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주체와 대상/장(場)

2008/03/25 14:59

20세기의 사상들이 그 전의 사상들에 비해 가지는 독특한 특징들 중 하나는 의미 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에 있다 하겠다. 현대 철학은 의미론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이어왔다.

 

주체가 대상에서 읽어내는 노에마로서의 의미를  추구한 현상학이든,

텍스트에 숨어 있는 또다른 의미를 캐내려 한 해석학이든,

언어의 논리적-구조적 분석을 통해 의미를 탐색한 언어분석철학이든, 

 또 기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들의 놀이를 통해 의미를 이해한 구조주의이든,

현대 사상의 상당수 조류들은 의미의 문제에서 교차한다.

 

근대 철학은 대상과 주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상을 접촉함으로써 주체에게 발생하는 것이 관념이다(칸트는 표상이라는 말을 썼다).

주체는 영혼(마음, 의식, 정신)이고 주체가 경험했을 때 영혼에 생겨나는 것이 관념이다

데카르트는 접촉 이전에 영혼에 주어진 관념들이 있다고 보았고,

영국 경험론은 접촉을 해야만 관념이 생긴다고 보았다.

 

이후의 철학들에서도 이런 논의 구도는 이어진다. 이런 구도 아래에서 기호는 관념을 물질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기호는 늘 관념과 붙어 있으며, 관념의 외화(外化)로서 이해되었다.

 

이해 비해 현대 철학에서는 대상과 주체 사이에는 그 두 항을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場)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대상과 주체가 직접 관련 맺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맥락에서 생각할 때, 대상과 우리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한다. 만일 공간이 휜다면 물체는 우리에게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대상과 주체가 직접, 순수하게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공간이라는 장의 성격이 매개되어 관계 맺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물리적 맥락에서 보다 추상적인 맥락으로 옮겨 생각해보면,

우리는 현대 철학의 핵심적인 한 원리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어떤 장을 통과해서, 항상 어떤 전제를 매개해서 그 대상을 보게 된다.

똑같은 하나의 사과를 봐도 생물학 시간, 미술 시간, 경제학 시간,......에 그 사과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로 이 장을 사유하려는 것이 현대 사유이다.

그리고 이 장은 우선은 언어적-논리적인 장인 것이다.

 

이런 사유에서 '현존'(現存) 개념은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대상과 주체를 곤통하는 어떤 '빛' 아래에서 성립하는 순수한 나타남, 벌가벗은 대상과 순순한 주체의 무구(無垢)한 만남은 부정된다.

현상학의 한계가 노출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이런 생각이 인식론의 형태로는 '이론 의존성'(핸슨), '패러다임'(쿤), '에피스테메'(푸코), '인식론적 장'(바슐라르, 캉길렘)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맥락에서 이것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그리고 상징적인 것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조조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에 대한 나이브한 형이상학적 상상적인 것-의식적인 것-에 대한 근대 철학의 집착을 비판하고 상징적인 것을 내세웠으며, 사물의 차원과 의식의 차원을 넘어 기호의 차원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사유는 탈현존화(脫現存化)한다.

상상적인 것(의식의 차원), 실재적인 것(사물의 차원)은 상징적인 것(언어의 차원)을 매개해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개념화하든, 대다수의 의미론들은 의미를 투명한 어떤 것으로서 인식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서구의 고중세 철학과 근대 철학은 공통적으로 거울의 은유 또는 빛의 은유를 가지고 있다.

 

마음이 대상을 그대로 비춰서 대상이 마음속에 재현되고, 그렇게 재현된 대상은 관념(觀念)이 된다.

그리고 이 관념이 다시 그대로 바깥으로 투사되어 기호가 된다.

이런 거울과도 같은 재현들이 가능하려면 여러 존재들이 서로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해 주는 빛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사유 구도는 현대 철학에 이르러 무너지게 된다.

존재와 사유를 이어주는 빛이 꺼지고(예컨대 칸트의 경우),

거울은 깨지거나 일그러진다(예컨대 라캉의 경우).

 

이제 의미는 예전처럼 단순한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바로 이것이 현대 척학이 의미의 문제에 천착하게 되는 이유이다.

 

무엇인가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때,

기존의 인식을 무너뜨릴 때 사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 발췌 : 이정우. 2007. [세계의 모든 얼굴]. 한길사. pp.11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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