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다시읽기]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 마르셀 모스 <증여론>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미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까? 아마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원시사회(promitive society)’라는 단어로 그들이 사는 세계를 표현하는 현재의 관습이 남아 있는 한, 그 단어를 통해 작동하는 ‘문법의 환상’은, 다시 말해 그 사회는 ‘원시적’이고, 따라서 뒤처진 사회며 미개한 사회라는 식의 환상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원시사회를 연구하러 그 속으로 들어갔던 인류학자들은, 그 세계가 '본원적(primitive)'일지언정 결코 미개하거나 뒤처진 사회가 아님을 발견한다. 가령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아직도’ 돌도끼를 사용하는 남미 원주민들에게 그보다 10배는 효율이 좋은 쇠도끼를 주었을 때, 그것으로 동일한 시간 일해서 10배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10분의 1시간만 일해서 동일한 물량만을 생산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뒤처진 생산력, 뒤처진 문화를 발견하겠지만, 그들은 거꾸로 반문할 것이다. “왜 10배나 더 생산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데 필요한 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물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다. “쓰고 남은 건 팔아서 돈을 벌면 되잖아. 그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저축해서 재산을 모아도 되고.”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험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은 틀림없이 남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데 사용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를 초과하는 생산은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었다. 즉 필요 이상의 생산을 저지하는 것, 그것은 이런 점에서 미개함의 증거가 아니라 자연이나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지혜’의 증거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생산력이 형편없이 뒤처진 그들의 경우, 가령 아프리카 부시맨의 경우 하루나 이틀 일하면 하루나 이틀 쉰다. 하루에 대략 3~4시간 일하는 꼴이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발전된 생산력을 가진 자본주의 세계의 우리는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인 걸까?


이러한 사실은 한 두 사람이 지적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원시부족’들이 이런 식으로 산다. 그래서 그걸 조사하던 인류학자들 중 일부는 그 ‘본원적’ 세계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해체된 사실에 거대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기도 했고, 다른 일부는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은 그들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삭막한 삶을 대신할 ‘미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을 쓴 마르셀 모스 역시 ‘선물’로 특징지어지는 그 원시적 문화에서 자본주의를 대신할 미래적 세계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은 바타이유처럼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실망한 좌파 지식인들이 새로운 종류의 미래를 구상 내지 상상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했다. 이 책에서 모스는 수많은 현지조사 보고서(‘민족지’)를 뒤져서 이른바 원시부족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선물’의 문화, 혹은 ‘증여’의 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포틀래취’와 ‘쿨라’일 것이다.


치누크 ‘인디언’의 말로 ‘식사를 제공하다’ 내지 ‘소비하다’를 뜻하는 포틀래취는 일종의 ‘선물게임’이다. 결혼식이나 성인식, 조상신에 대한 제사 등의 축제 때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을 실컷 먹이고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에 초대된 사람들은 초대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게임’에서 진 것이 된다. 이는 대개 경쟁이나 전쟁처럼 격렬하게 진행되며, 종종 대대적인 물자의 파괴를, 특히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동판의 파괴를 수반한다. ‘이런 것쯤 얼마든지 내다버려도 돼’라는 듯이. 이러한 선물과 파괴는 명예 내지 권위로 되돌아온다. 다른 누구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쎄게’ 나간 사람이 최고의 명예와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을 소모하여 별로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권위를 경제적 재산의 소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위가 하나로 겹쳐져 필경 남들을 지배하게 되는 국가적 권력이 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었을까?


쿨라는 트로브리얀드 군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선물이 증여자와 답례자 두 항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과 달리 섬 전체를 돌며 여러 항 사이에서 행해진다. 그것은 두 개의 정해진 물건을 선물하는데 하나는 음왈리라는 팔찌고, 다른 하나는 술라바라는 목걸이다. 가령 A가 음왈리를 B에게 선물하면, B는 그것의 답례를 A가 아니라 C에게 하는 것이다. C는 그것을 D에게 주고···. 이런 식으로 전해지는 음왈리는 아마도 하나의 순환을 그리며 A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술라바의 경우는 음왈리와 반대 방향으로 순환한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하는 것. 이것이 반복된다면 한 번의 선물은 대대적인 선물의 연쇄를 만들어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선물의 체제는 이들 원시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대 이전 우리가 살던 세계에도, 모스가 살던 서구에도 있는 것이다. 포틀래취까지는 안 가더라도, 잔치를 벌이면 음식이 남도록 만들어 싫컷 먹이고 가는 손님에겐 음식을 싸주는 것은 이미 근대화된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만 가도 떡을 해 이웃에 돌리지 않던가! 모스는 이를 좀더 강하게 말하기 위해 로마 시대의 채권-채무관계조차 선물을 주고받는 의무체계로 해석한다.


이러한 선물의 체계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분리된 가구나 가족들 사이에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쿨라에서 선물은 섬들로 분리된 마을이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증여되는 재화의 순환이 사람들을, 혹은 삶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마나’ 내지 ‘하우’라고 불리는 ‘靈’이 선물의 순환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며, 공동체에 하나의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의 삶은 어디든 증여의 양상을 취한다. 역으로 선물의 순환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물을 개념을 좀더 확장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식물이 동물에게 산소를 선물하고, 동물이 식물에게 유기물을 선물하는 관계 역시 선물의 순환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서로 기대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싶다면, 어떻게 선물의 순환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모스는 ‘계산기’가 되어 버린 근대적 ‘경제동물’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꿈꾼다. 선물의 체제, 그것이 그 꿈을 향한 출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물의 체제를 일반화하기 위해 교환이란 개념에 포섭한다. 선물에 대한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 이유다. 답례가 의무라면, 선물과 답례란, 다시 말해 선물의 교환이란 상품의 교환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채권과 채무도 의무적으로 답례하게 되어있는 선물의 일종이 된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답례’하기 때문에 이를 일종의 ‘신용거래’라고 이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선물을 교환이라는 ‘일반적’ 현상으로 포착하는 모스의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찾아내는 능력으로 격찬한다.


그러나 그 결과 선물이 사라지게 된다. 상품교환의 일종이 되어버린 선물은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채무의 일종이 되어버린 답례 역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나중에 답례하는 것이, 그게 비록 의무라 해도 정말 교환일까? 일부러 등가성을 피해 다른 값어치의 선물을 하게 하고, 일부러 동시성을 피해 나중에 답례하게 하는데도.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것이 채무와 똑같다고 말할 이유가 될까? 갚아야 할 채무와 달리 어떤 종류의 등가성도 없는데. 이는 결국 ‘원시사회’의 선물을 우리가 익숙한 ‘교환’이란 개념 안에 끼워맞춰 무용하게 만드는 게 되진 않을까? 이를 놓치면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선물을 오해하는 일반적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책이 될지도 모른다.


 -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5446.html)

서평자 추천 도서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한길사 펴냄.

[폭력의 고고학] 클라스트르 지음, 변지현·이종영 옮김, 울력 펴냄.

[저주의 몫]바타이유 지음,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nomad22/trackback/103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