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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올로지 곽노순목사강연

천지에 충만한 에너지

어느덧 가을이 무르익었습니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과연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물음표를 붙여 봅시다. 언뜻 생각하면 강인한 남성 쪽이 추위를 덜 탈 것 같지만, 사실은 지방이 많은 여성이 남성보다 추위에 잘 견딥니다. 추위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자극적이고, 추위에 자극을 받은 남성의 정자 생산 능력이 향상되어, 가을이 되면 남성들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가 봅니다.
난자 생산 능력이 일정한 여성은 더위나 추위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환경 자체의 변화에 더 민감하여,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되면 마음이 달뜨게 됩니다.
봄이면 여성이 달뜨고 가을이면 남성이 달뜨니, 임을 찾는 인간의 노래는 어떤 짐승보다 더 왕성하여 ‘생육하고 번식하도록’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왜 모두가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태어나서, 상대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지칠 줄 모르고 불러대면서 이 인생 마당을 울긋불긋 장식하는 것일까요?
성 에너지는 천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성 에너지는 곧 생명 에너지요, 자연 에너지입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섹스를 통해서 씨를 퍼뜨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무들은 꽃을 피움으로써 아무 부끄러움 없이 생식기를 온 천하에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한가운데에 암술이 있고, 그 주변에 수술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왜 저들은 자기들끼리 의지를 작용하여 붙지 않고 바람이나 벌을 기다리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꽃은 우연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니, 그것이 곧 우리 인간에게는 연애 기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을이 무르익으면 연어들은 고향을 찾아 바다에서 강으로 돌아옵니다. 강에서 태어난 치어들이 바다에서 성장하고 알을 배어 다시 강으로 돌아와 수정을 하니, 암수가 있긴 하지만 사실은 바다가 자궁인 셈입니다. 연어는 암수가 물 속에서 나란히 있다가 입을 동시에 벌리고 10∼20초 동안 방란(放卵), 방정(放精)을 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합니다. 육체 접촉을 전혀 하지 않는 셈이지만, 과연 그들에게는 아무 쾌락도 없는 것일까요? 육체를 만지거나 삽입하지 않지만, 부르르 몸을 떠는 동작을 보면 큰 희열을 폭발시키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코쿤>이라는 영화에는 몸을 접촉하지도 않은 채 영혼의 교감만으로 절정에 도달하는 외계인들의 섹스 장면이 나오는데, 연어들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것이겠지요. 산란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암컷이나 수컷이나 모두 일주일 이내에 죽고 마니, 우주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그 사랑이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재의 출발점

천지에 성 에너지가 충만해 있고 성 에너지는 곧 생명 에너지라고 했지만, 이 생명 에너지는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것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지구상에는 암수로 나뉘어서 씨를 퍼뜨리는 것보다는 박테리아나 지렁이처럼 자기 복제를 통해서 자손을 증식하는 숫자가 훨씬 더 많아서, 무려 80%에 달합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의문을 품는 분이 계시다면, 박테리아의 숫자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따르기에, 날로 날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면,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들의 자기 분열에도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등가적인 쾌감이 따른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박테리아의 자기 분열이 고등 동물이라는 우리 인간들의 몸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 또한 하나의 알세포에서 분열을 거듭하여 100조 개의 세포를 거느린 주인이 된 것입니다. 100조 개라는 세포의 숫자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습니다. 세포의 크기가 커져서 어른이 되는 것일 뿐, 아기들도 세포의 숫자가 똑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신기하지요.
그러면 하나의 알세포가 몇 번이나 분열을 거듭해야 100조 개의 세포가 될 수 있을까요? 무진장 분열을 거듭해야만 100조 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도달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2, 4, 8, 16, 32, 64……, 이렇게 46번의 분열을 거듭하면 됩니다. 2의 46승. 46번 거듭 분열하면 인간의 몸이 완성되는데, 인간의 염색체 숫자 또한 46개이니, 이를 과연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그런가 하면 인간의 길흉화복이 다 들어 있다는 주역의 괘는 64개이니, 이는 2의 6승에 해당합니다. 그 정도쯤에서 인간사 길흉화복이 분류될 수 있다고 본 것이 아닐까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128괘가 될 것이고, 한 걸음 덜 나아간다면 32괘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염색체 수는 어떻게 해서 46개가 된 것일까요? 정자의 23개와 난자의 23개가 더해져서 46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자기 존재의 출발점으로 여행을 떠나 봅시다. 정자와 난자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볼펜으로 점을 찍으면 그 직경이 1밀리미터의 절반인 0.5밀리이고, 먼지의 직경은 0.1밀리미터입니다. 1밀리미터의 1000분의 1을 1미크론(㎛)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박테리아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정자는 6미크론이고, 난자는 정자의 50배인 300미크론(1/3밀리미터)입니다. 정자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난자는 눈으로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입니다. 난자를 향해서 헤엄쳐 가는 2억 마리의 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2억 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자의 입장에서는 돌연 50배나 큰 물체가 나타납니다. 가히 천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난자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의 정자이니 이를 치열한 경쟁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50배나 큰 천체에 도달해서 이를 꿰뚫어야 하는데, 한 마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근처에 도달한 몇백 마리가 협력해서 난자라는 이 천체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열두세 마리가 협력해서 한 마리를 이 천체에 들여보냅니다. 한 마리가 수정에 성공하면 나머지는 세포 분열 때에 영양분으로 자신을 바칩니다. 그러니 엄청난 자기 희생이요 협력 관계이지, 결코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그렇게 수정이 이루어지고, 46번의 세포 분열을 거듭하여 여러분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주의 수수께끼가 여기에 다 들어 있고, 여러분은 또 섹스를 통해서 수수께끼를 되풀이합니다. 그러니 섹스란 지극히 신비스러운 것이고, 경건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신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교합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가히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성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따르기에,

날로 날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면,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들의

자기 분열에도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등가적인 쾌감이 따른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로 태우고 물로 씻으라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이를 낳았는데, 아내는 그 당시에 90세였습니다. 90세의 나이에 달거리를 하고 애를 가졌으니 회춘한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은 175세의 나이에도 첩을 두고 살았습니다.
모세는 120세에도 눈빛이 성성하고 기력이 정정하였다고 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발로 산에 올라가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는 섹스를 즐거움으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60세의 회갑을 성대하게 축하할 정도로 수명이 단축되었고, 한때는 평균 수명이 고작 40세 정도였습니다. 부단히 일하지 않으면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고, 그나마 영양 부족이기 십상이었습니다. 가족 계획이라는 것도 없는 때여서 생기면 생기는 대로 줄줄이 아이들을 낳아놓고는 먹이고 입히기에 고단하기만 세상살이여서, 성을 즐긴다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였지요.
이제는 과학 문명의 발달로 수명이 늘어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어, 태고적의 좋은 시절이 다시 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900살이 넘도록 살았다는 창세기의 그 시절이 다시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정(精)을 보존하는 비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정이라는 것도 왕성하게 생산될 수 있어야 보존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왕성한 생산 능력이 없는데도 이를 보존하려 든다면, 자전거를 세워두고 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칼을 칼집에만 고이 간직하여 녹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또 정력을 강하게 한답시고 사슴 녹용이다, 곰 쓸개다, 물개의 무엇이다 하여, 애꿎은 동물 사냥을 부추기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물의 어느 부위에 정력이 담겨 있어 이를 취하는 데에 비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개가 왜 정력이 강할까요? 물에서 놀다가 뭍으로 나와서 햇볕 쬐기를 번갈아 하는 물개는, 화토공수(火土空水)의 에너지를 골고루 섭취하고 있는 셈입니다. 화토공수의 에너지에 노출되고, 이 에너지를 먹는 데에 생명력이 왕성해지는 비법이 있는 것입니다.
숲 사이의 공터에서 서너 명이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타오르는 불을 계속 들여다본다면, 이는 영생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늘지고 부정적인 에너지가 들어붙게 마련인데, 불은 네거티브 에너지를 말려 버립니다. 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축축하고 지저분한 에너지가 다 타 버립니다.
물 또한 나쁜 기운을 씻어내는 정화 작용을 합니다. 하루에 두 번 이상 뜨거운 물이나 찬 물로 샤워를 하면서, 내 안의 더러운 찌꺼기들을 쓸어낸다면, 그것 또한 영생의 비법이 될 것입니다.
물과 불과 대지와 대기가 조화로운 자연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정력이 강해지는 비법이요 생명력이 충만해지는 비방입니다.
딱 하루만이라도 자연 속에 자신을 맡겨 보십시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얀 구름이 오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풀밭에서 뒹굴뒹굴해 보십시오. 잠시 시선을 딴 데다 두고 있었더니 새털 모양의 구름이 어느새 토끼 모양이 되고, 어느덧 나무 그림자가 비스듬히 길어지는 등, 시시각각 자연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노라면, 고요한 생명의 힘이 저절로 내 안에 쌓이게 됩니다. 햇빛과 물과 바람과 대지의 고요한 힘이 정(精)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력이 충만해져야만, 그것을 득도에 쓸 수도 있고, 섹스에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 고흐나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은 이런 생명 에너지를 정신 에너지로 전환했던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글자 생김새로 보아도 '살다'와 '사랑하다'는 같은 어원인 듯 싶고,

영어로도 '리브'와 '러브'는 알파벳 하나가 다를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입니다.”





천상의 축제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글자 생김새로 보아도 ‘살다’와 ‘사랑하다’는 같은 어원인 듯 싶고, 영어로도 ‘리브’와 ‘러브’는 알파벳 하나가 다를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에덴 동산에서 처음 만난 낯선 두 짐승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하얀 테이블보 위에 촛불을 켜 놓고, 명상 음악의 선율이 방 안을 휘감게 합니다. 향을 켜 놓는다면, 내 인생에 끼여든 낯선 손님을 감상하기에 더욱 좋은 분위기가 되겠지요.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발가벗은 몸이 되어 서로의 육체를 감상하면서, 누군가 소질 있는 쪽이 춤을 추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함께 춤을 춘다면 더욱 좋겠지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가 천천히 천천히 서로를 만집니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맛난 음식을 즐기듯이, 서로를 구석구석 애무합니다. 속도를 조절하여 밀리미터로 해야지, 킬로미터로 급하게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마치 에덴 동산처럼 나란히 드러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는 신비스러운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나란히 누워서 눈을 감은 채로, 오른쪽 코를 들이막고 왼쪽 코로 숨을 한껏 들이쉬고 다시 왼쪽 코로 천천히 내쉽니다. 그런 호흡을 세 차례 반복하고는 눈을 뜨고 서로를 바라봅니다. 이것은 감정의 찌꺼기를 깨끗하게 청소하여 감각을 백촉으로 환하게 켜는 호흡법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이렇게 서로의 안을 깨끗하게 하여 태초의 낯설은 짐승으로 돌아갔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대낮의 연장선상에서 세금이 어떻고 주식이 어떻다는 이야기로 성스러운 분위기를 깨뜨릴 필요가 있을까요? 늘상 잣대를 대서 평가를 하는 대낮의 버릇을 어찌하지 못하고, 낯선 두 짐승의 ‘거룩한 행위’에도 잣대를 갖다대서 잘했다, 못했다를 혼자서라도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경쟁 체제나 시간 관념을 침실에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옷을 벗을 때는 그 모든 사회적 관념까지도 다 벗어 버려, 진정한 에덴 동산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호흡 조절을 하고, 서로의 육체를 세밀하게 어루만지다 보면, 은근슬쩍 잠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잠이 들어도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발가벗은 채로 그렇게 잠이 들어서 아침에 출근한다면, 왠지 ‘거룩’을 저지른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질 것입니다. 적어도 하루 동안은 천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천사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삽입이 없었을 뿐, 둘 사이의 에너지는 말없이 오간 것이 분명합니다.
잠이 올 듯한 상태에서 교합을 하면, 평소보다 더 느긋하게 충분히 즐길 수가 있습니다. 섹스는 에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섹스가 끝났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돌고 돕니다. 남성의 하체에서 여성의 하체로, 여성의 하체에서 여성의 상체로 이어진 에너지는 다시 남성의 상체로 이어집니다. 남성이라 할지라도 하체가 +라면 상체는 - 구실을 하는 것이요, 여성이라 할지라도 하체가 -라면 상체는 +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아픈 부위가 있다면 교합을 한 상태에서 상대가 손을 얹어 주면 에너지가 휘돌면서 치유될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아이를 못 가져서 고민인 여성을 짝으로 둔 남성은 여성의 안쪽 복사뼈를 자주 애무해 주십시오. 아이가 없는 여인의 안쪽 복사뼈는 만져 보면 냉기가 돌곤 합니다. 그 부위가 자궁에 해당합니다. 유산을 두세 번 경험한 여인도 이런 식으로 효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생리통으로 고통을 겪는 여성이라면 바깥쪽 복사뼈를 만져 주십시오.

우리 모두는 남성이나 여성의 옷을 임시적으로 입고 있을 뿐, 우리가 입고 있는 성(性)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상수(常數)가 아닌 변수(變數)로서, 우리가 전생에 경험한 것과는 다른 성을 택해서 경험의 폭을 확장시키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성은 우주의 아주 신비한 측면입니다. 빅뱅 때부터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만물이 이 에너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하여 물이 되는 이치도, 성 에너지와 닮은 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양성자와 전자가 합쳐져서 원소 변화가 일어나는 양자 내부의 신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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