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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오랜만에 학교다닐때 다녔던 동아리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일본에 있던 한 선배가 나의 결혼을 앞두고 남긴 글을 보았다. 추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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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식이 너 마저도???!

   


드뎌 태준식이도 교론를 하는구나... 쉬바 상큼한 우리의 청춘도 어느샌가 다 가고 노총각 소릴 들어가는 나이에 짝을 찾아 가는군. 따지고 보면 졸라 길었던 청춘이고 상큼함과는 담쌓고 살았지만.

 

오늘은 태준식과의 만남에 대해 썰을 풀어볼까. (준식이형이 이 게시판에 들르기는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예정대로 팔자좋은 방위로 끌려가서 예상도 못했던 뺑이를 치던 와중에, 바닥을 기던 햇살은 일대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니... 성호형과 정훈이형을 투톱으로 내세우고 아무 생각없는 익구가 리베로를 맡아 햇살의 중흥을 기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던 축구협회와 서포터들은 몰지각한 일군의 마이너리티가 주사파라고 경멸하던 무리들이였나니... 그리고 역시 별 생각없던 나는 군생활 초기의 정신없던 시기에 그 마이너리티에 물들고 말았다. 당근 우리 집 햇살에의 출입은 점점 더 고역스러운 방문이 되었다. 남의 집 애들이 죽치고 있는 곳에 주인인 내가 눈치밥을 먹어야 하니 이 어찌 비극이 아닌가. (물론 덕분에 좋은 사람도 만나고 사람 공부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퇴근한 방위가 갈 곳이 어디있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래도 햇살로 나와서 삐대곤 했다.
제대를 앞둔 여름이니 91년 여름방학이였을 거다. 햇살에선 영화핵교란걸 한다고 수선이고, 그 틈에 어영부영 성환이형이나 준식이형, 그리고 장우영(얜 지금 뭐한다냐?) 등이 햇살에 들어왔다.

 

"잠깐 토막상식"-- 조선 후기에 신분제의 몰락과 상업의 발전으로 평민 등이 족보를 사거나 위조해서 대거 양반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가문을 중시하는 명문가에서는 이 수상한 일족들을 '별보'라 해서 본래 족보와는 따로 기록해서 관리를 했는데... 신분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조선이 멸망하면서 본래 족보와 별보는 섞여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조선 초기엔 인구 3%에 지나지 않았던 양반이 오늘날 한국사람 90%의 조상이 되고 말았다는 전설의 고향~~; 결론. 우리의 태준식이는 햇살 별보 출신이다. 그리고 공고 출신이다.^^;

 

좌우간 그 여름에 햇살이고 찾아오니 늘 그렇듯이 낯선 얼굴이 제 집처럼 햇살에 앉아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영화랑도 안어울리고 '학습'과도 거리가 먼 그 투박한 외양을 보고서 '이 넘, 또 축협에서 나온 단무지로군.'하고 졸라 티꺼운 인상을 받았다. 화양리 삐끼들의 오야붕 정도 되는 세숫대야인 주제에 여드름 자국이 수두룩하던 그 티껍던 넘이 우리의 태준식이다. 그 티꺼운 인상을 기초로 '이 넘들에겐 말을 놓지 않겠다'고 맘을 먹었고, 지금도 '넘을 형'이라고 부르는 모순을 반복하고 있다. 내가 아직도 존대말을 쓰는 햇살 후배들은 기본적으로 '별보출신'들이다.(흥미로운 언어적 혼란의 사례가 아닌가?)

 

첫인상과는 다르게 성실하게(또한 단순하게) 햇살 일에 열심이고, 나름대로 재롱부리는 맛도 있고, 무엇보다 그 푸짐한 살집이, 머리를 빡빡 깎며 엽기노선을 추구하다 군대로 끌려간 익구의 '대체재'로서 충분했기에 모든걸 용서하기로 했다. 나도 곧 소집해제를 명 받아 완존 백수가 되어서 시간이 남아돌기에 자주 만나 이야기할 기회도 많아졌다. 언제부터 이 넘과 맘이 통하게 됐는지 기억은 안나지만(그러니깐 별다른 계기는 없다) 좌우간 당시에 다른 어떤 넘들보다 태준식이랑 맘이 제일 맞았고, 제일 많은 시간과 정력(?)과 돈(!)을 때려박았다. 그러니깐 결혼하더라도 그 살의 절반은 내 소유이다~ (참고로 지금 내 위장병은 내 밥도 못먹고 이 넘들 밥과 술을 공양하는라 얻은 병이다. 말그대로 살신성인이다)

 

반드시 그 때문은 아니지만 넘은 축구협회랑은 거리가 멀었고, 굳이 족보를 따지면 나 같은 마이너리티랑 공통점이 많았고, 그걸 핑게삼아 졸라 많은 고민과 사소한 음모의 공범자가 됐다. 총선이나 대선 때 밤을 새워가며 벌였던 '그들만의 리그'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군. 서태지의 '환상 속의 그대'를 비지엠으로 쓴 총선 홍보 비디오를 학생회관에서 틀었는데(나래이션을 준식이 목소리로 깔았으니 말 다했지), 완성도도 형편없고 축구협회얘들 보기도 그렇고, 좌우간 서로 얼굴 보기도 민망해 하면서 숨어서 지켜보는데 (게다가 웬 단무지가 때려엎기라도 하면 안되잖아~) 건대부고 고삐리들만 모여들는걸 보니 웬지 허탈하면서도 안심이 되더군. 그래도 생각해 보니 이게 넘의 첫 다큐멘타리(풍) 작품이 되는 셈인가?

 

그렇다고 늘 죽이 맞았던 건 아니다. 가장 크게는 내가 정치에 아주 약간의 무게 중심을 두었던데 비해서, 넘은 상당히 영화에 무게 중심을 두고있었다. 물론 상대적인 차이였고, 당시에 유행하던 정치주의자 vs 영화지상주의자의 대립은 아니였다. (준식이형은 기억하고 있쑤? 둘이서 어느 '스탈린주의적 정치주의자'를 낄낄거리며 씹던 일을?)
성향 때문에 나는 요새 말로 잡화섹트들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학교를 나가서 무슨집단이라는 곳에 들어갔는데, 영화 혹은 햇살에 목숨걸고 있던 넘은 그런 나를 졸라 섭섭해했다. 정말이지, 마누라 두고 집나가는 서방 보는듯한 눈으로 흘겨봤다...
그 무슨집단에서 삽질하면서 당시 닥쳐온 대선에 징발되어 나갔는데, 거기는 나같은 행정병은 필요없고 당장 나가서 총 쏠 수 있는 보병이 필요했다. 조직을 위해 목숨은 못바칠 망정 눈물을 머금고(사실은 대의를 위해 사소한~ 의리를 팽개치고) 총알받이로 준식이형을 소개시켰는데, 대선 끝나고 보니깐 넘은 나보다 더 정치적인 노뉴단에 입적을 했더군. 한마디로 바람나서 집나갔다 돌아오니 마누라 배가 불러있더라는 이야그.(참고로 넘도 방위출신이다. 바로 우리 옆 당나라 부대 조교 출신이다)

 

오히려 같은 처지에 있게됐으니 어느때 보다 할 말도 많고 할 일도 많았을듯 한데, 실상은 그 반대였다. 내 멋대로 판단하자면, 비록 내가 '집단'에 속했지만 어느정도 상대적인 객관성을 유지했던 반면에 넘은 노뉴단의 입장에 기울어서 '집단'은 물론 나까지 재단하려들었다. 넘은 그런 외곬수 성향이 있고 지금도 여전한 듯 하더군. 그래서 이번엔 내가 섭했다...
서로가 그렇게 바쁘고 거리가 생기고, 게다가 나는 지금도 정리가 안되는 심각한 상황에 빠진채 '판'을 정리하고 4년 전에 일본에 와서 지금에 이른다. 따지고 보면 넘이랑 동거동락하던 시절은 그리 길지도 않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가장 치열하고 힘겹고 한편으론 '아름다운 청년'이던 시절에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벌써 5,6년 가까이 예전에 그랬듯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한번 제대로 못했지만(전에도 나만 졸라 떠들고 넘은 건성인채 밥이나 술을 우적우적 홀짝홀짝 먹어댔다), 여전히 넘이 그립다.
학교시절부터 그다지 개인적인 얘기는 못하고 살았는데, 막상 결혼한다니 언뜻언뜻 들었던 연애사건들의 후일담이 새삼 궁금하기도 하고. (흐흐흐, 결혼에 초를 칠까부다)
넘의 소중한 결혼식에도 못가보고, 그보다도 넘과 나의 인생행로가 예전처럼 가깝게 겹쳐질 일 또한 없겠지만, 내 청춘의 가장 중요한 공범자로서 넘에 대한 기억은 잊혀질리 없을 것이다. 멀리서 나마 진심으로 축하하고, 언제나 격려하고 성원하면서 변함없는 애정(음... 결혼한다니깐 우정으로 표현을 바꾸지, 뭐)을 보낸다.

 

아~ 넘 뿐만 아니라 다들 보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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