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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주의인가

앨버트 아인슈타인 (by Albert Einstein)

 

이 글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1949년 5월 미국의 독립계 좌파 월간지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쓴 것이며, 이 잡지는 창간특집호에 이 글을 종종 다시 싣습니다.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슬리리뷰 = 옮긴이)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문은 먼슬리리뷰 (www.monthlyreview.org/598einst.htm) 에 있습니다.

번역: 신기섭

2004/07/09 21:11 2004/07/09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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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자 스티븐 굴드 - 래디컬하다는 건 무엇인가?

리처드 르원틴(Richard C. Lewontin), 리처드 레빈스(Richard Levins)

<먼슬리 리뷰> 2002년 11월호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굴드의 `래디컬한(근본적인)' 정치적, 지적 인생을 동료 학자들인 리처드 르원틴과 리처드 레빈스가 회고하는 글입니다. "래디컬함이란 언제나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첫번째 원칙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이다"는 말은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 또 "(변함없이 래디컬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지만, 우리 누구도 (래디컬함을 위한) 투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말은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올해초, 스티븐 굴드(Stephen Jay Gould)는 폐암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회복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2002년 5월20일 60살에 숨졌다. 20년전 그는 석면에 노출되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중피종에 걸렸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당시 치료는 잘 됐으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적어도 그의 친구들에게는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거의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인상까지 줬다. 환경 공해의 결과로 추정되는 암에서 회복됐지만 그는 또 다른 암에 굴복하고 말았다.

 

스티븐 굴드의 공적인 지식 인생과 정치 인생은 독특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먼저 그는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사가로서 진화과정에 대한 우리의 식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둘째로, 그는 일반 대중을 위해 글을 쓰는 과학 해설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셋째로, 그는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와 억압에 반대하는 일관된 정치 활동가였다. 이런 면에서 그와 가장 닮은 인물은 아마도 1930년대의 영국 생물학자 제이. 비. 에스. 홀데인(J. B. S. Haldane)일 것이다. 그는 근대 진화유전학의 기초를 세우고 대중을 위한 뛰어난 과학 저술가이며, 우상파괴에 앞장서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동시에 `데일리 워커'의 칼럼니스트였으며, 공산당이 과학을 당강령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하자 마침내 당과 갈라선 인물이었다.

 

스티브 굴드의 작업을 특징짓는 것은 변치않는 래디컬리즘이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는 극단적(extreme)과 동의어로 쓰인다. <먼슬리리뷰>는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 독자에게는 래디컬한(극단적인) 잡지이다. 스티브 굴드는 래디컬한 수술을 통해 뇌의 종양을 제거했다. 또 래디컬한 사람은 좌익 (또는 우익)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옥스포드사전을 간단히 훑어 보기만해도, 이 단어의 뿌리는 라틴어로 뿌리라는 뜻의 라딕스(radix)임을 알 수 있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사물을 근본 뿌리부터 고려하는 것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첫번째 원칙에 맞춰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래디컬하려는 욕구는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또 "왜 내가 저 길이 아니라 이 길을 따르고 있는가?"라고 물으려는 욕구이다. 스티브 굴드는 래디컬한 충동의 소유자였으며 그것이 제시하는 것을 따랐다.

 

먼저, 그는 과학에서 래디컬했다. 진화생물학에 끼친 그의 가장 유명한 공헌은 동료 나일스 엘드리지(Niles Eldridge)와 함께 만들어낸 단절된 평형(punctuated equilibrium)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진화의 시대에 유기체 구성의 변화에 대한 표준적 이론은 변화가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다소간 균등한 변화가 지속적이면서 천천히 그리고 점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윈의 19세기 저작은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사람들은 이 이론이 다윈의 생각이라고 여겼다. 근대 유전학은, 발육 단계에서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이는 물려받은 변화라는 것이 유기체에 아주 사소한 변화만 유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돌연변이는 오랜 기간동안 아주 일정한 비율로 나타나며 그런 작은 변화의 자연 도태(선택)의 힘 또한 강하지 않다. 이런 사실은 모두 오랜 기간동안 종의 변화가 꾸준하면서도 천천히 나타남을 지적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화석을 보면, 변화는 훨씬 더 불규칙하다. 지리적 시간상 연속된 시대의 화석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며 둘 사이의 중간단계로 추정되는 시기를 보여주는 증거는 많지 않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화석들이 상대적으로 아주 희귀하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유기체의 실제적 진화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앞뒤가 딱 맞는 것이다. 그러나 엘드리지와 굴드는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서 자연도태에 따른 변화율이 진정 모든 사람이 생각하듯이 꾸준한 것인지 되물었다. 보통의 화석보다 훨씬 더 순간적인 기록을 보여주는 일련의 화석을 검토함으로써 두 사람은 오랫동안 사실상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대부분의 변화가 짧은 기간동안 나타남으로써 단절되는 증거를 발견했다. 그들은 이 발견을 이론으로 일반화했다. 진화는 발작적이며 갑자기 나타난다는 것이 그것인데, 이 이론은 환경의 주요한 변화가 갑자기 나타난 직후에 진화의 대부분이 이뤄진다는 것 등 몇가지 가능한 해명을 제시한다. 스티브 굴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삶의 역사에서 중요한 불규칙한 사건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됐다. 그는 지구와 거대한 혜성의 충돌 이후 갑작스런 생물종의 대량 멸종과 여기서 살아남은 제한적인 생물군에 의한 생물 세계의 재구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의 삽화적인 진화론과 역사 단계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그의 지지를 단순히 연결하려는 유혹은 피해야 한다. 연결고리는 이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이 고리는 그의 래디컬리즘에 있다.

 

굴드의 과학 래디컬리즘의 다른 면은 진화에 대한 설명에 접근하는 방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삶의 역사와 이것의 지리학적 분포와 생태적 분포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자연도태가 살아남은 유기체와 멸종한 유기체의 모든 특징의 원인이라고 여기며, 이에 대한 해명을 제시하는 것과 관련된 생물학자의 임무는 한 종의 어떤 특징이 왜 자연도태 과정에서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인원의 조상에서 진화하면서 인간종의 털 대부분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눈썹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눈썹이 이롭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스티브가 과학 저작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단순한 낙관적인 적응주의에 대한 거부였으며 더 나아가 진화과정의 변화 원인을 찾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근본적인 생물학적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진화란 어떤 선택하는 세력이 유발할 뿐 아니라 임의의 결과물이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남은 특징들은 다른 특성의 선택 과정의 물리적 부산물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진화적 변화의 역사적 우연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어떤 것이 특정한 시기에 어떤 이유에선가 선택됐을 것이고, 이와 완전히 다른 어떤 이유로 다른 시기에 어떤 것이 선택되며, 그래서 최종 산물은 진화의 연장선 전체 역사의 결과이고 이는 적응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해명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인간이 지금의 모습을 띤 것은, 육상 척추동물이 많은 지느러미 같은 것을 단지 네개의 수족으로 단순화했고 조류의 심장은 우연히 오른쪽에 자리잡은 반면 포유류의 심장은 왼쪽에 자리잡게 됐고 내이의 뼈는 우리의 파충류 조상의 턱 일부분이 변화한 것이며, 우리의 진화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때에 우연히도 동아프리카가 건조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능을 갖춘 생물이 외계에서 우리를 찾아온다면, 그들이 우리처럼 인간의 모습을 띠고 성적 위계질서 때문에 고통을 겪으며 그들의 우주선에 지휘부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굴드는 또 유기체의 서로 다른 부위간 발육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관한 유명한 사례가 그의 아일랜드 큰사슴(Irish elk) 연구다. 이 사슴은 요즘 사슴에 비해 뿔의 크기가 훨씬 큰 멸종동물이다. 적응주의가 만들어낸 설명은, 숫놈의 뿔은 암놈 쟁탈전에 쓰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자연도태 과정에서 커졌다는 것이다. 또 아일랜드 큰사슴은 이 남성의 상징물을 너무 진화시킨 나머지 감당할 수 없이 뿔이 커졌고 그래서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멸종했다는 것이다. 스티브가 보여준 것은, 덩치가 큰 사슴과 작은 사슴의 뿔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둘의 몸집 차이보다 훨씬 더 차이가 많이 나며, 이는 발육 과정에서 몸이 성장하는 비율과 뿔이 성장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아일랜드 큰사슴은 같은 몸집의 다른 사슴과 뿔의 크기가 정확하게 일치했으며 이 때문에 특별한 자연도태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진화의 복잡성에 대한 굴드의 주장이 다윈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 다른 패러다임이라고는 없으며 단지 다윈의 애초 틀을 풍부하게 하는 완벽한 "정상 과학"이 있을 뿐이다. 이런 그의 주장들은 그의 설명에 나타나는 래디컬한 규칙을 정형화한 것이며, 언제나 근본적인 생물학 과정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제시하는 것을 본 것이다.

 

굴드가 최대 명성을 얻은 것은 생물학자로서가 아니라 대중들을 위한 과학 해설자로서였다. 과학적 지식과 사회적 행동의 상관관계가 언제나 문제였다. 과학적 지식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이해하는 비밀의 지식이다. 하지만 이 지식을 사적인 권력과 공권력이 사용하고 통제하는 것은 사람 전체에게 커다란 사회적 영향을 끼친다. 중요한 지식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극소수의 손에 있는데 어떻게 민주국가는 고사하고 그것과 유사한 것이라도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번지르한 대답은, 과학 언론과 과학자들의 대중적인 저술행위같은 과학 대중화 도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식있는 대중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화 그 자체는 보통 혼돈을 유발하고 엘리트들의 의제를 강요하는 도구이다.

 

과학 언론인들은 두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첫째는, 아무리 교육을 잘받고 똑똑하고 동기로 충반할지라도,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과학자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생물학자조차 물리학자가 양자역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믿지않을 도리가 없다. 과학보도의 많은 부분은 과학기관의 기자회견 또는 보도자료에서 출발한다. "블랙레그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오늘 반복적인 행동에 따른 부상에 예민한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는 식이다. 두번째로, 과학 기자들이 몸담고 있는 언론매체들은 극적인 설명을 기사에 넣으라고 강하게 압박한다. 소중한 지면을, 모든 것이 너무나 복잡하며 어떤 예상도 할 수 없고 물질의 진실을 발견하는 실험에 심각한 어려움이 존재하며, 결국 우리가 답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기사에 할애할 편집자가 어디에 있겠나? 세번째로, 과학적 기술이 비밀스럽다는 점은 가장 지식이 풍부한 기자와 독자사이에서조차 극복 불가능한 수사적 장벽이 생기게 만든다. 일반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투명한 설명을 해주려면 글 쓰는 사람이 최대한 깊은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보통 잘 깨닫지 못한다.

 

과학자들과 대중 대상의 글을 쓰는 그들의 전기작가들은 보통 지적인 삶의 낭만, 과학의 경이를 무비판적으로 강조하고, 그들의 작업에 대한 한층 더 큰 지지를 얻기 위해 선전, 선동을 일삼는 데 관심을 둔다. 스티븐 호킹과 그의 지적인 작업에 사로잡힐 수 없을 만큼 냉담한 가슴을 지닌 이가 어디 있겠나? (글의 목적이) 과학적 지식 집단에 대한 단순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일 때조차 (그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복잡미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단순하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게 만드는 압박감을 억제하기 힘들다.

 

스티브 굴드는 예외였다. `자연사잡지'에 매달 쓴 과학 문제에 대한 그의 글 300개는, 이 가운데 상당수는 책 형태로 보급되기도 했는데, (지적 수준을) 독자 수준으로 떨어뜨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과학을 과도하게 단순화하지도 않는 설명 기법으로 과학적 발견과 문제를 진실되면서도 세심하게 해설해줬다. 그는 야구, 합창 음악, 교회 건축 등에 대한 언급을 곁들여 문장의 생기를 더하면서 복잡한 진실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해줬다. 대중들을 위해 글을 쓰려고 할 때, 그 대중이 어떤 대중인지를 명확히 해야함은 물론이다. 우루과이 작가 에두아르도 칼레아노는 대부분의 인민이 문맹인데 우리가 "인민"을 위해 글을 쓴다고 하는 게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북반구에는 공식적인 문맹이 훨씬 적지만, 그래도 굴드가 대상으로 삼은 독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 역시 과학적인 사상 자체 보다는 합창 음악과 교회 건축에 대한 은유를 통해 훨씬 더 의미있는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는 불특정 독자이기는 마찬가지다.

 

스티브가 다룬 주제 대부분은 진화 과정과 진화의 산물의 복잡함과 다양함에 대해 엄밀히 설명하는 것들이었다. 그가 다룬 제재들이 아주 다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밑에 일관되게 유지되는 주제가 있었다. 그건 생물 세계의 복잡함을 어떤 거대 일반 이론을 표현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으며, 각각의 것들을 밑바탕부터 따져서 각각을 인과관계의 다양한 물질적 경로에서 실현된 개별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삶 측면에서 보면 그는 좌파 운동 전반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대중을 위한 과학운동과 뉴욕마르크스주의학교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겼지만,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이 정체성이 뜻하는 것은 그렇게 확연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그와 동지 관계를 유지했지만, 우리가 그와 마르크스의 역사이론과 정치경제학을 논한 적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충실함으로써 그는 대중적 지식인으로서의 명성과 합법성을 이용해 대중들이 마르크스의 분석의 유효성에 대해 더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려 애썼다.

 

실제적 정치 투쟁 단계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창조론에 맞서 싸우고 사회생물학과 인종주의 같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정당성을 부수는 작업이었다. 그는 아칸소주 의회에서 진화론자간 차이나 진화론에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진화론이 삶을 이해하는 조직적 원리라는 사실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전쟁과 인종주의, 남녀 성 차별, 기업주도의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인간 본성이 진화의 과정에서 생성됐다고 주장하는 사회생물학에 맞서는 독창적인 선언을 제기한 필자들 가운데 한명이 그였다. 그는 내내 사회생물학 이념을 공격했고 그것이 주장하는 유전학과 진화론적 뿌리가 얼마나 얇팍한 것인지 폭로했다. 그런데 그가 생물학적 결정론을 깨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은, 유명 과학자들의 인종주의와 거짓을 폭로한 `사람에 대한 오판(The Mismeasure of Man)'을 써서 널리 보급한 것이다. 여기서도 그는 다시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보여줬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국, 영국, 유럽의 생물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이 표현한 계급적 편견과 인종주의를 명확히 보여주는데 만족하지 않은 그는, 북유럽인이 두뇌가 더 크고 정신도 우월하다고 그들이 주장하면서 근거로 삼은 자료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모든 사례에서 표본이 의도적으로 왜곡됐거나 자료를 잘못 제시했거나 심지어 없는 것을 만들어내기까지 하고 잘못된 결론을 도출했음을 밝혀냈다. 시릴 버트(Cyril Burt)가 제시한 지능지수에 대한 완벽하게 잘못된 통계는 이미 리오 캐민(Leo Kamin)이 폭로한 바 있지만, 이는 자칫 특이한 한가지 일탈 정도로 간과될 뻔했다. 일군의 저명 연구자들이 교묘한 자료 조작을 했음을 스티브 굴드가 밝혀냄으로써 버트의 잘못은 정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것임이 분명해졌다. 이념적인 신념이 과학자들의 연구 방향과 결론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적 의제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기를 치는 것도 일반화될 수 있을까? 또 "객관적인" 과학의 기존 체제에 대해 이보다 더 래디컬한 공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런 (스티브 굴드에 대한) 기억을 전함에 있어서 래디컬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장과 행동의 밑바탕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티브 굴드를 포함한 누구도 변함없이 래디컬할 수 있었다고 내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래비 타폰(Rabbi Tarfon)이 썼듯이, "성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는 아니지만, 우리 누구도 이를 위한 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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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르원틴과 리처드 레빈스는 40년 이상된 동지들이다. 그들은 `변증법적 생물학자' (하버드대 출판부, 1987)와 `이념 차원으로 본 생물학: 디엔에이의 독트린' (하퍼콜린스, 1992)를 함께 썼다. 로원틴은 하버드대 생물학과 연구교수이며 스티브 굴드과 함께 진화에 대한 공동 연구과정을 맡아 가르쳤다. 레빈스는 하버드대 공공보건대학의 인간생태 프로그램 책임자이다.

RICHARD C. LEWONTIN and RICHARD LEVINS have been colleagues and comrades for over forty years. They are the authors of The Dialectical Biologist (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and Biology as Ideology: The Doctrine of DNA (HarperCollins, 1992). Lewontin is Research Professor in Biology at Harvard and taught a joint course in evolution with Steve Gould. Levins is the head of the Human Ecology program at the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

 

 

원문: www.monthlyreview.org/1102lewontin.htm

번역: 신기섭

2004/07/09 21:10 2004/07/0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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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socialism and communism?)

글쓴이: 리오 후버만, 폴 스위지

출처: `사회주의 서설', <먼슬리 리뷰>

 

미국 좌파잡지 <먼슬리 리뷰>를 함께 창간한 두 사람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주 분명하고 쉽게 써놓아서 한번쯤 읽어보실 만할 겁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바로 성장하는 것이며, 새로운 사회의 첫번째 형태이다. 공산주의는 여기서 더 발전했거나 "더 높은 단계"인 사회주의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실적(행위)에 따라 분배한다.(사회주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공산주의)

 

실적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 원칙은, - 말하자면 수행한 일의 질과 양에 따른 것 - 즉각적으로 실현 가능한 실제적인 것이다. 반면에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 원칙은 곧바로 실현할 수 없다. 이는 궁극의 목표이다.

 

명백하게, 공산주의를 달성하기 전에 생산이 그동안 꿈꿔보지 못한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키려면 모든 것이 가장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일에 대한 태도 변화도 나타나야 한다. 해야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기 때문에 일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서 일해야 하는 것이고, 또 일이 자기 자신의 삶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일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풍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생산력을 개발하고, 사람들의 심적, 정신적 관점을 바꾸는 과정의 첫번째 걸음이다. 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단계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 때문에, 스스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전세계 모든 정당이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 하는 정당들은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추정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의 직접 계승자는 다름 아닌 사회주의 뿐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당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당도 사회주의 건설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당과 공산주의당의 차이가 없는가? 물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 계급과 노동 계급의 연대세력이, 국가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면 바로 국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 첫번째 단계로, 노동자를 지배하는 자본가 독재를 자본가 계급을 지배하는 노동자 독재로 전환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를 통해 (개인이 아닌) 계급으로서 자본가는 사라지게 되고, 계급없는 사회가 마침내 이뤄진다는 것이다. 또 사회주의는 단지 권력을 잡고 과거 자본주의적 정부 기구를 이용한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옛 것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국가 기구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국가는 과거 지배계급이 반혁명을 조직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며, 또 자본가들이 저항하면 무력을 사용해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국가의 성격에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런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가 본질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독재를 위한 기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국가를 장악하는 어떤 계급이든,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완벽하게 좋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 과거 자본주의 국가의 기구들을 파괴하고 새로 만들 필요가 없어진다. 곧 사회주의로 진군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적 형식이라는 틀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소련에 대한 두 쪽의 태도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공산당은 소련을 찬양하고 사회주의당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난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에, 소련은 사회주의를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꿈을 현실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소련은 비난받을 가치밖에 없다. 적어도 자신들이 꿈꾸던 그런 사회주의를 결코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인민들의 사유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하는 대신에 더 많은 사람이 과거보다 더 많은 사유 재산을 소유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사유 재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소비재이며,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 쓰이는 재산이 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개인적이지 않으며 생산 수단인 사유 재산이 있다. 이런 재산은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당신의 옷 같은 첫번째 종류의 사유 재산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옷을 만드는 공장과 같은 두번째 종류의 사유 재산을 빼앗겠다는 것이다. 또 생산 수단인 사유 재산을 소수로부터 빼앗음으로써, 다수에게 제공할 소비 수단인 사유 재산이 더 많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생산했지만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에게) 빼앗겼던 재산을, 사회주의에서는 다시 노동자들이 갖고, 더 많은 사유 재산을, 곧 더 많은 옷과 가구와 음식과 극장 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용과 즐거움을 위한 더 많은 사유 재산. 억압과 착취를 위한 사유재산의 폐지. 그것이 사회주의다.

 

번역: 신기섭

2004/07/09 21:09 2004/07/09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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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