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명랑국토부]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 우석훈/성공회대 외래교수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낚싯대 접고, 고무 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 호텔 싸우나에 몸 풀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써비스 한 번 볼만한데 음, 음

환갑내기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그저 아이스 박스 가득,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

(정태춘, <나 살던 고향> 중)



국토라는 말을 듣자마자 어떤 생각이 들까? 조국강산이라는 말이 생각나고, 시인 서정윤이 노래하였던 먼 옛날 만주벌판을 지나 이 땅에 정착했던 그 옛날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국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개발해야 잘 산다”는 붉은 글씨로 논밭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와 “xx지역 개발 막는 정부는 각성하라”와 같은 날선 구호들이 연상된다. 내가 사는 집 앞의 “지주들 단결하여…”라는, 문정 법조단지에 보상금을 높여달라는 구호들이 국토와 관련되어 있고, 골프장, 임도, 경마장 등등 전국 그 어느 곳이든 개발이익과 관련해서 몸살을 앓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현장은 한 편으로는 “대한민국은 공사중”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며, 차를 세우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태춘의 해금 반주와 함께 애절하게 울려펴지던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는 노래 가사를 가슴에 떠올리게 한다.


서양에서 가장 먼저 화폐를 사용한 사람들은 페니키아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또한 가장 먼저 창녀 제도를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오따르는 상품화폐가 아닌 진짜 화폐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딸을 창녀로 팔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뭔지 아는” 사회에서야 비상품 화폐라는 제도가 도입될 수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딸을 파는 비정함과 물건이 아닌 화폐를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내어주는 정신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선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아버지가 딸을 내어주고 몸값을 받는 것과 똑같은 원시적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국토를 혹은 고향을 내어주고 외지에서 온 골프장 주인이나 건설업체에 동네마다 환영 깃발을 걸어놓고 있는 저 사람들이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의 진짜 아버지일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리스 시대의 페니키아처럼 결국 사라지고 말 타락한 문명의 길 한 가운데 들어서 있는 셈이다. 정부는 “돈돈”하고 외치는 건설업자의 입에 새만금을 내주었고, 지방정부는 인천 계양산부터 제주도 한라산까지 마찬가지 방식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생태계를 내어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신석기부터이든 아니면 요즘 얘기하듯이 구석기 문명부터이든 이 땅에 깃들어 산 것은 긴 땅의 역사에 비하면 찰라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민족은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비장한 심정의 아버지처럼 “단돈 육만엥”에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있다.


몸서리치는 이 국토 인신매매의 현장에서 우리는 딸을 내어주는 아버지 또는 주5일제를 내세우며 “나에게 놀 곳을 내놔”라고 말하는 비정한 성매매범과 논리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지방정부는 포주고, 중앙정부는 더 큰 포주고, 손님들은 “이렇게 지저분해서 내가 돈 쓸 맛이 나겠어”라고 외치는 관광객이다. YS가 사투리로 “강간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실수를 했다고 했는가? 현실은 ‘관광입국’을 꿈꾸는 온 국민이 ‘강간입국’을 철학적으로 외치는 셈이다.


이걸 눈 앞에 보면서 경제학자가 왜 “육만엥 밖에?”라고 질문하는 것은 정신분열증이다. 이 사태를 보고도 정신분열증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있을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이 상황에서 뇌구조가 붕괴하지 않을 수 있는 알리바이는 딱 하나다.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 그리고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상황을 보면 어머니처럼 그 지역에서 살포시 살았던 주민들 중에 돈 독 오른 사람은 없다. 이 싸움은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랑이 같아 보이지만, 만약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현실을 훨씬 부드럽고 정신분열증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명랑해질 수 있다.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퐁당퐁당 던져줄 수 있게 된다. 돈독오른 아버지를 비판하기 어렵지만, 돈독 오른 날강도와 포주를 비판하기는 너무 쉬울 뿐 아니라 즐겁기까지 할 수 있다. 지역별로 좀 다르지만, 돈독 올라 지역의 생태계를 외지에 팔아넘기는 지역의 외지인 토지소유 비율은 60%가 넘는다. 부재지주와 악덕지주 그리고 그들과 붙어먹었던 마름들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한 것이 바로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의 정신이다. 왜 아버지는 딸을 이렇게 파실 수밖에 없느냐고 비장하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저들은 조선조부터 이 땅과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정신을 배신한 바로 그 내부 부패세력, 친일파 그리고 유신세력과 연결된 악질들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점점 명랑해진다. 멀게는 몰리에르의 코메디와 가깝게는 아르헨티나 에두아드 갈레아노의 글들과 만나게 된다. 몽환적이거나 명랑하거나 두 가지의 방식이 있는데, 판소리와 마당극에 등장하는 우리의 “가짜 아버지” 다루는 방식은 명랑한 방식이다.


그런게 내가 생각하는 명랑국토의 정신이었다. 진짜 아버지를 비난하는 컴플렉스 가득한 시리적 증후군의 두려움 없이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는 가짜 아버지를 두둔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명랑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진취적인 미래 자세이며, 또한 판소리의 즐거움과 만나고 장터의 흥을 만나는 흥겨운 길이 아니겠는가. 여러분들도 “돈이 뭔지 아냐?”는 지방토호와 건설업자들에게 어깨에 힘빼고 “명랑이 뭔지 아냐?”는 작은 돌덩이를 퐁당퐁당 던져주시길 바란다. 이 시대에 국토가 장터처럼 흥겹게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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