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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추기

발터 벤야민(외래어 표기법 기준으로는 베냐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뒤늦게 읽었다. 간단한 글이 아닌데, 특히 맨 마지막의 추기는 꼭 읽어볼만한 것 같아서 적어둔다. 강유원 등 여러명이 번역한 판본이다. 번역본 전체가 있는 게시판 보기

 

추기(追記)

 

현대인의 점증적인 프롤레타리아트화와 대중의 점증적인 형성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다. 파시즘은 대중이 폐지하고자 하는 소유관계는 건드리지 않은채 새로이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화한 대중을 조직하려 하고 있다. 파시즘은 대중의 의사를 표현하게(그들의 권리를 찾게가 결코 아니라) 하는 데에서 구원을 찾고자 한다.* 대중은 소유관계의 변화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파시즘은 소유관계를 보존하면서 그들에게 하나의 표현을 제공하려고 한다. 파시즘은 시종일관 정치적 생의 심미화로 귀착한다. 파시즘이 지도자에 대한 숭배 속에서 전락시킨 대중의 폭력에는 파시즘이 제의적 가치의 생산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구의 폭력이 상응한다.

 
* 특히 그것의 선전적 의의가 과대평가될 수 없는 주간 뉴스 영화를 고찰해보면 여기서는 기술적 상황이 중요하다. 대량 재생산에는 특히 대중의 재생산이 맞아 떨어진다. 오늘날 촬영기구에 모두 잡히는 거대한 축제행렬, 대규모 군중집회에서, 그리고 스포츠 경기의 대중집회와 전쟁에서 대중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사정(射程)이 강조될 필요가 없는 이러한 과정은 재생산 기술 내지는 촬영기술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중의 움직임은 일반적으로 육안에 보다는 기구에 더 분명하게 표출된다. 수십만의 부대는 조감도에서 가장 잘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근법이 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다해도, 육안이 가져다주는 상(像)에서는 촬영이 겪게되는 확대가 불가능하다. 이는 대중의 움직임과, 그리고 또한 전쟁은 특히 기구에 적합한 형태의 인간의 태도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의 심미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한 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한 점이 전쟁이다. 전쟁, 그리고 전쟁만이 기존의 소유관계를 보존하면서 대규모의 대중운동에게 하나의 목표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정치에 의해서는 사태가 그렇게 정식화된다. 기술에 의해서는 사태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전쟁만이 소유관계를 보존하면서 현재의 모든 기술적 수단을 동원할 수 있게 한다. 파시즘에서 전쟁의 신격화가 이러한 논증을 사용하고 있지 않음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이 논증을 살펴보는 것에서는 배울 점이 있겠다. 에디오피아 식민전쟁에 대한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의 선언은 다음과 같다: "27년 동안 우리 미래파는 전쟁이 반예술적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항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주장한다: ...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방독면,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확성기, 화염방사기와 소형 탱크 덕분에 예속된 기계를 인간이 지배하도록 확실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인간 육체의 금속화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꽃피는 초원을 불꽃 튀기는 기관총의 난초로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온갖 총화(銃火), 포화(砲火), 휴전, 향기와 부패의 악취를 하나의 교향악으로 합쳐놓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대형 탱크, 기하학적 비행편대, 불타는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나선형의 연기와 같은 새로운 건축구조와 그밖의 다른 건축구조를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미래주의 시인과 예술가들이여... 새로운 시와 새로운 조형예술을 위한 당신들의 투쟁이 ... 그것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도록 전쟁의 미학이 갖는 이러한 근본명제를 기억하라!"

 

이 선언은 분명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선언의 문제제기는 변증가에 의해 받아들여질만 하다. 변증가에게는 오늘날의 전쟁미학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생산력의 자연스러운 이용이 소유질서에 의해 저지된다면, 기술적 수단과 속도 및 에너지의 원천의 증대는 생산력의 부자연스러운 이용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전쟁의 파괴력은 사회가 기술을 자신의 기관으로 삼을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 기술이 사회의 기본적 역량을 장악할 수 있을만큼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가공(可恐)할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적 전쟁은 거대한 생산수단과 이 생산수단의 생산과정에서의 불충분한 활용과의 상충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실업과 판로의 부족 때문에) 일어난다. 제국주의적 전쟁은 기술의 반란이니, 기술은 사회로부터 자연자원을 거부당하자 그 요구를 "인간자원"으로 추징(追徵)하는 것이다. 기술은 운하를 파서 강물이 흐르게 하는 대신에 인간의 흐름을 전쟁의 참호 소굴로 몰아 넣으며,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는 대신에 도시 위에 화염폭탄을 뿌리며, 기술은 새로운 방식으로 아우라를 없애는 수단을 가스전에서 발견하였다.

 

"예술은 지속되리라 ― 세상이 멸망한다해도"라고 파시즘은 말하면서, 기술에 의해 변화된 감관 지각의 예술적 만족을, 마리네티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에서 기대한다. 이것은 분명 예술을 위한 예술의 완성이다. 일찌기 호메로스에 있어서는 올림푸스 신들의 관조 대상이었던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의 관조대상이 되었다. 인류의 자기 소외는 인류로 하여금 인류 자신의 파괴를 일등급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케 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파시즘이 추진하는 정치의 심미화는 이러한 사정에 처해있다.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응답하고 있다.

2005/11/04 15:19 2005/11/0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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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국가론

최정운, <지식국가론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의 노동통계 발달의 정치적 의미>, 삼성출판사, 1992

 

부제를 보면 알듯이 '지식국가론'이라는 제목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싸구려 경영 분야 책 같은 느낌을 준다. (나만 그런가?) 1989년 아메리카 시카고대학에서 쓴 정치학 박사 논문을 한글로 번역한 책인데 원 제목은 'The Rise of the Knowledge State: the establishment of labor statistics in Great Britain, France, and the US'다. '지식 국가의 등장: 영국, 프랑스, 아메리카에서 노동통계의 확립'쯤 되는 것이다. 훨씬 낫지 않은가?

 

구체적인 필요성 때문에 앞 부분 조금과 세 나라의 초창기 노동통계 역사 부분만 읽었지만, 끝까지 읽을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읽으려고 정해놓은 책이 너무 많아 언제 이 책을 마저 읽을지는 장담 못하지만, 읽은 부분에서 몇 구절을 적어둔다.

 

통계란 어떤 종류의 데이터를 이떻게 수집할 것인가를 사전에 결정한 조사계획에 근거하여 수집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계는 피동적 관찰이 아니라 대상물에 대한 계획된 의도적 개입을 통하여 생산되는 지식이다. (72쪽)

 

노동통계는 일견 구체적인 집단에 대한 것 같지만 그 집단의 경계와 내부관계들은 매우 유동적인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 집단은 대단히 추상적인 것이다. 노동통계는 집단을 계급적 편견 외에 경제학적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73쪽)

 

공공지식의 타당성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고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의 주도권에 의하여 창조되고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74쪽)

 

(영국)

1890년대에 나타난 사회문제에 관한 신조어는 '실업'이었다. 경제학자로서는 알프레드 마셜이 1888년에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1895년에 존 홉슨에 의하여 경제학의 개념으로서 최초로 정의되었다.

곧 실업은 노동통계의 중요한 분야로 확립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 실업의 문제는 1930년대식의 대량 실업의 문제를 의미하기보다는 날품팔이 임시 노동자들(casual workers), 특히 런던 부두 노동자들의 잠재실업(under-employment)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1880년대 이후 잦은 폭동의 주역이었으며 위험한 계급으로 지목받고 있었다. 결국 실업문제란 이들 노동자들을 정부나 사회개혁가들이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96, 97쪽)

 

(프랑스)

영국에서 실업의 문제가 노동통계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면, 프랑스에서 1880년대를 통하여 노동문제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산업분쟁 즉 파업의 문제였다. 1890년대에 공식적인 통계자료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통상업무를 맡은 행정부처에서 각 지방행정청(Préfectures)으로부터의 보고체계를 1880년대를 통하여 발전시켜 왔다. 1883년 7월부터는 각 보고에 통일되게 인쇄된 보고서 용지의 각 항목을 채우도록 되었고 보고서의 양식은 1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석: 11개항목은 지방명, 지역, 기업체 이름, 파업기간, 파업에 동조한 숫자, 파업자들의 요구사항, 고용주의 제안, 노사의 타협조건, 파업 전의 임금수준, 파업자들의 재원, 법률에 위반된 사항이었다.)

1884년 앙쟁(Anzin)의 광부들이 일으킨 대규모 분규는 분기점을 이루었다. 중앙정부는 지방 행정청으로부터 계속 많은 양의 정보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157, 158쪽)

 

(아메리카)

미국은 전세계에서 최초로 정기적인 노동통계의 생산을 위한 국가 행정기관을 창설한 나라였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통계와 행정의 역사적 발전과정은 어려운 상황에서 여러 적대적 이해집단들과의 투쟁으로 점철되는 험난한 길이었다. 결국 뉴딜 시기에 이르러서야 노동통계는 공공지식의 지위를 확보하고 노동부와 더불어 국가 정책과 전국적 정치 형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노동통계국은 1871년 최초로 매사추세츠주에서 창설되었고 1879년에 이르러서는 상설기관이 되었다. 1870년대 후반에는 펜실베니아, 코네티컷, 그리고 오하이오 주 등에 노동통계를 위한 유사한 행정기관이 설치되었다. 1884년에는 연방정부의 내무부 산하에 연방노동국이 조직되었다. (209쪽)

19세기 말에 이르러 통계는 사회개혁의 논의와 계급 갈등의 장에서 사회 지식의 권위있는 형태로 인정되고 사용이 시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LS(노동통계국)에서 만들어지는 실제 통계는 공공지식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BLS와 다른 공공기관에서 생산되는 통계는 당파 권력과 이익집단에 의하여 왜곡되었다고 보여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의회도 BLS에게 어떤 특별한 조사활동을 요청한 적도 없었다. (211, 212쪽)

20세기 벽두까지 미국의 노동통계는 노동자들의 도덕성에 관한 것과 경제적 조건에 관한 것 등 두개의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두가지 요소에서 전자는 노동계급의 도덕적, 정신적 조건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그들 요구의 타당성과 나아가서는 인간적 존엄성을 잠식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220쪽)

 

 

2005/11/01 15:44 2005/11/0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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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논리

노장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이 권유하는 삶의 양식과는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삶의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개별적 역사와 문화에 의해 결정된 구체적인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주장하는 공자의 사상은 정통적인 그 어느 사상들보다도 (...)에 가장 가깝다. (박이문, <논어의 논리>, 문학과지성사, 2005, 208쪽)

 

 

괄호 안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철학 또는 사상 조류일까?

• 박이문 교수의 답: “21세기의 지배적 세계관인 포스트모더니즘”.
• 내 느낌: 18세기에 등장해 서구 사상계를 뒤집었다는 낭만주의.

 

근거는?

• 박이문 교수의 답: “포스트모더니즘은 내세가 아니라 내세에서의(“현세에서의”를 잘못 쓴 듯) 자기 실현을 강조하는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구체적인 지리적 조건과 문화사에 의해서 가변적인 인식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208쪽)
• 내 대답: 낭만주의는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쯤은 익숙할 불굴의 의지에 대한 개념으로, 인간이 성취하는 것은 가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가치의 창조라는 것이다. 인간은 가치를 창조하고, 목표를 창조하며, 목적을 창조하는데, 궁극적으로는 마치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창조하듯이 (중략)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창조한다.” “두번째 명제는 사물의 구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할 모범 따위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쉼 없는 흐름이 아니면, 부단한 세계의 자기 창조뿐이다. (중략) 세계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 전진의 과정이자 끊임없는 자기 창조다.”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한국어판 194, 195쪽)

 

남들의 평가

• 박이문 교수의 해석에 대해: 이 책을 계기로 우리의 논어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 교수)
• 내 추측에 대해: 다음 둘 중 하나. “엉터리” 또는 “누가 물어봤어?”

 

덧붙임1: 공자 사상을 박이문 교수가 요약한 데로 이해하는 게 옳은지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공자 사상이 “21세기의 지배적 세계관인 포스트모더니즘”과 가까우며 그래서 보수적인 사상이 아니라 첨단적인 사상이라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논어의 논리>에는 자세한 논증이 없다. 사실 박이문 교수가 규정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상대주의적이라는 점을 빼고는 전적으로 공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정확한 규정이라 하더라도, 이 측면은 낭만주의의 영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주의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 군주론>을 보면 명쾌하게 정리가 될 거라고 본다. (절대 책 광고 아님... 믿거나 말거나^^)

 

덧붙임2: 박 교수는 이 책에서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은 “그냥 또 하나의 동물로서 인간이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도덕적 심성을 지칭한다. 인간에게 인간으로서 사는 것보다 더 귀중한 가치가 있을 수 없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동물과는 정말 다른 도덕적 원리대로 사는 것을 뜻한다면, 그 차이를 '인'이라는 덕목에서 찾지 않는다면 다른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라고 쓴다.(57쪽)

 

그런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인'과 '예'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이다. “인이라는 덕목이 인간이 갖추어야 할 내적 심성의 속성을 지칭하는 데 반해서 '예'라는 덕목은 '인'의 덕목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관습화된 가시적 행동 양식이다.”(156-157쪽) 공자가 노자와 달리 '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도덕적으로 언제나 선하고 옳은 행동은 우연적이고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저절로인 것처럼 언제 어디에서고 실천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러한 태도와 행동이 마치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 억지 없이 취해지고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4쪽)

 

진짜 흥미있는 대목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후에 비로소 손가락 움직임, 공던지기, 도자기 빚고 굽기, 우아하고 정확한 피아노 연주, 자유로운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명곡을 독창할 수 있고 (중략) 마찬가지로 '예'를 통해서 습관화되어 몸에 배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에 젖은 즉 착한 사람이 되고, 그렇게 착한 일을 몸에 밴 듯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를 만들고, 그것을 마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몸에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같은 쪽)

 

기술을 몸에 익히는 것처럼 예를 익힌다고 과연 착해질까? 이런 비교는 '범주 오류'가 아닐까? 박 교수 스스로 “지적 능력의 우열은 육체적 힘의 우/열과 똑같은 잣대로 측정할 수 없으며, 도덕적 선/악과 경제적 효율성을 똑같은 원칙으로 측정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 두 가지 경우를 같은 원칙에 의해 같은 잣대로 측정한다면 그것은 '범주 오류'라는 논리적 잘못을 저지름을 의미한다.”(184쪽)고 했듯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걸 '수사학'이라고 하는 건가?

 

덧붙임3: <논어의 논리>는 논어에 대해 잘 알고 싶은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관이나 진리, 가치, 윤리 문제 등 서구 철학의 주요한 개념들에 대해 쉽게 설명한 개론서 또는 안내서로서는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2005/10/25 14:40 2005/10/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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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