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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인가, 존재인가: 십계명의 하느님

Ernesto Che Guevara,1928~1967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선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출애굽기 20장 1~7절)

 

 

1.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지금하는 요한복음 묵상처럼 이 십계명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십계명을 도덕적 훈계나 유일신교의 교리적 선언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신학'에 반대되는 '사건의 신학' 선언으로, 억압적 법률이 아니라 '해방의 선언'으로 십계명을 읽고 싶습니다.

 

십계명은 사실 하나의 계명입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서문' 격인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즉, 제국의 압제에서 신음하던 하비루(주1)들을 하느님이 해방하였으니 그 '해방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십계명의 내용입니다. 때문에 십계명은 도덕적 훈계나 법령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몸에 새겨진 하느님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또한 두 계명입니다. '해방된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그 해방된 삶에 함게 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이고, 또 하나는 그 해방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1~3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전자이고, 5~10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후자입니다. 그리고 제 4계명, 노동자와 자연만물의 '안식'을 규정한 계명이 이 둘을 연결시켜줍니다. 따라서 '안식'이야말로 십계명의 중심 계명입니다. 우리는 안식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일에서 해방함으로써,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여 줌으로써, 자연만물을 인간의 착취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하느님을 기념하고, 해방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2.

제 생각엔, 십계명의 앞부분(1~3계명)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실제로 교파마다 십계명을 어떻게 끊어읽을지에 대한 견해차가 있다고 하는 걸 보면, 1계명은 뭐고, 2계명은 뭐다 식으로 십계명을 보기 보다는 크게 하나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십계명의 앞부분 선언을 '사건의 하느님' 선언으로 봅니다. 현대의 많은 개신교인들은 1계명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2계명을 카톨릭의 성화나 성상에 대한 비판으로, 3계명을 교권에 대한 옹호로 활용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존재의 신학'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존재로, 특히 초월적인 군주적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사건의 신학'의관점에서 보면 1~3계명은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특히 2계명이 다르게 읽힙니다. 2계명의 '형상 금지'는 '하느님'을 어떤 '형상'에 가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물질로 만든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과 해방의 사건 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을 어떤 존재로 형상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이 하느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빚고 조각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인냥 섬겼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은 형상 금지를 명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이 하느님을 '언어' 속에 가둡니다. 그 언어는 '교리의 언어'입니다. 하느님을 교리화하고 하느님에게 전지전능, 삼위일체, 무소부재 등과 같은 속성들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 속성들을 하느님인냥 섬기라 합니다. '형상 금지'는 어쩌면 현대에서는 '교리 금지'의 율법은 아닐까요?

 

이렇게 2계명을 읽으면 3계명도 다르게 읽힙니다. 제가 읽기로 3계명은 바로 함부로 하느님을 규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이것이 하비루들의, 이스라엘의 '해방적 삶'을 위해 필요했을까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을 규정하는 순간, 그 하느님을 언어 속에 가두어 놓고, 민중을 그 언어를 통해 복종시키는 권력자들이 등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가 그러하였습니다. 하비루들이 각 부족별로 평등주의적 부족연맹을 구성했을 때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기본 역할이란 봉사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강한 사사들이 등장하고, 마침내 왕조가 들어섰을 때 왕(사사)과 제사장들은 민중을 지배하는 억압집단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해방의 이데올로기가 어느새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변한 20세기 구 사회주의의 경험들,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해방경험을 자신들의 권력의 근거로 삼았지만 억압적으로 변해버린 우리 시대의 소위 '민주 정부'들의 경험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언어 속에 갇힐 때, 해방 사건 역시 '역사'가 되어 언어 속에 갇혀 버립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1계명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해방을 경험했고, 또 그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할 이스라엘의 하비루들이, '신'을 '존재'와 '형상' 속에 가두어놓고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을 위한 종교체제를 세워 놓은 가나안 종교에 빠져 다시 억압의 상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1계명의 말씀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결국 십계명의 1~3계명은 하나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형상 속으로 가두지 말고 하느님 사건을 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하느님은 '말해질 수 없는 하느님'입니다. 말해질 수 없다는 말은 '규정된 언어'로, '교리의 언어'로 말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해집니다. 억압당하는 민중들이 권력자들을 비판할 때 하느님이 말해집니다. 빚을 탕감하라!, 노예를 해방하라!, 우리를 쉬게하라! 라는 외침 속에서 하느님은 말해집니다. 하느님을 교리 속에서 해방시켜야, 종교 체제 안에서 해방시켜야 하느님은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해방되어야 합니다.

 

 

주1 하비루 - 현대의 구약학자들을 이스라엘을 혈통적 민족개념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하비루'들은 '히브리인'들의 어원이 된 집단으로, 하류계층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사건은 바로 이 하비루들의 해방 사건이며, 하비루들이 억압적 권력자들에 대해 투쟁한 기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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