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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무모한 도전

제 5회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끝내고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 '나눔터'에 기고했던 글.

친구들이 보고푸다^^

 

 

그녀들의 무한 도전

  

글쓰기 워크샵에서 처음 만난 우리. 처음 한달 동안 그녀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듣고 그녀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집중했지. 그녀들의 주관적 진실을 믿어주기.

 

난 몸 워크샵이 참 좋았어. 몸 워크샵이 끝나고 나면 뭉치고 굳어있었던 목과 어깨도 사르르 풀려 있더라구. 고통을 견디느라, 세상과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늘 경직되어 있었던 몸이 이완되면서, 내 몸이 너무 좋아라 하는 걸 느꼈지. 또 ‘표현한다’는 것의 자유로움과 해방감, 그 ‘맛’을 처음 알고 빠져들게 되었다고 할까?^^ 서로 마사지 해 주고 함께 춤추면서, 그리고 그 날의 기분을 몸짓으로 표현하면서 우린 더 가까워진 것 같아. 한 친구와 파트너가 되어 눈 감고 춤을 췄을 때, 그녀의 깔깔대는 천진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네.^^;

 

그래, 지금 막 생각난 건데 말하기대회를 준비하면서 내내 느꼈던 기분은 ‘내가 존중받는다’는 느낌, 그리고 ‘느끼는 대로 표현할 수 있다’, ‘나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경험에 눈뜸. 내가 우울하다고 했더니 모두 달려들어서 마사지를 해 주었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겠니?”ㅋㅋ

 

내가 쓴 가사로 노래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내가 제목을 붙이고 나의 감정대로 불렀지. 내가 말한 키워드를 갖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협동으로 연극이 만들어졌지.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 안에 새로운 힘이 사르르 도는 걸 느꼈어. 그렇게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었던 건 눈치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표현해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신뢰감과 편안함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연습하는 내내 굉장히 유쾌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했었지. 배가 아프고 광대뼈가 저릴 정도로 깔깔대며 웃고 뒤집어지고... 어떤 공동체 속에서도 이렇게 많이, 사심 없이 웃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막판에 연습이 빡세게 돌아가면서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문득 문득 나를 덮치곤 했어. 일주일에 이틀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생존자’로서의 나와 대면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나봐. 생존자라는 정체성에서 이제 쫌 벗어나고 싶다, 지겹다는 생각. 이산이 말한 것처럼 이건 좋은 징조일까?^^

 

말하기대회 당일, 나의 불안증상 응가를 한번 해 주고, 막상 무대에 섰을 때 무진장 떨리긴 했지만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어. 노래할 때 또 말할 때 나의 감정과 눈물을 억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 같아. 그냥 나 자신에게 충실했지.

 

내 말하기가 끝나고 나서 다음 노래를 할 친구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어. 무대에서 내려왔을 땐 오매가 오랜 시간 포옹을 해 주었지. 수천마디의 말보다 더 깊고 따뜻한 위로와 지지. 그동안의 애씀, 부대낌, 설움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더라.

 

그나저나 어쩜 그렇게 실수도 안 하고 다들 멋지게 잘 해낼 수가 있니? 앙큼한 것들ㅋㅋ 우리가 결국 해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성폭력 경험 이후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요즘 새삼 느끼고 있어. 숨죽이고 웅크리고 경직되고 경계하고 무표정하고...

 

하지만 말하기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자유롭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유쾌하게 웃고, 나 스스로의 힘과 가능성을 확인했던 그 시간들로 이제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세상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말하기대회는 나의 애도 과정, 치유의 여정에서 가장 유쾌하고 즐거웠던 작업으로 기억될거야. 나와 함께 해 준 여러분, 참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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