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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2/06
    사각을 허물며 2호
    시다바리
  2. 2004/11/20
    [영상] 아름다운 이들의 투쟁...
    시다바리

기부의 문화와 동냥의 윤리/서동진

요즘 신문기사에 기업의 기부금을 낸다는 기사가 종종 실리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는 돈만 달랑 기부했었는데, 요즘에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이를 정착화하려 한다는 얘기도 덧붙이고 있다.

 

빈곤의 문제를 맞닥뜨리면서 '기부문화'활성화가 필요하다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이것의 실질적 효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떤 철학과 사고에 기반했는지가 다음의 글은 참고할 만하다.

 

 



기부의 문화와 동냥의 윤리 / 서동진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참담한 윤리적인 풍경은 대개 티비 속에서 득실대고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을 향해 연민과 공감을 호소하는 휴먼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후 곧장 "김치도 건강해야 한다"는 김치 냉장고 광고와 마주해야 한다. 김치의 건강, 김치의 삶. 부조리한 유머를 즐기는 일본의 컬트 만화 제목 같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이런 광고가 우리 시대의 "과학적인 진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다. 코미디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뉴에이지적인 관념은 이제는 거의 과학적 진실이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 집의 화초를 생각하라. 그것도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에게 반응한다. 그 여린 꽃과 작은 잎이 당신과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런 생물학적인 지식이 세간의 통속적인 과학 서적을 채우는 내용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물며 김치인들 왜 우리와 대화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 좋은 생명의 윤리의 시대에 김치라고 건강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물론 이런 모습에 우리는 더없이 절망적인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당장 이주노동자의 뼈저린 가난과 장애자의 참담한 굴욕을 우리는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삶을 김치의 건강과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이냐. 인간을 이렇게 막 대하는 미친 사회를 향해 우리는 분노하고 나아가 고약하게 생명의 물신으로 군림하는 것들을 향해 더없이 전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생명이 김치의 건강보다 존엄하다는 상식조차 농락하는 현실은 기괴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매우 패배적인 생각이다. 왜 그럴까. 마침 성탄절이 다가왔으므로, 가난한 이웃에게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뻗쳐야 하는 시절이 돌아왔으므로, 그것을 두고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여보자. 알다시피 빈곤이 "사회문제"화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구사회라면 우리는 이를 복지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의 몰락에 따른 결과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서구의 좌파들이 경악한 낯으로 외치는 "유럽의 브라질화" 즉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빈곤의 대량화에 대한 놀라움은 분명 20세기의 역사가 부정당한 데 있을 것이다. 왜 그것이 매우 우연하고 구체적인 사회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지 않고 역사의 궤도 이탈이라는 고통스런 체험으로 받아들여질까. 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폭발적인 확산과 네트워크화된 경제의 도래, 지식과 정보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상황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역사를 체험하는 자신들의 지평 자체가 뒤흔들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사실 서구에서 빈곤은 사회문제가 아니라 곧 정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제의 도래 이후 빈곤이 양적으로 많아졌다거나 사회의 대다수가 빈곤 계급의 나락에 빠져들고 그 위에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리는 "하이퍼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냥 현상에 대한 서술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끔찍한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충격의 외상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부의 분배를 둘러싼 문제는 바로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의 문제를 결정하는 유일한 행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실천을 이름짓기 위해 마련된 근대 사회의 개념인 "정치"의 문제였다. 그렇지 않다면 근대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사회주의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이제 빈곤은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를 둘러싸고 투쟁해야 하는 근본적인 물음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즉 정치를 향한 물음이 아니게 된다. 이제 빈곤은 범죄, 안전, 오염, 성차별같은 다양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취급되며 정치를 압박하고 규정하는 문제의 지위에서 해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빈곤이 "사회문제화"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그저 저널리즘적인 표현을 흉내낸 것이 아니다. 이는 빈곤한 삶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대적 논리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정치가 물러난 자리에 혹은 퇴각한 자리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알다시피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새로운 용어이다. 디지털 거버넌스에서부터 글로벌 거버넌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우리는 거버넌스란 용어가 부착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이란 물음을 던지고 결정을 행하는 정치가 사라지고 곧 사물의 관리, 비정상적인 상황의 처리를 뜻하는 것일 뿐인 행정이 만연하게 되었음을 알릴 뿐이다.

그러나 이는 물론 서구 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다. 정치의 공간인 국회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진짜 정치를 하지 않는 국회를 질타하는 상투적인 비난에 질릴 만큼 익숙해져 있다. 9시 티비 뉴스가 끝날 즈음 앵커들은 거의 표준적인 멘트를 덧붙인다. 추문과 욕설 그리고 폭력에서 벗어나 진짜 삶의 문제를 다루는 국회로 거듭나라는 식의 주문이 그것이다. 민생 국회와 정쟁 국회를 나눌 때 우리는 그것이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고 공허한 이데올로기만을 내세우는 선량을 향해 비판을 보내는 것이라고 자꾸 오해한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일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지금 실업 문제보다 뭐가 중요한가, 과거사 청산이 지금 빈곤 문제보다 뭐가 중요한가. 이제 공허한 이념의 정치에서 삶의 정치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이런 논리에 우리가 설득 당하는 순간 우리가 돌아가게 되는 곳은 당연히 삶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 없는 행정의 공간, 우리가 살 수 있는 세계란 자유주의적 전지구적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어처구니없게 한계 설정된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요구해야 할 진짜 정치란 어떤 사회에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 즉 국가보안법을 따를 것인가 어길 것인가라는 선택이 달려있던 문제일 뿐이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회를 꿈꾸는 희망에 족쇄를 채우는 질서의 폭력이다.

과거 급진적인(?) 정치조직에 몸담았던 한 국회의원을 향해 노동당원이었다는 협박을 들이대며 국회에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가공할 코미디를 펼치는 한나라당은, 어찌 보면 진짜 정치가들이다. 그들이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내세우는 열린우리당이 정작 그것을 탈냉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악법이란 이름으로 폐지를 주장할 때 그리고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정치란 없고 서로가 정책이란 이름으로 상생의 경쟁을 펼치는 사회적 관리의 파트너일 뿐이라고 주장할 때의 포스트정치적인 입장보다 투박하게 그러나 온전하게 정치적이다. 물론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하여 과거사 청산에 대하여 열린우리당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열린우리당 혹은 노무현 정권의 비열한 기회주의, 즉 책임내각제를 운영하며 이헌재라는 경제전문가에게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맡긴다는 식의 주장은 그야말로 정치를 정치에서 해방시킨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분리, 민생의 정치와 이념의 정치의 분리야말로 우리 시대의 빈곤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오직 사회문제일 뿐이지 우리가 살아야할 사회, 노동은 어떻게 측정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부는 어떻게 관리되고 분배되어야 할 것인가의 논리를 결정하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투명한 경영, 소유자 자본주의 그리고 이에 더한 기부의 문화가 "경제정의"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등장할 때, 아직도 그것을 지킬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정의란 개념을 그 모욕스런 처지에서 구제해야 한다. 옷깃에 빨간 열매를 달고 고통받는 삶을 향한 연민 따위에 정치를 희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가난한 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그들은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실패한 패배자들이란 것이고 둘째 그들은 측은하고 불쌍한 희생자들이란 것이다. 첫 번째의 패배자를 위한 사회적인 배려는 "청년 실업 극복"을 위한 사기 진작 쇼의 연출이며,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고 노래를 틀어주는 "힘내라 한국" 식의 코미디 보급이다. 두 번째의 희생자를 위한 사회적인 배려는 "러브하우스"를 통해 디즈니랜드를 방불케 하는, 이웃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떼어내어진 못살 집을 지어주고 다함께 울음에 북받치는 것이다. 아니면 사회공헌도 경영전략이며 윤리경영, 책임경영이 살 길이라며 "아름다운 가게"에 거액을 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꽤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몸짓의 사악함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실패하도록 규칙이 입력된 게임의 룰 때문에 우리는 패배자일 뿐이다. 우리는 패배자가 아니라 사기를 당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희생자도 아니다. 우리는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말인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소박한 실험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기부가 아니라 동냥의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알다시피 기부를 위한 바자회는 따뜻하고 분위기 좋은 백화점과 호텔에서 이뤄지지만 동냥질은 찬바람 부는 길바닥에서 하는 짓이다. 그러나 거지들에게 따뜻한 지하철 역사, 북적대는 멀티플렉스, 분위기 좋은 호텔 로비에서 동냥을 할 수 있게 하자. 물론 우리는 곧 걷잡을 수 없는 입씨름에 사로잡힐 것이다.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들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둥, 공공공간이 아니라 사유지이므로 동냥을 할 수 없다는 둥의 갖은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우리에게 정치에 다가서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얼마 전 고인이 된 데리다의 타자성의 윤리를 빌려쓴다면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그가 "환대"라고 불렀던)를 복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부와 동냥은 어떻게 다른가. 기부의 대상은 불쌍해진 나의 또 다른 거울이미지이지만 적선의 대상은 견디기 어려운 거북하고 불편한 심지어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부와 동냥은 전연 다른 윤리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부란 것이 인간은 약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평범한 규범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그 안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리는 것이라면 동냥은 말 그대로 가난한 자들을 가난한 자들로 표시하는 조건 자체가 풍기는 거북함을 자각하고 그들을 타인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타인을 타인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으로 인정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태도 역시 나의 일관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몸짓에 불과하다. 내가 그를 그 스스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이란 이름의 자리에 그를 앉히는 것, 즉 나의 타인으로서 그를 자리바꿈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궁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가능한 그를 추상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추상화한다는 것은 그를 사회의 질서,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관계의 한 항(項)으로 그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의 삶을 규정하는 질서의 체계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은 그를 객관화시키거나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그를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맞서 주체화하도록 이끄는 조건을 던진다. 겉보기에 이는 매우 건조하고 냉정한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몸짓은 본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윤리란 마오쩌뚱 식으로 말하자면 조사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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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을 허물며 2호

웹메일신문을 매주 펴내기로 했는데, 2주이상이나 밀려버렸다. 다들 투쟁에 몰입한 까닭이다.

 

 



항상 겨울철이 돌아오면 정책당국자와 언론은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는 계층의 문제를 특별히 들추어낸다. 특히 노숙인과 같이 삶이 극단의 위기상황에 내몰린 위기계층의 경우는 겨울철이 시즌이라 불릴 정도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매번 정부는 노숙인 문제에 대해 실제는 재탕 삼탕의 내용임에도 특별한 대책인양 보건복지부를 통해 ‘동절기특별대책’을 발표한다. 최근에는 동절기특별대책이 발표된 직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모 방송국 명사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울역에 노숙체험을 하러 온다고 해서 노숙동료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소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노숙동료들은 “우리가 상담을 못 받아서 우리 삶이 이 지경인가!!”라는 구호를 내걸고 주거와 의료 등 일상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매년 겨울이면 발표되는 상담 위주의 응급 대책만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봉합하려는 보건복지부의 노숙인 정책이 오히려 거리와 쪽방 등 불안정한 주거생활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임을 꼬집었다.

1998년 전국 대도시 주요 공공역사로 "쏟아져 나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정도로 가히 폭발적인 증가 양상을 보였던 노숙인 문제는 IMF 구제 금융을 받는 당시 한국의 경제난과 대량실업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졌었고, 이에 따라 노숙인은 IMF사태에 따른 대량실업난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인 사회 현상으로 받아 들어져 응급보호 차원에서 급식과 잠자리를 제공하여 조만간 가정과 사회로 복귀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 졌었다. 그러나 구조화된 빈곤화가 개인과 가족의 온전한 삶을 가로막아 피폐화 시키고 있고, 불안정 노동과 불안정한 주거, 불건강의 악순환 상태는 더 이상의 소득을 보장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한 삶을 양산하고 있는데 정책당국자들의 이러한 시각이 맞아 들어갈 리가 없으며, 이미 한국사회에서 노숙인은 줄어들래야 줄어들 수 없는 사회적 실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노숙인 문제에 대해 여전히 현상을 봉합하려는 응급구호적 대책만으로 일관하려 하는 정책은 철저히 지탄받아야 하며, 이는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예산을 들여 시혜적 원조로 묶어 두며 그 자체로 사회적으로 낙인찍고 차별받는 소수의 특정한 계층으로 남겨 두려는 반복지적 정책이다.

그렇다면 노숙인 정책에서 정작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미 외국의 선험적인 경험과 사례를 보면 노숙인과 같은 위기계층을 1차적으로 주거를 상실한 홈리스로 파악하고 <주택법> 혹은 홈리스 지원 단독법에 임시거처나 항구적인 주택의 제공에 있어서 홈리스 우선지원을 명문화하고 있는 사례를 찾아 볼 수 있고, 최근 들어 한국사회 노숙인 문제를 연구해 온 여러 연구 문헌에서도 주거문제가 노숙 생활의 시작과 반복 혹은 장기화의 주요한 원인으로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으며, 또한 현장에서 당사자들의 사례를 직접 접하고 있는 지원자들을 통해서도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공식 노동에 종사하는 노숙인의 경우 임금상승에 비례하지 않는 주거비상승이 노숙 생활로 전락해가는 주요한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과 이해는 비단 노숙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04년부터 건설교통부가 추진하고 있는 매입임대주택정책의 추진과정에서도 보면 이른바 정책입안자들이 우리사회 사각지대 틈새·취약계층이라 분류하고 있는 갱생원과 같은 사회복귀시설이나 미혼모 시설, 성매매여성 쉼터, 노숙인 쉼터, 쪽방 거주민, 그룹홈 대상자 등 사회복귀시설 혹은 생활시설의 대상이 되는 위기계층 모두에게 스스로 부담 가능한 저렴한 주거대책의 필요성은 그 어떠한 응급적대책 보다도 우선해 고려되어야 할 문제임이 드러나고 있다.

즉 노숙인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는 계층에게 제한된 예산으로 쉼터와 같은 임시거처의 제공이나 응급구호적인 대책만을 정책의 전부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해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소한 충족되어야 할 주거와 의료, 일자리 등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 주는 방향에서 정책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 특히 지역 정착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주거보장정책을 통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주택법>과 <임대주택법>이나 기타 관련 법안에 입주 기준이 획일적이다 보니 노숙인과 같은 다양하게 존재하는 위기계층을 포괄하려는 지원 규정은 빠져 있다. 분명 정부는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있으며, 공공임대주택의 공급 취지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노숙인과 같은 위기계층에 대해 합당한 주거정책을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 2004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매입임대주택정책만 보더라도 적은 물량과 위기계층의 구체적 상태를 기준으로 입주 자격을 폭 넓게 명문화하려는 노력은 결여된 상태에서 생색만 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고 있다.

물론 정부가 변명할 여지는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보편적 주거보장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는 적극적 인식을 통해 공공임대주택정책에 있어서 노숙인을 비롯한 위기계층을 적극적 포괄대상으로 인정하고 구체적 주택정책으로 이행하려는 노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거보장의 밑바탕이 있어야 재활이나 자활프로그램, 쉼터 정책 등 사회복지의 대상이 되어 왔던 위기계층에 대한 여타의 기존 정책들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권리를 중심으로 한 인식의 바탕위에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적극적으로 밝혀나가기 위한 사회복지 현장에 있는 활동가와 권리의 주체가 되는 당사자가 함께 투쟁해 나가야 할 것이다.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 문헌준






죽음을 쏟아내는 말, 신자유주의

97년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구조적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과거에 그나마 존재했던 ‘복지’, ‘성장’, ‘고용’ 포기하고 모든 방면에서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민중들의 삶과 권리를 희생시키고 자본의 이윤추구 자유만을 추구하는 정치 경제 조류를 우리는 통칭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겉으로는 위기를 극복하자는 그럴싸한 말로 들리지만 실상은 지구 곳곳에서 파괴적인 재앙을 낳고 있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그 대표적인 브랜드가 IMF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구조조정’이다. 김대중정권의 공공, 노동, 기업, 금융 등 4대부문 구조조정에 이어 노무현정권에 와서는 상시적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정리해고, 노동강도 강화, 임금삭감, 비정규직 증가를 의미한다. 또한 시장개방, 공기업 사유화도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불평등한 조건에서 시장을 개방한다는 것은 금융부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온갖 외국투기자본이 국내 알짜배기 기업의 단물을 쪽 빨아먹는 것이다. IMF이후 외국투기자본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가져간 이윤이 100조가 넘는다고 하니 기가찰 노릇이다. 공기업을 사유화하면 그 과실은 국내외 거대 민간자본에게 돌아가고 피해는 노동자와 서민에게 돌아간다. 특히 사유화 이후에는 이윤논리에 의해서만 기업이 작동하게 되므로 서비스가 나빠지고 요금이 대폭 인상된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불안정하게 하고 빈곤과 실업을 양산하는 것이다. 이러니 신자유주의를 죽음의 언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가 대세?
정부나 재벌들, 가진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몰아치는데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약속된 거짓말일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기생해 살아가는 지배자들에게만 대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아니고는 민중들을 쥐어짤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경제를 쥐락 펴락하는 한줌의 그들을 제외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이를 달가와하지 않는다. 뼈빠지게 일을 하고도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전 세계에서는 밑바닥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나서고 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란군은 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 발효에 맞추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원주민의 권리를 위해 봉기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민중들이 나서서 민중의회를 조직하여 일자리를 요구하였다.
독일에서는 최근 15년만에 ‘월요일 시위’가 부활하여 복지와 고용파괴에 항의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무토지 농민들은 대지주의 토지를 점거하여 자치적인 공동체를 꾸리는 저항을 하고 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곳일수록 민중의 저항은 더욱 거세다. 한국에서도 우리는 가까이 96~97 노동법 날치기에 맞선 총파업투쟁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놀라게 한 신자유주의 반대 총파업이었다. 대책없는 쌀시장 개방에 대해 절박하게 싸우는 농민들의 투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무수히 벌어지는 빈민들의 생존권 쟁취투쟁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신자유주의가 대세라고? 개소리, 헛소리 말라고 하자. 지금 당장 국회앞에만 가보라. 무수히 많은 농성천막들과 국회 안 타워크레인 위에서 비정규 노동법개악 철폐를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노동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누가 우리 사회의 압도적인 다수란 말인가? 어느 노래에서 말하듯 “저들의 계획속에 우리들의 미래는 없다”.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들기 위해, 진정으로 다수인 우리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과 저항이 대세다.

사회진보연대 정영섭




빈곤을 강요하는 최저생계비

2005년 최저생계비가 12월 1일 발표되었다. 1인가구 40만 1천원, 4인가구 113만원으로 평균 8.9%의 인상율로 결정되었다. 이번 최저생계비 결정의 문제는 예산을 문제로 계측결과조차 반영되지 않은 근거없는 결정이라는데 있다. 2004년 최저생계비가 최소한 4인가구 기준 123만원 이상이 되어야 했다는 가계부 조사 등을 통한 실계측 연구결과를 예산을 이유로 삭감해버렸다.

전날인 30일 오전 최저생계비 심의를 위한 중앙생활보장위원회 마지막 전체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과천정부종합청사앞에서는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는 지난 11월 8일부터 빈곤해결과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을 진행해 온 한국노총, 빈곤사회연대 등 노동사회단체 회원 60여 명이 함께했다.

이날 집회에서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은 현 정부의 복지 정책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류정순 소장은 기초생활보장법(기초법) 수급권자 수는 정부와 빈민운동의 성적표인데, 기초법이 시행된 이후 오히려 수급권자가 줄어들고 있다며 그런 점에서 빈민운동가로서 자괴감이 든다며 말문을 열었다.
류정순 소장은 89년 4인 가구 최저생계비 수준은 평균 가계지출의 58.4%였다며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현행 최저생계비는 60% 수준인 160만 원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 110만 원에 불과하다며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삭감 책정되고 있는 최저생계비를 지적했다.
류정순 소장은 또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기획예산처에 대해 기획예산처에서 최저생계비를 제멋대로 깍을 수 있는 권한을 준 사람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라며 복지마인드 없는 노무현 대통령이 기획예산처를 앞세워 빈민들을 우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의선 빈곤연대 사무국장은 최저생계비가 5년만에 계측되는 것인 만큼 현재 생활수준에 부흥할 수 있도록 책정돼야 한다고 촉구하며 1일 발표되는 최저생계비가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이 된다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키도 했다.
김동만 한국노총 대협본부장은 IMF 이후 노동시장에서 퇴출된 이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등 빈곤의 문제는 이제 노동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노동자들의 연대를 호소하며 특히 노동운동은 이제 빈곤층 등 사회약자와 연대하는 등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자들은 36만원으로는 살 수 없다, 예산타령 듣기 싫다, 최저생계비 현실화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회의가 진행되는 1시간30여분 동안 집회를 벌였다.

한편, 지난 8일 부터 '10만인 선언', '삼보일배' 등의 사업을 진행해 온 공동행동은 최저생계비 발표 이후에도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빈곤해결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

[출처 : 미디어 참세상 2004년11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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