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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에게 묻는다 (진중권)

김창현 전 사무총장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에 종북주의자는 하나도 없다. TV에 나와서 낯빛 하나 안 바꾸며 태연하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거짓말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솔직히 '대단하다'고 감탄을 했다. 도대체 어떤 이념의 숭고함이 저렇게 대중 앞에서 거짓말 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바꾸어 놓았을까? 그 이념의 위대한 힘 앞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좀 더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종북'이라는 말을 남다르게 이해함에 틀림없다.

종북주의자들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사실 피차 뻔히 알면서 벌이는 우스운 논쟁이다. 소위 '자주파'라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민주노동당 당원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어 보고, 또 거기에 소개된 사이트들을 탐방하면 금방 드러난다. 아래에 인용된 글들은 민주노동당 당원 게시판에 올라와 있거나, 거기에 소개된 사이트에서 발췌한 것. 민노당 당원게시판에서 출발해 이런 글에 도달하는 데에는 단 1분도 안 걸린다. 이게 종북인지 아닌지는 각자 읽어보고 판단하시라. 종북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종북이 왜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이번 사태에 대해 이른바 '자주대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번에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명문이라 다시 한 번 소개한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에 겁을 집어 먹은 미국은 지난 2002년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을 와해 말살하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는 미국은 문국현과 같은 사이비진보세력을 내세워 민주노동당의 성장을 가로막으려 하였으며 대선 이후에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세력을 와해, 말살하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다. 이같은 미국의 신지배전략을 바로보지 못하고 조승수, 김형탁, 한석호, 진중권 등 진보진영 내에 반북세력, 사이비진보세력들은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 논쟁, 진보판 마녀사냥인 소위 일심회 출당 요구, 진보운동을 내부로부터 와해하는 분당놀음을 벌여 놓고 진보진영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 중앙위원이자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의원 후보로 출마하는 분이 공식적으로 내놓은 성명이다. 이런 시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그쪽 사람들이 꽤나 좋아하는 '통일학 연구소'의 한호석이라는 분의 견해다. 이 분은 분당이나 탈당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행"으로 규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분당파는 진보정치운동을 둘로 쪼개놓음으로써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추진하려는 분열공작을 앞질러 대행해주고 있으며, 한나라당과 수구우파세력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고 있다. (…) 분당은 어디까지나 분열이다. 명백하게도, 분당은 성장단계에 있는 생물유기체를 인위적으로 갈라놓아 생명력을 조금씩 앗아가는 잔인한 정치적 살상이다. 분당은 절대로 신당창당이 될 수 없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행이라는 법률용어는 분당파의 분열소동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다."

이게 이 분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예의", "동지에 대한 예의"다. 물론 자주파 내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다. 다만 나는 위로 보고할 '본사'가 없어서, 누구처럼 자주파들의 성향을 11개로 섬세하게 분류할 동기를 갖기 못했다. 자주대오 내에 이런 성토의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자신들의 패권주의를 인정하고 반성하자는 갸륵한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 반성을 하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자주계열 일부는 자신들의 이 편협하고 욕심 사나운 패권주의작풍이 연합전선형태의 통일전선을 지향한 전국연합을 일개 정파조직으로 전락시켰던 역사적 오류를 지금 민주노동당에 반복해 구현하려고 한다. 심상정 비대위를 좌초시켰다고 환호하는 그 순간, 민주노동당은 '제2의 전국연합'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자주계와 평등계의 양 날개가 없이 민주노동당은 결코 집권할 수 없다. 진보세력도 단결시키지 못하는데 개혁세력까지 어떻게 포섭해 통일전선의 대의를 관철하겠는가. 민주노동당의 한쪽 날개를 꺾어 당을 일개 정파조직으로 떨어뜨리는 이들이여, 부디 총화와 혁신으로 이성과 양심을 찾아라." (21세기 코리아 강○○)

여기서 이들은 민주노동당을 "통일전선"으로 간주하고 있다. 통일전선은 원래 전위당이 지도하는 것이 정치학의 상식. 그 전위당이 어떤 당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본사'라 부르던 바로 그 당일 게다. 바로 이게 자주대오 내에서 그나마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이들이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또 다른 반성의 목소리가 있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 훨씬 더 섹시하여, 거의 정치 포르노에 가깝다.

"어떤 이는 아예 '김일성주의자'가 민주노동당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던데 이는 진정으로 김일성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식의 소치에서 나온 말이다 (…) 통일뉴스에 올라오는 김일성주석의 회고록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김일성 주석이 항일무장투쟁 할 당시의 행적이 나오는데, 당시 반일 무장부대 중에서는 민족주의자이면서 골수 반공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 무장 대오를 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다. 이에 대해 격분한 김일성 주석의 부하 간부들은 이들을 무장으로 소멸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때 김일성 주석은 자기 한 몸이 죽음을 각오하고 반일 민족주의자 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가 설득해서 결국은 반일 무장투쟁에서 연합전선에 참여토록 했다고 한다. 나는 요즘 대선 패배를 둘러싸고 '종북주의' 등등의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정말 제대로 '종북주의'를 했으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다수의 자기 부하들을 잔혹하게 죽이기까지 한 골수 반공 반일 민족주의자까지도 용서하고 그들을 설득해서 반일투쟁에 합류하도록 한 김일성 주석의 발끝이라도 따라갔다면 이번 대선에서 이런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국회의)

이것이 이른바 '자주대오' 내에서 그나마 당의 반성과 혁신을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이 땅의 노동자, 농민, 이 땅의 모든 서민이 대선에서 참패를 안김으로써 민주노동당에 요구하는 반성과 혁신이 과연 이런 종류의 것일까? 도대체 이들은 왜 남한의 민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그게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다.

"또한 일부에서 대선 결과에 좌절하여 패배주의에 빠진 것도 결국 주체 역량을 남쪽으로 한정짓고 북한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한 마디로 남한의 유권자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좌절할 것 없다는 거다. 왜? 공화국 북반부에 몇 천만 주체 역량이 있는데, 왜 그걸 모르느냐는 얘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또한 경제를 아는 데서도 북한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경제가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나면서 한국 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경제가 어려움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 이런 측면에서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극복하는 데서 가치가 있다. 북한 경제는 철저한 자립적 민족경제로 최근 '경제강국' 건설에 주력하면서 일정한 성과도 내고 있기 때문이다. (…) 흔히 '자민통 진영'이 북한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이 아는 것처럼 여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강성대국'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현재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 '강성대국' 건설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북한 주민들의 사상 상태나 준비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남북관계, 북미관계에서 북한의 입장과 노선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잘 모르는 것이 많다. 이래서는 전체 우리 민족의 발전에 발맞춰 따라갈 수 없다. 2012년 북한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 때, 한국은 자주적 민주정부를 건설해야 속도가 맞을 것 아닌가." (실천연대 정책국장)

남한이 북한의 자립적 민족경제의 성과를 배워야 한단다. 북한은 2012년에 강성대국이 될 텐데, 남한에서는 자주적 민주정부 하나 수립 못해서야 말이 되느냐는 얘기다. 하여튼 체제에 대한 자신감만은 철철 흘러넘친다. 이거 하나는 정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종북주의자들에게 배워야 한다.

"이북의 실상을 남쪽의 서민대중들이 제대로 알게 되면 지지하지 말라고 해도 서민대중은 진보진영을 지지하게 되어 있다. 이북에서는 이남의 텔레비전까지 개방했다. 그런데 남쪽은 이북의 텔레비전 개방은 고사하고 노무현 정권 들어서 이북의 바둑사이트까지 차단하는 <원시인적 개그>를 자행했다. 이는 이북과의 체제경쟁이 그만큼 두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 보안법 폐지를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이북의 언론을 개방하지 않는 것일까? 왜 연방제통일을 남쪽은 거부하는 것일까? 만일 남쪽이 이북과의 체제경쟁에 자신이 있다면, 수구세력들이 보안법 폐지하라고 난리 칠 것이고, 수구세력들이 이북 언론 개방하라고 난리 칠 것이고, 수구세력들이 연방제통일 하자고 방방 뜰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정 반대다. 왜 그럴까?"

물론 체제경쟁에서 남한 체제가 북한 체제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리라. 다음은 이들이 바라보는 세계정세다. 공화국이 미제를 무찔러서 '빰빠라밤' 신이 났다.

"현대경제연구원이 3일 'EU 신아시아전략의 분석과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유럽연합기업들이 최근 대북투자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동기를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분석했다고 연합뉴스에서 3일 보도하였다. 이는 유럽연합은 북미대결에서 북의 승리가 멀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판단되어 살펴보고자 한다 (…) 유럽연합이 당장은 이익을 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북과 교류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단지 북에 대한 투자 매력 때문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을 압도한 북이 가진 세계적인 영향력을 주목하기 때문일 것이다. (…) 따라서 유럽연합은 미국은 결코 북과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이며 전쟁을 하더라도 미국이 명백히 패배할 것을 예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유럽연합은 이미 핵실험까지 동반된 치열한 북미대결의 최종 승자는 북한이며 그 최종승리가 멀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주민보)

이게 과연 정상인의 사고방식인가? 손석춘 씨는 민주노동당에서 북한의 핵실험에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한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에서 표명했다는 그 유감이란 게, 북한에서 핵을 개발한 데에 대한 유감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의 대립이 핵실험으로 이어진 데에 대한 유감이다. 한 마디로, 일본의 우익이 식민지배의 과거사를 반성할 사용하는 그런 종류의 '유감'이다. 손석춘 씨는 이런 유의 논평이 정말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주파의 공식적 입장은 북핵자위론이다. 자위를 위해 핵을 개발했으니 정당하다는 얘기다. 다음은 김정일 신년사에 대한 해석이다. 말이 해설이지, 무슨 5공 시절 문화공보부 담화문을 보는 것 같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강성대국에 대해 국력이 강하고 모든 것이 흥하며 인민들이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회주의 강성대국이라는 청사진을 이미 제시하였다. 북은 고난의 행군을 낙원의 행군으로 전환하면서 99년 공동사설에서 강성대국이라는 목표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지난 10여년, 강성대국 건설 위업을 위한 행군을 다그쳐 왔으며 2008년을 맞이하는 지금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기본적인 토대는 마련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제국주의 수장이라 일컫는 미국의 대북고립정책과 전쟁책동을 물리친 북의 정치군사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확증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많은 나라들과 수교, 경제협력 강화 등으로 이어지며 외교적 권위도 2000년에 이어 작년 한 해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정치, 군사, 외교 분야에서 북은 누가 보아도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범청학련 남측본부의장)

그리하여 결론은…

"한국진보연대, 민주노동당으로 전체역량을 총집중시켜야 한다. 단결만이 살 길이다. 모든 단위와 지역에서 한국진보연대와 민주노동당에 대해 나의 사랑, 나의 조직이라는 관점과 입장을 더욱 투철히 하고 투쟁과 사업에서도 헌신적인 노력으로 복무해야 한다. 민중정치세력화의 유일한 대안은 바로 우리라는 높은 자신감과 책임감으로 4월 총선의 승리를 위한 태세를 빠르게 갖추어 나가야 한다. 2012년, 북은 강성대국이 목표라면 2012년에 총선과 대선을 치루는 이남에서는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 목표이다. 민족제일, 민중제일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2012년까지 미군철수의 전면화, 전국화, 대중화를 반드시 이루어 내고 우리민족끼리의 새 시대를 힘차게 개척해 나가자. 민족의 부름. 민중의 요구에 발맞추어 주체세력의 면모와 실력을 빠르게 갖추어 나가자." (범청학련 남측본부의장)

자, 이게 손석춘 씨가 주장하듯이 탈당을 하는 사람들이 덧씌운 공안색깔인가? 아니면 자기들 스스로 갖고 있는 천연색일까? 1분만 서핑을 해도 무더기로 쏟아지는 문건들을 죄다 손바닥으로 부랴부랴 가리며, 유권자들 앞에서 "우리는 종북이 아니예요. 순수하게 평화와 통일만 사랑해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대중이 바보인가? 손석춘 씨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평화통일에만 찬성하면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평화통일에 찬성할 뿐인 대중의 순수한 의지가 왜 종북주의자들의 '통일전선' 놀이로 포장되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온통 자주파의 온상이 된 민주노동당의 미래, 아니 이미 민주노동당의 현재다. 이게 21세기 정당의 모습인가? 손석춘 씨한테 묻는다. 이런 당에 희망이 있다고 보시는가? 이런 길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런 길에 동의하지 않아서, 그런 정당에 몸담을 수 없어서 떠나는 것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행"이고, "미국의 신지배전략"에 놀아나는 이적행위고, 조중동에게 봉사하는 행위가 되는가? 그리고 이 꼴 보다 못해 몇 마디 하면 그게 "통일운동에 재나 뿌리"는 게 되는가? 명토 박아두는데, 지식인으로서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게다.

이런 농담이 있다. "주사파 3단 논법. 1. 국가보안법은 악법이다. 2. 악법에 의해 처벌받는 사람은 선량하다. 3. 그러므로 일심회 사건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주사파도 선량하다. '노빠' 3단 논법 1. 조중동은 못된 신문이다. 2. 못된 신문에 의해 비판받는 것은 오히려 잘 했다는 증거다. 3. 그러므로 조중동에게 비판받는 노무현은 잘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삼단논법이 논리적 오류논증이라는 것을 알 게다. 그런데 지금 손석춘 씨가 하는 주장이 이 개그랑 도대체 뭐가 다른가?

사실 손석춘 씨 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주파들이 하는 주장과 똑같다. 하지만 나는 '분당파=조중동'이라는 등식을 내세우는 손석춘 씨처럼 용감하지 못해 감히 '고로 손석춘=자주파'라고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나는 손석춘 씨 같은 분이 왜 이 사안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애써 스스로 두 눈을 가리려고 하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 그들의 생각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면, 제발 민주노동당 당원 게시판에서 출발해서 딱 30분만 서핑을 해 보라. 그리고 나서 발언하시라. 그래도 늦지 않는다.

이것을 자주파 극소수만의 일탈이라고 우기지 말라. 80년대에 운동하면서 옆에서 지켜봤고, 민주노동당 활동하면서 지켜봤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어와서 보아도, 이것이 그들 대부분의 생각이고, 그들도 저 인용문에 담긴 것만큼은 인정할 게다. 손석춘 씨에게 말을 건 것은, 말이 통할 거라는 기대에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자주파들과는 애초에 논쟁 자체가 된다. 왜? '논'리가 아닌 것은 '논'파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저 글들 읽어 보라. 거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대화가 필요가 없다. 그때는 그냥 서로 종교가 다른 거라고 해 두자.

진보든, 보수든 최소한 상식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위에 발췌해 놓은 인용문들이 상식에서 현저히 벗어나 있다고 본다. 이건 상식의 문제지, 정파 간 대립의 문제가 아니다. NL이든, PD든, 어차피 낡아빠진 80년대 이념.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으라 그래라. 다만 지식인이라면, 저런 병적 담론이 대중의 정신계를 오염시키는 데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 노동자, 농민이 책상에 앉은 먹물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먹물에게도 역할이 있다는 뜻. 먹물은 노래가사처럼 "해골 두 쪽 나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진정성"을 말한다. 이 중세적 어법은 사람을 아찔하게 만든다. 도대체 자신만이 "진정성"이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도대체 21세기에 '진정성' 어쩌고 하는 얘기를 어떻게 그렇게 서슴없이 할 수가 있을까? 자신이 진정성 있다는 얘기는 어떻게 입증할 작정인가? 남에게 진정성 없다는 얘기는 어떻게 증명할 작정이고. 그럼 분당하고 탈당하는 사람들은 "진정성"이 없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걸까? 바닥에서 새 출발하면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러잖아도 8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지 잠시라도 헤아려는 봤는가?

는 말한다. 자신은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고. 그럼 평화와 통일만 하면 되지, 왜 북한의 핵실험을 정당화해야 하는가? 왜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가? 김정일을 "21세기의 수령"으로 모시지 않으면, 평화와 통일이 안 되는가? 남과 북이 만나야 한다고? 그럼 만나면 되지, 왜 자기 동지들 성향 분석해서 넘겨주는가? 방북을 해야 한다고? 그럼 방북만 하면 되지, 왜 이쪽에서 할 얘기를 미리 그 쪽에 알려줘야 하는가? 북한을 이해하자고? 그럼 이해만 하면 되지, 왜 강성대국 어쩌고 하는 북한정권의 프로퍼갠더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가?

북한이 강성대국은커녕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 못한 후진적 체제라고 말하면, 도대체 통일이 안 되는가, 평화가 안 되는가? 북한에도 지배하는 권력층과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민중이 있다고 말하면, 도대체 통일이 안 되는가, 평화가 안 되는가? 굳이 북한이 지배하는 자도 없고, 지배당하는 자도 없는 무계급의 이상사회라고 믿어야 통일이 되고 평화가 오는가? 지금이 무슨 30년대 항일 빨치산, 40~50년대 항미 빨치산 운동하던 시대인가? 도대체 21세기에 그런 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라는 생각은 안 해봤는가?

지식인이라면, 평화와 통일의 의지를 이 말도 안 되는 담론에서 해방시켜 말 되게 정식화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저런 황당한 얘기 늘어놓는 사람들 이성적으로 설득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손석춘 씨는 지금 뭐하고 있는가? 물론 설득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80년대에 그 길로 접어들어 그 관성으로 지금까지 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인생을 거기에 다 걸었는데,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이제 그게 생활이 되었기에, 그 방식 아니고는 이미 다른 곳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불행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게 분단의 고통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어떤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어디서에선가 저런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이어야 할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주입되고 있을 게다. 그들의 인생은 뭐가 되겠는가? 가슴도 안 아픈가? "적국의 수도 서울에서" 어쩌고 하는 어느 대학생의 글을 방금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고 하는 얘기다.

진중권/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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