인 지적 경향이 세상에 대해 해주는 이야기에 불만을 품는 징표를 우리는 봅니다. 또 노동운동은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형적이라고 생각한 긴 순간이 사실은 전형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또 그 때 이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실제적인 자본주의라는 것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자본주의의 개선 가능성은 극도로 제한적일 뿐입니다.

 

질문: 당신이 편집진에 참여한 1997년 3월 사설에서 해리와 폴은 그들이 고민해온 잡지의 계승과 연속성의 문제에 대한 답이 당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적, 이론적 배경이 약간 다른 당신을 선택한 것은 흥미로운 결정입니다. 이는 그들의 밑바탕에 흐르는 관대한 정신의 징표입니다. 지지자와 비판자 가운데 일부가 이 잡지를 실제보다 더 편협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관대한 정신은 얼마간은 이 잡지의 전형적인 것이죠.

 

우드: 그것이 당신의 해석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신이 말했듯, 그들은 사회주의가 뼛속까지 들어있고 관대한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전적으로 사회주의에 헌신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들과 일을 해본 사람은 사회주의가 뼛속까지 들어있다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삶으로 실천합니다. 저는 이 점이 그들의 깨어있는 순간에 대해, 또 그들의 관계 모두에 대해 아주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한다고 봅니다.

 

물론, 저는 함께 일하도록 선택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잡지의 연속성이 전적으로 제게 의존하지는 않기를 기대합니다. 독자들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신념이 굳은 작자들에 더해 새로운 세대의 작가 군을 점차로 늘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잡지로서 좋은 증거입니다. 이 징조를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인 순간을 뜻하기를 기대합니다. 또 바람이 변화해서 먼슬리 리뷰가 말하는 것을 들을 준비가 된 잠재적인 독자가 존재하는 시점에 제가 잡지에 합류하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라면 좋겠군요.

 

이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진짜로 먼슬리 리뷰에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잡지는 꼭 필요한 때에 누구도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먼슬리 리뷰가 황금기였던 때, 지금보다 판매 부수가 많았던 때에, 이 잡지는 독특할 수는 있었지만 유일한 좌파 잡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다른 것들과 구별되며, 이 잡지가 전하는 말이 특히 중요한 순간에 거의 혼자 서 있습니다. 저는 이점이 바로 우리가 다시 성장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이 정치적, 지적 자원을 계속 살아있게 해야하며, 이것에 우리가 유용한 구실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영한 대역본

번역: 신기섭

2004/07/09 21:07 2004/07/0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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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구치소, 법률의 사기 거래

(Lawyers, Jails, and the Law's Fake Bargains)

 

미국 진보잡지 <먼슬리 리뷰> 2001년 7-8월 합본호 특집 가운데 법조인인 마이클 타이거 교수의 글입니다. 많은 사람은 미국이 대단한 인권국가인줄 알지만, 실상은 그것과 거리가 있습니다. 이 글은 서구 평균에 미달하는 반인권적인 미국의 사법체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색인종과 가난한 이들에게 편파적이랍니다. 우리의 사법체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글입니다.

 


 

 

캐나다와 서유럽 국가들의 교도소 수감자 숫자가 적정하다고 가정하자. 또 이 나라들의 범죄 문제가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가정하자. 우리나라의 투옥자 비율이 이 나라들의 5~8배임을 인식하자. 이런 전제들과 이 인식이 거의 유효한 것이라고 한다면, 미국 수감자의 80%는 감옥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수감자의 숫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형사 사건 처리 과정이 주로 가난한 이들과 유색인종을 통제하는 사회적 기제로 이용되는 정도를 반영한다. 나는 이를 쟁점의 실체법적인 측면이라고 부르는데, 과도한 범죄화(over-criminalization) 라고도 부를 수 있다. 사소한 사회적 일탈로도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이는 다른 나라의 대응을 아주 사소하게 보이게 한다.

 

절차주의자들은 이런 수치가 경종을 울릴 근거가 못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투옥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모두 적절한 절차를 거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할 것이다. 나는 대법관 한명과 저녁을 함께 들었는데, 그는 헌법을 제정한 이들은 아이작 뉴턴의 저작을 읽은 사람들이며 시계장치처럼 견제와 균형을 고안해낸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 입안자들은 정부의 작동기제를 걱정했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은 분명히 편파적인 것이다. 그들은 혁명가였으며, 특정한 사회적 전망을 위해 싸운 이들이며, 투옥과 처형의 위협에 직면한 이들이다. 그들은 또한 자산을 소유한 백인 남성들이며, 그들 중 대부분은 아닐지언정 상당수는 사람들을 자산의 일부로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시계장치 이념은 강력해서, 현재 법정에 서는 이들에게 해당하는 형사소송법 절차에 대한 현재 대법원의 태도 가운데 일부를 드러내 보여준다.

 

시계는 본질적으로 "형식"이며 그 형식의 내용은 현재 시간이기 때문에 시계장치는 강력한 이미지이다. 시계가 하나뿐이라면, 힘있는 작은 집단이 그것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말하는 시간이 바로 시간이 된다. 시계, 심지어 단위를 60, 60과 12 또는 24로 나누는 자의적인 결정조차 몇명이 만든 규약이다. "12시,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거리의 포고자는 성의 흉벽에서 외친다. 이 글에서, 나는 어떻게 모든 이들이 절차상으로 투옥되거나 사형장으로 갈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변호사와 의뢰인, 변호사와 정부의 거래 내용을 논하기 전에, 거래의 형식 측면에 대해 말해야 하겠다. 자산 규범은 개인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명백하게 한 개인의 다른 개인 지배를 바탕으로 한 봉건시대 사회 관계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 관계는 무생물에 대한 지배와 어떤 동물이든지 합법적으로 도살해서 판매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형식은 자본주의의 내용을 감춘다. 그 내용이란, 어떤 이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단지 노동력만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 수단 소유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사람에 대한 지배로 바뀐다.

 

"너무 앞질러 가는군!"이라고 듣는 이들은 말할 것이다. 노동자는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노동력을 판다. 이는 "계약"이라는 형식이다. 계약은 조건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는 이들간의 상호 약속의 교환이다. 하지만 노동계약에선 이 형식이 내용에 의해 감춰지는 것을 우린 목격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팔 수 있는 것은 노동력뿐이다. 가격은 노동자의 손아귀 밖에 있는 시장 세력에 의해 결정된다. 개인은 고용주 기업에 맞설 힘이 없다. 단체협상의 개입은 균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한계가 있다. 강력한 판매자와 구매자가 지배하는 경제체제에서 나타나는, 사든지 아니면 말든지 식의 유사 거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률적 자문이 형사 사건 절차를 지배하는 형식적 거래의 핵심에 있다. 헌법은 명백하다. "누구도 답변을 강요당할 수 없다. 다만 ...", "피고는 보장받는다...", 이와 유사한 구절들은 범죄 혐의로 고소됐거나 의심받는 이에게 수많은 권리를 보장한다. 그 권리 가운데 하나가 "법률 자문"이다. 그래서 이 자문을 보장해주는 다양한 거래를 규정해야 한다.

 

이런 거래의 첫번째는 권리장전에 나타나있는 것이다. 다른 수많은 권리들처럼 이 권리도 표면상 중립적인 정부에 의해 헌법의 시작 구절인 "우리, 국민"이 체결한 거래 전반의 조건으로 보장된다. 노예를 포함한 자산을 소유한 이들이 지배하는 정부는 특정한 권리를 정부가 해석하는 범위에서만 보장한다. 한 거래가 유효한 건지 여부는,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이라는 수단을 휘두르는 이들이 좌우한다.

 

이것이 우리를 변호사에게 보낸다. 판사가 얼마나 편향적이냐와 무관하게, 형법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와 상관없이, 또 경찰과 검찰이 얼마나 썩었고 악독한지와 무관하게, 피고는 옹호자인 변호사가 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 전제가 반복해서 문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콜럼비아대학 법대 대학원의 한 연구 결과, 1978년 미 연방 대법원이 사형을 광범하지만 특정한 범위에서만 승인하기 시작한 이후, 미국에서 열린 사형 재판의 3분의 2에 법률적으로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오류 대부분은 경찰관이 무죄를 증명할 증거를 감췄거나, 검찰과 경찰이 형사 절차상 피고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았거나, 판사가 이런 잘못을 묵인한 것이었다. 판사 대부분, 특히 미국 남부의 `사형 지대'(Death Belt)에 있는 판사들은 주류 사회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선거운동을 통해 당선된 이들이다. 이 연구는, 아주 오랫동안 분명했으며 사형수의 인종적 분포를 보면 드러나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준 셈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인에게 저지른 범죄는 희생자나 살인자가 다른 인종일 때보다 훨씬 사형에 처해질 여지가 높다. 인종적 차이가 지배하는 체제가, 이 연구가 밝혀낸 다른 오류들을 왜 그리 쉽게 용인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형 판결만 유독 오류로 물든 것은 아니다. 가장 철저하게 연구했을 따름이다. 물론 피고가 사형선고에 동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이런 사건은 보통 상소심에 회부된다. 형사 범죄 사건의 90%는 구형을 인정하거나 부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유죄 인정 거래"(plea bargains)다. 전형적으로 피고는 체포 당시 법률자문권을 인정받지 못했다거나, 불법 수색을 당했다거나, 무죄를 증명할 증거의 제시 기회를 얻지 못했다거나 등등의 법률적 오류에 대한 문제제기를 철회하는 데 동의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피고는 상소심에서 절차의 적법성을 다시 제기할 권리 또한 포기한다. 물론 이런 거래를 하는 피고는 관선 변호인의 도움을 받게 되며, 판사 앞에서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며 사전에 충분한 관련 정보를 얻었다고 공개적으로 증언한다.

 

피고와 피고의 변호사간 거래도 다른 모든 거래처럼 국가가 범위를 정하고 규정한다. "다른 모든 거래처럼"이라고 말한 것은, "계약의 자유"는 신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화적 성격은 부분적으로 드러나는데, 어떤 거래 당사자는 생산 수단이 있고 어떤 당사자는 없기 때문이다. 신화인 또 다른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른바 거래가 자유 비슷한 것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일지라도 정부에 의해 강제한다는 점이다.

 

19세기에는 영어를 못하는 노동자를 농사철에 고용했는데 농사철이 끝나기 전에 그만두면 돈을 한푼도 주지 않은 사례가 수없이 많았다. 법정은 보통 비록 노동자가 계약의 진정한 뜻을 몰랐다 할지라도 이는 "자유 거래"의 자연스런 속성이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오늘날도 협상력과 세련미가 제한된 소비자나 노동자가 뜻도 모르는 계약을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계약의 부가조항"의 예가 수도 없이 많다.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 측면에서 보면, 변호사는 피고의 옹호자일 뿐 아니라 "법정의 집행관"(officer of the court) 구실도 해야 한다. 그래서 변호사는 의뢰인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면 사건 담당을 중단하거나 의뢰인에 대해 법원에 보고할 의무가 생긴다.

 

대중을 상대로 의뢰인을 변호할 변호사의 권리 또한 연방 대법원에 의해 제한당한다. 진행중인 사건에 악영향을 줄 여지가 충분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변호사는 처벌을 받는다. 이 제한은, 정부가 잘못된 증거를 제시하거나 정치적 또는 인종적 고려 때문에 기소하는 식의 부정을 저지른 경우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정부의 이런 잘못에 대해 변호사보다 공개적으로 더 잘 발언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권리장전 입안자들은 변호사가 공개적인 논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재의 연방 대법원은 사태를 다르게 보고 있다.

 

그런데, 최고 갑부 피고인이라면 정부가 확보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조사관과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신화일 뿐이다. 이 법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물론 형사사건 피고의 대부분은 가난한 이들이며, 인구 비례와 어긋나게도 대부분이 유색인종이다. 이런 편파적 선택을 연방 대법원은 거의 묵인하고 있다. 법원은 검찰과 경찰의 재량권에 많은 제한을 두기를 거부하고 있다.

 

선의를 지닌 많은 이들은 특별검사 케니스 스타(Kenneth Starr)의 클린턴 백악관 조사 행태에 충격을 받았다. 증인들은 협박과 위협을 당했다. (모니카 르윈스키 같은) 증인이 심문 때 변호사와 동행하려 하자 회유를 당했고, 변호사 동행 의지를 표했다는 것 때문에 모욕을 당했다. 언론에 자극적으로 내용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상사였다. 아무튼 한 법률 전공 교수가 유력한 저널에 기고한 글의 제목처럼 "스타는 보통의 검사가 흑인들을 대하듯이 클린턴을 대했다."

 

요약하자면, 이상적인 형태에서조차 변호사와 부유한 의뢰인의 계약은 계약의 속성상 정부가 가하는 제한과 이들이 맞서야 하는 정부기구의 우월적인 힘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피고는 법원이 지정한 변호사와 거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거래는 가장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거래이다. 가난한 피고는, 판사가 골라서 지역의 관례가 허용하는 범위의 수임료를 지불하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수임료가 낮기 때문에, 변호사가 재정적으로 가장 유리한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사건을 맡아서 가능한 한 빨리 유죄 인정 거래를 시도하는 것이다. 수치를 확보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형사사건 피고의 90% 정도가 법원이 지정한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유색인종 피고의 경우는 이 비율이 훨씬 더 높다.

 

<전국 법률 저널>(National Law Journal)은 1990년 사형 사건의 관선변호사에 대해 연구했다. 피고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니, 가장 능력있는 변호사가 할당됐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쯤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적 증거들에 대해 읽었을 것이다. 의뢰인이 사형에 처해질 살인사건 재판을 받는 동안 관선 변호인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 텍사스의 고전적인 이야기가 널리 전해졌다. 재판과 판결에 단지 13시간이 걸렸고, 피고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검사의 말에 변호사가 이의조차 달지 않았다.

 

다음은 <전국 법률 저널>이 찾아낸 것을 짧게 요약한 것이다.

  • 6개 주의 경우, 사형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들이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했거나 일시 정지당했거나 기타 형태로 징계당한 비율은 같은 주의 건전한 변호사의 3배에서 46배에 달했다.
  • 관선 변호인의 법정 보수한도가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 변호사 선임 기준이 없었다.
  • 가난한 피고 지원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 다른 주에서는 사형 사건 재판이 2주 또는 2개월동안 진행된 것과 대조적으로, 재판이 단 하루나 이틀만에 끝났다.

 

요약하자면, 위험이 가장 큰 재판에서 실질적인 법률자문을 받을 권리가 무시됐으며, 오류 발생률이 명백하게 높았다. 사형 사건 재판이 하루나 이틀만에 재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테리 니콜스(Terry Nichols)에 대한 오클라호마시티 폭탄테러 재판에서는 배심원 구성에만 5주가 걸렸다. 언론의 질문 공세를 이겨낼 수 있다고 선서하겠다는 이들로 배심원단을 구성하려다보니 그랬다. 재판은 거의 3개월이 걸렸다. 피고쪽은 100명 이상의 증인을 불러냈다. 배심원들은 표결을 통해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 판정을 내리고 사소한 부분에만 유죄를 인정했다. 이 결과는 변호인이 정부와 싸울 의지도, 싸울 자원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형 사건이 아닌 재판에서도 상황은 전적으로 황량하다. 2001년 4월 뉴욕타임스는 뉴욕시의 관선 변호인 제공 및 그들의 성과에 대한 오랜 탐사 결과를 보도했다. 결과는, 관선 변호인의 수임료가 너무 적어 변호인들이 재판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는 데 발벗고 나서려 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수입을 올리려면 한해에 수백건을 맡아야 하며 각 사건에 가능한 한 시간을 적게 들여야 한다. 타임스가 "전면에 내세운 변호사"는 신 설리번(Sean Sullivan)이었다. 설리번은 한해에 1600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그 대가로 2000년에 12만5천달러 이상을 벌었다. 그가 보여준 "상황"은 최소한에도 미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의뢰인과 협의하지 않으며, 전화해달라는 의뢰인의 요청에 응하지도 않으며, 꼭 필요한 법률적 대처도 준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괄작업 처리하듯이 가능한 한 빨리 유죄 인정 거래를 시도하는 데 만족한다.

 

이런 서툰 대처 때문에 교도소로 돌아가는 불행한 의뢰인은 마찬가지로 무신경한 상소 담당 변호사에게 넘겨진다. 그래서, 1심에서 제대로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일은 거의 없다.

 

많은 관선 변호인들은 이런 흐름에 강하게 반발해 공격적으로 의뢰인을 변호한다. 뉴욕타임스는 수전 타이포그래프(Susan Tipograph)를 거론했다.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노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변호사다. 관선 변호를 주로 맡는 또 한명인 데이비드 크라우스(David Krauss)도 같은 예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이 치르는 대가는 아주 심하다. 그들은 법정 밖의 조사에 필요한 사무실과 보조 인력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벌이를 한다.

 

뉴욕의 관선변호사 체계가 변호인의 도움을 제대로 제공할 수 없음을 수치로 계산해 보여줄 수 있다. 관선 변호인들은 법정 밖의 업무에 대해 시간당 25달러를 받으며 법정에서는 시간당 40달러를 받는다. 수전 타이포그래프처럼 열심히 하는 변호사가, 까다로운 사건의 법정 밖 업무에 100시간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계산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변호사는 피고 및 원고쪽 증인이 될 여지가 있는 이들을 모두 만나봐야 하고 변론 보고서를 검토해야 하고, 법적 대응을 준비하며 의뢰인을 만나야 한다. 의뢰인이 구치소에 있다면 한번 찾아가 만나려고 구치소까지 가는 데만 5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다. 또 면회소에 들어가는 허가를 받으려 거의 무기한에 가깝게 기다려야 한다.

 

400시간은 10주의 노동에 해당한다. 변호인은 1만 달러를 받게 될텐데, 이를 위해서 양식을 작성하고 승인과 처리 절차를 기다려야 한다. 이 변호사는 사무실 임대료로 주당 250달러 곧 10주에 2500달러를 내야할 것이다. 시간당 15달러를 받는 반일 근무 비서나 법률보조원을 한명 둔다면, 3000달러가 들어간다. 사무실 임대료 말고도 전화비, 최소한의 법률서적 유지비, 사무용품 구입비와 운영비가 따로 들어간다. 적당히 잡아 한주에 50달러가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추가로 500달러의 비용이 든다. 이런 비용을 모두 빼면 1만달러에서 남는 것은 4천달러다. 이는 주당 400달러, 시간당 10달러다. 뉴욕시에서 부양가족이 있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이 2001년에 시간당 11달러다.

 

게다가 우리가 가정한 변호사는 보통 갓 법대를 나온 사람일 것이며, 학비로 평균 10만달러의 빚을 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도 최소 750달러씩을 매달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헌신적으로 일하기 위해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는 싸구려 아파트에 사는 변호사 이야기를 접한다고 놀랄 것도 없다.

 

반면, 매일 법정에 나가서 재빨리 유죄인정 거래를 함으로써 예닐곱명의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척 하는 변호사는 시간당 40달러씩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변호사는 조사할 필요도 그렇다고 법적 대응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비서를 둘 일도 없고 기본 도서를 구비할 이유도 없다.

 

이런 정보를 검토하다 보니, 내가 뉴욕 형사 법정에 처음 섰을 때가 기억난다. 정의의 표상을 유지하려고 고심 끝에 누군가 판사석 위에 있는 미국 국기에 비닐봉지를 씌워놓았다. 비닐봉지는 노랗게 됐고 얼룩져 있었다. 판사 뒤에는 바랜 금속 활자로 된 글이 있었는데 한 자가 떨어져서 "우리는 하느님을 녹슬게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믿는다 곧 trust에서 t가 떨어져 녹슬다 곧 rust가 됐다 = 옮긴이)

 

변호사 임무에 대한 연방 대법원의 태도는 최근의 텍사즈주 대 콥(Cobb) 사건에 대한 판결에 잘 나타나있다. 대법원은 한 사건 처리를 위해 가난한 피고를 대리하도록 지명된 관선 변호인은 관련된 다른 사건도 맡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5 대 4 표결로 결정했다. 그래서 정부는 피고가 공식적으로 고소된 범죄 이외의 부수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변호인이 없는 것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가난한 이가 불법 무기 소지로 체포됐다고 가정하자. 변호인이 선임되고 피고는 구치소에 수감된다. 경찰은 피고가 무기를 이용해 강도짓을 하는 식으로 다른 범죄도 저질렀을 거라고 의심한다. 피고는 변호사가 있으니 그 변호사가 경찰에게 조사 때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고, 경찰도 이 조건을 승낙했다고 치자. 하지만 대법원의 결정이 뜻하는 것은, 피고는 변호사가 배석하지 않은 채 조사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법원의 논리는, 정부의 규정에 따른 대리 계약은 특정한 혐의에만 한정하는 것이지 피고의 자유 전반을 보호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송사건이 밀려서 피고가 보석을 몇주씩 기다려야하는 지역사회도 상당수에 이른다. 가난한 이들은 현금으로 보석금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구치소에 있어야 한다. 인종간의 체포 형태 차별에다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간의 차이까지 더해져 차이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런 지역사회에서는, 피고가 법정에 설 때까지 상당 기간동안 변호사 선임을 못받는 일이 잦다. 이런 장치 때문에 피고가 보석금을 낮추거나 개인적 서약을 통해 석방되도록 도와줄 변호사가 없는 가운데 구치소에 머물게 된다. 이런 체계의 사회적 결과는 무죄로 추정될지언정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기 때문에 직업을 잃고 가족이 붕괴되고 지역사회와 맺은 끈이 끊어지는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진정, 헌법은 형식상 변호사의 실질적인 도움을 보장하고 있다. 제대로 해석한다면 이는, 변호사와 피고간 계약이 의뢰인의 욕구와 이해를 반영하도록 보장하는 장치여야 하며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상업거래 영역에서는 부자가 변호사를 고용하면 변호사는 고객과 대화하고 고객을 성실하고 열심히 대변해야 한다. 법률 문제가 복잡하고 특수한 것이면,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자신은 사건에 필요한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계약은 의뢰인이 제시한 목표에 맞춰지고, 변호사는 열심히 기술껏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것이 법적 윤리의 원칙이다. 하지만 법적 윤리는 또한 변호사가 의뢰인이 잘못하도록 돕지는 못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도 대개는 정부가 법원과 관련 기관을 통해 부유한 의뢰인의 욕망과 목표를 충족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와 아주 대조적으로, 가난한 피고와 관선 변호인의 관계는 느슨하고 임의적인 기준에 따르고 있다. 변호사가 무능한지 판단하는 경우, 법원은 이른바 전술적 결정에 상당한 여지를 주고 있다. 전술적 결정에는 피고가 항변할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증인에 대한 반대심문을 안하는 것, 배심원들에게 상징적인 주장만 펴는 것 등도 포함된다. 대법원이 밝혔듯이, "변호사의 실적에 대한 사법적 조사는 아주 정중해야(deferential) 한다." 무엇에 정중하란 말인가? 당연히, 변호사가 해야 하는 것을 또는 의뢰인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않겠다고 한 결정에 대해 정중하란 말이다.

 

"사법적 조사"(judicial scrutiny)라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 보통 그렇듯이, 1심에서 관선 변호인으로 일한 사람이 항소심도 맡는다면, 자신이 1심에서 한 것이 결함이 있었다고 주장할 리가 없다. 항소심이 끝나고 피고가 감옥에서 생각해보니 변호사가 자신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것 같더라도,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사실 관계를 수집하고 이런 주장을 할 권리를 얻지 못한다. 직접 상소가 끝나고 대법원이 사건을 맡게 되면 변호를 받을 헌법적 권리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래서 재판의 불공정성이나 자신을 교도소로 보낸 유죄인정 거래에 도전할 효과적인 방법이 막힌 수많은 수감자들이 존재한다.

 

현행 연방 법률상, 수감자가 자신의 형에 대한 연방정부의 재심을 시도하면서 제대로 된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할 때, 연방 법원은 주 법원의 헌법 해석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면 보상하지 않는다. 예컨대, 최근 사형사건 재판에서 연방 법원은 피고쪽 변호사가 피고의 끔찍한 어린시절과 "고문으로 점철된" 수감 상태를 입증하는 증거를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적으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하지만 연방 법원은, 미시시피 대법원이 그 변호사가 적절했다고 본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런 무서운 결정을 이해하려면 미시시피 대법원은 선출직으로 구성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70년대에 아주 잠깐동안 주지사가 공석을 채우기 위해 지명한 이 대법원의 판사 한명이 몇건의 사형 판결을 뒤집는 쪽에 표를 던졌다. 다음 선거에서 그는 낙선했다.

 

이는 우리에게 관선 변호인과 피고의 관계, 유죄인정 거래와 관련된 계약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이 혐의를 썼다고 하자. 관선 변호인은, 구치소에 있으면서 재판을 기다리라고, 또 아마 기소될 것이고 그래서 상당 기간 구치소에 있어야 할 거라고 지적한다. 다른 한편, 유죄를 인정하면 형 감면을 받게될 것이다. 경미한 사건이라면 "이미 구치소에서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석방될 것이다. 의뢰인과 맺은 "계약"의 본성상 변호사는 물론 이 꿈의 어두운 그늘쪽이 현실화하도록 할 위치에 있다. 변호사의 무관심과 부주의 때문에 소송이 열리면 유죄 판결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사사건의 90% 정도가 유죄인정 거래로 귀결되는 전형적인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피고와 주 정부간의 "계약"은 관례적인 형식을 따른다. 피고는 혐의를 이해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변호사의 부추김 때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이제 재판을 포기하고 모든 권리의 주장과 소송에 관련된 증인에 대한 반대심문을 포기하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종종 피고들은 현실적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판사는 거래를 마치고 선고를 한다.

 

이 장면에서 무엇이 잘못됐나? 두가지가 문제다. 가장된 동의는 비현실적이다. 또 피고는 자신이 벌금형에 처해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진짜로 전해듣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다. 최근에 검찰은 항소권 포기까지 유도함으로써 불공평에 3번째 차원을 더했다.

 

먼저 동의 문제. 자유로운 거래라면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고문당한 수감자는 현실적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발언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노동자는 돈을 벌 길이 없기 때문에 근로기준 이하의 노동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다. 유죄인정 거래에서 한탄스런 수준의 법적 대리는 대부분의 가난한 피고가 유죄인정 거래라는 덫을 빠져나올 현실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분명 유죄인정을 하는 많은 피고는 사실 유죄이고 그래서 주 정부가 소송을 벌이는 수고를 덜게 해준다. 그러나 매년 유감스럽게 많은 소송사건에서, 피고가 유죄인정 거래로 내몰린 것으로 드러난다. 또 "죄있는" 피고가 유죄인정 거래를 시도하더라도, 변호사가 일을 제대로 못하면 변호사가 감형을 위해 공격적이고도 상상력 풍부하게 증거를 제시하고 변론을 할 때보다 더 중형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같은 몇몇 서유럽 국가에서는 체제 자체가 변호사에게 유죄 판결 문제에 대해 열심히 항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에 상응해서 실형 선고와 수감자도 준다.

 

두번째로, 정보를 충분히 얻고 합의하느냐 문제. 대법원은 유죄인정 거래를 시도하는 피고에게는 그가 재판권 곧 증인을 요청하는 것 등등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점만 알려주면 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최고형량도 알려줘야 한다는 태도다. 하지만 "3진 아웃제"(three strikes) 법에 따라 중범죄로 3번의 판결을 받으면 종신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려주는지는 의심스럽다. 대법원은, 경찰의 불법 행위를 문제 삼을 권리나 일반적으로 정부가 침해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절차상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피고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는 태도다. 그래서 보통 피고는 이런 절차상의 권리를 주장하면 혐의를 벗거나 훨씬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지 못하게 된다.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새로 추가된 꾀가 바로 피고가 거래의 한 부분으로 유죄인정 거래가 불공정했다고 결코 문제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검찰쪽이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요즘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보통의 상거래에 비유하면 이런 행위는 차를 사라고 강력하게 홍보하고 압력을 행사해 차를 사게 한 뒤에 치명적인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환을 요구하면 안된다는 것과 같다. 몇몇 상소법원은 이런 합의가 유효한 것인지 따지지만, 종종, 아마도 대부분이겠지만, 이를 인정한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듯 높은 비율로 사람들을 교도소로 밀어넣고 있다. 근원은 의심할 것없이 과도한 범죄화와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는 경찰과 검찰의 결정이다. 변호사와 의뢰인간과 의뢰인과 정부간의 계약이라는 이 쌍둥이의 사기 계약이, 이런 종류의 권력 남용을 심의하고 고치기 위해 만들어진 명백한 헌법적 장치들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두가지 의문이 남는다. 무엇이 사법체계를 이 방향으로 몰아가는가? 또 제대로 된 변호사는 단지 꿈일 뿐인가? 체계가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은, 계급의식을 불러넣어줄 생산 수단도, 노동도, 변호사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은 보통 변호사의 비율이 적다. 지난 20년동안 단지 멕시코 출신 변호사들만이 인구 비율에 비해 많았다. 법조계에 진출한 유색인종들은 가장 낮은 자리로 좌천되는 경향이 있으며 승진할 때 인종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 승진하는 한가지 길은, 인종 문제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대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불평등을 고치기 위해 개설되는 법대의 교과과정은 점점 더 공격을 받고 있다.

 

변호사들은 잉여가치를 소비한다. 잉여가치를 분배받는 사람들은 대개 이 억압적인 체제 편을 든다. 노동조직들도 변호사를 고용하지만, 이런 변호사들이 용감하게 하는 일은 노동자 권리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지 형사 사건의 정의 구현에 관한 것은 아니다.

 

이런 체제에 대한 도전이 많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실제로 많은 도전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처럼, 변호사들이 계급에 바탕을 둔 편견을 극복하고 변화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2000년에 나온 '법과 자본주의의 등장'(Law and the Rise of Capitalism) 개정판에서 나는 이런 변호사들의 중요성과 그들의 임무에 대해 썼다. 이런 변호사들은 사건의 한복판에 서있지는 않지만, 한복판에 있는 이들 또는 정부와 다툼을 벌이는 이들을 돕고 있다. 변호사들은 정의 실현 요청이 논리적인 법적 요구와 원칙이 되도록 돕고 있다. 그들은 변화가 성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이 낡은 체제 안에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 열린 공간이 닫힌다면, 그들은 새로운 질서가 생겨날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몇 사람은 내가 제시한 변호사의 잠재적 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투쟁을 거듭하면서 정의의 투사들은 법률적 이념을 그려냈다. 넬슨 만델라와 올리버 탐보는 변호사였으며, 그들의 끊임없는 정의실현 요구는 변혁된 남아프리카에서 꽃필 수 있는 법률적 이념으로 표현됐다.

 

상당수에 이르는 뛰어난 공공 문제 옹호자들과 관선 변호인들은 한번씩 한번씩 체제와 싸운다. 우리는 예브게니 에프투센코의 말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너무나 가슴 저미게 우리 아이들은 부끄러워하리라
마침내 복수를 하면서, 이 공포에 대해
너무나도 낯선 때
전체의 통합이 용기 같아 보이던 때의 공포에 대해
How sharply our children will be ashamed
Taking at last their vengeance for these horrors
That in so strange a time
Common integrity could look like courage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워싱턴법대 같은 몇몇 법대에서는 법률 실증 교육을 통해 현 체제가 만들어내는 도전에 변호사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볼 때 법대 졸업생의 3%만 공익법 일을 한다. 25년전의 15%에 비교되는 수치다. 워싱턴법대에서 우리는 이 비율이 평균치의 3배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주 정부 차원, 연방 정부 차원의 법률 서비스 기금에 대한 제한 때문에 이 분야에서 일을 얻기가 아주 어려워지고 있다. 한편 공익 업무를 선택하는 법대 졸업생들은 민사 사건을 맡는 졸업생이 기대할 수 있는 수입보다 20%는 수입이 적게 된다. 25년전에는 이 차이가 훨씬 적어 10% 정도였다. 관심 있는 법학도들은 전국 변호사 길드 같은 진보적인 단체들과 연대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은 많은 피고들의 권리를 신장하고 전체 교도체계나 형법 체계를 목표로 삼는 집단 소송을 통해 창조적인 방법으로 불공정을 공격하고 있다. 예컨대, 스티븐 브라이트(Steven Bright)가 이끄는 남부인권센터(the Southern Center for Human Rights)는 의료보호 개선과 보석 신청을 위해 변호인의 조력을 더 잘 얻기 위한 소송을 효과적으로 벌였다. 비슷한 소송을 재소자 인권 프로젝트(the Prisoners Rights Project)와 헌법권센터(the Center for Constitutional Rights)도 제기했다.

 

대규모 집단소송은 1940, 50, 60년대의 시민권 소송이 건설적인 기여를 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중요하다. 보수적인 판사들이 있는 현실 상황에서는, 이런 소송이 성공하려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집단 소송제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소송은 쟁점에 대중적인 관심이 모아지게 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이는 더 폭넓은 조직적 노력의 일부분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도, 변호사의 세계관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요구와 필요가 우선순위를 차지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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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앤젤라 조던 데이비스, '미국의 검사: 독립성, 권력, 독재의 위협'은 많은 유용한 사례를 담고있다.
     Angela Jordan Davis, The American Prosecutor: Independence, Power and the Threat of Tyranny, 86 Iowa L. Rev. 393 (2001) contains many useful citations.
  • 변호사의 발언에 대한 대법원 재판은 젠틸 대 네바다 주 법조계 사건이다. 꼭 지적할 것은, 법원이 헌법 제1 수정조항에 근거해 젠틸씨에 대한 징계처분을 뒤집었다는 점이다. 반면 이와 별개로 법원의 다수는 향후 사건에 대한 기준을 정했다.
    The Supreme Court case on lawyer speech is Gentile v. State Bar of Nevada, 501 U.S. 1030 (1991). It must be noted, however, that the Court did reverse the disciplinary action against Mr. Gentile on first amendment grounds, while a separate majority of the Court set a standard for future cases.
  • 관선 변호인이 특정 사건을 맡지 못하도록 제한한 사례는 텍사스 대 콥 사건이다.
    The case limiting the appointed lawyer's representation to the specific case is Texas v. Cobb, No. 99-1702 (April 2, 2001).
  • 사형 판결 소송의 변호사에 대한 연구는 훌륭한 심포지엄인 '카터센터의 사형 판결 심포지엄'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The study of death penalty counsel is part of a superb Symposium, Carter Center Symposium on the Death Penalty, 14 Ga. St. U. L. Rev. 329 (1998).
  • 변호사가 별 도움을 주지 못한 사건에는 스트리크랜드 대 워싱턴 사건도 포함된다.
    Ineffective assistance of counsel cases include Strickland v. Washington, 466 U.S. 668 (1984).
  • 권리의 포기에 관해서는 마이클 타이거의 '서문: 헌법의 권리 포기: 성채 안의 소란'을 보라.
    On waiver of rights, see Michael E. Tigar, Foreword: Waiver of Constitutional Rights: Disquiet in the Citadel, 84 Harv. L. Rev. 1 (1970).
  • 뉴욕타임스 기사는 2001년 4월8일~10일 3일동안 실렸으며 다음의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www.nytimes.com/2001/04/08/nyregion/08LAWY.html
    http://www.nytimes.com/2001/04/09/nyregion/09LEGA.html
    http://www.nytimes.com/2001/04/10/nyregion/10LAWY.html
  • 미시시피 소송건은 닐 대 퍼킷 사건이다.
    The Mississippi case is Neal v. Puckett, 2001 WL 43274 (5th Cir.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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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타이거는 미국 법조계의 리더이며 동시에 공개적인 급진주의자이면서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가이다. 그는 워싱턴시 아메리카대학 워싱턴법대 교수이다. 또 2000년에 개정판이 나온 '법과 자본주의의 등장'을 썼다.

 

원문: www.monthlyreview.org/0701tigar.htm

번역: 신기섭

2004/07/09 21:05 2004/07/0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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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