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성적 자기결정권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2/09
    고발된 낙태, 속이 끓는다.(3)
    나랑

고발된 낙태, 속이 끓는다.

고발된 낙태, 속이 끓는다.

 

 

17살 때였다. 유일한 성교육 시간에 낙태반대운동연합의 비디오를 시청했다. 낙태 시술 과정에서 매스로 긁어대고 잘려진 팔과 몸을 부수는 태아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며 선생님은 말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고. 낙태는 살인행위라고. 분노로 무장된 강의가 마무리되고 반 아이들에게 순결 캔디라며 사탕 하나 물렸다. 맛있다고 좋아하며 먹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친구의 수줍은 첫 성관계 경험을 듣고 대꾸했다. “니네 엄마를 생각해봐. 낙태했을 때 슬퍼할 엄마를 생각해보라고.”(그러고 보면 나 참 많이 변했다.)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났다. 관계를 하고 임신이 거의 확실할 것 같았던 순간이 있었다. 불안한 며칠이 지나고 꼬박 그 시간 내내 병원에 가서 누워있는 내가 둥둥 떠다녔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친구랑 어디 가서 처량하게 미역국을 먹어야 할까. 슬플까. 아프겠지. 어떤 느낌일까. 수술비는 얼마 정도일까. 혹시 임신 다시 못하려나. 경험한 친구랑 가는 게 맘이 좋겠지? 아니야. 별것도 아닌데 혼자가자. 기어코 거기까지 상상하고 나서야 분노가 치밀었다. 10년 전에 먹었던 사탕이 목구멍에서 역류하겠다.

 

수술이다. 내 몸에 어떤 부위를 차갑게 건드리는 수술이다.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위액이 올라올 만큼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토록 많은 여성의 삶에 걸쳐 있는 낙태에 대해서 찐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낙태 문제가 이슈화 되면 언제나 허울 좋은 이야기만 한다. 여성의 경험이 삭제되고 잡히지 않는 공기마냥 도덕만이 함축된 낙태 찬반론이 떠다닌다. 여성은 낙태를 결심하며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아닐까 죄책감도 생기고,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내 몸에 대한 걱정도 일고, 수많은 감정들을 빠르게 저울질해야 한다. 물론 가장 큰 감정은 외로움과 두려움일꺼다.

 

얼마 전 낙태 시술 근절을 위해 산부인과 의사들로 조직된 프로라이프 의사회(전신 : 낙태근절운동본부)는 낙태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병원 세 곳을 고발조치했다. 홈페이지 보니 국가가 그토록 이루지 못한 낙태 근절을 의사들의 정의와 윤리로 이룩하겠단다. 지독하게 간편한 발상이다. 왜 낙태 문제의 주체가 산부인과 의사인가. 언제까지 낙태 논쟁에서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는 제외될 것인가. 프로라이프의 한 의사는 그토록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고도 했다. 웃기고 앉아있다. 병원 가서 의사 붙잡고 나의 사정을 같이 고민한다고? 낙태를 하게 되는 그 수많은 이유와 역사를 ‘안다고’? 의사가 그런 존재였나? 의사가 조력자라고? 무슨 권리로 여성의 낙태 결정 여부를 자신들이 주체인 양 떠드는가.

 

낙태는 잘못된 것, 올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은 국가보안법폐지 논란처럼 찬성 반대할 ‘사안’이 아니라 사회적‘현상’이다.

 

낙태라고 하는 불가피한 현상을 둘러싼 여러 가지 원인과 살펴야 할 조건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낙태는 무조건 없애야 한다? 형벌을 강화해야 한다? 윽박지르기 이전에 불가피한 요소와 조건을 살펴야 한다. 기실 거기서 시작하면 낙태에 대한 논의는 간단하다. 낙태가 많아진다면 왜 ‘불가피한’임신이 많아지는지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피임할 수 있는 관계, 출산 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조건과 제도,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 여아낙태의 문제 등등. 낙태는 절대 독자적으로 떨거진 하나의 주제가 아니다. 일상적인 여성과 남성의 관계, 성교육, 복지, 노동조건의 총합이다. 낱낱이 쪼개보면 성차별적 사회문화와 구조의 단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는 1987년 낙태가 불법화된 루마니아의 독재정권 하에 호텔에서 가난한 한 여성의 낙태를 하는 과정을 그렸다. 탁한 어둠으로 이리 저리 혼란스럽게 걷던 친구가 쓰레기통에 아이를 버리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휘청거린다. 영화 내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어두웠던 그 공기, 몇몇 장면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결말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느꼈던 그 불편한 공기가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낙태를 고민하며 휘청거리는 여성들의 삶과 뭐가 다른가. 갑자기 메슥거린다.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꼬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