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17
    도검 각부위 명칭
    검은눈썹
  2. 2007/08/17
    오래된정원,, 염정아,,,매력적이다.
    검은눈썹
  3. 2007/08/17
    영화 바벨 감상했다..
    검은눈썹
  4. 2007/08/17
    Let it be 렛잇비
    검은눈썹
  5. 2007/08/17
    고병권,,,이진경 FTA반대기고문..
    검은눈썹
  6. 2007/08/17
    수유넘 연구원들 기고문,,
    검은눈썹
  7. 2007/08/17
    가리타니고진의 기사..관련,
    검은눈썹
  8. 2007/08/17
    좌우는 어떻게만들어지는가..(우석훈)
    검은눈썹
  9. 2007/08/17
    제안]생태적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비정규 및 불법파견 관련 세설 At2005.가을By이맹물
    검은눈썹
  10. 2007/08/17
    효울성은 자본가에게만 적용된다..
    검은눈썹

도검 각부위 명칭

본문스크랩 칼자루 부품및 각부명칭 禪 그리고 무예

2007/04/23 09:47

 

http://blog.naver.com/turk182s/140037039252

출처 블로그 > 잠자기....-.-
원본 http://blog.naver.com/wind02ma/90004266765

 


 

 

http://blog.naver.com/peietta/60011827686

 

 

 

 

 

검명칭


- 세부 명칭 예제 -
명칭 : 한글 - 한자 - 일본 - 영어 
"O" : 표시는 마땅한 표현 단어가 없음을 표시 

1. 칼날 명칭

- 칼날끝 부분 명칭

1. 칼끝 - 鋒 - 키사키(kissaki) - point of sword
2. 칼끝선 - O - 후쿠라(fukura) - pointedge line
3. 칼끝날개선 - O - 코시노기(ko-shinogi) - diagonal point-line
4. 칼끝열선 - O - 보시(boshi,帽子) - tempered point-line
5. 칼끝절선 -  O - 요코테(yokote,橫手) -dividing point-line

 

- 칼면 부분 명칭

1. 칼날 - 刃(인) - 하(ha) - cutting edge
2. 열선 - O - 하몽(hamon,刃文) - temper pattern
3,4. 칼배,칼면 - (면) - 지(ji,) - blade surface
5. 홈,골 - 血漕(혈조) - (hi) - groove

 

2. 코등이,자루 명칭

- 코등이 부분 명칭

1. 코등이 - 刀瘢(도반),古銅(고동),심(심) - 쯔바 (tsuba) - guard
2. 덧쇠 - 切羽(절우) - 쎕빠 (seppa) - washer
3. 주석막이 - 銅護刃(동호인) - 하바키 (habaki) - metal collar

 

- 자루 명칭(자루 - (병) - 쯔카 (tsuka) - hilt)

 

1. 자루앞장식(앞매기) - O - 후치 (fuchi) -hilt collar
2. 못 - (정) - 메쿠기 (mekugi) - pin, peg
3. 자루내피 - 柄皮(병피) - 사메 (same) - rayskin
4. 자루끈 - 柄絲(병사),柄券(병권) - 쯔카이토 (tsukaito) -braid
5. 자루장식 - O - 메누키 (menuki) - ornaments
6. 자루뒷장식(뒷매기) - 柄頭(병두) - 카시라 (kashira) - butt cap
7. 십자매듭(가장 많이 쓰이는 자루끈 매듭법)

 

3. 칼집 명칭(칼집 - 刀室(도실),초 - 사야 (saya) - scabbard)

 

1. 칼집앞장식 - (봉) -고이쿠치 (koiguchi) - scabbard cap
2. 칼집고리 - 刀環(도환),栗形 - 쿠리카타 (kurikata) - cord knob
3. 칼집끈 - 족서(足緖),하서(下緖) - 사게오 (sageo) - cord
4. 칼집뒷장식 - 표 - 고지리 (kojiri) - scabbard cap
5. 은분처리(도검의 마무리 칠을 할 때 은가루를 섞어 본색을 은은하고
    품위있게 처리하는 공정)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래된정원,, 염정아,,,매력적이다.



 



영화 오래된정원을보았다..

지진희와 염정아의 연기 참 좋았다..

염정아는 처음에 내가 대학교때 미스코리아로나온여자인데..

처음에는 그저 얼굴이쁜 여배우 정도로만기엇했는데

점점 영화인이,,되가는것같다..


이 영화,,

황석영님의 소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

예전에 황석영의  NL(national liberalism)적 성향이

그의 소설들의

백미를 잡아먹는다고  비판하던 한선배가 떠올른다..

내가 소설을 읽었을 때도

좀그런듯했는데..

이영화는 그런작가의 성향을  아는지모르는지

한 좌익전과자의

석방이후의 모습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뼈저린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냥 맘이아프다..

시대가 남녀의 사랑을 가라놓는다 라는명쾌한

주제를 느끼면 좋으련만..

그런 감각도 안느껴진다..

그저예전의 아픔을 간직한채 현재를살아가는 한이상주의자?

의 몸짓인듯하다..

이전에 혁명구호도,최루탄도, 덤프트럭같은 이론적논쟁과

담배연기자욱한 동아리방에서의 피튀기는 운동권의 토론도

이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MP3를 들으며 걸어오는 딸 한테 희미하게웃으며 말을거는

남자 주인공,,,


영화초입에 감옥에서

석방당하는 주인공한테  교도소장은 말한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네요,,선생(주인공)도 한몫을 했겠죠”



핸드폰,전자기기, 인권변호사,맛있는외식문화,아파트,땅투기

 이런 발전된 사회에서 괴거를회상하며 술을마시는 혁명 주인공들의 울음은

그저 과거회상주의자들의 넑두리에불과한것인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영화속에그려진 허무감에도 불구하고

FTA는채결되었으며

마틴슈만이 말한 8:2의사회에서 우리모두는 살고있다.,.


토지보상금,보유세,억대의상속금 첨단을달리는 교통,건축,영화,향락,

등 문명의 아케이드속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지....?

지금의 시대에

영화에서처럼 과연 이상주의자들은 박물관의 유물에불과한것이지..

 불행히도 아니 내주위는

보유세를내는사람은 거의99%없으며 많은이들이 비정규직이며  일부는 농부들이시고

또 일부는 외국인노동자이며,,또일부는 일요일도 일하는

노동기계로 전락해있는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도 핸드폰이며 mp3며 자가용,KTX를 타고다니지만

예전과 지금이 무엇이 바뀌었을까..?


이런 첨단과 돈과 또 파렴치하기로 그지 없는 

역설의 영토에서

우리모두는 욕망에 지배당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것은 아닌지....



“난 사회주의자에요..”

과거속 주인공의 이 대사가


지금  살고있는

지금 현세상의

"세기말적이고  카프카적인 음산함” 속에서도

통용될지는 

앞으로 두고볼일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 바벨 감상했다..

 

 

한마디로

맛있는 영화다ㅡㅡMY하고 같이 본영화다,,
처음에는 좀지루했지만 후반부로갈수록 안타까움이랄까...

우선 내가느낀점은..
모로코의 풍경이 너무나 황량하다
MY와 농담으로 모로코만큼은 이민가서 정말로 살기힘들겠다할정도로 ,,

극도의가난과함께 일반민중들의 생활상도 그렇고 게다가 모로코 경찰의 파시스트적인 폭력성하며(세상에 애들한테 총쏘는 그 충격이란,,)
한미국인이 총격을당하여 그주위에
많은 모로코 농민들은 자국내 공무원경찰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구타를당하며 죽기까지한다.
한 강대국의힘이 비강대국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관련성을가지는지 보여주는듯하다..
마치우리나라의 미선효순사건,FTA 등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음으로 멕시코,,
정말로 지저분하다는거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적어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서로 단절이아닌 무언가 소통을 하는듯한
인간관계가 보이는듯하다..
특히나 결혼축하연을통한 사람들의 즐거움은
옛날 원주민들의 공동체문화를보여주는듯하다..
거기서 꼬마아이(브래드피트 자식들)들이 사람들의 축제장면을보며 굉장히 즐거운표정을지으며 웃는모습이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미소는 미국내의 병폐인 중산계급가족이기주의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러나 남미적인 흥겨움도 ,,
미국이라는 국경선에도착하면 도망자
마약밀매자,불법체류인이라는 거대한
굴레에 아비지옥으로변하고만다..

과연 멕시코인들에게는 아니 제3세계인들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존재로 어떤 영향으로 다가오는지 ,,흡사
거대한 지옥의 블랙홀이요, 야비한 야누스요,또 하나님의 탈을쓴 "기회의 전지자" 가 아닌가 ?

 

일본,,,은
역시나 멕시코감독이 일본에 대해서도 공부를많이 한듯하다....

십대들의 도시적방랑을 그리며 접근하는모습은 나를 감동케했다..
말그대로 소통이 부적한 일본의십대들..
30층높이의 펜트하우스에살며 청각장애자인 일본여고생은
결국 일본의 사회의 소통과 의식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양의 유럽이라는 칭호를들으며

전후50년동안 눈부이부실정도의 한마디로 맛있는 영화다ㅡㅡMY하고 같이 본영화다,, 처음에는 좀지루했지만 후반부로갈수록 안타까움이랄까... 우선 내가느낀점은.. 모로코의 풍경이 너무나 황량하다 MY와 농담으로 모로코만큼은 이민가서 정말로 살기힘들겠다할정도로 ,, 극도의가난과함께 일반민중들의 생활상도 그렇고 게다가 모로코 경찰의 파시스트적인 폭력성하며(세상에 애들한테 총쏘는 그 충격이란,,) 한미국인이 총격을당하여 그주위에 많은 모로코 농민들은 자국내 공무원경찰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구타를당하며 죽기까지한다. 한 강대국의힘이 비강대국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관련성을가지는지 보여주는듯하다.. 마치우리나라의 미선효순사건,FTA 등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음으로 멕시코,, 정말로 지저분하다는거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적어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서로 단절이아닌 무언가 소통을 하는듯한 인간관계가 보이는듯하다.. 특히나 결혼축하연을통한 사람들의 즐거움은 옛날 원주민들의 공동체문화를보여주는듯하다.. 거기서 꼬마아이(브래드피트 자식들)들이 사람들의 축제장면을보며 굉장히 즐거운표정을지으며 웃는모습이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미소는 미국내의 병폐인 중산계급가족이기주의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러나 남미적인 흥겨움도 ,, 미국이라는 국경선에도착하면 도망자 마약밀매자,불법체류인이라는 거대한 굴레에 아비지옥으로변하고만다.. 과연 멕시코인들에게는 아니 제3세계인들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존재로 어떤 영향으로 다가오는지 ,,흡사 거대한 지옥의 블랙홀이요, 야비한 야누스요,또 하나님의 탈을쓴 "기회의 전지자" 가 아닌가 ? 일본,,,은 역시나 멕시코감독이 일본에 대해서도 공부를많이 한듯하다.... 십대들의 도시적방랑을 그리며 접근하는모습은 나를 감동케했다.. 말그대로 소통이 부적한 일본의십대들.. 30층높이의 펜트하우스에살며 청각장애자인 일본여고생은 결국 일본의 사회의 소통과 의식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양의 유럽이라는 칭호를들으며 전후50년동안 눈부이부실정도의 경제성장과 테크노틱을보여준 일본은 급격한 서양따라가기와 가치관의 붕괴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겨준다.. 애니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듯 엄청난 힘에대한 두려움과 단절,,공포심은 순간적으로 힘을 실체화시키며 인간의 현실을 전진시킨다.. 설사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어쩌면 그런것이 지금의일본을 끌어나가는 숨은저력 인지도모르겠다.. 주인공여고생이 마지막에 나신으로 아버지를끌어 안는장면은 완전히 발가벗고 모든것들과 통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젊은이의 애절한 몸짓 이랄까? 개인적으로는 그장면이 넓은 평야나 바닷가에서 했다면은 일본의 희망이있다라고 생각했을텐데.. 닫혀진 고층빌딩에서의 나신의 포옹이라 그런지 슬프게만느껴진다..도무지답이없는 어느 연약한 인간들의 깊은 슬픔,,,,, 일상에 묻혀있는 개인들도 결국 이 세계라는 굴레에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일상의 영양분을 제공하는 그런세계... 거기서 우리는 슬픔을느낀다.. 2007/봄 어느날...남훈이 생각 아래는 스크랩인데 간결명료하게 잘평가한 글이다... --------------------------------------------------------------------------- 극장의 예고편을 상상하며 보기 시작했던 영화인데 2시간동안 대사도 거의 없고, 특별한 소리 없이 진행되는 영화 예고편을 무슨 블록버스터액션물로 만들어 놓고, 이거 완전히 낚인 느낌이다. 이러니 예고편을 상상했던 사람들은 재미없다는 말을 할 수 밖에.. 그렇지만 초반 30분을 당황하고 나니 나머지 1시간반은 딴짓안하고 초집중하게 만들어주더라. 이 영화 재미없다고 소문내는 사람들에게 예고편 탓이니 오해를 풀라고 하고 싶다. 얼토당토않게 악으로만 치닫는 끊임없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그러지말라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진공상태의 느낌인 영화 이게 도대체 어쩌겠다는 스토리인지 궁금해서 결국 영화해설을 뒤지고 말았는데, " 단절과 소통 에 관한 영화" 아, 그래서! 그리하여 그냥 잠자코 봤다 바벨에서 흐르던 음악 - 튀지않고 잔잔하니 영화에 잘 어울리네요. 아카데미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의 음악, 작곡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수상했다고 하네요. Bibo no Aozora Ryuichi Sakamoto, Jacques Morolenbaum and Everton Nelson/ Endless Flight and Babel Gustavo Santaolalla Deportation/Iguazu Written by Gustavo Santaolalla 태초에 인간의 언어가 하나였다 인간이 하늘에 도전하여 탑을 쌓아 올리자 신이 분노하여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버리시고 그 사이에 혼돈과 단절을 만들었다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창세기 11:1-9) 단절의 고통, 그리고 소통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 -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1. 태초에 인간의 언어는 하나였다. 수세기동안 끊임없는 폭력과 갈등은 인종과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처럼 소통되지 않는 사고와 이념의 혼선때문일지도 모른다. 비악의적인 단순한 계기가 국제정치적 마찰로 번지며, 모든 사실을 알고 지켜보는 관객은 피흘리며 신음하는 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정치적 보복이 먼저 논의되는 현실의 통증을 대면해야 한다. 2. 주인공은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 쉽지않은 소통을 간단하게 포기해버리는 얄퍅한 인간들의 소통을 보여준다. 또한 , 모로코에서 시작된 장난이 미국, 멕시코, 일본까지 영향을 미치는 우리는 서로가 미약하지만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TV 뉴스를 통해서 보게되는 그 현상안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접하고 영향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그저 흘러가는 뉴스거리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자신과 무관한 소통에 관심을 지니지 않는 보편화된 이기심이다. 이 여배우 굉장했다. 연기도 그랬지만 일단 전라연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니까 꼭 한번봐 ㅋㅋㅋ)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올랐다는데, 미국에서 상을 줄 것같진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상을 수상했으면 바램이다. 3. 차별에 대한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지 못한자 의 이야기 동등한 인간이란 없다. 힘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열등함을 인식한다. 인종간의 차별과 갈등은 유색인종인 우리도 어디서든 겪을 일이다. 부당한 차별에 대한 발길질. 차별이라는 부당함이 발길질이라는 정당함으로 뒤바뀌는 모순 (- 테러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결과적 피해를 얻는 것은 그와 무관한 이들 무너져내린 무역센터가 이라크를 점령하고, 비악의적인 사건은 테러리즘으로 과장되고 악용된다. 사실 영화가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은 9.11테러이후 아랍과 서구의 대립이다. 브래드피트의 딸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다코다패닝의 동생이라네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Let it be 렛잇비

Let it be                                                 렛잇비
                               Beatles                           비틀즈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내 자신이 너무 힘들어 질 때
Mother Mary comes to me                               성모 마리아가 나에게 와서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로운 충고를 하기를, 있는 그대로 두어요.
And in my hours of darkness                            그리고 암흑의 시간 속에 내가 있을 때
She is standing bright in front of me                   성모 마리아가 내 앞에서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로운 충고를 하죠. 있는 그대로 두어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로운 충고이죠, 있는 그대로 두어요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세상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Living in the world agree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감을 합니다.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그냥 그대로 두는 게 그게 답이 될 수 있습니다.
Though they may be parted                             아마 그들이 헤어지더라도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저기 그들이 여전히 기회가 있다고 보고  있어요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답니다.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그냥 그대로 두는 게 그게 답이 될 수 있습니다.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그대로 두어요.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로운 충고이죠. 있는 그대로 두어요.
(후략)

(주) Mother Mary(성모 마리아) : 서양 기독교 문명의 거룩하고 최고의 진리를 상징한다고 봄.
바다와 갯벌의 자연 생태계를 생각해 볼 때, 지구와 달의 인력에 의하여, 지구의 자전과 달의 공전에 의하여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생긴다. 실제의 주기는 24시간이 넘는다. (지구의 자전만 고려한다면 24시간인데, 달의 공전에 의하여 시간이 지연된다. 더 정밀하게 과학적으로 계산하려면 지구의 공전 궤도의 타원방정식이 적용될 지도 모른다.)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의 주기에 맞추어 생물들은 먹이 활동을 하고, 달의 공전 주기(28일)에 맞추어 생식활동과 산란을 한다. 인간의 생체리듬과 월경도 이들의 유전인자와 비슷하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이 성모 마리아의 진리이고,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가만히 두어도 지구가 돌고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바다와 갯벌의 생태계도 가만히 두면 자연이 보존이 되고 최선의 방책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제발 그대로 두자. 그냥 그대로 두어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고병권,,,이진경 FTA반대기고문..

몇 겹의 환상 혹은 망상의 정치학 
  [왜 한미FTA에 반대하냐고?(4)] 위험한 올인 도박 


  한미 FTA에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처럼
쉽지만 어려운 질문도 없다.
그것이 쉬운 것은
그 이유가 조금의 망설임도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 이유가 너무도 많아
뭐부터 말해야 할지, 뭐가 핵심이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의료비가 오를 것이고,
건강보험료가 오를 것이며,
교육비가 오를 것이고,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이 오를 것이며….
이런 눈앞에 닥쳐올 손해를 계산하는 것은 내가 너무 쫀쫀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이런 손해를 보는 상황은 누구도 좋아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그렇잖아도 항상 도시에 착취당하고 시장에 농락당하던 농민들의 삶이
전면적으로 초토화될 것이고,
땅이 있어도 농사지을 수 없게 되는 사태가 닥쳐올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해서도 '신도시'를 만들고 투기로 땅값을 올려
'보상책'을 찾는 거대한 개발의 정신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국의 들판이 콘크리트로 덮이는 그날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對)중국 경쟁력이 없으니 포기해야 마땅하다는 제조업,
그 제조업 공장의 노동자들이 여기저기서 밀려나
선진화된 실업사회(실업률이 10% 근방을 오락가락하는 서구의 사회처럼!)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아니면 그 노동자들이
한미 FTA로 수입된 선진 서비스업의 발전 덕택에 보험사원이 돼
보험상품을 팔러 다니고,
법률회사 직원이 되어 법원을 들락거리고,
컨설팅회사의 직원이 되어
회사 사장님들에게 선진화된 경영방법을 알려주러 내왕하는
'탈공업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믿어야 할까?
 
  어느 것이든 피하고 싶은 상상이거나 믿을 수 없는 상상이다.
우리의 풍부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이 따위 상상으로 내모는
한심한 상상의 장이 싫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멀쩡한 자국 은행을 부실은행으로 둔갑시켜
외국자본에게 팔아넘기며 뒤로 슬쩍 돈을 챙기는 정부관료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겨야 하는 것일까?
우리 영화는 미국영화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는 영화인들의 말에
미국인들이 볼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말로 응수하는
협상단 대표에게,
FTA식 구제심판제도가 뭔지도 모른 채로
협상안을 만들고 있는 협상단 관료들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맡겨야 하는 것일까?
 
  그러려면 먼저 사기 전과자라도 믿고
그에게 자기 재산의 운용을 맡길 정도의
맹목적 신앙심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외환은행처럼 저리 큰 은행도 저렇게 쉽사리 넘어가는데,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우리네 인생이 뭘 어쩌겠어"라며 포기하는
손쉬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차라리 철없는 몽상가, 무모한 낭만주의자가 되어
거대한 수레 앞에 팔을 들어 대드는
당랑거사(螳螂居士)가 되고 싶다.
 
  어디 이뿐일까?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구조적인 차별을 제도화하면서도
자본에 대해서는 모든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면서
산업폐기물로 사람들을 집단으로 폐기처분했던
잔혹한 기업 메탈클래드의 '손해'조차 국가로 하여금 배상하게 하고,
우편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우체국에 대해서조차
자본과 똑같이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FTA의 턱없는 심판제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멀쩡한 정신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이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차피 미국시장이 없으면 망할 경제이니
미국경제가 저물든 말든 좀더 찰싹 달라붙어 운명을 같이 하자는
가미카제식 동맹주의를,
멀쩡한 안목을 갖고 있다면 어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싫은 것은
한미 FTA라는 하나의 사건에 겹쳐져 있는 몇 겹의 환상들이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자본, 그것도 잘 나가는 일부 거대 독점자본의 이익을
국민 전체의 이익으로 착각하는 경제적 환상.
국민의 인생을 판돈으로 걸고 국민을 대신하여 '올인'하는 도박이
무슨 구국의 결단이나 큰 정치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정치적 환상.
미국과 연계되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외교적 환상.
전체적으로 경제적 부가 늘어나면
사회 전체가 잘 살게 될 거라는 사회적 환상.
그리고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인생을 걸고 자신이 남들을 위해
뭔가 큰일 혹은 희생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도덕적 환상(과대망상!).
 

  이런 환상들은 대중이 갖고 있다기보다는
대통령이나 그 주변 인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학적 개념인 '이데올로기'라는 말보다는
정신의학적인 개념인 '망상(delirium)'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이 어이없는 환상들이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작동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환상들의 게임에 말려들게 한 것일까?
 
  우리는 이런 환상 또는 망상들이 작동하게 한 '객관적인' 이유와
'주관적인' 이유에 대해 간단하게 추측할 수 있다.
망상의 객관적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이었을 것이다.
 
  개성공단은 중국보다도 싼 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으니,
가령 거기에 삼성이나 현대 등 기술력을 갖춘 남한 자본이 들어간다면
중국과도 경쟁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그걸 미국시장에 내다팔 수 있다면,
남한 자본은 가격경쟁력이 강화되니 이득을 볼 것이고
거기서 지불한 임금은 북한경제를 살려낼 기사회생의 약이 될 것이니,
이거야말로 남북한 모두가 사는 '윈-윈 게임'이 아닌가!
 

  그것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노무현의 꿈에 딱 맞는
'한 건'이었을 것이다.
이거라면 "남은 임기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올인하겠다"고 할 만한
사안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정도 일을 위해서라면
몇십만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고통,
혹은 영화인들의 저항은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일종의 비용 내지 판돈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거라면 그 도박 같은 '올인'이
남북통일과 민족중흥을 위한 숭고한 일이 될 것이니,
무지한 인민들의 반대와 비판은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들이 받게 마련인
시련의 증거로 받아들여졌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여러분은
'그때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참 잘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일종의 순교자적 심정으로
모든 역경을 헤쳐나가리라고 다짐하게 됐을 것이다.
스스로 자랑삼는 '도덕적 진정성'은
이런 종교적 심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떠한 반대도 그의 귀에는 안 들리는 것은
이 숭고한 결심의 벽이 그토록 두텁기 때문일 게다.
 
  더구나 내막을 있는 그대로 까놓을 수 없는 사정은
한미 FTA에 대한 모든 반대를 무지의 소산으로 돌릴,
즉 '여러분들이 이 모든 생각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할
그럴듯한 알리바이마저 제공해 준다.
따라서 남는 것은 비밀스런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뿐이다.
 
  이런 게 아니고선,
느닷없이 한미 FTA에 대한 외골수의 신앙심을 갖게 된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게 아니고선,
청와대 담당자와 측근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길로 꼴통 같은 고집과 곤조로 치달리는
대통령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게 아니고선,
스스로 운동권 출신임을 자처하면서도
모든 운동권이 한결같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한미 FTA를
고집스레 하겠다고 우겨대는
노무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핵실험으로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은 물건너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기대했던 가장 중요한 이익이 소멸된 것 아닌가?
그러나 국가장치를 움직이는 관료-기계들은 관성의 힘으로 움직인다.
즉 일단 하기로 한 것은 해야 한다.
그것은 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해야 할 이유를 다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함을 설득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한 일이 된다.
 
  그래서일까?
경제관료를 지낸 노무현의 한 측근(강봉균)은
북한의 핵실험 직후 이렇게 말했다.
"경제적 이득이 없더라도 정치적 동맹 차원에서 한미 FTA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새로운 이유를 찾아낸다!
 
  더구나 지금 와서 북한 핵실험 때문에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바꾼다면,
그건 그것을 추진한 이유이지만
감추어야 할 이유를 까놓는 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는 것은
'올인'하는 도박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노무현이 이준기에게 해줬던 말이
다시 그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요?"
 
  이런 식으로 올인하는 도박사의 망상이
앞서 말한 객관적 이유에 더해진다.
"끝까지 베팅하면 결국 승리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몇 겹의 환상이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작동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
즉 '주관적인' 요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올인'하는
도박사의 망상 덕에 성공했고,
그로 인해 대통령이라는 꿈을 이루었다.
그것은 사실 그의 매력이기도 했고, 그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스로 자랑스레 '바보 노무현'을 자처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한 열정으로
그를 좋아하고 지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쩌다 도박판에서 큰돈을 땄다고 해서
계속 도박판을 헤집고 다니면
한때의 행운이 인생을 망치는 결정적 불행이 되고,
슈퍼마켓으로 성공한 사람이
그 성공의 경험에 취해 있으면
평생 슈퍼마켓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잘 아는 유명한 정치가는
"어떠한 조건에도 대립물로 전환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선거에서 이기거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좋은 방법이
행정적 통치를 수행하는 데 좋은 방법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미련스런 '올인'의 도박정신이
선거의 승리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는 좋은 방법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국민 전체의 삶을 좌우하는 경제정책의 선택이나
국제조약의 체결에도 좋은 방법일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사실 그는 어떤 경제정책에도 올인하지 않았고,
부동산 정책조차 일관되게 밀어붙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선거야 떨어져도 또 나가면 그만이지만,
한미 FTA처럼 우리 인생을 좌우할 사태는
한번 해서 실패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위를 걸고 올인해서 성공한 경험,
그건 선거에나 다시 써먹을 일이다.
그걸 한미 FTA처럼
국민경제 전반에 대한 포괄적 시야와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전략적 사유,
그리고 예상되는 손익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문제에
쉽사리 써먹으려는 발상처럼
안이하고 위험한 게 또 있을까?
 
  세상 모든 일이 선거와 같으리라는
선거주의적 망상,
끝까지 버티면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도박주의적 망상,
그래서 한탕하면 그간의 오류는 모두 잊고 그것으로 자신을 기억해주리라는
한탕주의적 망상,
이런 망상들이 그와 그의 관료들이 한미 FTA를 미친 속도로 몰고 가며
하나의 현실적 사태로 만들고 있는 주관적 이유인 것이다.
 
 
  한미 FTA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
그것은 한마디로 '망상의 정치학'이다.
그 망상이 만들어내는 겹겹의 환상들을 우리가 공유하게 될 때,
혹은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될 때
망상의 정치는 현실적 힘을 획득해
우리 자신의 삶을 향해 물질적 힘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망상은 허구적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범위 안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정확하게 현실과 동일한 효과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현실적 효과가
망상 안에서 상상한 것과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이다.
망상 안에서 똥을 된장이라고 알고 먹는 사람에게도
물리적으로는 똥은 똥일 뿐인 것처럼.
더욱 나쁜 것은,
망상으로 인해 실패한 경험이 일반화될 경우
부재하는 것을 만들어가는 모든 창조적 상상이나
미래를 꿈꾸는 즐거운 몽상조차
결국엔 파국으로 귀착될 끔찍한 망상으로 간주돼
비난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모든 희망이 절망의 다른 이름이 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는 능력조차 빼앗겨버리는 것,
바로 이것이 '한미 FTA'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망상의 정치에서
우리가 예견하는 미래다.
그것은 끔찍해진 현실 다음으로 닥쳐올,
그 현실보다 더 끔찍한
우리의 미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미 FTA를 반대한다. 
   
 

  이진경/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수유넘 연구원들 기고문,,

[경향포럼] 이용후생의 덫, 한·미 FTA


1780년 여름. 생애 처음 중원에 들어선 연암 박지원은 책문을 지나 한 주점에 들른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외양간이나 돼지우리는 물론 땔감 더미나 두엄 더미까지도 그림처럼 곱다. 연암은 감탄한다. “아! 이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그 쓰임을 이롭게 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또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면 어찌 덕을 바르게 펼 수 있겠는가.”

-‘正德’ 실종된 채 부국강병 올인-

이용과 후생, 그리고 정덕, 이 ‘트리아드’가 바로 연암 문명론의 핵심이다. 물론 이것이 연암이 창안한 개념은 아니다. 선진고경 가운데 하나인 ‘서경’의 한 대목에서 유래한 구절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저 아득한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문명의 척도이자 근간을 이루는 명제였던 것. 연암은 이 오래된 명제를 되살려 거기에 피와 살을 입혔을 뿐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이 세 개의 개념 가운데 ‘정덕’은 홀연 실종되고 말았다. 연암은 ‘이용후생학파’로 규정되었고, 이용후생은 곧바로 부국강병의 논리로 변주되었다. 이용후생을 이루면 정덕은 절로 이룰 수 있으리라고 여긴 탓일까? 아니면 서구 열강의 도래 앞에서 ‘이용후생’만이 살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우리는 마침내 ‘삶을 도탑게 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0위 안에 들고, 인터넷 최강국이 되었으며, 집값과 물가 수준은 이미 미국이나 유럽을 훨씬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자, 이쯤되면 이제 그간 완전 망각하고 있던 ‘정덕’을 되새길 때도 되지 않았는가? 뭐가 됐든, 이 정도의 부를 누리게 되었으면 범국가적 차원에서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통찰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말이다.

한데, 그렇기는커녕 이제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세계시장을 정복하겠다고 한다. 멕시코와 캐나다의 실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농업과 제조업의 희생쯤이야 어차피 겪어야 할 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대충 뭉개버린다. 정부에 따르면 미국 시장은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며,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더더욱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논리고 뭐고 없다. 그저 ‘하면 된다’는 돌격대 정신만이 충만할 뿐.

그래, 좋다. 일단 정부의 말을 믿어준다고 치자. 멕시코와 캐나다의 전철을 밟지 않고, 경기침체를 벗어나 도약을 이룬다고 치자. 그럼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중요한 건 수치나 제도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변화되는가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나면 다른 건 몰라도 미국식 중산층의 삶이 이 땅에 고스란히 이식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식 삶 이식 과연 행복할까-

하여, 나는 정말 묻고 싶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진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가? 가족관계는 해체된 지 오래고, 허울뿐인 민주주의에, 자본 이외에 어떠한 비전도 없는 그 황량한 일상을 굳이 복제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미 우리는 그런 가치들로부터 충분히 고통받고 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질주하는 저 부동산에 대한 광기를 보라! 어떤 제도나 계몽으로도 막을 수 없는 저 맹목의 질주를. 그런 점에서 부동산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나 한·미 FTA에 대한 돌격대식 논법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국민들은 부동산에 올인하고, 정부는 세계화에 올인하고, 참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만약 연암으로 하여금 우리 시대를 통찰하게 한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탄식할 것이다. “정덕이 없는 ‘이용후생’이라? 그건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덫에 불과해.”

〈고미숙/연구공간‘수유+너머’연구원〉

 

 

왜 한미FTA에 반대하냐고?9 - 다수에게 불편한 미래 

- 장보혜
 

 
  백화점에서 명품이나 고가품이 잘 팔리고,
아이들 장난감이 백만 원을 호가해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외제 고급 승용차의 수입량이 늘었지만 없어서 못 팔고,
인천 국제공항에는 골프채를 맨 여행객들로 만원이고….
경기가 어려운 때일수록
이런 소식을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보고 듣게 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것 같다.
저들의 활발한 소비활동이
돌고 돌아 내 지갑에도 미칠 효과를 잠깐 따져보다 그만둔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관심 없다.
 
  서울 강남의 집값이 아무리 뛴다 해도,
대치동의 아파트 값이 얼마니 해도 나와는 무관하다.
거기서 안 살면 그만이다.
거기다 집을 살 돈도,
아이들을 경쟁 속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직까지는 서울 안에서도 잘 찾아보면
집값이 비교적 싼 동네가 남아 있고,
그게 안 되면 전세나 월세라는 대안도 남아 있다.
오히려 집값 폭등이 영원히 강남 안에서만 일어나 준다면 감사할 뿐.
강남의 집값을 잡겠다고 매번 뒤늦게 나서는 정부도
나와는 상관없게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면 좋으련만,
그러면 또 관심 끄고 평온하게 살아갈 텐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
한미 FTA가 이미 충분히 힘든 농촌을 죽이는 계약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미 FTA는 평범한 대다수 시민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불편한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조건의 악화
 
  하루의 생활은 도시 단위 혹은 광역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대중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으면 두 다리가 묶인다.
우리는 식사에서부터 배설까지 상하수도에 의존하고 있다.
전기로 낮을 밤까지 연장하고,
우리의 눈과 입과 귀를 먼 곳으로,
과거와 미래로 연장하고 있다.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생활이다.
모두의 효율을 위해,
서로의 안전을 위해 삶의 수단들을 통일하고,
이들 수단을 공동으로 구매해서 소비하고 있다.
공동재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다.
본디 인간에게 땅과 물과 공기가 무상이었듯,
도시인에게는 이들 공공재가 땅과 물과 공기의 연장으로서
무상까진 아니라 해도 세금으로 공동구매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것을 도시에서 자유로이 지불 가능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없게 될 때
도시인들은 눈이 멀고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불구가 된다.
한미 FTA는 우리의 자연인 도시환경을 값비싼 상품으로 바꿔 놓음으로써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일하다 죽거나 굶어 죽거나
 
  정부는 말한다.
직접 보지도 않고 '영화'가 재미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한미 FTA'란 영화는 표를 사서 직접 보지 않아도
어떤 영화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라는 예고편을
이미 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산업구조를 선진국형으로 바꾸는 구조조정이란
결국 많은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를 의미했으며,
일자리를 지킨 노동자들에게는
'노동강도의 증가'를 의미했다.
한미 FTA는 이미 진행 중인 노동조건의 악화를 더욱 가속화시켜
되돌릴 수 없도록 확정시킬 것이다.
 
  내가 먹은 밥이 네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정부는 경쟁력을 키우자고 한다.
경쟁력 있는 힘센 몇몇을 밀어 주자고 한다.
경쟁력 있는 분야와 그 분야의 사람들이
나머지를 부양하면 된다고 한다.
 
  정말 그들이 힘 없는 사람들을 부양할까도 의문이지만,
이는 간단히 보상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문 서비스업 종사자의 발전이
농민과 노동자의 몰락을 상쇄할 수는 없다.
 
  너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살 수 없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을 대신할 수 없다.
타인이나 특정 계층의 희생으로
나의 안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
 
  자본증식의 참신한 기술?
 
  하긴 새로운 경제질서에서는 어차피
큰 재산은 월급을 모아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파트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챙기는 시세차익으로 큰돈이 벌린다.
기업 역시 물건을 만들고 팔아서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사 자체를 사고파는 과정을 통해 덩치를 키운다.
 
  IMF 외환위기는
기업이 재화를 생산해서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히 가르쳐 주었다.
특히 초국적 자본은 제품을 생산하고 파는 것보다는
회사 자체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더 큰 부를 축적했다.
한편 고용구조를 조정함으로써 아끼게 된 인건비만큼
이윤이 늘었다.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고 파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버는 데 더 의존한다면,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신용카드로 구매'하게끔 했던 바로 그 은행에서
어떤 사람들은 돈을 빌려 집을 살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집값이 점점 오르기만 한다면,
그런데도 계속해서 풍요를 누릴 수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아 왔거나
빚을 지고 상환은 계속 미루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물리학의 '질량 보존의 법칙'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세계경제에도 있을 것이므로.
 
  신종 계급사회의 도래
 
  정부는 한미 FTA를 체결하면
경제성장률이 7.75%가 더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수치가 허수인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몇 %의 성장이냐가 아니다.
걱정해야 할 건 저성장이 아니라
그동안 오랜 성장기를 거쳐 왔음에도
그 성장으로 모두의 삶이 꼭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과거에는 성공신화가 있었고
그것이 실화로 드러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계층 간에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지만,
거기에서 교육이 한 몫을 해냈었다.
한미 FTA는 자산과 소득의 계층 분화를 가속화시키고 영구화시켜
신종 계급사회를 가져올 것이다.
 
  이 새로운 계급사회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돈이 피부색도 체격도 얼굴 생김새도,
그리고 수명도 다르게 만들 것이다.
또한 이 사회에서는 계급에 따라 구사하는 언어도 달라질 것이다.
돈이 새로운 계급과 인종을 낳을 것이다.
나는 이런 계급사회를 후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돈과 사람을 선택적으로 걸러내는 필터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에는
실제로 높은 장벽이 서 있고 그 벽에는 관들이 걸려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관의 행렬은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넘을 수 없는 국경이지만
자본은 그것을 어려움 없이 넘나든다는 현실을.
그럼에도 최소한의 통행절차도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방해가 된다며
자본이 지나는 길을 매끄럽게 닦으려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마지막 한푼까지 짜내기 위해.
나는 그런 국책사업에 찬성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소박하지만 정직하게
일한 만큼 벌어서 생활해 나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바보이고 시대착오적인 인종으로 만드는 음모를 고발한다.
IMF 외환위기,
그리고 한미 FTA와 같은 헤비급 충격들은
부의 분배 기준을 바꾸고 경제질서를 크게 바꾼다.
 
  경제질서가 크게 뒤척일 때마다
무서운 파랑이 일어 작은 배들은 파괴되거나 침몰한다.
저들은 말한다.
작은 배를 고집하지 말고 큰 배로 옮겨 타라고.
아니면 큰 배 옆에 작은 배를 꼭 붙들어 매라고.
 
  하지만 모두에게는 원하는 각자의 항로가 있다.
그리고 나는 저들과 함께 침몰하고 싶지 않다.
저들과 함께라면 죽음도,
심지어 영광조차도 창피하다.
 
  우리가 찬성할 FTA를 위해 지금은 반대!
 
  우리에겐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미래에 올 자유무역협정을 위해 이번 한미 FTA는 반대하자.
그것은 노동자들을 긴장과 과로로 몰아가는
이 이상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
노동자들이 아닌 국가들과 기업들을 경쟁시키는 방향으로의 전환이다.
 
  노동자, 시민, 국민들은
더 나은 서비스를 하는 기업과 국가를 선택하면 된다.
돈과 상품뿐 아니라 인구의 이동도 자유로운 협정을 환영하자.
옛날에 풍요로운 땅을 찾아 이동했던 것처럼
살기 좋은 곳, 살고 싶은 곳, 가능성의 땅을 찾아 이주할 수 있는
자유협정에 찬성하자.
 
  그런 자유협정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한미 FTA는 중단되어야 한다.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기 전에.
 
  우리는 전쟁 중이다.
가치를 놓고 벌이는 전쟁이고 미래를 건 싸움이다.
 
  나는 내 행복과 자유를 위해 한미 FTA를 반대한다.
아직은 반대할 수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한미 FTA 저지'이니까

 

 

 

반 FTA를 넘어 삶의 권리를 재구성하기.


1.
제가 다닌 중학교는 큰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주변을 산동네가 둘러싸고 있어서 수업이 끝난 후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산동네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함께 뛰어놀았죠.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던 친구는 산기슭에 있는,
방들과 마당이 뒤섞인 기묘한 구조의 집에 살았는데요.
방과 후면 밤늦게까지 그 애 집에서 놀다가 집으로 향하곤 했어요.
산기슭 좁은 골목에서는 가로등 불빛만으로도 아이들이 공을 차고,
강아지들이 깡총거리며 뛰어다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엔
커다란 공터들이 있었습니다.
띄엄띄엄 서 있는 밤의 가로등 불빛 사이에서
시커멓게 뚫린 공터들은 음험해 보입니다.
그 공터의 한 켠에 천막으로 지은 집이 있었죠.
바람이 불면 천막이 펄럭거리며 부풀고, 천막 앞에 널린 낡은 옷들이 나부꼈어요.
어쩐지 무서워 뛰기 시작하면 뒤에서 검은 개가 컹컹 짖었구요.

환한 대낮에 천막집을 지나치게 된 건 좀 나중의 일인데요.
파란색 방수 천으로 만들어진 천막집 앞에
엄마, 아빠와 아이들의 신발들이 놓여 있고,
작은 싱크대와 살림도구들이 보이더군요.
날씨가 쨍쨍하게 맑은 날이면 천막 앞에 실내화가 마르고 있기도 하고,
공터에는 상추나 파 같은 야채들이 자랐습니다.

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6년간,
우리 가족이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그 가족은 내내 그 곳에 있었습니다.
비라도 오면 공터는 온통 진창이 되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많이 오는 밤이면
파란 천막집이 펄럭이다가 날려가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높은 아파트가 이렇게 많이 지어지는데도
천막을 치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과,
어쩌면 아주 많은 가족들이 그러하리라는 것,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땅을, 그러니까 지구의 일부분을
자기 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을까 뭐 그런 것들도요.

몇 년 후, 그 동네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야채가 자라고 천막집이 있는 넓은 공터 같은 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더군요.
비어 있던 자리마다 빼곡히 들어선 건
커다란 주차장을 가진 외국계 프랜차이즈 식당들. 화려한 상가와 교회,
그리고 무수히 많은 학원들 이었구요.

천막에서 살던 가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냥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선 오랫동안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그들은 다시 어딘가의 공터를 찾아냈을까요?
아니, 어쩌면 이제 어디에도 공터는 남아 있지 않는 건 아닐까요?

아파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산동네,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집들,
좁은 골목길에서 공을 차던 아이들도 모두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건 온통
세련된 모노톤의 아파트들뿐 이었으니까요.

멋진 수트를 입고 오피스 타운에서 일하는 사람들,
통통한 뺨을 가진 건강한 아이와 잘생기고 부자인 아빠,
친구들이 부러워할 삶을 스타일링 하는데 여념이 없는 날씬한 주부.
이런 사람들이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입주자인 모양입니다.
텔레비전은 매일 그들의 삶을 광고하잖아요.
하지만 누구도 거기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도 그 곳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말예요.

고층빌딩이, 쇼핑센터가, 주상복합단지가, 화려한 낙원이 건설되고 있는데
굳이 몇 푼의 보상금을 손에 쥔 채 쫓겨난 사람들을,
가난에 쭈그러든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부모가 일을 나간 하루 종일 문이 잠긴 지하방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보여줄 필요는 없기 때문일까요. 
   
2.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 미국과 FTA를 체결하겠다고 합니다.
아주 새로운 일이 생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지금까지도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훨씬 빠르게, 체계적으로 진행될 뿐일 겁니다.

더러운 담요를 두르고 짐짝처럼 누워있는
지하철역 노숙자들의 존재에 익숙해졌듯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에 이미 익숙한지도 모르겠군요.
때로 뉴스에서 생계 때문에 자살한 일가족의 이야기가 나와도
그건 그저 개인적인 불행으로 여겨질 뿐이지요.

그리고, 한미 FTA가 체결되면
이런 ‘개인적인’ 불행들이 훨씬 더 많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평화롭게 농사짓는 땅에 미군기지를 세우겠다고
평택에 군대를 투입했던 지난 5월 4일,
멕시코의 작은 마을 아뗀코에서도 무장경찰에 의한
엄청난 폭력이 벌어졌다는 걸 아세요?

역시 강제 퇴거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 월마트가 들어설 예정이거든요.

꽃을 파는 14살 소년이 철거에 항의하다 목숨을 잃었다는군요.
월마트를 짓기 위해서 국가가 재래시장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쫓아냅니다.
그렇게 자기 삶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고작 몇 푼을 벌기 위해 월마트에서 일해야겠지요.

자본의 욕망을 위해서 국가의 이름으로 민중들에게 내려지는 추방 선고.
찬란한 자본의 제국, 월마트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낙원 주위에 지옥을,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떨이로 이용할 수 있는 무력한 노동력들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FTA는 그런 작업들을 쉽고 빠르게 만들어주는 협정이지요.
많은 것을 소유한 자들이 더, 더, 더 많은 걸 소유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저들만의 협정.

NAFTA를 체결한 이후 13년 동안,
멕시코의 부자들은 엄청나게 돈을 벌어서 세계적 순위를 자랑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이 절대 빈곤층으로 몰락했습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 국경을 넘다가 죽어가는 사람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비참한 판자집.

그건 결코 개인적인 불행도, 개인적인 무능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FTA가 요구하고, 만들어내고 있는 가난입니다.

FTA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생계형 자살이 세계 1위,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는 속도가 세계 1위라는 이 곳 한국에서
가난은 이미 세대를 넘어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 되고 있으니까요.

물을, 전기를, 의료를, 교육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상품으로 바꾸고 있는 사회에서
가난하지만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가난하지만 그래도 미래를 꿈꾸는 삶 같은 건
점점 더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요?
모든 권리를 오직 자본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라니 말입니다!

FTA에 반대하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만이 권리를 갖고 있는 이 세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의 권리를 다시 구성해내는 것이니까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평생 살아온 곳에서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는 권리,
돈이 없어도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권리,
아프면 치료를 받고, 누구나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지구 위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 권리를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리타니고진의 기사..관련,

예전부터 일군의사람들이 고진의 글들을 읽길래..

난 그냥 일본 문학주의자 인가했다..

그저 섬나라일본에 보수화와 우경화에 그늘에

그어떤 좌파적 힘도 없을줄 알았는데..

있긴있나보다..

나중에 시간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몰락 이후' 쉰이 넘어 코뮨주의자 되다

 

[세계의 사회주의자 26] 가라타니 고진, 경제학과 출신 문학평론가

이 글의 필자는 가라타니 고진을 "기존 의미의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는 기존 사회주의와의 이론적 대결을 통해 자신의 변혁적 사상을 가다듬었고, 따라서 그가 사회주의자인지보다는 그가 사회주의를 통해 무엇을 사고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현실적인 실천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가 90년 대 말 지역통화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NAM(New Association Movement)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새로운 현실운동을 시도했지만 4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필자는 가라타니 고진을 무슨 '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그가 사회주의자일 수 있다면,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기획 속에서일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새로 만들어낸 기획은 NAM을 의미한다. <편집자 주>

잊고자 쓰는 사상가가 있다. 그는 개념으로 성을 쌓지 않는다. 남들이 자신의 착상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차용할 때면 그 자리에 불을 지르고 떠난다. 형이상학을 극도로 경계하며, 따라서 세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지어내는 예언을 멀리한다.

이런 성향을 가진 이에게 ‘~주의ism’는 사상의 죽음을 뜻한다. 예수가 아닌 바울이 기독교(예수주의)를 만들었듯, 마르크스주의가 엥겔스의 산물이듯 ‘주의’는 사상이 하나의 체계로 구축되며 시작된다.

그래서 이동을 감행하는 사상가에게 ‘~주의’는 사상이 멈춰선 자리, 즉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전망이 상실된 90년대에, 그것도 쉰이 넘고 나서야 그는 코뮨주의자가 되었다. 바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이야기다.


비평은 위기적 상황으로 자기를 내모는 것

 

가라타니 고진은 1941년 일본의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10대에 문학 작품을 탐독했지만 문학을 하나의 장르로 다루는 데에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결국 도쿄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행방은 문학비평가로 시작되었다. 스물아홉에 가라타니 고진은 <소세키론>으로 군조오 신인문학상을 거머쥐면서 문학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이 시기 그는 영문과 대학원을 진학했지만 경제학과 출신의 문학비평가라는 다소 어색한 그의 이력을 두고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경제학이든 문학이든 그는 분과학문을 한다는 의식을 갖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형이상학과의 싸움이 절실한 문제였다.

   
  ▲ 가라타니 고진의 대표작『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형이상학은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이념을 발견한다. 한국에서 널리 읽힌 그의 초기 저작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과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은 형이상학과의 대결이라는 문제설정을 경제학과 문학이라는 각기 다른 방면에서 펼쳐낸 것들이었다.

그는 이 저작들에서 자본주의와 근대문학을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장치로 해명하여 근대인들을 속박하는 관념의 그물을 걷어내고자 했다.

아마도 가라타니 고진이 스물여섯에 발표한 첫 번째 평론 「사상은 어떻게 가능한가」는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적 원점을 이룬다고 하겠다. 그 일절을 주목하자. “사상과 사상이 격투한다고 보일 때도, 실상은 각자의 사상적 절대성과 각자의 현실적 상대성이 모순되는 지점에서 은밀히 행해지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상이 각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곳에서 결전이 이루어진 예는 한 번도 없다.”

확실히 가라타니 고진은 ‘비평가’로서의 자기의식을 갖고 출발했다. 그에게 비평은 다른 텍스트에 기대어 자신의 입장을 전하거나 편을 짓는 작업이 아니었다. 비평이란 사상의 결전이 치러지는 장소 밑바닥에서 이뤄지고 있는 역할극을 끝까지 주시하는 일이다.

대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입장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렇게 대치할 수 있는 조건, 그 무의식적 구조를 해명하는 일인 것이다. 그 조건과 구조를 밝힌다면 날이 선 온갖 사상적 입장들은 형이상학의 성채를 두르고 있던 부속물임이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비평에는 으레 자신은 상처입지 않으면서 상황 밖에 서 있다는 푸념이 따르곤 한다. 하지만 고진은 홀로 옳은 곳에 서 있고자 비평하지 않았다. 그에게 비평(critique)이란 위기적인(critical) 상황으로 내몰리는 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비평 대상만이 아니라 비평하는 자신도 그래야 한다는 점이다. 사상가가 자신의 발화를 자명하다고 여겨 더 이상 거리낌을 갖지 않는다면, 사상은 어느새 상업성을 띤 선교가 되고 만다. 가라타니 고진에게 비평이란 자신을 불명료함으로 내몰아 선교사의 입장을 피하는 일이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비평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개척해나가던 60년대 후반은 서구 지성계에서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시기이자 반체제 운동이 번져나가던 시기였다. 전공투의 역사를 지닌 일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 그는 다만 난무하는 여러 입장들을 곁눈으로 흘기며 자신의 속도로 걸어갔다. 당시 제기된 인간적 마르크스주의도 반체제 운동이 보여준 열정도 그에게는 ‘이념이 만들어낸 병’에 불과했다.

그 무렵의 학생들처럼 거리로 나섰으나 이내 회의를 느끼고는 이념을 걷어낸 자리를 끝까지 응시한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어떠한 ‘주의자’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에게 입장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입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했다.


태도 전환

 

이후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적 노정은 『탐구』에서 결실을 이룬다. 형이상학과 맞서 싸운다는 버거운 작업으로 삼십대에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지만, 그는 『탐구』를 통해 자신의 스스로 병을 치유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그는 잡지 『군조우』에 『탐구』를 연재했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 할 것이다.”(『탐구Ⅰ』후기)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에서 ‘타자의 문제’를 해명하여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해체주의 마냥 어려운 지적 수사에도 빠지지 않는 ‘삶의 비평’을 일궈냈다. 90년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나온 이 책을 두고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정작 가라타니 고진은 90년대에 들어서자 『탐구Ⅲ』을 쓰겠다던 계획을 중단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90년대 이후 쓴 저작들을 보면 무언가 적극적인 발언을 하겠다는 충동이 가득 묻어난다. 하나의 선명한 입장을 갖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 전환이 응축되어 있는 저작이 바로 10년간 거듭해서 써낸 『트랜스크리틱』(2000)이다. 『트랜스크리틱』은 확신으로 씌어진 책이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광명을 보기 시작했다”고까지 표현하는데, 사상의 구석진 자리를 응시하려던 과거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확실히 가라타니 고진은 1989년까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경멸해 왔다. 그는 어떠한 입장에도 속하지 않고 비평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자 자신이 과거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지속된다는 전제 아래 유효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사회주의는 역사의 ‘거대 서사’와 함께 종언했지만, 아울러 몇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사회주의의 종언이 서구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서사’가 등장했으며, 민족주의와 원리주의라는 ‘서사’가 부활했다. 아울러 모든 이념을 조소하는 냉소주의도 만연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사회주의가 현실적으로 끝났을지언정 사상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자본주의를 극복할 현실적인 기획에 몸을 담았다. 90년대의 상황이 학문적으로는 회의론적 상대주의가 범람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의 우월성이 구가되었으나 그것들이 점차 파괴력을 잃어갔다는 사정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이 시대의 변화와 아울러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야 했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구축된 실천의 방향

 

   
  ▲ 가라타니 고진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전망을 가다듬는다. 기억해야 할 대목은 그가 지극히 이론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폐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론적인 무지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결코 변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정의감과 연민에 기반한 열정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토대로 삼는 논리구조를 해명할 때 그것을 극복할 단서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교환’에 내재된 근원적인 패러독스로 생겨났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지양할 코뮤니즘 역시 종교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상상이 아닌 새로운 교환원리를 통해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선 자본주의를 스테이트(state, 국가)와 네이션(nation, 공동체)과 겹쳐 사고한다. 89년 이후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자신의 정식을 설파하는 데에 경주했다. 그것들 각각은 등가교환, 상호부조, 강탈이라는 교환원리에 대응한다.

먼저 네이션 안에서는 ‘상호부조’가 이루어진다. 등가교환에 따르지 않고 공동의 감정에 기대 서로를 돕는다는 교환원리이다. 스테이트는 강탈을 자신의 교환원리로 삼는데, 그것이 교환인 까닭은 지속적으로 빼앗기 위해 수탈당하는 이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기원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시장원리에 따라 화폐를 통한 등가교환을 취한다.

이렇듯 상이한 교환원리가 합쳐져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자본주의가 강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자본주의를 깨려고 하면 국가적인 관리가 뒤따르거나 네이션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래서 우리는 공황에 직면하면 국가기구가 전면화되고 민족주의가 활성화되는 현실을 목도한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강력한 스테이트로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던 것이 레닌주의이고, 네이션으로 자본주의 극복을 꾀했던 것이 파시즘이다.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사슬을 끊지 못했기에 역사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세 가지 교환원리에 기반해 있는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새로운 교환원리를 제안한다. 그것이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다.

또 한 가지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이론적인 단서는 자본의 자본화 과정, 즉 화폐(M)-상품(C)-화폐'(M')에 있다. 여기에는 두 차례 개입의 여지가 있다. 첫째는 M-C의 계기, 즉 화폐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고, 두 번째는 C-M'의 계기, 즉 상품이 다시 잉여가치가 부가된 화폐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이것은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구매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파는 일이 된다. 무산대중에게 이것은 노동자가 되고 소비자가 되는 일로 나타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M-C-M'의 과정을 끊자고 제안한다.

즉 일하지도 상품을 사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대중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의 연합’을 제시한다.


사상의 실패인가 새로운 사상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90년대 후반부터 그는 본격적인 실험에 나섰는데, 그것이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 운동이다. NAM 운동은 그가 제안한 최초의 현실운동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NAM 조직을 만들고, 각 지역의 NAM 지부 사이에서 네트워크를 꾸려냈다. 간단히 말해 그가 제안한 NAM 운동은 새로운 교환원리인 어소시에이션에 기반하는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 운동이었다.

어소시에이션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와 닮아 있지만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공동체의 교환원리인 상호부조와 유사하지만 배타적이지도 구속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발상이 단지 낯설지만은 않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역통화 운동은 원리적으로 어소시에이션이다. 그가 『가능한 코뮤니즘』이나 『NAM 원리』에서 제시한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운동 역시 자본이 되지 않는 화폐를 매개로 삼는 지역통화 운동의 일종이다.

그리고 NAM 운동은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의 연대를 목표로 삼는다. 화폐 경제에서 판매와 구매,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분리는 노동자와 소비자의 분리, 나아가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의 분리를 낳는다.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실상 입장이 바뀐 노동운동이며, 노동운동 역시 소비자운동인 동안 자신의 국지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소비과정은 육아, 교육, 여가 등 생활세계 전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 바깥에서 생활의 지평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그가 기획한 현실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FA(Free Association)라는 또 하나의 조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2년 「FA선언」을 통해 NAM을 해산시킨다.

자신의 기대와 달리 NAM은 그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한 지식인들의 모임이 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FA선언」에서 밝힌 해산 이유 역시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현실에서 보여준 시도와 실패는 일본과 한국에서 그를 둘러싼 평가가 갈리는 지점이 되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평가는 예순이 넘은 가라타니 고진의 나이를 상기시키며 “가라타니 고진도 이제 다했다”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것은 정녕 사상의 실패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실패는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 사실을 알고도 그는 실패를 감행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현실적인 운동의 실패를 사상의 실패라고 단정짓는 것은 사회주의의 현실적인 몰락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를 사상적으로 꾀했던 가라타니 고진에게는 공평치 못한 일이리라.

가라타니 고진은 이제껏 여러 사상적 입장에 가격을 매겨 왔다. 이제 자신의 사상적 궤적을 제작비이자 홍보비 삼아 하나의 입장을 상품으로 내놓았으니, 그것은 팔릴 것인가. 쉽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지금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 그의 시도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의 긴장감을 놓쳤으며, 그의 실패는 그마저도 이론적 완결성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의 사상 언저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늘과 불쾌함을 더 이상은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한 사상가를 진정 대면하려면 그 사상이 지닌 탄성을 제멋대로 줄여놓고 쉽사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2007년 가라타니 고진은 재직 중이던 컬럼비아 대학과 긴키 대학에서 물러나 일본에서 지인들과 교류하며 또 한 번의 사상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그는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하지만 자신의 명성에 사로잡히지도,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않기에 그는 건강하다. 그리고 이 말도 보탤 수 있겠다. 기꺼이 실패하는 것. 그것이 사회주의자의 역사적 역할이다. 사회주의자는 하나의 입장에 관한 이름이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자들이 공유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근본적인 사고는 현실에서 실패할지언정 불씨를 남긴다. 그 불씨는 타오를 것인가.

                                                             * *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좌우는 어떻게만들어지는가..(우석훈)

좌파와 우파의 발생학적 고찰

 

우리가 좌파와 우파라고 부르는 것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다. 처음에는 회의 오른쪽에 왕당파들이 앉고 왼쪽에 공화파들이 앉았고, 나중에는 보수적인 지롱드파와 급진적인 쟈코벵파가 앉으면서 시작된 말이다.

세상에는 좌파와 우파만 있고, 회색지대는 없느냐? 그렇지는 않다. 극우도 있고, 극좌도 있고, 이런 방식으로는 분류하기 어려운 무정부주의나 아주 이상한 퇴행적 정치신념을 가진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있다. 현재에는 대체적으로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우파를 형성하고,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진화의 마지막 단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좌파를 형성한다.

생태주의에도 좌파가 있고 우파가 있으며, 여성주의에도 좌파가 있고 우파가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한동안 좌파는 무산계급에서 등장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21세기에 과연 그렇게 사람들의 의식을 재산 혹은 소유관계가 결정할 것이냐라고 질문하면 대답하기가 좀 어렵다. 70년대에는 '공유된 경험' 혹은 문화라고 생각하는 흐름도 있었는데, 이 말도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좌파가 되고, 누가 우파가 되느냐? 가장 고전적인 자본론 방식의 설명을 차용하는 딱딱한 방법에서 DNA로 설명하는 약간 황당하지만 논리적 일관성은 가지고 있는 최근에 유행하는 방법까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그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청소년기에는 모든 사람은 약간씩 좌파가 되고,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하면서 모든 사람은 조금씩 우파가 되는 것 같다. 학교에서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른 것들을 기원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구조에 대해서 저주하거나 반항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나이를 먹으면서 '순치'라고 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조금씩 우파가 된다.

물론 아주 특이하게 날 때부터 우파였던 것처럼 청소년기에 우파로 자라나고, 어른이 되면서 극우파가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거짓말 하기를 싫어하는 성격들을 가지는 것 같다. 내가 프랑스에서 만났던 극우파들은 개인적으로는 청교도 이상으로 도덕적이며, 무결점의 인간들이었다. 가죽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스킨헤드 한 명을 아는데, 이 친구는 전형적인 극우파인데, 스킨헤드들이 대학원 1등을 늘 하던 전통에 따라 이 친구도 공부를 아주 잘했다. 로그함수에 대한 아주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정의를 나에게 알려준 프랑스 친구가 바로 이 스킨헤드였다. 물론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극우파들은 게으름뱅이이고, 거짓말쟁이이고, 협작에 도가 튼 사람들이 많다. 진정한 극우파는 예술적 감성이 뛰어나고, 아주 민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극좌파들도 몇 명 아는데, 내가 프랑스에서 만났던 극좌파들은 남자나 여자나 황홀하도록 아름답게 생겼다. 극좌파는 조직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재능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이 극좌파가 된다는 생각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재능이 많은 사람들 특히 지적능력과 신체적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사람들 아니면 극좌파라는 정치적 신념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의 수 십년을 제외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극좌파임이 드러났을 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공개적이고 가혹한 테러에 의해서 목 달아나는 경우가 많았다.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혼자 사는 아름다운 여인을 마녀라고 부르며 가혹하게 처형하던 전통을 분명히 인류사 특히 서양인류사는 어두운 과거로 가지고 있다. 모든 극좌파가 아름다운가?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프랑스 극좌파들은 모두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답게 생겼고, 아주 미성들을 가지고 있어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그대로 시일 정도로 선율과 실루엣이 멋진 사람들이었다.

우파의 경우는 평범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모든 사회는 좌파로 태어난 청소년들을 길들여서 우파로 만들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시키는대로 있으면 자연스럽게 우파가 된다. 우파로 세상을 살아가면 편하기 그지없고, 정신적 고통은 별로 없다. 마녀사냥에 나설 때에도 뒤에서 박수치고 있으면 훌륭한 한 명의 우파로 기능하게 되고, 취직하고, 친구 사귀고, 적절한 소비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파가 된다.

우리나라가 유럽 사회와 다른 것은, 가만히 있으면 극우파가 된다는 사실이 다르다. 유럽의 극우파들은 어쨌든 자기 논리와 자기 감정이 분명하고, 호불호를 자기 논리로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의 극우파는 엄앵란에서 젊은 MC들에 이르기까지 평범하기 그지없고, 때때로 발음도 제대로 못한다. 한국은 중도가 개혁파이고 진보주의자라고 그러는 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전부 우경도되어 있고, 그래서 평범한 우리나라의 우파가 국제 기준으로는 극우파 정도 되는 것 같다. 조선일보 읽으면서 조선일보에서 시키는 대로 퓨전 레스토랑에 가면 유럽식 우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식 극우파가 된다.

유럽에서도 극우파는 부동산 투기는 안하는데, 한국의 극우파는 유럽의 평범한 극우파들이 지키는 개인적 소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변종들이다. 세상에 어느 나라 극우파가 자기 자식들을 변성기도 겪기 전에 미국으로 보내서 어학연수 시키는 나라가 있느냐? 중국 극우파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일본 극우파는 그 정도도 아니다. 극우성향이 평균이 된 평범한 우파들의 구조라고 봐야 일관된 발생론적인 설명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좌파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유럽의 경우라면 '3대째 노동자', 즉 three-generation worker라는 기준을 가지면 대체적으로 정확하다. 할아버지 노동자, 아버지 노동자이면, 자식 노동자는 거의 정확하게 좌파가 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유럽에서 3대 노동자인데, 이 중의 일부가 극우파도 되고, 우파도 되고, 결국은 국민의 50% 정도가 좌파가 되는 셈이다. 일반적인 유럽 정치 지형에서 좌파는 숫자는 많지만 여러 당으로 분할되어 있고, 우파는 숫자는 적지만 경제적 권력이 강하다. 유럽에 좌파 지식인이 많은 것은 지식권력만큼은 좌파들이 우파들에게 혁명 이후로 뺏긴 적이 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의사, 독일의 변호사, 모두 3대째 노동자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영국의 의사와 독일의 변호사는 모두 노동자들이다. 월급도 노동자 수준이고, 공무원처럼 국가에 소속되지만 자신은 노동자라는 의식이 강하다. 대문자 P로 시작되는 프랑스의 국립대학 Professor들은 6개월 이상 계속되는 시험을 봐서 교수가 되고, 데리다가 이 시험을 3수만에 겨우 붙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이런 정교수들은 정년이 보장되지만, 임금은 결코 프랑스의 평균 노동자임금을 넘지 않고, 이들도 고용이 안정되고 책을 낼 수 있다는 사회적 명예만을 갖지, 경제적 권력까지 갖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자신을 노동자 혹은 노동자의 대변자라고 생각한다.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니꼴라이 선생은 코르시카 노동자의 아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3대째 노동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좌파는 사회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공유된 경험을 통해서 일부가 발생하고, 공부하다가 자신의 학문의 결론으로 좌파가 되거나, 아니면 고등학교 이후에 진행되는 '순치'를 거부한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좌파가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극좌파가 아주 적고, 희한하게도 좌파가 적다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좌파로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우파로 취직을 하게 된다. 이런 구조는 21세기 이후의 문화의 재생산구조와 결합되기 때문에, 지금 20대에서 좌파는 천연기념물인 셈이다. 지금 20대의 좌파는 공유된 경험이나 출생의 유래에 의해서 좌파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순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선택을 한 셈이기 때문에, 80년대에 공유된 경험으로 대량배출된 좌파에 비해서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높다.

10대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좌파의 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구조를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20대에 특별한 재능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던 사람은 자연스럽게 우파가 되는 것이 현재의 구조인데, 이 때의 우파는 국제적 표준에 의하면 극우파인 셈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순치를 거부한 좌파들이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조그맣게라도 꾸릴 수 있는 곳은 예술과 학문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생산'이 '모방'보다 칭송받고, 구질서를 깨트린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이나 학문이라고 평탄치는 않지만, 이곳이 현재 아주 좁은 경로를 따라서 이미 좌파가 된 20대가 비로서 작은 숨이라도 쉴 수 있는 공간이다.

# by 비나리 | 2007/07/24 01:39 | 파라독스 | 트랙백 | 덧글(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안]생태적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비정규 및 불법파견 관련 세설 At2005.가을By이맹물

[제안]생태적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비정규 및 불법파견 관련 세설 At2005.가을By이맹물

 저는 촌놈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차를 타면 멀미를 합니다. 제가 시를 썼다면 그것은 한 촌놈이 도시생활에서 느끼는 멀미의 기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딱딱하고 높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시골집 앞에서 수십년 동안 묵묵히 바람을 만들고 있는 당나무의 그늘과는 참으로 다릅니다. 나무그늘 아래 몸을 누이면 나뭇잎들은 수천개의 빛을 반짝이며 몸과 마음을 한없이 어루만져 주는데 도시의, 골목의 그늘들은 그저 아득하게 검기만 합니다.

 도시는 똥싸는 일조차 자책감이 들게 만듭니다. 수세식 변기에서 마술처럼 사라진 똥들은 (아마도) 종합처리장으로 모여 수차례 걸러지고 염소소독을 거쳐 다시 방류됩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개똥이든 사람똥이든 귀하디 귀해 이웃집에 마실갔다가도 다시 뛰어와 제 집에서만 똥을 누었다 합니다. 이곳에서는 그 귀한 똥이 고작 쓰레기밖에는 못되니 슬픈 노릇이지요.

저번에 한국이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장이란 어쨌든 약자에 대한 착취없이는 거의 불가능했었습니다.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 열광할 때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은 그 물건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른채 축구공을 꿰매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는 얘기를 왕왕 듣지 않습니까.

  저는 자본주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어떤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는지 제대로 배운 바가 없습니다. 다만 '돈이 최고'라는 것은 압니다. 돈만 있으면 살기에 더없이 편하다고들 하지요. 로또 한 방이면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곳에서는 돈없이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일단 집밖으로 나가면 무얼 하든지 돈이 필요합니다. 생산과 소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활동도 아무런 인간관계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돈이 없다면 '나'는 이곳에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이윤이 된다면 인간이건 동물이건 쉽게 도구화되어 버리지요. 이제는 사람의 목숨과 장기까지 필요에 따라 '생산'하고 '팔아먹으려' 합니다.

  한 친구가 말하길 자기는 양말은 특히 잘 빨지 않는다 합니다. 한 켤레에 500원 짜리 양말이 있는데 질감도 좋고 신기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달에 고작 이만원 정도면 매일 새 양말을 신을 수 있다고 귀뜸합니다. 만약 인구의 10프로 정도만 그같이 한다면 머잖아 우리는 양말쓰레기 더미에 갇혀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풍요로운 죽음'이지요. 양말도 똥처럼 재활용이 잘 안되기는 마찬가지이고 재활용의 '기술'이란 것도 돈과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어쨌든 또하나의 소모과정이 됩니다. 게다가 이런 걸 모아서 아프리카로 보내면 그 나라 의류산업의 싹을 자른다 하니, 거참 사면초가이지요.

  사람들의 꿈은 의례 도시에서 벌어, 촌에서 전원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혹은 연애를 하거나 낭만적인 세계여행을 하며 여유롭게 사는 것이지요. 헌데 낭패입니다. 지난 30년간 태풍의 위력이 50%나 세졌는데 거의 확실히 지구온난화 때문이랍니다. 땅은 온갖 화학적 불결함 때문에 상당부분 이미 죽었습니다. 매연이 만들어낸 구름들이 꼭 도시에만 뿌려지라는 법은 없지요. 구름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제멋대로 흘러다니잖아요. '청정한' 시골의 사람들도 결국 같은 산성비를 맞아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농촌은 세계화의 산성비를 맞아 경제적 파산에 직면했고 사실상 우리 고향은 붕괴되었습니다. 낭만과 여행에 대해 말하자면, 세상은 여전히 전쟁통입니다. 민족전쟁, 석유전쟁, 복수전쟁, 종교전쟁, 땅전쟁. 지금 이 시간에도 폭음 속에 불안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요. 안전하게 여행하며 '즐길 수' 있는 나라는 몇 개 안됩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에게 헛된 오만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진화는 어느 순간 '진보'가 되었고 진보의 필요충분은 '성장'입니다. 세계는 지금 유사이래 가장 강력한 도그마, 곧 성장이데올로기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습니다. 저로써는 경제학이 스스로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단지 채취하고 변경시킬 줄만 아는 인간에게 '생산'이라는 용어를 부여한 것조차 납득불가입니다만 어쨌든 지금은 무한히 생산하고 무한히 성장해야만 하는, 그리하여 선점하고 독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하는 패권주의의 세상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충분히 발달했지만 지구촌이라는 범아적 의식은 민족주의의 소아적 고집을 끝내 벗겨버리지 못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쟁이 난무하고 굶주림이 계속 확대되는 '외부적 불안'이 한 사회의 풍토를 더욱 경직되고 분열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동시에 노동을 그 이윤으로부터 한층 더 단절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몇몇 선진국과 비정규직과 정규직간의 갈등을 이용하는 자본가는 결국 한통속이지요. 신자유주의를 네오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마도 '자유'가 이처럼 일부 극소수층만의 전유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곳곳의 저항, 복수, 무질서가 심해지면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그 제국적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그것이 평범한 일상과 안전을 원하는 서민들의 요구에 알맞게 부합한다는 거지요. 지금 우리는 공포정치의 전형을 겪고 있습니다, 악순환의 존속이지요. 사람들은 이제 절망을 인정하고 그것에 안주하려 드는 것 같습니다.

  도시는 거죽만 요란할 뿐 온갖 회의와 좌절로 꽁초처럼 버려졌습니다. 이미 텅 비었습니다.

  역사적 진보는 '다양성의 만발'이라는 자연적 진화를 눈꼽만큼도 흉내내지 못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인류사회가 진보적이고 민주적이었던 시절은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나 노예가 있었고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이 있어 왔으니까요. 무엇보다 현대사회의 임노동자들만큼 '노예다운 노예'는 일찌기 한번도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전적으로 자연과 운명의 노예였다면 지금은 돈과 기업의 노예입니다. '기업시장주의'는 가진 건 몸밖에 없는 사람들의 노동을 한낱 '특별한 상품'으로 간주합니다. 그나마 <특별한>이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진언과 희생 끝에 성취된 노동법 때문이지요. 해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습니다. 더이상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력이나 인재 곧 <수단이나 재료>일 뿐입니다. 고도의 분업화, 기계화, 합리화는 애초부터 노동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상당부분 배제합니다. 더욱이 비현실적인 최저임금, 과노동, 관행적인 중간착취, 미비한 사회보장 시스템 때문에 서민들의 삶은 진정 고해, 그 자체입니다. 자유시장은 스스로 생산한 분(分)의 가치를 되살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지루하고 고된 하루를 잊을 수 있게끔 탁월한 마약을 공급합니다. 티브이, 유흥, 스포츠, 영화, 쇼핑, 섹스, 약물, 게임 이런 것을요. 이런 '망각상품'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일은 문화창조적 활동의 동기와 방법 모두를 상실해가는 흔한 '중독과정'입니다. 이런 식으로 혼이 없는 마리오네뜨들이 거리를 누비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계는 대량실업과 장기불황이라는 '경제적 난국'과 환경오염과 기후온난화라는 '절대적 위기'를 더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난 과오의 꾸준한 누적에 따른,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길은 공멸과 공존 중에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거국적이고 초국적인 단결이 필요한 시점이지요. 헌데 '온전한 협동'이란 어디까지나 자발성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경제적 자립이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유럽에서는 생태경제학이라는 분야가 정밀성을 획득하고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데 잘은 몰라도 생태경제학에서의 부(富)는 기존의 것과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기차가 커다란 바윗돌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이즈음, 더이상의 성장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제로성장률이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기우일 뿐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지요.

  근래 '불법파견' 문제가 노동계의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는데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경제'와 '정의' 사이에서 마냥 표류 중입니다. 불법파견과 노동유연화의 배경에도 역시 '성장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음을 주시한다면 이제 노동운동은 생태적 관점에 대해 충분히 열려있어야 합니다. 여지껏 절대적 가치가 되어온 <자본과 이윤>이 그 내용물을 완전히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한 줌의 맑은 공기조차 살 수 없게 됐으니까요. 생산과 소비 둘 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태적 선택이 노동운동의 진의와 효과를 조금도 퇴색시키지 않는다고 봅니다. 직고용의 원칙을 고수하고  왜곡된 노동자성을 회복하는 것, 식량안보를 확고히 하는 것, 내수기반을 견실히 하여 건전한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것, 소유되거나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자원을 가려 공적 재산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 등은 생태주의와 거의 완벽히 일치하거나 그것에 무리없이 수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중해방의 꿈은 인간본위에서 생명본위로 가치이동을 이룰 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동자 개개인의 근본적 성찰이 가장 먼저겠지요. 직업인은 상당부분 '군인'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위계조직 하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전쟁 중의 군인에게 동정심이야말로 주적(主敵)입니다. 무관심과 몰인정이 당연한 ‘삶의 기술’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신자유주의의 충복, 곧 일개 군인이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바로 며칠 전 현대자동차에서 또 하나의 귀중한 생명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해고당한 비정규노동자였는데, 열사를 두고 노노갈등이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합니다. 형제애나 조화로움의 최고가치를 외면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는 그 명분이 확실히 빈약합니다.

  노동법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직접고용과 종신고용의 원칙'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난 해의 박일수 열사 또 며칠 전의 류기혁 열사는 둘 다 비정규 노동자였고 동시에 불법파견 근로자였습니다. '불법파견 근로자'는 중간착취로 인한 저임금, 주기적 이중계약으로 인한 고용불안, 노동3권 상실 등의 불합리한 차별을 당하고 있는 법률적 피해자를 말합니다. 이들의 '피해'는 대부분 사용자들만의 이윤이 됩니다. 생산원가를 아끼고 노조규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영위기 때는 손쉽게 자를 수도 있지요. 사용주가 누리는 이같은 이익들은 당연히 '부당한 이익'이고 해당 근로자들에게 당장 환원되어야 하는 이익입니다. '위장도급' 하의 근로자들은 처음부터 해당 원청기업에 직고용됐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기업들은 이들에 대해 사실상의 통제권을 유지하면서도 형식적 간접고용을 이용하여 실사용자로서의 법적 책임을 회피합니다. 발각되더라도 거미줄처럼 허술한 법망 덕에 벌금이나 몇 푼 물고는 전원 해고시킬 뿐이지요. 가해자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고 피해자만 다시 피해를 보는 셈입니다. 불법파견을 두고 '신종 인신매매'나 다름없다며 거친 표현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헌데 노동부는 이들 기업들에게 마치 갓난 아기를 얼르고 달래는 듯한 미온적 태도로 일관합니다. 직무유기이지요. 참여정부는 위헌적이고 반가치적 악법인 <파견법>을 폐기는커녕 오히려 확대하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방법론은 당연히 '대화'입니다. 하나의 오해가 다른 오해를 만나 얘기합니다. 그리고 각자를 수정하여 타협합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차이가 차별로 되지 않아야 하지요. 강자와 약자가 있는데 만약 강자가 일방으로 대화를 거부한다면 혹은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폭력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정직해서 내가 누군가를 소외시키면 동시에 나또한 소외받게 되지요. 해서, '함께 한다'는 것은 진정한 이기심일 뿐 실상 아무런 희생도 동반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런 고리타분한 원론을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네요. "불법파견은 근로빈곤층을 양산해 당장 <구매력> 하락으로 나타난다" 라고. "불법파견은 높은 이직률과 기술축적 하락 때문에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라고. "불법파견은 정규와 비정규라는 신분갈등을 초래해 막대한 <비효율>을 낳는다"라고. "불법파견은 애사심 부족, 인적 투자 미흡, 작업 집중도 저하,  일상적 사보타주 등으로 인해 결국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게 된다"라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효울성은 자본가에게만 적용된다..

군대 있을 때 '산업시찰' 이란 이름으로 경북 영주에

있는 KT&G 제조창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안내원의 소개를 따라 제조공정을 구경하기 위해

공장 안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이 공장에서 우리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우리 회사가 얼마나 완벽한 무인공정 체제를 자랑하며,

얼마나 최고의 장비를 들여와, 효율적인 생산체제를 보여주는지'

였다.

 

쉴새없이 담배가 만들어지는 커다란 공장은 과연 기계를 조작하

는 몇몇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전부 로봇이나 자동화 기계를

통해 모든 것이 '빠르고, 많이' 생산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 도입한 기계는 전 세계에 몇대 없는 것으로

독일에서 생산한 최고의 기계다.

그러나 독일 내 담배회사에 이 기계는 도입되지 않았다.

안내원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간략히 '사회와 노조'의

문제 때문이라 했다.

 

안내원의 이 말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독일은 이 좋은 기계를 자국에서는 쓰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이 공장에 나와 일을 한다.

자동화공정을 할 능력이 없는게 아니라 의지가 없는 것.

이것이 과연 자본가에게, 그리고 흔히 말하는 '국가경제'에

효율적인 일인가.

 

'효율성' 이란 반드시 추구해야하는

아프리오리하게 검증된 절대진리 아니었던가.

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기에, 독일이란 나라는

이렇게 '비효율적'인 것일까?

 

'이성'적인 사람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효과를 내는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자본주의에서 이성은 조금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내는 데 

소모된다. 왠지 도둑놈 심보 같은 느낌이 들지만, 화폐가 통용

되는 모든 사회는 이 원칙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맑스의 도식과 개념을 빌려와 이야기하자면,

자본을 가진 자가 생산설비에 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

자본의 궁극목적이 더 많은 이문을 남기는데 있으므로, 

인건비를 줄이고 생산설비를 투자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길이다.

 

여기에 투하되는 노동량이 기계에 의해 완전 대체될 때,

도식에서 '인건비' 혹은 '필요노동'으로 처리되는

'일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사라지게 된다.

 

KT&G 제조창이 최신의 설비로 무인공정화, 자동화되면,

그 첨단 과학기술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매료되는 뒤편으로

그만큼의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잃는다.

 

효율성이 만능의 법칙이 되었기에,

최첨단 설비를 투자해서 사람없이도 돌아가는 생산설비를

구축하는 일은, 불가피를 넘어,

 

과학기술이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그 신비한 효과에

(실제로 로봇이 사람처럼 움직여, 일들을 처리하는 모습이

내 눈앞에 바로 펼쳐졌을 때의 그 경이로움이란 )

힘입어, 모종의 당위성마저 획득해 버린다.

 

그 효과를 선전하기 위한 여러 전략의 일환으로

사람들 모아서 '우와 신기하네' 라는 마음을 심어주는

이런 견학 프로그램도 나오는 것이다.

 

('신기하다'라는 감정영역이, '그것이 옳다'는 이성영역으로

 넘어가는 이 과정은 내가 겪어보니 모순없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저런 최첨단 기계설비를 만들 능력이 되면서도, 그리고

실제로 만들어 내어 다른 나라에 판매하고 있으면서도,

자국에서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엄청나고

경이로운 과학기술의 집약체를 사용하지 않는 독일.

 

독일인들은 과연, 효율성을 추구할 줄 모르는 미련한 바보들일까.

 

적어도 한국인의 대부분은 이들 행동의 '비효율성'을 들어

이들을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이들의 수만큼, 한국은 '효율성'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효율성도 짝퉁임을 알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비단 한국사회 뿐이겠냐만) 

이성은 '화폐로 측량할 수 있는 이성' 이고,

효율성은 '조금 내고, 많이 먹는' 도둑놈 심보를 세련되게 추구

하는 일의 다름 아니다.

 

짝퉁 효율성 만능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

그렇기에,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위한 불가피한

'효율적 선택' 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받는 이들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회사가 돌아갔을때와 비교하는 도식으로

'얼마얼마의 손해를 낸' 불법적인 사건이 되어,

오늘의 이랜드 사람들처럼 개처럼 끌려나가 법앞에 심판받는다.

 

여기서 효율성은 '자본가에게만 적용되는' 효율성인 것이다.

"정상적으로 회사가 돌아갔을 때 하루 평균 얼마를 벌 수 있는데"

를 계산하는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회사에 없어 영구히 일을 하지 않았을때, 자신들은

한푼도 벌 수 없는 실업자 신세가 된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처럼  이성이 '모든 관계를 손익계산으로 주먹구구하게 만들고'

효율성이 '강한 자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효율성' 이라면,

 

그건 분명 '옳지 않다.'  

논리적으로 적합하다, 틀리다가 아니라

가치판단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옳은 것으로 포장하고, 인식시키는 노력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효율성=무조건 바람직"의

도식이 들어와 앉아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수많은 '인간적인' 가치들이 있다.

그 중 하나인 '노동'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독일은 과감히 '비효율'을 선택했다.

 

한국은 효율성의 악셀을 밟아,

모든 효율이 자본가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하는 길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

 

 

끝맺는다. 그래서 뭘 어쩌잔 말인가?

 

완전한 개인으로의 인간은

그 모든 준거의 틀이 '자본' 이 아닌 '인간'에서

나와야 옳다.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 아니고, 자본가를 박살내서

프롤레탈리아 세상을 만들자는 것 아니다.

 

다만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현상의 이면에

인간적 삶의 상실이 자리잡을 수도 있음을

통찰하길 원할 뿐. 

 

더불어

'효율성'이라는 단어가

'좋고 옳으며 최선'이라는 가치판단적인 함의를 담게

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할 일임을 인식하길 바랄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