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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06
    2005년 10대 트렌드
    시다바리
  2. 2004/12/14
    기부의 문화와 동냥의 윤리/서동진(5)
    시다바리

2005년 10대 트렌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2005년 10대 트렌드이다. 매년 이 연구소에서는 당해년도 핵심 포인트나 경향이 될 의제를 선정해서 매년 초에 발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부분 신기할 정도로 일치한다. 물론 이는 자본의 운동방향을 예견하거나 의도하는 것을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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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의 문화와 동냥의 윤리/서동진

요즘 신문기사에 기업의 기부금을 낸다는 기사가 종종 실리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는 돈만 달랑 기부했었는데, 요즘에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이를 정착화하려 한다는 얘기도 덧붙이고 있다.

 

빈곤의 문제를 맞닥뜨리면서 '기부문화'활성화가 필요하다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이것의 실질적 효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떤 철학과 사고에 기반했는지가 다음의 글은 참고할 만하다.

 

 



기부의 문화와 동냥의 윤리 / 서동진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참담한 윤리적인 풍경은 대개 티비 속에서 득실대고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을 향해 연민과 공감을 호소하는 휴먼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후 곧장 "김치도 건강해야 한다"는 김치 냉장고 광고와 마주해야 한다. 김치의 건강, 김치의 삶. 부조리한 유머를 즐기는 일본의 컬트 만화 제목 같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이런 광고가 우리 시대의 "과학적인 진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다. 코미디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뉴에이지적인 관념은 이제는 거의 과학적 진실이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 집의 화초를 생각하라. 그것도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에게 반응한다. 그 여린 꽃과 작은 잎이 당신과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런 생물학적인 지식이 세간의 통속적인 과학 서적을 채우는 내용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물며 김치인들 왜 우리와 대화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 좋은 생명의 윤리의 시대에 김치라고 건강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물론 이런 모습에 우리는 더없이 절망적인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당장 이주노동자의 뼈저린 가난과 장애자의 참담한 굴욕을 우리는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삶을 김치의 건강과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이냐. 인간을 이렇게 막 대하는 미친 사회를 향해 우리는 분노하고 나아가 고약하게 생명의 물신으로 군림하는 것들을 향해 더없이 전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생명이 김치의 건강보다 존엄하다는 상식조차 농락하는 현실은 기괴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매우 패배적인 생각이다. 왜 그럴까. 마침 성탄절이 다가왔으므로, 가난한 이웃에게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뻗쳐야 하는 시절이 돌아왔으므로, 그것을 두고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여보자. 알다시피 빈곤이 "사회문제"화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구사회라면 우리는 이를 복지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의 몰락에 따른 결과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서구의 좌파들이 경악한 낯으로 외치는 "유럽의 브라질화" 즉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빈곤의 대량화에 대한 놀라움은 분명 20세기의 역사가 부정당한 데 있을 것이다. 왜 그것이 매우 우연하고 구체적인 사회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지 않고 역사의 궤도 이탈이라는 고통스런 체험으로 받아들여질까. 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폭발적인 확산과 네트워크화된 경제의 도래, 지식과 정보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상황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역사를 체험하는 자신들의 지평 자체가 뒤흔들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사실 서구에서 빈곤은 사회문제가 아니라 곧 정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제의 도래 이후 빈곤이 양적으로 많아졌다거나 사회의 대다수가 빈곤 계급의 나락에 빠져들고 그 위에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리는 "하이퍼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냥 현상에 대한 서술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끔찍한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충격의 외상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부의 분배를 둘러싼 문제는 바로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의 문제를 결정하는 유일한 행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실천을 이름짓기 위해 마련된 근대 사회의 개념인 "정치"의 문제였다. 그렇지 않다면 근대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사회주의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이제 빈곤은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를 둘러싸고 투쟁해야 하는 근본적인 물음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즉 정치를 향한 물음이 아니게 된다. 이제 빈곤은 범죄, 안전, 오염, 성차별같은 다양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취급되며 정치를 압박하고 규정하는 문제의 지위에서 해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빈곤이 "사회문제화"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그저 저널리즘적인 표현을 흉내낸 것이 아니다. 이는 빈곤한 삶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대적 논리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정치가 물러난 자리에 혹은 퇴각한 자리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알다시피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새로운 용어이다. 디지털 거버넌스에서부터 글로벌 거버넌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우리는 거버넌스란 용어가 부착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이란 물음을 던지고 결정을 행하는 정치가 사라지고 곧 사물의 관리, 비정상적인 상황의 처리를 뜻하는 것일 뿐인 행정이 만연하게 되었음을 알릴 뿐이다.

그러나 이는 물론 서구 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다. 정치의 공간인 국회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진짜 정치를 하지 않는 국회를 질타하는 상투적인 비난에 질릴 만큼 익숙해져 있다. 9시 티비 뉴스가 끝날 즈음 앵커들은 거의 표준적인 멘트를 덧붙인다. 추문과 욕설 그리고 폭력에서 벗어나 진짜 삶의 문제를 다루는 국회로 거듭나라는 식의 주문이 그것이다. 민생 국회와 정쟁 국회를 나눌 때 우리는 그것이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고 공허한 이데올로기만을 내세우는 선량을 향해 비판을 보내는 것이라고 자꾸 오해한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일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지금 실업 문제보다 뭐가 중요한가, 과거사 청산이 지금 빈곤 문제보다 뭐가 중요한가. 이제 공허한 이념의 정치에서 삶의 정치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이런 논리에 우리가 설득 당하는 순간 우리가 돌아가게 되는 곳은 당연히 삶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 없는 행정의 공간, 우리가 살 수 있는 세계란 자유주의적 전지구적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어처구니없게 한계 설정된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요구해야 할 진짜 정치란 어떤 사회에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 즉 국가보안법을 따를 것인가 어길 것인가라는 선택이 달려있던 문제일 뿐이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회를 꿈꾸는 희망에 족쇄를 채우는 질서의 폭력이다.

과거 급진적인(?) 정치조직에 몸담았던 한 국회의원을 향해 노동당원이었다는 협박을 들이대며 국회에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가공할 코미디를 펼치는 한나라당은, 어찌 보면 진짜 정치가들이다. 그들이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내세우는 열린우리당이 정작 그것을 탈냉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악법이란 이름으로 폐지를 주장할 때 그리고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정치란 없고 서로가 정책이란 이름으로 상생의 경쟁을 펼치는 사회적 관리의 파트너일 뿐이라고 주장할 때의 포스트정치적인 입장보다 투박하게 그러나 온전하게 정치적이다. 물론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하여 과거사 청산에 대하여 열린우리당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열린우리당 혹은 노무현 정권의 비열한 기회주의, 즉 책임내각제를 운영하며 이헌재라는 경제전문가에게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맡긴다는 식의 주장은 그야말로 정치를 정치에서 해방시킨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분리, 민생의 정치와 이념의 정치의 분리야말로 우리 시대의 빈곤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오직 사회문제일 뿐이지 우리가 살아야할 사회, 노동은 어떻게 측정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부는 어떻게 관리되고 분배되어야 할 것인가의 논리를 결정하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투명한 경영, 소유자 자본주의 그리고 이에 더한 기부의 문화가 "경제정의"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등장할 때, 아직도 그것을 지킬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정의란 개념을 그 모욕스런 처지에서 구제해야 한다. 옷깃에 빨간 열매를 달고 고통받는 삶을 향한 연민 따위에 정치를 희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가난한 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그들은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실패한 패배자들이란 것이고 둘째 그들은 측은하고 불쌍한 희생자들이란 것이다. 첫 번째의 패배자를 위한 사회적인 배려는 "청년 실업 극복"을 위한 사기 진작 쇼의 연출이며,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고 노래를 틀어주는 "힘내라 한국" 식의 코미디 보급이다. 두 번째의 희생자를 위한 사회적인 배려는 "러브하우스"를 통해 디즈니랜드를 방불케 하는, 이웃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떼어내어진 못살 집을 지어주고 다함께 울음에 북받치는 것이다. 아니면 사회공헌도 경영전략이며 윤리경영, 책임경영이 살 길이라며 "아름다운 가게"에 거액을 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꽤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몸짓의 사악함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실패하도록 규칙이 입력된 게임의 룰 때문에 우리는 패배자일 뿐이다. 우리는 패배자가 아니라 사기를 당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희생자도 아니다. 우리는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말인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소박한 실험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기부가 아니라 동냥의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알다시피 기부를 위한 바자회는 따뜻하고 분위기 좋은 백화점과 호텔에서 이뤄지지만 동냥질은 찬바람 부는 길바닥에서 하는 짓이다. 그러나 거지들에게 따뜻한 지하철 역사, 북적대는 멀티플렉스, 분위기 좋은 호텔 로비에서 동냥을 할 수 있게 하자. 물론 우리는 곧 걷잡을 수 없는 입씨름에 사로잡힐 것이다.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들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둥, 공공공간이 아니라 사유지이므로 동냥을 할 수 없다는 둥의 갖은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우리에게 정치에 다가서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얼마 전 고인이 된 데리다의 타자성의 윤리를 빌려쓴다면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그가 "환대"라고 불렀던)를 복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부와 동냥은 어떻게 다른가. 기부의 대상은 불쌍해진 나의 또 다른 거울이미지이지만 적선의 대상은 견디기 어려운 거북하고 불편한 심지어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부와 동냥은 전연 다른 윤리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부란 것이 인간은 약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평범한 규범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그 안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리는 것이라면 동냥은 말 그대로 가난한 자들을 가난한 자들로 표시하는 조건 자체가 풍기는 거북함을 자각하고 그들을 타인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타인을 타인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으로 인정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태도 역시 나의 일관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몸짓에 불과하다. 내가 그를 그 스스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이란 이름의 자리에 그를 앉히는 것, 즉 나의 타인으로서 그를 자리바꿈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궁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가능한 그를 추상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추상화한다는 것은 그를 사회의 질서,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관계의 한 항(項)으로 그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의 삶을 규정하는 질서의 체계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은 그를 객관화시키거나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그를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맞서 주체화하도록 이끄는 조건을 던진다. 겉보기에 이는 매우 건조하고 냉정한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몸짓은 본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윤리란 마오쩌뚱 식으로 말하자면 조사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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