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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생태적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비정규 및 불법파견 관련 세설 At2005.가을By이맹물

[제안]생태적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비정규 및 불법파견 관련 세설 At2005.가을By이맹물

 저는 촌놈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차를 타면 멀미를 합니다. 제가 시를 썼다면 그것은 한 촌놈이 도시생활에서 느끼는 멀미의 기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딱딱하고 높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시골집 앞에서 수십년 동안 묵묵히 바람을 만들고 있는 당나무의 그늘과는 참으로 다릅니다. 나무그늘 아래 몸을 누이면 나뭇잎들은 수천개의 빛을 반짝이며 몸과 마음을 한없이 어루만져 주는데 도시의, 골목의 그늘들은 그저 아득하게 검기만 합니다.

 도시는 똥싸는 일조차 자책감이 들게 만듭니다. 수세식 변기에서 마술처럼 사라진 똥들은 (아마도) 종합처리장으로 모여 수차례 걸러지고 염소소독을 거쳐 다시 방류됩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개똥이든 사람똥이든 귀하디 귀해 이웃집에 마실갔다가도 다시 뛰어와 제 집에서만 똥을 누었다 합니다. 이곳에서는 그 귀한 똥이 고작 쓰레기밖에는 못되니 슬픈 노릇이지요.

저번에 한국이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장이란 어쨌든 약자에 대한 착취없이는 거의 불가능했었습니다.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 열광할 때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은 그 물건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른채 축구공을 꿰매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는 얘기를 왕왕 듣지 않습니까.

  저는 자본주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어떤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는지 제대로 배운 바가 없습니다. 다만 '돈이 최고'라는 것은 압니다. 돈만 있으면 살기에 더없이 편하다고들 하지요. 로또 한 방이면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곳에서는 돈없이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일단 집밖으로 나가면 무얼 하든지 돈이 필요합니다. 생산과 소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활동도 아무런 인간관계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돈이 없다면 '나'는 이곳에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이윤이 된다면 인간이건 동물이건 쉽게 도구화되어 버리지요. 이제는 사람의 목숨과 장기까지 필요에 따라 '생산'하고 '팔아먹으려' 합니다.

  한 친구가 말하길 자기는 양말은 특히 잘 빨지 않는다 합니다. 한 켤레에 500원 짜리 양말이 있는데 질감도 좋고 신기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달에 고작 이만원 정도면 매일 새 양말을 신을 수 있다고 귀뜸합니다. 만약 인구의 10프로 정도만 그같이 한다면 머잖아 우리는 양말쓰레기 더미에 갇혀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풍요로운 죽음'이지요. 양말도 똥처럼 재활용이 잘 안되기는 마찬가지이고 재활용의 '기술'이란 것도 돈과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어쨌든 또하나의 소모과정이 됩니다. 게다가 이런 걸 모아서 아프리카로 보내면 그 나라 의류산업의 싹을 자른다 하니, 거참 사면초가이지요.

  사람들의 꿈은 의례 도시에서 벌어, 촌에서 전원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혹은 연애를 하거나 낭만적인 세계여행을 하며 여유롭게 사는 것이지요. 헌데 낭패입니다. 지난 30년간 태풍의 위력이 50%나 세졌는데 거의 확실히 지구온난화 때문이랍니다. 땅은 온갖 화학적 불결함 때문에 상당부분 이미 죽었습니다. 매연이 만들어낸 구름들이 꼭 도시에만 뿌려지라는 법은 없지요. 구름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제멋대로 흘러다니잖아요. '청정한' 시골의 사람들도 결국 같은 산성비를 맞아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농촌은 세계화의 산성비를 맞아 경제적 파산에 직면했고 사실상 우리 고향은 붕괴되었습니다. 낭만과 여행에 대해 말하자면, 세상은 여전히 전쟁통입니다. 민족전쟁, 석유전쟁, 복수전쟁, 종교전쟁, 땅전쟁. 지금 이 시간에도 폭음 속에 불안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요. 안전하게 여행하며 '즐길 수' 있는 나라는 몇 개 안됩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에게 헛된 오만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진화는 어느 순간 '진보'가 되었고 진보의 필요충분은 '성장'입니다. 세계는 지금 유사이래 가장 강력한 도그마, 곧 성장이데올로기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습니다. 저로써는 경제학이 스스로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단지 채취하고 변경시킬 줄만 아는 인간에게 '생산'이라는 용어를 부여한 것조차 납득불가입니다만 어쨌든 지금은 무한히 생산하고 무한히 성장해야만 하는, 그리하여 선점하고 독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하는 패권주의의 세상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충분히 발달했지만 지구촌이라는 범아적 의식은 민족주의의 소아적 고집을 끝내 벗겨버리지 못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쟁이 난무하고 굶주림이 계속 확대되는 '외부적 불안'이 한 사회의 풍토를 더욱 경직되고 분열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동시에 노동을 그 이윤으로부터 한층 더 단절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몇몇 선진국과 비정규직과 정규직간의 갈등을 이용하는 자본가는 결국 한통속이지요. 신자유주의를 네오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마도 '자유'가 이처럼 일부 극소수층만의 전유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곳곳의 저항, 복수, 무질서가 심해지면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그 제국적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그것이 평범한 일상과 안전을 원하는 서민들의 요구에 알맞게 부합한다는 거지요. 지금 우리는 공포정치의 전형을 겪고 있습니다, 악순환의 존속이지요. 사람들은 이제 절망을 인정하고 그것에 안주하려 드는 것 같습니다.

  도시는 거죽만 요란할 뿐 온갖 회의와 좌절로 꽁초처럼 버려졌습니다. 이미 텅 비었습니다.

  역사적 진보는 '다양성의 만발'이라는 자연적 진화를 눈꼽만큼도 흉내내지 못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인류사회가 진보적이고 민주적이었던 시절은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나 노예가 있었고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이 있어 왔으니까요. 무엇보다 현대사회의 임노동자들만큼 '노예다운 노예'는 일찌기 한번도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전적으로 자연과 운명의 노예였다면 지금은 돈과 기업의 노예입니다. '기업시장주의'는 가진 건 몸밖에 없는 사람들의 노동을 한낱 '특별한 상품'으로 간주합니다. 그나마 <특별한>이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진언과 희생 끝에 성취된 노동법 때문이지요. 해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습니다. 더이상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력이나 인재 곧 <수단이나 재료>일 뿐입니다. 고도의 분업화, 기계화, 합리화는 애초부터 노동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상당부분 배제합니다. 더욱이 비현실적인 최저임금, 과노동, 관행적인 중간착취, 미비한 사회보장 시스템 때문에 서민들의 삶은 진정 고해, 그 자체입니다. 자유시장은 스스로 생산한 분(分)의 가치를 되살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지루하고 고된 하루를 잊을 수 있게끔 탁월한 마약을 공급합니다. 티브이, 유흥, 스포츠, 영화, 쇼핑, 섹스, 약물, 게임 이런 것을요. 이런 '망각상품'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일은 문화창조적 활동의 동기와 방법 모두를 상실해가는 흔한 '중독과정'입니다. 이런 식으로 혼이 없는 마리오네뜨들이 거리를 누비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계는 대량실업과 장기불황이라는 '경제적 난국'과 환경오염과 기후온난화라는 '절대적 위기'를 더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난 과오의 꾸준한 누적에 따른,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길은 공멸과 공존 중에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거국적이고 초국적인 단결이 필요한 시점이지요. 헌데 '온전한 협동'이란 어디까지나 자발성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경제적 자립이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유럽에서는 생태경제학이라는 분야가 정밀성을 획득하고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데 잘은 몰라도 생태경제학에서의 부(富)는 기존의 것과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기차가 커다란 바윗돌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이즈음, 더이상의 성장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제로성장률이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기우일 뿐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지요.

  근래 '불법파견' 문제가 노동계의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는데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경제'와 '정의' 사이에서 마냥 표류 중입니다. 불법파견과 노동유연화의 배경에도 역시 '성장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음을 주시한다면 이제 노동운동은 생태적 관점에 대해 충분히 열려있어야 합니다. 여지껏 절대적 가치가 되어온 <자본과 이윤>이 그 내용물을 완전히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한 줌의 맑은 공기조차 살 수 없게 됐으니까요. 생산과 소비 둘 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태적 선택이 노동운동의 진의와 효과를 조금도 퇴색시키지 않는다고 봅니다. 직고용의 원칙을 고수하고  왜곡된 노동자성을 회복하는 것, 식량안보를 확고히 하는 것, 내수기반을 견실히 하여 건전한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것, 소유되거나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자원을 가려 공적 재산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 등은 생태주의와 거의 완벽히 일치하거나 그것에 무리없이 수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중해방의 꿈은 인간본위에서 생명본위로 가치이동을 이룰 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동자 개개인의 근본적 성찰이 가장 먼저겠지요. 직업인은 상당부분 '군인'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위계조직 하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전쟁 중의 군인에게 동정심이야말로 주적(主敵)입니다. 무관심과 몰인정이 당연한 ‘삶의 기술’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신자유주의의 충복, 곧 일개 군인이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바로 며칠 전 현대자동차에서 또 하나의 귀중한 생명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해고당한 비정규노동자였는데, 열사를 두고 노노갈등이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합니다. 형제애나 조화로움의 최고가치를 외면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는 그 명분이 확실히 빈약합니다.

  노동법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직접고용과 종신고용의 원칙'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난 해의 박일수 열사 또 며칠 전의 류기혁 열사는 둘 다 비정규 노동자였고 동시에 불법파견 근로자였습니다. '불법파견 근로자'는 중간착취로 인한 저임금, 주기적 이중계약으로 인한 고용불안, 노동3권 상실 등의 불합리한 차별을 당하고 있는 법률적 피해자를 말합니다. 이들의 '피해'는 대부분 사용자들만의 이윤이 됩니다. 생산원가를 아끼고 노조규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영위기 때는 손쉽게 자를 수도 있지요. 사용주가 누리는 이같은 이익들은 당연히 '부당한 이익'이고 해당 근로자들에게 당장 환원되어야 하는 이익입니다. '위장도급' 하의 근로자들은 처음부터 해당 원청기업에 직고용됐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기업들은 이들에 대해 사실상의 통제권을 유지하면서도 형식적 간접고용을 이용하여 실사용자로서의 법적 책임을 회피합니다. 발각되더라도 거미줄처럼 허술한 법망 덕에 벌금이나 몇 푼 물고는 전원 해고시킬 뿐이지요. 가해자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고 피해자만 다시 피해를 보는 셈입니다. 불법파견을 두고 '신종 인신매매'나 다름없다며 거친 표현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헌데 노동부는 이들 기업들에게 마치 갓난 아기를 얼르고 달래는 듯한 미온적 태도로 일관합니다. 직무유기이지요. 참여정부는 위헌적이고 반가치적 악법인 <파견법>을 폐기는커녕 오히려 확대하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방법론은 당연히 '대화'입니다. 하나의 오해가 다른 오해를 만나 얘기합니다. 그리고 각자를 수정하여 타협합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차이가 차별로 되지 않아야 하지요. 강자와 약자가 있는데 만약 강자가 일방으로 대화를 거부한다면 혹은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폭력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정직해서 내가 누군가를 소외시키면 동시에 나또한 소외받게 되지요. 해서, '함께 한다'는 것은 진정한 이기심일 뿐 실상 아무런 희생도 동반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런 고리타분한 원론을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네요. "불법파견은 근로빈곤층을 양산해 당장 <구매력> 하락으로 나타난다" 라고. "불법파견은 높은 이직률과 기술축적 하락 때문에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라고. "불법파견은 정규와 비정규라는 신분갈등을 초래해 막대한 <비효율>을 낳는다"라고. "불법파견은 애사심 부족, 인적 투자 미흡, 작업 집중도 저하,  일상적 사보타주 등으로 인해 결국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게 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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