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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넘 연구원들 기고문,,

[경향포럼] 이용후생의 덫, 한·미 FTA


1780년 여름. 생애 처음 중원에 들어선 연암 박지원은 책문을 지나 한 주점에 들른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외양간이나 돼지우리는 물론 땔감 더미나 두엄 더미까지도 그림처럼 곱다. 연암은 감탄한다. “아! 이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그 쓰임을 이롭게 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또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면 어찌 덕을 바르게 펼 수 있겠는가.”

-‘正德’ 실종된 채 부국강병 올인-

이용과 후생, 그리고 정덕, 이 ‘트리아드’가 바로 연암 문명론의 핵심이다. 물론 이것이 연암이 창안한 개념은 아니다. 선진고경 가운데 하나인 ‘서경’의 한 대목에서 유래한 구절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저 아득한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문명의 척도이자 근간을 이루는 명제였던 것. 연암은 이 오래된 명제를 되살려 거기에 피와 살을 입혔을 뿐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이 세 개의 개념 가운데 ‘정덕’은 홀연 실종되고 말았다. 연암은 ‘이용후생학파’로 규정되었고, 이용후생은 곧바로 부국강병의 논리로 변주되었다. 이용후생을 이루면 정덕은 절로 이룰 수 있으리라고 여긴 탓일까? 아니면 서구 열강의 도래 앞에서 ‘이용후생’만이 살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우리는 마침내 ‘삶을 도탑게 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0위 안에 들고, 인터넷 최강국이 되었으며, 집값과 물가 수준은 이미 미국이나 유럽을 훨씬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자, 이쯤되면 이제 그간 완전 망각하고 있던 ‘정덕’을 되새길 때도 되지 않았는가? 뭐가 됐든, 이 정도의 부를 누리게 되었으면 범국가적 차원에서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통찰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말이다.

한데, 그렇기는커녕 이제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세계시장을 정복하겠다고 한다. 멕시코와 캐나다의 실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농업과 제조업의 희생쯤이야 어차피 겪어야 할 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대충 뭉개버린다. 정부에 따르면 미국 시장은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며,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더더욱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논리고 뭐고 없다. 그저 ‘하면 된다’는 돌격대 정신만이 충만할 뿐.

그래, 좋다. 일단 정부의 말을 믿어준다고 치자. 멕시코와 캐나다의 전철을 밟지 않고, 경기침체를 벗어나 도약을 이룬다고 치자. 그럼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중요한 건 수치나 제도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변화되는가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나면 다른 건 몰라도 미국식 중산층의 삶이 이 땅에 고스란히 이식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식 삶 이식 과연 행복할까-

하여, 나는 정말 묻고 싶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진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가? 가족관계는 해체된 지 오래고, 허울뿐인 민주주의에, 자본 이외에 어떠한 비전도 없는 그 황량한 일상을 굳이 복제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미 우리는 그런 가치들로부터 충분히 고통받고 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질주하는 저 부동산에 대한 광기를 보라! 어떤 제도나 계몽으로도 막을 수 없는 저 맹목의 질주를. 그런 점에서 부동산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나 한·미 FTA에 대한 돌격대식 논법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국민들은 부동산에 올인하고, 정부는 세계화에 올인하고, 참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만약 연암으로 하여금 우리 시대를 통찰하게 한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탄식할 것이다. “정덕이 없는 ‘이용후생’이라? 그건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덫에 불과해.”

〈고미숙/연구공간‘수유+너머’연구원〉

 

 

왜 한미FTA에 반대하냐고?9 - 다수에게 불편한 미래 

- 장보혜
 

 
  백화점에서 명품이나 고가품이 잘 팔리고,
아이들 장난감이 백만 원을 호가해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외제 고급 승용차의 수입량이 늘었지만 없어서 못 팔고,
인천 국제공항에는 골프채를 맨 여행객들로 만원이고….
경기가 어려운 때일수록
이런 소식을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보고 듣게 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것 같다.
저들의 활발한 소비활동이
돌고 돌아 내 지갑에도 미칠 효과를 잠깐 따져보다 그만둔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관심 없다.
 
  서울 강남의 집값이 아무리 뛴다 해도,
대치동의 아파트 값이 얼마니 해도 나와는 무관하다.
거기서 안 살면 그만이다.
거기다 집을 살 돈도,
아이들을 경쟁 속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직까지는 서울 안에서도 잘 찾아보면
집값이 비교적 싼 동네가 남아 있고,
그게 안 되면 전세나 월세라는 대안도 남아 있다.
오히려 집값 폭등이 영원히 강남 안에서만 일어나 준다면 감사할 뿐.
강남의 집값을 잡겠다고 매번 뒤늦게 나서는 정부도
나와는 상관없게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면 좋으련만,
그러면 또 관심 끄고 평온하게 살아갈 텐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
한미 FTA가 이미 충분히 힘든 농촌을 죽이는 계약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미 FTA는 평범한 대다수 시민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불편한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조건의 악화
 
  하루의 생활은 도시 단위 혹은 광역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대중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으면 두 다리가 묶인다.
우리는 식사에서부터 배설까지 상하수도에 의존하고 있다.
전기로 낮을 밤까지 연장하고,
우리의 눈과 입과 귀를 먼 곳으로,
과거와 미래로 연장하고 있다.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생활이다.
모두의 효율을 위해,
서로의 안전을 위해 삶의 수단들을 통일하고,
이들 수단을 공동으로 구매해서 소비하고 있다.
공동재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다.
본디 인간에게 땅과 물과 공기가 무상이었듯,
도시인에게는 이들 공공재가 땅과 물과 공기의 연장으로서
무상까진 아니라 해도 세금으로 공동구매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것을 도시에서 자유로이 지불 가능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없게 될 때
도시인들은 눈이 멀고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불구가 된다.
한미 FTA는 우리의 자연인 도시환경을 값비싼 상품으로 바꿔 놓음으로써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일하다 죽거나 굶어 죽거나
 
  정부는 말한다.
직접 보지도 않고 '영화'가 재미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한미 FTA'란 영화는 표를 사서 직접 보지 않아도
어떤 영화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라는 예고편을
이미 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산업구조를 선진국형으로 바꾸는 구조조정이란
결국 많은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를 의미했으며,
일자리를 지킨 노동자들에게는
'노동강도의 증가'를 의미했다.
한미 FTA는 이미 진행 중인 노동조건의 악화를 더욱 가속화시켜
되돌릴 수 없도록 확정시킬 것이다.
 
  내가 먹은 밥이 네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정부는 경쟁력을 키우자고 한다.
경쟁력 있는 힘센 몇몇을 밀어 주자고 한다.
경쟁력 있는 분야와 그 분야의 사람들이
나머지를 부양하면 된다고 한다.
 
  정말 그들이 힘 없는 사람들을 부양할까도 의문이지만,
이는 간단히 보상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문 서비스업 종사자의 발전이
농민과 노동자의 몰락을 상쇄할 수는 없다.
 
  너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살 수 없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을 대신할 수 없다.
타인이나 특정 계층의 희생으로
나의 안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
 
  자본증식의 참신한 기술?
 
  하긴 새로운 경제질서에서는 어차피
큰 재산은 월급을 모아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파트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챙기는 시세차익으로 큰돈이 벌린다.
기업 역시 물건을 만들고 팔아서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사 자체를 사고파는 과정을 통해 덩치를 키운다.
 
  IMF 외환위기는
기업이 재화를 생산해서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히 가르쳐 주었다.
특히 초국적 자본은 제품을 생산하고 파는 것보다는
회사 자체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더 큰 부를 축적했다.
한편 고용구조를 조정함으로써 아끼게 된 인건비만큼
이윤이 늘었다.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고 파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버는 데 더 의존한다면,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신용카드로 구매'하게끔 했던 바로 그 은행에서
어떤 사람들은 돈을 빌려 집을 살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집값이 점점 오르기만 한다면,
그런데도 계속해서 풍요를 누릴 수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아 왔거나
빚을 지고 상환은 계속 미루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물리학의 '질량 보존의 법칙'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세계경제에도 있을 것이므로.
 
  신종 계급사회의 도래
 
  정부는 한미 FTA를 체결하면
경제성장률이 7.75%가 더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수치가 허수인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몇 %의 성장이냐가 아니다.
걱정해야 할 건 저성장이 아니라
그동안 오랜 성장기를 거쳐 왔음에도
그 성장으로 모두의 삶이 꼭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과거에는 성공신화가 있었고
그것이 실화로 드러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계층 간에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지만,
거기에서 교육이 한 몫을 해냈었다.
한미 FTA는 자산과 소득의 계층 분화를 가속화시키고 영구화시켜
신종 계급사회를 가져올 것이다.
 
  이 새로운 계급사회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돈이 피부색도 체격도 얼굴 생김새도,
그리고 수명도 다르게 만들 것이다.
또한 이 사회에서는 계급에 따라 구사하는 언어도 달라질 것이다.
돈이 새로운 계급과 인종을 낳을 것이다.
나는 이런 계급사회를 후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돈과 사람을 선택적으로 걸러내는 필터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에는
실제로 높은 장벽이 서 있고 그 벽에는 관들이 걸려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관의 행렬은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넘을 수 없는 국경이지만
자본은 그것을 어려움 없이 넘나든다는 현실을.
그럼에도 최소한의 통행절차도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방해가 된다며
자본이 지나는 길을 매끄럽게 닦으려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마지막 한푼까지 짜내기 위해.
나는 그런 국책사업에 찬성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소박하지만 정직하게
일한 만큼 벌어서 생활해 나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바보이고 시대착오적인 인종으로 만드는 음모를 고발한다.
IMF 외환위기,
그리고 한미 FTA와 같은 헤비급 충격들은
부의 분배 기준을 바꾸고 경제질서를 크게 바꾼다.
 
  경제질서가 크게 뒤척일 때마다
무서운 파랑이 일어 작은 배들은 파괴되거나 침몰한다.
저들은 말한다.
작은 배를 고집하지 말고 큰 배로 옮겨 타라고.
아니면 큰 배 옆에 작은 배를 꼭 붙들어 매라고.
 
  하지만 모두에게는 원하는 각자의 항로가 있다.
그리고 나는 저들과 함께 침몰하고 싶지 않다.
저들과 함께라면 죽음도,
심지어 영광조차도 창피하다.
 
  우리가 찬성할 FTA를 위해 지금은 반대!
 
  우리에겐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미래에 올 자유무역협정을 위해 이번 한미 FTA는 반대하자.
그것은 노동자들을 긴장과 과로로 몰아가는
이 이상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
노동자들이 아닌 국가들과 기업들을 경쟁시키는 방향으로의 전환이다.
 
  노동자, 시민, 국민들은
더 나은 서비스를 하는 기업과 국가를 선택하면 된다.
돈과 상품뿐 아니라 인구의 이동도 자유로운 협정을 환영하자.
옛날에 풍요로운 땅을 찾아 이동했던 것처럼
살기 좋은 곳, 살고 싶은 곳, 가능성의 땅을 찾아 이주할 수 있는
자유협정에 찬성하자.
 
  그런 자유협정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한미 FTA는 중단되어야 한다.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기 전에.
 
  우리는 전쟁 중이다.
가치를 놓고 벌이는 전쟁이고 미래를 건 싸움이다.
 
  나는 내 행복과 자유를 위해 한미 FTA를 반대한다.
아직은 반대할 수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한미 FTA 저지'이니까

 

 

 

반 FTA를 넘어 삶의 권리를 재구성하기.


1.
제가 다닌 중학교는 큰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주변을 산동네가 둘러싸고 있어서 수업이 끝난 후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산동네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함께 뛰어놀았죠.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던 친구는 산기슭에 있는,
방들과 마당이 뒤섞인 기묘한 구조의 집에 살았는데요.
방과 후면 밤늦게까지 그 애 집에서 놀다가 집으로 향하곤 했어요.
산기슭 좁은 골목에서는 가로등 불빛만으로도 아이들이 공을 차고,
강아지들이 깡총거리며 뛰어다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엔
커다란 공터들이 있었습니다.
띄엄띄엄 서 있는 밤의 가로등 불빛 사이에서
시커멓게 뚫린 공터들은 음험해 보입니다.
그 공터의 한 켠에 천막으로 지은 집이 있었죠.
바람이 불면 천막이 펄럭거리며 부풀고, 천막 앞에 널린 낡은 옷들이 나부꼈어요.
어쩐지 무서워 뛰기 시작하면 뒤에서 검은 개가 컹컹 짖었구요.

환한 대낮에 천막집을 지나치게 된 건 좀 나중의 일인데요.
파란색 방수 천으로 만들어진 천막집 앞에
엄마, 아빠와 아이들의 신발들이 놓여 있고,
작은 싱크대와 살림도구들이 보이더군요.
날씨가 쨍쨍하게 맑은 날이면 천막 앞에 실내화가 마르고 있기도 하고,
공터에는 상추나 파 같은 야채들이 자랐습니다.

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6년간,
우리 가족이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그 가족은 내내 그 곳에 있었습니다.
비라도 오면 공터는 온통 진창이 되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많이 오는 밤이면
파란 천막집이 펄럭이다가 날려가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높은 아파트가 이렇게 많이 지어지는데도
천막을 치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과,
어쩌면 아주 많은 가족들이 그러하리라는 것,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땅을, 그러니까 지구의 일부분을
자기 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을까 뭐 그런 것들도요.

몇 년 후, 그 동네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야채가 자라고 천막집이 있는 넓은 공터 같은 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더군요.
비어 있던 자리마다 빼곡히 들어선 건
커다란 주차장을 가진 외국계 프랜차이즈 식당들. 화려한 상가와 교회,
그리고 무수히 많은 학원들 이었구요.

천막에서 살던 가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냥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선 오랫동안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그들은 다시 어딘가의 공터를 찾아냈을까요?
아니, 어쩌면 이제 어디에도 공터는 남아 있지 않는 건 아닐까요?

아파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산동네,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집들,
좁은 골목길에서 공을 차던 아이들도 모두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건 온통
세련된 모노톤의 아파트들뿐 이었으니까요.

멋진 수트를 입고 오피스 타운에서 일하는 사람들,
통통한 뺨을 가진 건강한 아이와 잘생기고 부자인 아빠,
친구들이 부러워할 삶을 스타일링 하는데 여념이 없는 날씬한 주부.
이런 사람들이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입주자인 모양입니다.
텔레비전은 매일 그들의 삶을 광고하잖아요.
하지만 누구도 거기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도 그 곳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말예요.

고층빌딩이, 쇼핑센터가, 주상복합단지가, 화려한 낙원이 건설되고 있는데
굳이 몇 푼의 보상금을 손에 쥔 채 쫓겨난 사람들을,
가난에 쭈그러든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부모가 일을 나간 하루 종일 문이 잠긴 지하방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보여줄 필요는 없기 때문일까요. 
   
2.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 미국과 FTA를 체결하겠다고 합니다.
아주 새로운 일이 생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지금까지도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훨씬 빠르게, 체계적으로 진행될 뿐일 겁니다.

더러운 담요를 두르고 짐짝처럼 누워있는
지하철역 노숙자들의 존재에 익숙해졌듯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에 이미 익숙한지도 모르겠군요.
때로 뉴스에서 생계 때문에 자살한 일가족의 이야기가 나와도
그건 그저 개인적인 불행으로 여겨질 뿐이지요.

그리고, 한미 FTA가 체결되면
이런 ‘개인적인’ 불행들이 훨씬 더 많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평화롭게 농사짓는 땅에 미군기지를 세우겠다고
평택에 군대를 투입했던 지난 5월 4일,
멕시코의 작은 마을 아뗀코에서도 무장경찰에 의한
엄청난 폭력이 벌어졌다는 걸 아세요?

역시 강제 퇴거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 월마트가 들어설 예정이거든요.

꽃을 파는 14살 소년이 철거에 항의하다 목숨을 잃었다는군요.
월마트를 짓기 위해서 국가가 재래시장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쫓아냅니다.
그렇게 자기 삶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고작 몇 푼을 벌기 위해 월마트에서 일해야겠지요.

자본의 욕망을 위해서 국가의 이름으로 민중들에게 내려지는 추방 선고.
찬란한 자본의 제국, 월마트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낙원 주위에 지옥을,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떨이로 이용할 수 있는 무력한 노동력들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FTA는 그런 작업들을 쉽고 빠르게 만들어주는 협정이지요.
많은 것을 소유한 자들이 더, 더, 더 많은 걸 소유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저들만의 협정.

NAFTA를 체결한 이후 13년 동안,
멕시코의 부자들은 엄청나게 돈을 벌어서 세계적 순위를 자랑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이 절대 빈곤층으로 몰락했습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 국경을 넘다가 죽어가는 사람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비참한 판자집.

그건 결코 개인적인 불행도, 개인적인 무능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FTA가 요구하고, 만들어내고 있는 가난입니다.

FTA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생계형 자살이 세계 1위,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는 속도가 세계 1위라는 이 곳 한국에서
가난은 이미 세대를 넘어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 되고 있으니까요.

물을, 전기를, 의료를, 교육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상품으로 바꾸고 있는 사회에서
가난하지만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가난하지만 그래도 미래를 꿈꾸는 삶 같은 건
점점 더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요?
모든 권리를 오직 자본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라니 말입니다!

FTA에 반대하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만이 권리를 갖고 있는 이 세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의 권리를 다시 구성해내는 것이니까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평생 살아온 곳에서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는 권리,
돈이 없어도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권리,
아프면 치료를 받고, 누구나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지구 위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 권리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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