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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개념없는' 번역

책을 낸 출판사의 평판을 모르던 바 아니지만,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휘한 '리버' 컬렉션으로 출판됐고 부르디외가 직접 한국어판 번역을 적극 추천했다고 해서 읽었다. 후회가 막심하다. 어떤 책인지는 거론하기도 싫지만,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요즘 세상에 영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을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 너무 한다. 게다가 번역자는 지금도 번역서를 쏟아내고 있다. 쏟아낸다는 표현은 그리 심한 과장이 아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한 결과로 보면 7년동안 10권, 더 정확하게는 5년동안 9권을 냈다. 나도 최근 3년동안 한해에 한권씩 번역한 경험이 있어서 아는데, 한해에 두권을 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억울한 마음에 서론이 길어졌지만, 주어를 찾기 어렵거나 해독이 거의 불가능한 다음의 몇구절만 보면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진단 문제의 해결에 접근하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가정으로부터) 또 아래서 위로(자료로부터)의 과정을 따르는 추론을 완성하는 산술적 총체에 있다. 목표는 새로운 가정과 보충적인 목표를 낳는 법칙을 가로지르는 가정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주어진 언어 사건의 참여자들은 특수 의료 환경의 특수한 멤버들에 부합되는 범주의 무게를 실어주는 동시에 그들의 담론에서 이같은 범주를 사용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예를 들어 여기서 사용된 '환자'라는 용어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일정 결론의 추론을 요구하는 한 특별한 '여자 환자'에 대해(용어의 기술적인 의미에서) 벌이고 있다.

 

수많은 독자들은 아마 하나의 질문을 지금껏 거두지 못하리라 짐작이 된다. 그것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모두' 말하려는 욕심 많은 관찰자를 위협하는 끝없는 퇴보이다. 이 야망은 물론 비합리적인 것이 어느 누구도 한 상황의 가장 일반적이고 지역적인 양상에 대해 모두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비교적 그 한계가 명확한 속에서 환자의 문제를 재구성하는 방법에 있고, 최초의 의료 면담의 중요성을 지적하려 노력하고 있다. 의사의 목적은 일반의학이나 전문의학적인 진단의 범주에 보내기 위한 부분적인 선언적 형식 속에서 환자의 증세와 증상들을 해석하는 것에 있다.

 

매번 사회적 상호 작용과 관련 있는 연구소의 경험이 지위와 역할의 관계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추적인 문제가 던져진다. 학자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주체에게서 해당 실험의 필요를 위해 설정된 함축적이거나 형식적으로 정의된 '상황' 개념의 기능에 따라 이 위상과 역할 관계는 인식이 된다.

 

혹시 내가 번역한 책에도 이와 비슷하게 엉터리 문장들이 가득한 건 아닌지 두렵다.

2005/10/19 19:07 2005/10/1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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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얼마전까지 사업자 단체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놀라운 일이 드러난 이후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단순하게 분류하자면 대략 두가지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민주노총의 태생적 한계부터 따지는 것이고 두번째는 지도부의 대응 방식과 향후 민주노총 진로 문제를 따지는 시각이다.

 

첫번째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는 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김승호, 이 글을 꼽을 수 있다. 두번째 시각은 민주노총의 현 사태에 대한 비상시국 토론회 참가자 결의문에 집약되어 있다.

 

웬만하면 나는 이번 일을 거론하지 않으려고 했다. 매일 매일 전쟁을 치르듯 힘든 상황에 처한 많은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민주노총 조합원이긴 하되 제대로 투쟁 한번 해본적 없는 한가한 처지의 나 같은 사람은 조용히 있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승호라는 분의 글을 읽고는 참기 어려운 답답함을 느꼈다. 인격 수양이 덜된 탓인지 더는 참지 못하겠다.

 

글의 내용은 제목에 잘 요약되어 있다. 비리로 궁지에 몰린 쪽이나 비판하는 쪽이나 진정성이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또 민주노총은 출범 때부터 전노협의 전투적, 변혁적 운동 정신을 배반하고 관료적, 개량주의적 운동을 취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지금 좌파니 해방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정파나 활동가들도,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낡은 사고와 실천으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일상적 삶과 활동에서부터 “자본가와 질적으로 다른 새 인간으로의 노동자의 자기변혁” 곧 인간해방이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기 국면일수록 과격하거나 관념적이거나 회의적인 주장들이 난무하기 마련인데, 이 글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순혈주의' 낌새가 있지만 이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관념론적 과격성과 극단적인 환원주의, 게다가 대중의 잠재력에 대한 무시는 그냥 넘기기 어렵다.

 

민주노총은 시작부터 개량주의적이었다고 하자. (나는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 하지만 1996년, 97년 노동법 개악에 맞선 대투쟁이 개량주의적 투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이 투쟁의 끝은 지도부의 개량주의 때문에 흐지부지 됐지만, 그것과 투쟁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이 투쟁이 이렇게까지 커질 수 없었다. 민주노총의 문제를 정파의 문제, 지도부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 한, 이토록 쉽게 민주노총은 어쩔 수 없다고 결론짓는 건 비관주의를 넘어서 오만한 태도다. 민주노총 깃발 아래 벌어진 많은 투쟁들은 결코 개량주의적이지 않았다. 문제는 지도부의 개량주의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모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쉽게 나오는 것도, 정파를 이끄는 일부 운동가들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중에 대한 무시 또는 무지, 관념성은 대안에서도 드러난다. “자본가와 질적으로 다른 새 인간으로의 노동자의 자기변혁”이라니... 최저 임금보다 10원 더 받는다는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은 모르긴 몰라도 매일 매일 자신들이 '자본자와 질적으로 다른 인간'임을 절감할 것이다. 어디 그들 뿐이랴. 그들이 원하는 건 '질적으로 다른 새 인간'이 아니라 '질적으로 같은 인간 대접'일 것이다. 글줄이나 읽었다는 놈이 어떻게 글자 그대로 저급하게 해석하느냐고 혀를 찰지 모르겠으나, 모르긴 몰라고 이 글이 그렇게 '해방'시켜주고 싶어하는 바로 그 노동자들은 훨씬 더 황당해할 것이다. 왜 그런 반응이 나오겠는가? 구호만 있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어떻게 자기변혁을 이룰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이 자기변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최저 임금보다 10원 더 받는 사람들, 아니 최저 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일상적 삶과 활동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이 자기변혁이 관철되는가?

 

진짜 문제는 “잘난 노동운동가들”이 바로 이런 구체적인 대안과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과 전망을 제시하는 정파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민주노총이 이 지경까지 왔겠는가? 그래서 문제는 운동가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 속에 매몰되어 다툼이나 벌이는 데 있지, 민주노총이 애초 한계가 분명했다는 데 있지 않다. 제대로 된 운동가들이 있었다면 민주노총의 태생적 한계는 벌써 극복되었을 것이다. 약간의 희망만 있어도 대중은 들고 일어날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더 버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2005/10/17 19:23 2005/10/17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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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주의의 한가지 배경

레싱, 칸트, 헤르더, 피히테는 모두 아주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헤겔, 셸링, 실러, 횔더린은 중하류층 출신이었다. 괴테는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에게 맞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중략)

 

한편 당대의 프랑스인들, 모든 급진주의자들과 좌파, 전통과 교회, 군주 정치, 현 상태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반대 세력이었던 이들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모두 실로 매우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몽테스키외는 남작이었고, 콩도르세는 후작이었으며, 마블리는 성직자, 콩디야크도 성직자였고, 뷔퐁은 훗날 백작이 되었으며, 볼네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중략) 볼테르조차 한미하긴 했으나 신사 계급에서 태어났다. 오직 디드로와 루소만이 진정한 평민이었다. (중략) 살롱을 출입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긴 이들은 고도로 세련된 몸가짐과 훌륭한 교양을 갖추었고, 장엄한 산문체를 사용하며, 인생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당당한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독일인들에게 거슬렸고 굴욕과 좌절을 느끼게 했다. 헤르더가 1770년대 초반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들 중 어느 누구와도 사귈 수 없었다. 헤르더에게는 그들 모두가 인위적이고 몹시 틀에 박혀 있으며, 지나치게 자의식이 강한 데다 무미건조하고 활력 없는 살롱의 춤꾼들로 비쳤으며, 인간의 내면적인 삶을 전혀 모르며, 나쁜 사상이나 거짓된 원칙 때문에 지상에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참된 목적과 신으로부터 아낌없이 부여받은 참되고 귀중한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로 인해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겼으니, 이 폭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들의 반항을 생각하기만 해도, 스스로 로마 교회와 프랑스 국왕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독일인들조차 욕지기와 혐오감, 굴욕과 열등감을 느꼈고, 이것은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 사이에 학자들이 추진할 수 있는 모든 문화적 교류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깊은 틈을 만들었다. 아마도 이것이 독일이 프랑스에 반감을 품게 된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며, 낭만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강유원 나현영 옮김, 이제이북스, 2005, 한글판 66-68쪽.)

 

실상 칸트 철학의 위대한 스승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적대, 특히 카시러에 대한 적대의 뿌리가 바로 아비투스간의 심층적인 적대에 있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명은 운동을 좋아하고 스키를 잘 타며, 에너지가 넘치면서 단호한 용모를 한 거무스름한 작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진지하게 제기한 문제에 혼신을 다해 몰두하는 끈질기고도 완고한 사람이었다. 다른 한 명은 외면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올림포스 신 같아 보이는 백발의 사람이었다. 관대한 마음씨와 해박한 관심, 차분한 용모와 편안한 표정, 생동감과 온화함, 마지막으로 귀족적인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G. Schneeberger) 카시러 부인 자신이 쓴 것도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하이데거의 야릇한 모습에 대해 우리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사회적 관습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도, 신칸트학파 사람들, 특히 코헨을 적대시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략) 문이 열리면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사람 하나가 거실로 들어선다. 성 안으로 떠밀려 들어온 작은 농부처럼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략) 오스트리아 남부 출신 혹은 바바리아 출신의 장인을 연상케 했다. 그 사람이 쓰는 방언은 이러한 인상을 굳혀 주었다. 그 사람은 유행이 지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렇게 덧붙인다. “가장 불편했던 점은 치명적인 진지함과 유머의 결핍이었다.” (피에르 부르디외, <하이데거의 정치 존재론(나는 철학자다)>, 김문수 옮김, 이매진, 2005, 한글판 89-91쪽.)

 

영국에서 활동한 라트비아 출신 보수주의자 이사야 벌린과 프랑스 좌파의 좌파 피에르 부르디외가 각각 거론한 독일 낭만주의와 하이데거의 특징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어떤 필연적 연관성이 있을까?

2005/10/04 18:41 2005/10/04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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