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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과 본래부처

그런 상상을 해보자.

내 아랫배보다 더 아랫쪽, 그러니까 단전 즈음에

마르지 않고 늘 찰랑거리는 샘이 하나 있다고 상상한다.

 

머리는 판단하고

얼굴은 웃었다 울었다

입은 욕을 하고 화를 내고

손과 팔은 방어를 해도

 

저 깊숙한 곳에서는 따뜻한 빛이 퍼져나오는 샘이

늘 샘솟고 있다고.

굳이 이름붙이자면 그것은 '사랑'이며

그게 나의 본질이라고.

 

1년이 넘게 정신과 상담을 받고

치유하는 글쓰기와 명상심리치료를 하고

심리학 서적들을 탐독하면서도

풀지 못했던 내면의 문제들, 부딪쳤던 한계들.

그 답은 결국 '연기법'과 '본래부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계를 짓고 그 안에서 안전하고 싶은 마음(아니 안전할 거라는 착각),

변하는 것들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

부처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내 멋대로 화내고 지랄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

고단하다.

세상의 이치를 부정하면서 살기엔 이제 에너지가 딸린다.

그냥 항복하기, 있는 그대로 수용.

 

너와 나는 연결되어 있으며 나는 이 우주와 접속하고 있고,

나는못나고 추한 모순투성이의 이 에고(자아)가 아니라 '본래부처'라는 깨달음은

수행의 진짜 시작이요,

                온  과정이요,

             최종 결론이어야 한다.

 

사랑이라고 하면서

불안, 화, 미움, 원망, 슬픔, 증오가 따라온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특별함에 대한 에고의 욕심, 집착일 뿐이라고 한다.

 

'받기 위한 주기' 역시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냥 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모두 받기 위해서 준 것이었을 뿐.

준 만큼 받지 못하면 화가 났다. 빨리 되돌려 주지 않으면 불안했다.

사랑받으면 자존감이 하늘로 솟았고, 사랑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상대에게 직접, 같은 형태로 받지 않는다고 해도

내 안의 욕망들- 인정욕구, 나르시시즘, 영웅주의를 충족시키기 위한 줌이었다.

 

나만 주인공이려고 했다.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나

내가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다.

 

더 많이 사랑하면 어떤가. 더 퍼주면 어떤가. 더 많이 용서하면 어떤가.

그만큼 더 많은 수행의 기회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나의 지극한 사랑으로 누군가의 내면아이가 자라고 풍성해져서

그가 또 다른 이에게 그와 같은 사랑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참 멋진 일.

내가 주인공이 아니면 어떤가.

누군가의 삶의 배경이 되어서

밤하늘의 별 하나쯤으로 반짝이고

그대가 잠시 눈길 주고 스쳐가는 이름모를 들꽃이 된다한들

그대가 그 배경 속에서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보살행.

 

다음 사랑이 오기 전에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노력하고 성장해야 할 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사랑할 힘과 기회가

나에게 있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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