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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는 어떻게만들어지는가..

강유원 씨글이다...작년에 그가 강의한  "선언"을 읽고

재미있어서 가끔싸이트가는데 

재밌는 사람이다..

  

보니까 수유너머와 이진경을 무던히도 싫어하는것같던데..

나같은 범인이야  한반도에서 내놓라하는 재야 수재들의

논쟁을 그냥 담너머로 즐겨보는것도 재밌는지라..

여기저기 그들의 얘기를 귀에 다주어 담는다. 

가끔나도 제대후에

워하던대로  사회대학을가거나 독일유학을 갔으면 어떻게되었을까 하는아쉬움이든다..

그넫 어쩌랴,,

지금 그냥 이걸로도 좋다..

뭐 제도권이 가르쳐주는거 이상으로 날 만들어나가면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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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marius.net 에서 퍼옴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21세기에는 '창의력 있는 인간', '자발적 인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교육해 나가는 인간',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로운 창조자만이 이 시대에 살아남을 이야기는 새삼스러운게 아니다. 어느 기업에서든지 비용절감을 위해서 혼자서 여러가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게 되었고, 계획의 수립부터 실행까지 꿰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즉 아이디어를 내서 그것을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만들고 직접 수행해내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21세기에는 '창의력 있는 인간', '자발적 인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교육해 나가는 인간',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로운 창조자만이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사회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 나가므로 주어진 일만 해서는 금방 도태될 것이며, 그에 따라 자신이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게 이런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논조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운게 아니다. 어느 기업에서든지 비용절감을 위해서 혼자서 여러가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게 되었고, 계획의 수립부터 실행까지 꿰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즉 아이디어를 내서 그것을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만들고 직접 수행해내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실행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반복되는 일을 되풀이 하는 사람, routine laborer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이런 사람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한국은 여전히 낡고 답답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 개조라는 자각을 가지고 기업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구성원 거의 모두가 기업의 요구를 지상명령으로 여기면서도 그것에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창조적인 사람이 되도록 온갖 교육을 다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노예나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다. 창조적인 인간이냐 아니냐는 특정한 지식이나 재주를 가졌다는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태도나 정신적인 자세이므로 주입할 수 없고 몸에 저절로 익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서 창조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려면 한국 사회의 모든 집단들, 즉 가족, 학교, 회사 등에 개인의 개성과 창의력이 생겨나고 발전될 수 있는 멘탈리티가 있어야 한다.
멘탈리티는 정신적인 것을 주입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육체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생겨난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여서 그의 정신적인 것들 역시 육체적인 것의 반복적 습득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 인간의 반대말은 노예적 인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창조적인 인간이 될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노예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노예가 어떤 육체적, 물질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지를 알면 그것을 극복하고 노예가 아닌 존재, 더 나아가 창조적인 존재로 변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듯해서이다. 노예는 우선 몸뚱아리만을 가지고 육체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니 사람으로 취급되지조차 않는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을 하는 주요 목적이 영토확장이었다면 부수적인 목적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 전리품 중에서 노예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고대 사회에서는 농경지에서의 직접적인 생산물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더 나아가 사회 집단의 주요한 부의 원천이었므로 그것을 늘리는 방법은 영토를 확장하고 그 땅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사람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로 부려 먹어야 했으므로 고대 사회에서의 전쟁에서 대량 살륙을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노예가 필요치 않은 경제체제를 가진 집단만이 대량 살륙을 저질렀는데 징기스칸이 이끌던 몽골 군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할 때의 병력이 10만 정도 되었는데 이들은 수레에 가족들까지 싣고 다니면서 싸웠다. 어떤 지역에 쳐들어 갈때에는 기마병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싸움을 끝내고 정벌한 지역을 초토화하며 모든 주민을 죄다 죽여 버렸다. 계속해서 이동을 해야 했으므로 포로를 잡아서 노예로 삼기 보다는 그냥 죽이고 가는게 훨씬 편리했을 것이다.

유목민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족들은 노예획득을 위해 전쟁을 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고대의 전쟁은 오늘날과 같은 총력전이 아니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회에서 높은 대접을 받는 전투집단이 따로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전쟁기에도 평화롭게 생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전투집단이 전쟁에서 지게되면 이 보통 사람들이 노예가 되어 팔렸다. 그러므로 전투집단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존중은 대단했다. 자신들이 노예가 되느냐 마느냐는 이들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말도 잘 듣고, 모든 의사결정을 이들에게 맡기는 삶을 살았다. 전투집단은 농사를 짓거나 생업에 종사하는 일을 천하게 여겼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지배자, 전사 등과 같은 구별은 고대 사회의 이런 신분계층을 잘 보여준다. 또한 전투집단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용기 -- 이것은 좋은 말로 표현한 것이고 사실은 잔인함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 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나 <<오딧세우스>>는 전사들의 그런 잔인함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전투집단과 보통 사람의 명확한 구별이 많이 없어진 것은 로마 시대에 들어서였다. 로마에서는 시민만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고, 그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싸우지 않으면 나라가 위험하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신이 노예가 되느냐 마느냐가 특정 전투집단에 달려 있는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고대 사회의 패권을 거머쥐고 천년의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면서 동시에 그러한 책임에 걸맞는 권리를 가진 시민들의 공동체가 그것이다.

로마 제국의 쇠망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제국 말기의 용병들도 그 원인을 차지한다. 말기로 들어서면서 제국의 방어는 더이상 시민들에게 맡겨져 있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직업군인제도가 생겨서 좋았겠지만 로마를 로마답게 했던, 시민의 권리와 책임에 근거한 공동체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제국 말기의 로마 시민들은 전투집단에게 자신의 생존을 의존하는 반노예상태였던 것이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을 필요가 없어진 것은 사람이 노동력의 주요한 원천이 아니게 되면서부터이다. 물론 사람은 중요한 노동력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능력있는 사람'만이 주요한 노동력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중요한 노동력이 아니게 된 것은 제법 되었다. 공업이 발전하고 기계가 사람의 노동력을 상당 부분 대치하게 되면서 사람 값은 계속 떨어져왔고, 그것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극소수의 사람, 즉 '창의력 있는 사람'외에는 쓸모있는 사람 취급을 못받게 된 것이다. 21세기가 창의력있는 인간을 요구한다는 것을 뒤집어 말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버려도 된다는 뜻이 된다. 기계가 힘든 일을 대치하므로 육체적인 노동력조차 불필요하다. 그들은 고대의 노예만도 못한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사회 구조와 경제 체제는 대부분의 사람을 폐기처분하고 있다.

지금까지 노예적인 인간을 '노동력'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이제부터는 일종의 정신적 측면에서 이 주제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노예 상태는 자유로운 상태의 반대말이다. 창의력있는 인간이라는 것의 기본도 사실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먼저 자유롭지 않으면,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고 머리 속에 아무리 창의적인 생각이 있다해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다면 그 생각은 무의미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 창의적인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않게 된다. '창의적인 인간'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가능하고 그런 까닭에 자유로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이라 하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한다' -- 맞는 말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반대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즉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권을 남에게 넘기고 그냥 하루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모습, 그것도 개인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힘있는 사람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는게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신경써서 앞뒤를 재고 선택을 해야 하고,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골치아픈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몸이 피곤해지기 십상이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칠 위험마저 있다.

구체적으로 누가 위에 있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을 듣고 사는 것만이 노예처럼 사는 건 아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이 검증되지 않은채 사회에서 떠돌아 다니는 풍문에 자신의 삶을 맡겨서 사는 것도 노예처럼 사는 것이다. 뼈빠지게 고생을 해봐서 내린 결론이라면 모를까, 애초부터 '돈이 최고다'라는 말만 믿고 돈독이 오른채 사는 것이라든가, '영어 하나만 잘하면 끝난다'라는 말만 믿고 죽어라 그것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도 사실은 노예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렇게 사는게 편하다. 정말 편하다. 어차피 인생이란게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고,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다. 그러니 뭐 '의미'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하면서 사는 건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도 아니니 대충, 남들 사는대로 사는게 최고라는 생각이 나쁠게 뭐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굳이 인간의 본질은 자유라는 명제를 논증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예상태에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걸 더 좋아하면 그게 더 본질에 가까운게 아닐까? 아무리 그렇다해도 여기서 이야기를 그치면 너무 비참하니까 현대에 들어서 왜 사람들이 노예처럼 살게 되었는가를 따져 보기로 하자.

바로 앞에서 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과 관계있다고 말했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아가려면, 그것도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당장 점심때 뭐 먹을까부터 날마다 선택하는게 귀찮고 번거로워서 아예 메뉴를 정해놓고 배급해주는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이건 뭐 대단한 선택은 아니다. 이에 비하면 선택이 아닌 결단이라 해야 할만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앞으로의 진로, 결혼 시기, 결혼 상대자, 가족 문제, 직장 생활, 죽을 때 매장으로 할 것인가 화장으로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이게 오늘날 현대 사회의 도시인이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선택과 결단을 할 수 있을까?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고는 선택을 할 수가 없다. 당면한 주제에 대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어림잡아 하다가는 큰코 다친다. 이게 그냥 하는 말인거 같지만 우리의 일상을 잠깐만 돌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버스 하나 타고 내리는 것도 어렵다.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지방 도시에 갔을때 버스 차비가 얼마인지, 교통카드를 쓰는지 아직도 토큰을 쓰는지 모르면 버스 타는 것도 걱정이다. 그러다보면 택시나 타게 된다. 서울에서는 '내리실 분은 벨을 누르시오'라는 안내에 따라 내릴 때가 되면 벨을 누르면 되지만 지방은 어떤지 잘 모른다. 많이 다녀본 사람이 아니면 어렵다.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서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간단한 사용 설명서가 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일상이 이러한데 다른 일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면 도대체 왜 현대인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현대 사회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 또는 다양하게 분화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선택과 결단을 많이 해야 하며 그것에 필요한 정보의 양이 많아지며 사람들의 머리는 복잡해지고 몸은 그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이 이렇게 복잡해지는데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사람이 아무리 환경에 잘 적응하는 존재라지만 이렇게 급변하는 것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현대 사회에는 온갖 이상 심리적 증후가 난무한다. 흔히 하는 말로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그걸 해결하기가 어려워졌다. 자신의 머리와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아지다보니 의존성이 더 심해졌다. 알콜중독자가 늘어나고 점보러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등도 문명의 발달과 사회의 분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과연 현대 사회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보기 위해 단순한 사회와 간단하게 비교를 해보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 바로 앞서 있었던 조선 시대를 생각해보자. 조선 시대는 농경사회였다. 거의 대다수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사짓는 사람과 글을 읽어 관직에 나가는 사람만이 공식적으로 사람취급을 받았다. 농사를 짓는 일이 생업이다보니 알아야 할 것은 농사에 관련된 것밖에 없었다. 사는게 어려울게 없다. 하늘이 잘 도와주면 농사는 잘되는거고 관리들이 괴롭히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한 세상 살만했다. 자기 머리를 굴려서 결정해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결혼은 집안에서 시키는대로 하면 되는거고 아이는 생기는대로 낳으면 되는거고, 그 아이들 교육도 새삼스럽게 시킬게 없었다. 조금 크면 들판에 일나갈때 함께 데리고 가면 끝났다. 죽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다 땅파고 묻어주었다. 제사는 자식들이 알아서 지내주었다. 글 읽어서 관직에 나가는 사람들이야 알아야 할 게 많았겠지만 오늘날 알아야 할 것에 비하면 얼마나 되었겠는가? 당대의 석학이라는 퇴계나 율곡이라해도 오늘날 대학에서 교양 과목 수준의 지식이 있었을까. 사회가 단순하다보니 관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토지제도 제대로 만들고, 세금 제대로 부과하면 된다.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사회가 들썩들썩한 것은 그 당시 정치인들의 수준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단순하게 살았던게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불과 100년 전 일이다. 그러다 한국은 느닷없이 복잡한 사회가 되었다. 서양 사람들이라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단순한 사회에서 복잡한 사회로 넘어온 것이 200년이 넘질 않는다. 단순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이 몇가지 되지 않으므로 아주 느긋하다. 나름대로 복잡한 일이 있겠지만 공동체의 어른들에게 물어보거나 아예 마을 회의를 열어서 결정하든지 하면 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세상살이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고 있다. 어른을 공경하는 일이 강요된 덕목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므로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익히지 않은채 나이만 먹으면 집단에서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이런 현상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속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똑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단순 사회에서 복잡한 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면 세계 어디에서는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태인 것이다. 과거 단순 사회에서의 노예가 어쩔 수 없이, 힘에 의해 만들어진 노예였다면 이제 현대인들은 그러한 변화에 쫓아가지 못한채 무기력에 빠진 반 자발적인 노예이다.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급기야는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싶어진다.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위력의 결정과 선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 그저 윗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명령'에 내 머리를 맡긴채 묵묵히 그것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일이 닥치면 우애로써 사람들을 돌보아주던 공동체가 그리워진다. 이거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안좋은 것이다. 이미 먹고 살아가는 구조가 다른데 공동체적 윤리 덕목이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나치 독일의 억압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했던 인간 군상들의 심리를 파헤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룬 책이다. 자유로운게 오히려 힘들다. 그냥 시키는대로 하고 사는 게 편하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문집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에 실린 몇몇 논문들은 일본 군국주의 치하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발적인 노예가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에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명령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소시민이 어떻게 해서 유태인 학살계획을 담담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리하여 아무 생각없는 평범함(banality)이 바로 현대인의 악의 원천임을, 즉 악의 평범성을 증언해주고 있다. 수많은 매스 미디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중들의 의식 조작에 관한 책들도 선택에 직면한 이들의 의식에 노예적인 심성을 심어주는 과정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아무 생각없는 이들이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의 악행마저 세계사적 영웅의 결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21세기적 인간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가 귀찮으면 단순한 사회로 돌아가라.


8 Sep.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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