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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식민지화하기(Colonising the night)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

<레드 페퍼> 2000년 5월 5월

 

메이데이에 맞춰 쓴 글인데, 밤낮 구별이 없는 24시간 노동, 24시간 영업의 요즘 사회 추세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쓰고 있는 아주 흥미로운 글입니다. 글쓴이는 자본이, 기독교가, 기득권층이 밤을 사악한 것으로 몰아가고, 밤낮 구별과 계절의 구별을 없애버림으로써 민중의 삶을 착취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밤을 죄악시하는 것의 인종차별적, 남녀차별적 경향까지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제 시간에까지 손을 뻗는 자본의 움직임에 맞서는 전지구적 저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이 그리피스가 24시간 사회라는 자본주의적 열반의 뿌리를 따져보고, 이것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날 곧 노동자들과 무정부주의자와 이교도의 기념일 메이데이에 이에 반항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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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밀레니엄돔의 놀이지역에 있는 '입맞춤' 놀이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입장객들이 신나거나 - 입맞춤에 열광하거나 - 하면 안되니까, 놀이지역 입구에 우습게도 무표정한 지시사항 팻말이 놓여있다. '놀이지역에서 뛰지 마시오. 이용객 앞을 가리지 마시오. 신발끈이 확실히 매여있는지 확인하시오. 전기 의자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시오.' 그래드그라인드씨가 여기 왔다가 갔다.(Gradgrind woz ere; Gradgrind는 챨스디킨스의 소설 Hard Times의 주인공 이름이고, 주로 냉혹안 자본가의 상징으로 쓰여짐. 'was here' 를 발음나는 대로 적은 듯함. 양정언 님께서 알려주신 겁니다.: 옮긴이) 놀이지역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조적으로 노동지역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새로운 노동교를 밀어붙이는 지경까지 가고 있다. 먼저 노동의 판에 박은 문구들이 등장한다. 가짜 햄스터 100마리가 100개의 플라스틱 쳇바퀴에서 움직이고 있고, 9시에서 5시까지를 기록하는 출퇴근 자동기록 장치가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끝장났고 노동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밀레니엄체험 회사의 열성 안내원은 말하면서 '선택'과 관련된 '새로운' 노동세계를 어슴푸레하게('눈을 번뜩이며' 라고도 해석될 수 있을듯: 옮긴이) 언급한다. 자신의 작품집을 들고 다니는 전문직, 자유, 유연성. 이 모두가 24시간 사회 때문에 가능해진 것들이다.

 

24시간 사회를 보급하는 이들은 (정확하게) 두 가지 서로 다른 근대적 삶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달래질 수 없게 되어있는 소비적 갈망이며, 다른 하나는 과도하게 바쁜 사회 깊은 곳에 있는 시간 향수병 곧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없다' 증상이다.

 

'24시간 사회'의 저자 리온 크레이츠먼(Leon Kreitzman)과 '미래주의자 잡지'(퓨처리스트 매거진)에 글을 쓰는 마이클 헤이거(L Michael Hager) 같은 옹호론자들은 24시간 사회가 물건 구매와 서비스 이용의 오후 5시 마감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을 부드럽게 해주고, 노동의 자유직화 경향에 도움을 주고 '영원한 임시직'의 전문직 노동자를 고무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산업연합회(CBI)는 24시간 사회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벌들은 24시간 사회라는 개념을 밀어붙이고 있다. 공간적 영역이 소모되자 그들은 시간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해 밤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Tesco)는 말 그대로 하룻밤만에 몇몇 체인점을 24시간 운영체제로 바꾸면서 경쟁자들을 살그머니 앞질렀다.) 주당 노동시간 제한을 깨면서 '선데이 비즈니스' 신문은 홍보에 열을 올렸다. '일요일, 근무의 첫번째 날'이라고. 전문직 노동자 그래드그라인드는 밀레니엄체험 회사에서 일하지 않을 때 교육부에서 부업을 하면서, 5살 어린이에게 숙제를 꼭 부과해야하고 학교를 저녁 늦게까지 운영해야 한다고 자문한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건 말이 안된다.)

 

크레이츠먼 말대로 라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이'는 영국의 일하는 어머니들이다. 부부가 밖에서 똑같은 시간을 일한다면, 부인은 남편보다 집에서 일주일 평균 9시간을 더 일한다. 잔업이 문제라면, 24시간 사회가 그 답이다.

 

그렇게 빠르지 않다. 해결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황을 악화하는 것이다. 일하는 어머니를 한번 보자. 하루 종일 직장 일을 한 뒤에 새로 집안일 전체를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아마 하게될 것)이 정말 더 나은가? 남녀의 잔업 형태를 바꿔서 집안 일을 무시무시하게 싫어하는 남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더 건강한가? (시키지도 않는데 설거지를 하는 남성의 모습보다 더 사랑스런 광경은 거의 없다.) 언제 일할지, 일하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최절정기의 전문직 노동자와 자유직 노동자들만 이익을 볼 것이다. 그러나 덜 자리가 잡힌 전문직, 자유직 노동자들은 훨씬 더 끔찍한 경험 곧 언제나 대기해야 하는 운명인 자영업자가 겪는 자신을 갉아먹는 불안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학교를 늦게까지 열라는 압력은 이중적인 교육체계 곧 부유한 아이는 낮에 학교에 가고 가난한 집 아이는 밤에 가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

 

시간은 언제나 권력의 활동 중심이며, '무정치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24시간 사회야말로 정치적이다. 이 사회는 계급간, 인종간, 성별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24시간 사회는 '속박을 제거한다'고 크레이츠먼은 말한다. 무슨 말씀. 이 사회는 한 부류에 속박을 가함으로써 다른 부류의 속박을 없애는 것이다. 24시간 사회 옹호자들은 절대 다수가 부유한 중산층 백인 남성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3교대의 철야근무' 덕분에 - 직접 또는 간접으로 - 가장 이득을 볼 사람들이지, 자신들이 철야근무를 할 가능성은 가장 적은 이들이다. 시장조사는, '시간이 넘치는' 사람들은 24시간 사회를 반대하는 반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고? 시간이 많은 이들은 돈이 없고 이런 변화로 가장 피해를 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4시간 사회를 반대할 환경 차원의 확고한 이유도 있다. 이 사회는 의도적으로 소비와 낭비를 부추길 것이다. 또 도시인들에게 밤하늘의 별을 볼 권리를 빼앗는 도시의 불빛 공해를 증가시키는 주 요인이다. 24시간 사회는 같은 시간에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공동체의 사회적 결합력을 깨뜨린다.

 

건강 문제도 있다. 미국과 핀란드의 의사들은 최근에 유방암과 24시간 사회의 인공 광선의 상관 관계를 조사했다. 사람의 몸에는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하도록 맞춰진 복잡한 내부 시계가 있다. 이를 심하게 흔들면, 소화불량 궤양 당뇨병 등에 걸린 가능성이 높고, 정신도 불행해질 여지가 크다. 야근 때문에 인간관계가 파괴될 가능성이 높으며, 야근은 성욕을 감퇴시킨다는 보고서도 있다. 미국의 앞서가는 외환거래자인 마이클 마커스(Michael Marcus)는 1980년대 중반에 자신의 생활 형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매일밤 두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홍콩, 취리히, 런던의 외환시장이 열리는 데 맞춰 상황을 점검해야 했다. (효과? '결혼 생활을 파탄냈다.' 입맞춤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 일을 시작한 이들은 수도승들이었다. 죄처럼 어두운 6세기의 밤은 교회 시계의 노예가 됐다. 530년께 성 베네딕트는 새로운 시간 관리를 주장하고 시간과 인간 본성 통제 수단으로 밤에 종을 치라고 주장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새롭고 아주 강력한 태도를 주창했다. 수도승을 깨운 바로 그 자명종이 그 이후 계속 울리기 시작했고, 마이클 마커스를 밤에 두 시간마다 깨우고 있다. 효과 또한 같다. 20세기의 결혼생활을 망친 바로 그것이, (전복을 시도하고 더럽고 어두운) 섹스가 가장 왕성한 때인 밤의 즐거움을 6세기 사람들에게서 빼앗았다. 종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욕에 반하는 금욕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도구였다. 입맞춤은 '문란한 것'이라고 선언됐다.

 

EP 톰슨(Thompson) 등은 개신교의 시간에 대한 평가 - 시간 엄수, 시간관리, 생산적인 시간 사용 - 를 산업혁명을 이끈 돈벌이 욕심과 연결시켜왔다. 산업혁명의 이 시기야말로 다양한 이념의 특이한 융합 속에서 노동시간이 영원히 바뀐 때다.

 

이 때 무엇을 잃었나? 보통 사람들의 두르르 말려있고, 사랑스러우며 자연스럽고 탄력이 있으며 다채롭고 농촌적인 시간이 사라졌다. 대신 황량한 공장의 동시성이 자리잡았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하드 타임스(Hard Times)'에 나오는 '코크타운(Coketown)'에서는 '모든 날이 어제와 똑같고 내일도 차이가 없다. 코크타운에서 시간은 기계처럼 지나간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산업계가 매일 밤낮없이 문을 열면서 낮과 밤의 '시간 구분'을 오염시키고 여름과 겨울의 계절적 차이를 없애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항의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시간 착취를 정확하게 예견했다. '24시간 내내 노동을 전유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고유한 경향이다.' 1820년대와 1830년대 영국 섬유업계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에 대한 권한을 훔쳐간 공장 문 위의 시계를 부쉈다. 노조는 - 곧 바로 불법화했지만 - 가장 먼저 시간 착취를 문제삼아, 1847년 10시간법을 쟁취했다. 1848년 혁명은 (말하자면) 시간을 중심으로 삼았다. 8시간 노동, 8시간 취침, 8시간 놀이.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1886년 메이데이의 수많은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테스코는 '개명(또는 계몽, enlightenment)'과 무슨 관련이 있나? 잠도둑들은 누구인가? 또 24시간 사회는 암묵적인 인종차별과 무슨 관련이 있나?

 

수요일 새벽 3시. 나와 함께 24시간 운영하는 근처의 테스코 체인점에 가서 상징적인 모양의 네스카페 커피 한 병과 퍼실 세제 한 봉지, 마즈다 전구를 사보자. 빛이 어두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성경에서 테스코까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은 바로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의 '어두운 면'을 뿌리깊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밤으로 접어든 (Benighted, '미개한'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것은 저주이다. 사탄은 어둠의 왕자이며 빛의 왕자(인 동시에 빛의 원칙)의 도전을 받는다.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밤을 혐오하고 낮의 특권을 확보하고, 어둠을 악마와 연결시켰다. 이는 빛의 신 마즈다를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개 전구의 절묘한 상징 마즈다에 놀랐을 것이다.) 근대의 가장 더러운 정치학은 성차별과 인종주의에 깔려있는 어둠에 대한 빛의 지배와 관련되어 있다. 계몽은 빛, 가시성, 합리성, 남성의 '과학'을 존경하며, 여성의 '신비'의 어둡고 직관적이며 여성적인 방식을 비방한다. (남성 성기는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로서 빛 속에 서있다. 여성의 질은 사랑스러운 촉촉함과 비밀스런 어둠 속에 겹쳐져 있다.)

 

서구 사회는 인종차별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이런 어둠에 대한 급진적인 혐오를 이용해왔다. 악랄한 비난에 쓰이는 말인 (niger 곧 검정에서 온) 니거 (깜둥이라는 뜻 : 옮긴이) 또는 다키(darkies, 깜둥이라는 뜻 : 옮긴이) 라는 말을 보라. 또 끌어내리는 것은 '까맣게 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denigrate' (검게하다, 모욕하다라는 뜻 : 옮긴이) 같은 말의 과잉을 보라. 게다가 어둡거나 성행위처럼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것은 '불결하고' '더러운' 반면, 깨끗함은 경건함과 성적인 냉담함을 따라 다닌다. (또 퍼실 세제는 더 하얗게 해준다.) 잠은 정치적인 문제이다. 결근보다는 출근(presenteeism, presentee는 받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결근이라는 뜻의 absenteeism과 함께 씀으로써, 임금을 받는 것은 출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중적 의미로 이 표현을 쓴 듯함 : 옮긴이)이 오늘날 노동력의 병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거의 자지 않는 것이 말이다. 또 오전 3시에 네스카페 커피를 사는 것이 말이다. '잠도둑들'의 저자 스탠리 코렌은, 우리는 잠을 빼앗기고 있으며 우리가 자는 평균 시간인 7시간30분보다 더 많은 9시간30분에서 10시간은 잠을 자야한다고 했다. 잠은 '유약한 이들' 예를 들어 소녀들을 위한 것이다.

 

시간의 성정치학에선 강한 남성이 되려면, 몇시간만 잠을 자라고 주장하며 하루종일 여는 슈퍼마켓식 시간을 밀어붙이는 책임을 떠맡은 윈스턴 처칠이나 마거릿 새처(대처)처럼 잠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잠을 제대로 못자면 육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가 줄줄이 이어진다. (새처는 미치지 않았다. 음미해보라.)

 

야근을 하면 잠자는 흐름이 깨진다. 24시간 사회 옹호자들은 기술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한다. 적절하게도, 인라이튼드 기술(Enlightened Technologies)이라는 회사는 빛을 이용해 생리적 리듬을 다시 맞추는 장치를 써서 '잠을 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새벽 3시에 일한다면 이것을 명심하시라. 이 사업은, 당신을 착취해 돈을 버는 다른 사업 때문에 당신이 겪는 잠부족을 이용해 돈벌이하는 것이다. 곱빼기의 마법이라고? 에스프레소 커피 곱빼기로 마시기겠지.

 

24시간 사회는 한 개념의 대립된 개념 지배를 강화시키는 빛의 가장 심오한 문화정치학을 표현한다. 도시의 자연 지배, 빛의 어둠 지배, 남성의 여성 지배, 백인의 흑인 지배, 법인의 일반인 지배, 노동의 놀이 지배, 부자의 가난한 이 지배, 이익의 자연 지배, 기독교의 토속종교 지배, 깨끗함의 세속 지배를 강화시키는 문화정치학을 말이다.

 

24시간 시계의 반대는 무엇일까? 입맞춤이다. 24시간 사회의 반대 개념은 무엇인가? 메이데이다. 24시간 사회가 그래드그라인드같은 이들의 세계의 맞바꿀 수 있는 시간을 대표한다면, 메이데이는 달콤하게 특정한 순간 곧 '특별한' 시간을 대표한다. 지구적 기업들은 24시간 사회를 후원하고, 지구적 시위자들은 메이데이를 지지한다.

 

'런던 거리 되찾기(Reclaim The Streets in London)'가 낸 책자는 2000년 메이데이가 '자본주의에 맞서는 전지구 행동의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세계를 가로질러, 메이데이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다. 메이데이는 국제 노동절로서는 빨갛고, 1886년 처형된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까맣고, 고대 풍요의 메이데이 축제인 벨테인(Beltane) 축제날로서는 푸르다. 이 날은 평범한 사람들의 날이다. 공통의 시간에 한 장소에서 공통의 목적을 이루는 평민들의 날이다. 또 농민들의 반란날이다. 시간 : 오전 11시. 장소 : 런던 의사당 광장.

 

이 행사의 핵심은 '기습적인 씨뿌리기'다. 농민들처럼 '삽과 씨앗과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사방팔방에 씨를 뿌리자는 기획이다'. '런던 거리 되찾기'의 책자는 '저항은 생산적이다'고 주장한다. 모든 씨는 발아한다. 맞다. 벨테인 축제는 이교도 축제 가운데 가장 관능적이고 알몸의 생산력이 왕성한 축제다. 5월제 기둥의 '더러운 춤'이 이 관능적인 날의 핵심이다. 퍼실 세제는 금지된다. 선전 책자는 '더러워질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그렇다. 정말로 더러워지자. 진짜로 거리에서 성교를 하자. 사랑을 만들지 돈을 만들지 말자. 땅을 갈자. 그렇다. 세속적인 것을 되살리자. 입맞춤은 무질서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이날의 질서다. 바로 '그렇다'라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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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그리피스는 플라밍고에서 출판된 '삐삐: 시간에 대한 곁눈질'의 지은이다.

Jay Griffiths is the author of Pip Pip: a sideways look at time, published by Flamingo.

 

원문: www.redpepper.org.uk/cularch/xmayday.html

번역: 신기섭

2004/07/11 15:17 2004/07/1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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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글의 최대 용량은?

용량이 9만6천바이트 넘는 글을 올리니, 전체가 올라가지 않고 뒷부분이 잘리는군요. 진보블로그 개별 글의 최대 용량은 얼마일지 궁금해집니다.
2004/07/10 00:58 2004/07/1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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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지름길 또는 사파티스타의 각국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리샤르 그레망(Richard Greeman)

<뉴 소셜리스트> 1998년 6/7월호

 

멕시코 농민운동체 사파티스타를 지지하는 이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보다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에 집착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밑에 깔린 자본주의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따지자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나는 최근에 스페인에서 열린 "신자유주의 반대와 인간성을 위한 대륙간 만남" 행사에 참석해서 사파티스타 운동에 감명을 받았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을 파괴하려는 세계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공격에 대항하는 진정한 뜻의 첫번째 국제적 대응이 사파티스파의 깃발 아래 열린 것은 아주 적절한 것 같다.

 

올해 스페인 회의가 잘 조직된 것은 아니지만, 이 회의에 감도는 열린 분위기, 당파적이지 않은 성향,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 등은 나를 즐겁게 했다.

 

"신자유주의" 대 "자본주의"

회의 내내 나는 세계화와 삶의 상품화에 저항하는 각종 시도뿐 아니라 경제 대안과 저항의 형태에 대한 흥미로운 의견들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누가 정확하게 "인간성"을 대표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혼란과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해야 하느냐에 대한 혼란을 느꼈다. 마침내 나는, 우리가 반대하는 체제를 지칭하는 이념적 "지름길"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부정확하고 방향이 잘못됐으며 위험하다는 걱정을 하게 됐다.

 

첫째, 나는 "자본주의" 대신 "신자유주의"를 쓰는 것이 부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경제 이론도, 그렇다고 그 이론에 뿌리를 둔 정책도 지칭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본주의라는 말은 경제, 정치 체제 전체를 지칭한다.

 

둘째, 나는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방향이 틀렸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성 억압과 자연 파괴를 막거나 많이 줄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권력층에게 다른 이론(예를 들어 신케인스주의)이나 다른 경제 정책(예를 들면 복지국가 자본주의)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희망이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최근 주장(조직 감축, 합병, 구조조정, 자유시장 도그마, 세계화)에만 반대하고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 곧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을 통해 이윤을 얻는 ‘임노동과 상품교환 체계’에 대한 공격을 소홀히 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는 다른 방식의 국가자본주의 아래서는 인간성이 훨씬 더 잘 지켜질 것처럼 잘못 생각하게 한다. 이런 전망은, 각국의 지역 활동가들이 자유무역과 국제자본의 침투에 대해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애국주의적 지배계급의 보호주의 성향과 결합하도록 초청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점 하나만으로 지역 착취자들, 예컨데 지주나 공장 소유자, 정부 사업 관리자들을 "인간성"을 옹호하는 이들로 여길 수도 있다.

 

이런 환상은 위험하다. 돈은 민족도, 피부색도, 국적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세계적이었다. 자본주의는 "개혁"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본성을 바꾸려는 시도는 상어를 채식 동물로 바꾸려는 것만큼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 상어가 고기와 피를 포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사람과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을 위한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체제를 뿌리뽑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두렵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지름길을 택하는 것이 훨씬 쉽고 안전하며 멋스럽다고 느낀다. 그러나 "위험! 상어가 들끓는 바다임!"이라는 경고도 없이 사람들에게 사회 투쟁의 바다로 뛰어들라고 초청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내가 이 문제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 같다면, 내가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2세대 동안 실패한 급진적인 활동가들을 봤다. 이들은 "반자본주의" 앞에 멈춰선 채 다른 이념적 지름길을 선택하거나, 훨씬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다른 어떤 것에 반대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쉽다는 것을 받아들인 결과, 비참한 실패를 경험했다. 이들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반파시스트주의자들과 내 세대의 반제국주의자들이다.

 

오늘날 질문은 "자본주의 대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위험한 지름길로 가는 것이냐?"이다.

 

마르크스공포증

"ㅈ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거의 병적으로 피하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 내가 들은 것은 딱 한가지다. 칼 마르크스가 이 말을 썼고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낙인찍히기 싫다(마르크스도 이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분명, 많은 이들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완고하고 빛바랬으며 무엇보다 한물 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바퀴를 새로 만들어내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바퀴가 돌아간다"고 어설프게 바꿨다.

 

사물을 본래 이름으로 부르기, 내 생각에 이것이 지혜와 일관성의 시작이다. 아이에게 죽음이나 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나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에 대해 말할 때나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단어란 없다. 모든 단어는 그것의 밑바닥에 깔린 이념적 배경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오늘날 지배적인 언론의 이념은 반 마르크스주의다. 이미 널리 퍼진 이런 분위기는 우리에게 "진부하고" 한물 간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피해 가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고, 포스트산업화를, 포스트포드주의를,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한다. 또 가장 먼저인 동시에 가장 적확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한, 불쌍하고 아무도 읽지 않으며 시대에 뒤떨어졌고 20번은 배척당한 철학자, 마르크스의 오명을 피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묘하게도, 사파티스타의 자극을 받은 운동 진영이 제시한 현재 상황 분석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설득력있는 것조차도 마르크스가 1867년에 자본에 대해 쓴 책의 1997년판보다 못하다. 마르크스의 이른바 "자본의 초기 축적"에 대한 분석은, 1492년부터 자본은 자본가들의 노력과 근면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라, 무력을 써 자본주의 이전 단계 지역 사람들을 "털고 노예화하고 매장"함으로써 축적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세계적인 과정은 계속 강화돼 토착민은 물론이고 환경까지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세계 자본은, 전지구를 장악하고 임금노예건 그의 말대로 "실업자군대"건 모든 사람을 상품의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들 때까지는 결코 확장을 중단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 냈다.

 

그런데도 1997년 마르크스의 이름은 저주받은 채로 남아있다. 이 저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부사령관 마르코스조차 자신의 최근 선언문 "4차대전이 시작됐다"에서 마르크스나 그의 이론을 내비치지도 않은 채 마르크스의 6가지 지적을 "6조각의 퍼즐"이라며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마르코스 퍼즐의 "일곱번째 조각"에 가면, "4차대전"이 부자와 가난한자의 전쟁인지 아니면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와 "국가 주권"의 전쟁인지 모호해진다. 분명히 말하건데, 신자유주의같은 개념은 현재 우리의 조건을 밝혀 보여주고 이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핵심 곧 자본주의 체제 문제를 피해가면, 또 적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지 못하면, 우리의 운동은 다음 위기를 접할 때 이념적으로 무장해제당할 것으로 우려된다. 예를 들어 다음번 증시 붕괴 때 기회주의 자본가 정치인은 표를 얻으려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할 것이며, 월가는 대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들이 선거에서 당선되고 우리의 운동에 동참하도록 놔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자유주의 반대"는 무슨 뜻이 남겠는가?

 

이상한 동침자

오늘날 프랑스와 미국에서 세계화의 시종일관된 적은 파시스트에 버금가는 민족주의자 르펭과 패트 부캐넌뿐이다. 그들은 명백하게 신자유주의에 맞서 "국가 주권"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정치가 이상한 동침자를 만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를 반대하기를 꺼린다면 어떻게 우리의 운동이 이런 운동(예를 들어 공장폐쇄반대운동)과 한 침대에 눕지 않을 수 있을까? 사파티스타가 추동한 운동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각종 난관에 맞서 쟁취하려는 것 곧 인간답게 사는 것은 사악하고 돈이 지배하는 상품교환 체계(임금-노동을 포함해)를 제거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휴머니즘은 과거 운동과 대조를 이룬다. 과거 운동은 단순히 노동자의 몫을 더 많이 요구하거나 정부가 시장을 대체하면 자본주의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본주의 게임’에 갇혀 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임노동 상품 사회를 거부하는 자본주의 이전 원주민들의 휴머니스트 철학에 기초한 사파티스타적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대부분보다 수천배는 더 본래의 마르크스 사상에 가깝다.그리고 우리는 복지국가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국유화주의자, 관료주의적 만병통치약을 갖고 있는 "공산주의자"보다 몇광년은 앞서 있다. 마르크스가 바로 그랬듯이 치아파스 사람들은 자본이 사물이 아니라 인간 관계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 관계란 다른 사람의 땅과 노동력을 훔쳐놓고선, 이 도둑질을 노동력을 사고 파는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는 힘의 관계다. 본래 마르크스처럼, 이들은 또 이런 왜곡되고 돈을 매개로 한 관계를 뿌리뽑아, 평등과 협력과 공동체에 기초한 새로운 인간관계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과업이 우리가 직면해서 정복해야하는 괴물의 이름 곧 자본주의를 거론하기 않은 채 성취될 수 있을까?

 

나는 답을 모른다. 하지만 이 질문은 탐구해 볼 가치가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상어를 채식 동물로 바꾸려다가 다리를 물리고 마는 운동을 지켜보는 데 지쳤다. 또 "폭넓고" "이념적이지 않고" "일관되려고" 애쓰는 것도 지쳤다. 이는 지옥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택하는 것일 뿐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옳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에는 ‘선의’가 깔려있다."

 

연대의 뜻을 전하며 리샤르 그레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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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그레망은 빅토르 세르게의 소설 번역자로 가장 잘 알려진 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보이지 않는 인터내셔널... 이는 온 세상에 퍼져 있다"라는 것으로 곧 인터넷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의 주소는 16 r. de la Teinturerie, Montepellier 34000, France이며 전자우편 주소는 richard.greeman@hol.fr 이다.

 

 

번역: 신기섭

2004/07/09 21:12 2004/07/0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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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