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철학아카데미 자료실 http://www.acaphilo.org/PDS/?tb=J1 

이정우의 글(공간과 시간/욕망/동양 서양/의미/기억/코드/차이/사건)입니다.

 

1. 공간과 시간 월간 <논>에 실린 대담.


시공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김상협 >>> 이번 인터뷰 준비를 위해 친구들에게 시공간에 대해 물어봤는데, 다들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며 오히려 반문하더라고요. 시공간은 그것에 대해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삶의 조건인 것 같아요. 시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시공간에 대한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해요.


이정우 <<< 사람이 살다 보면 많은 물음을 던지게 되죠. 하지만 물음마다 성격이 달라요. 시간적으로 짧고 공간적으로 제한된 질문이 있는가 하면, 시간적으로 길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질문이 있어요. 예컨대 오늘 다툰 친구와 어떻게 화해할까, 라는 짧은 물음과 올해 있을 대선의 향방에 대한 조금 긴 물음, 그리고 근대사회를 극복하려는 탈근대적 모색에 관한 휠씬 긴 물음 등이 있지요. 이처럼 물음들의 층위는 다양한데, 인식이 넓어질수록 물음의 범위가 커지기 마련이죠. 역사에 대한 물음이 나아가 자연과학적 혹은 철학적 물음으로 발전하기도 하죠. 결국에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론적인 물음에 직면하게 되요. 이를테면 ‘있다’와 ‘없다’는 무엇인가, 이 세계는 필연적인가,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인가 등이 존재론적인 물음에 해당돼요. 문학·정치·경제 등 어떤 영역에서든지 물음을 계속 던지다 보면 결국에는 존재론적인 물음에 부딪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이죠. 당연하지만 당연한 것을 캐물어 우리의 삶이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가를 반성해야 해요.


시계, 근대적 시간측정 기계의 탄생


김상협 >>>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때 시간에 대한 개념이 확연히 달라진 것 같아요. 정확한 시간개념이 없었던 이전의 농경사회에서는 낮과 밤이라는 자연적 시간만이 존재했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시계라는 정밀한 기계에 따라 움직이잖아요. 이 시계라는 기계는 언제 만들어지고, 정밀한 시간은 왜 요구됐나요?


이정우 <<< 농경사회에서도 물시계·해시계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시계와 전혀 다르지요. 농경사회에서 시간을 나누는 분절의 기준은 자연이에요. 물론 그때도 왕조교체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시간이 존재했지요. 13세기에 최초로 만들어진 시계가 우리 사회를 직접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예요. 왜 근대사회에서 시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여러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요.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시계는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산업사회가 등장하면서 예전과 판이하게 다른 노동이 이뤄지는데, 노동의 가치나 임금을 책정할 때 시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죠.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에 따르면 근대는 시간을 공간화한 문명이지요. 공간으로 바꾸지 않은 시간은 측정할 수가 없어요. 시간이란 본래 우리 마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지루하면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재미있으면 빨리 가고. 근대는 이러한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누구나 확인 가능한 객관화된 시간을 요구하게 됐지요. 그래서 시간의 공간화가 이뤄지고, 시계라는 시간을 측정하는 정밀한 기계가 중요한 사회적 도구가 된 것이죠. 정밀한 시간이 요구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노동량을 측정해야 하는 사회적 필요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해요.


김상협 >>> 시계에 익숙한 일상을 살다보니 시계가 없는 자연적 시간에 따른 삶을 상상하기가 힘들어요.


이정우 <<< 이제 인간은 자연에 따른 삶이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삶 속에 살게 됐어요. ‘불야성’이라는 말이 있듯 밤은 예전의 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어요. 이처럼 자연이 만든 마디가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만든 사회적 마디에 따라 살게 되면서 근대 이전과 전혀 다른 일상을 살게 됐지요.


시간표로 짜여진 학교라는 공간


김상협 >>> 시공간 주제가 조금 막연한데 구체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을 짚어 보는 것이 좋을 듯해요. 학교는 저 같은 청소년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지요. 하지만 이 공간 또한 시간표라는 꽉 짜인 시간적 규율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물론 다수의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시간의 규율을 우리는 지나치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사실 저는 지각을 잘 하거든요. 대부분의 학교에서 지각생들을 불성실한 학생으로 처벌하는데, 우스운 질문이지만 왜 지각하면 안 되는지 의문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이정우 <<< 시계가 생기면서부터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모두 시계를 통해 이뤄지게 됐어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 “달이 나무에 걸릴 때 만나자” 같은 식의 구절들이 종종 나와요. 그때만 해도 시간의 마디가 정확하지 않고 폭이 넓었어요. 그런데 시계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시계에 의해 결정되죠. 시계는 공간화된 위치를 정확히 가리켜요. 그만큼 사회생활의 시간적 간격은 조밀해지기 때문에 신체리듬이 이 근대적 시간체계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현대사회는 무척 피곤한 사회이지요. 우리의 삶 자체가 시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가령 3시 약속이라고 할 때, 3시는 하나의 점이잖아요. 폭이 없어요. 그래서 학생처럼 정밀한 시간의 마디에 정확하게 부합하지 못한다면 지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김상협 >>> 조선 후기만 보더라도 전형적인 농경사회를 살던 우리 농민들이 일본인이 세운 공장에서 일할 때 공장이라는 근대적 시간체계를 인식하지 못해 불화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정우 <<< 근대적인 시간체계는 서구적 맥락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동양의 시간적 관념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서양에는 이런 일화가 있어요.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대승한 웰링턴 장군에 대한 일화이지요. 웰링턴 장군은 자신과 약속한 시간에서 5분 늦은 사람을 혼냈는데, 다음번에는 5분 일찍 도착했는 데도 혼냈다고 해요. 이 일화는 웰링턴이 정확한 시간관념을 가진 위인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죠. 하지만 가치관에 따라서는 그가 매우 냉혹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정확성을 중시하는 것은 매우 서구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과연 다른 문명에서도 웰링턴 같은 시간관념이 그토록 긍정적이고 찬양의 대상이 되는지는 의문스러워요. 게다가 근대적 시간이라는 것이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 회의적이지요.


김상협 >>> 학생으로서 시간표라는 정해진 규범을 어기기는 어려워요.


이정우 <<< 맞아요. 우리가 이미 시스템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거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예컨대 버스요금이 부당하게 느껴진다고 나 혼자 적게 내고 버스를 탈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내가 느낀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다른 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해요. 홀로 시스템의 문제와 부딪친다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니에요. 지금 같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구성원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이들이 동일한 불만을 품는다고 해서 시스템이 변화하지는 않아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지에 대한 상당한 고민과 실천이 요구돼요. 한 번 틀이 짜여진 시스템은 간단히 바뀌지 않아요.


학교라는 근대적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김상협 >>> 선생님 말씀처럼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를 바꾸기는 간단하지 않은데, 학교라는 공간이 중요한 역할을 해서인 것 같아요. 학교 또한 매우 근대적인 공간이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잘 짜인 시간표라는 규율에 따라 생활하며 근대적 시간체계를 몸 속 깊이 받아들이잖아요. 이런 교육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시간체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의문을 품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정우 <<< 학교 이전에 좀 더 근본적인 요인으로 국가와 자본을 들 수 있겠지요. 학교·군대·병원·공장 등은 국가라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개 요소로 존재하며 그 시스템 안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어요. 자본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무엇보다 시간을 중시하지요. 항상 재벌들은 잠을 조금 잔다고 자랑해요. 이러한 시간관리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이에요. 우리 모두는 국가와 자본이라는 거대한 양식 속에 살고 있고, 그 양식 중에 하나가 학교예요. 학교를 통해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규율을 지키는 것이 몸에 배게 되지요. 하지만 학교가 그런 시간적 규율을 배제할 수는 없어요. 시간을 완벽하게 자율화한다면 학교가 성립할 수 없지요. 문제는 시간에 대한 시스템을 일방적으로 만들어 학생에게 부가한다는 데 있어요. 주물을 찍듯 모든 학생들이 그 시스템에 몸을 맞추게 되는 것이 근대적 공간의 한계이지요.


김상협 >>> 근대적 공간이 구성원들을 획일화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이정우 <<< 그렇죠.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몰적-분자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몰적 관점은 어떤 한 집단을 덩어리로 보죠. 한 가족·한 직장·한 국가…. 이런 식으로 한 집단을 덩어리로 묶으면 당연히 집단의 구성원들은 평균화되고 획일화되지요. 분자적 관점은 마치 하나인 것 같지만, 그 안에 무수한 분자들이 움직이는 것에 주목해요. 한 직장 안에도 각자의 기억과 욕망과 무의식과 상상을 가진 무수히 많은 고유한 인격체들이 존재해요. 몰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고유한 인격체, 즉 분자들이 무시되지요. 사회시스템은 그 속성상 개개인들의 고유함을 솎아 내고요. 그렇다고 그런 시스템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밀고 당기는 것, 다시 말해 개인의 고유함과 사회의 시스템이 서로 밀고 당기는 복잡한 관계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죠. 인생이란 몰적인 덩어리와 한 개인의 고유성이 부딪치고 싸우는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사이버공간, 진정한 해방공간인가?


김상협 >>> 최근 인터넷이라는 광범위한 공간이 생겨나면서 많은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어요. 학교·감옥·병원 같은 근대적 공간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면, 이 사이버공간은 구체적 틀이나 형식·규정된 성격이 존재하지 않아요. 특히 ucc 같은 기존에 없었던 매체를 통해 현실공간과 다른 독특한 성격의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정우 <<< 오늘날 인터넷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근대 이전까지 공간은 현실공간과 초월공간만이 존재했어요.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 공간이 초월공간에 해당돼요. 물론 초월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는 큰 논란거리이지요. 근대에 와서 새롭게 발견된 공간이 원자·세포·나노와 같은 ‘마이크로공간’이죠. 그리고 네 번째로 등장한 공간이 사이버공간이에요. 사이버공간은 현실적인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사이버공간에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한다는 점에서도 무척 흥미로워요. 이미 우리의 삶 속 깊숙이 사이버공간이 파고 들어왔기에 사이버공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죠.


김상협 >>> 선생님 말씀처럼 사이버공간의 탄생으로 시공간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어요. 사이버대학교 같은 무형의 교육공간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앞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간단한 병의 진단이나 치료도 가능해진다고 하잖아요. 인터넷을 통한 이러한 시공간의 해체 혹은 새로운 조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정우 <<< 시공간이란 인간의 삶의 조건이고, 시공간의 구조가 달라진다는 것은 삶의 조건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삶의 조건이 달라지면, 그 조건에 적응해 성공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갈라지지요. 예컨대 근대사회가 도래하면서 그것에 적응하는 사람들과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갈라졌고, 새로운 기술이 도래하면 역시 그 기술에 적응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의 삶이 갈려요. 새롭게 도래한 시공간의 조건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습득되면서 불평등을 최소화시키는 방안을 마련해야겠지요.


김상협 >>> 사이버공간이 탄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공간이라며 열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많은 폐해를 드러내고 있지만 여전히 대안적인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이정우 <<< 인터넷이 만들어진 동기를 살펴 볼 필요가 있어요. 일본에게 자동차산업이 밀리자 미국이 만든 것이 인터넷이지요. 즉 인터넷 또한 자본주의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인터넷을 구동하는 시스템이 모두 영어로 구성돼 사이버공간은 영어라는 막강한 헤게모니에 의해 지배돼요. 이 헤게모니는 현재 미국이 가진 패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지요. 인터넷공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공간으로 탄생하지 않았으며, 오늘날 ibm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막강한 자본의 힘에 좌우되는 곳이에요. 그래서 인터넷공간이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는 어려워요. 어쨌든 우리는 그것을 좋은 쪽으로 활용해야 해요.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는 “주어진 것을 선용善用하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어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구죠. 어떤 유래로 생겼든 피할 수 없으며,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해요. 인터넷공간이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해요.


국가와 자본의 바깥, 대안적 시공간


김상협 >>> 근대적 시간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시간은 금이다’가 아닐까 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인 시간 사용을 위해 시간관리 서적을 읽기도 하잖아요. 그런 반면 최근 느림 같은 삶의 태도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어요. 웰빙과 더불어 일시적인 트렌드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새로운 갈망이 근대적 시간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요?


이정우 <<< 삶에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는 듯해요. 필요하다는 것은 좋든 싫든 해야 하는 것들을 말하고 충분하다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좋은 삶이란 필요한 부분을 최소화하고 충분한 부분을 최대화하는 삶인 것 같아요. 웰빙이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우아하게 살자는 뜻인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바로 그것을 위해 또 다른 필요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하죠. 대표적인 것은 돈이 되겠죠. 결국 악순환을 이루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웰빙이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아요.


김상협 >>> 근대적 시공간 체계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잇따르고 있어요. 그러나 삶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체계로 자리 잡아 마치 우리의 신체의 일부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에 시공간의 변환은 불가능하게 느껴져요. 근대적 시공간 체계 속에서 자율과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정우 <<< 삶의 곳곳에 ‘오아시스’를 만들어야 해요. 지금은 국가와 자본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국가와 자본에 완벽하게 포섭된 상태이죠. 그러나 사고를 ‘외연extension’에 두기보다 ‘내포intension’에 둔다면 바깥이 존재하게 되지요. 외연적인 의미에서의 바깥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외연적으로 안인 곳에 내용상 바깥인 공간, 말하자면 오아시스들이 존재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장소들이 서로 ‘네트’를 이룬다면, 삶은 꼭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2. 욕망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들이 넘실거린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뚜렷한 요소들 중 하나는 욕망이다.

물론 욕망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이 시대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표현되는 구체적 양태들은 각 시대마다 달리 나타난다. 인간은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등의 양상들=‘modalities’(현실, 가능, 필연)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리고 각 양상들이 처하게 되는 시공간적 맥락들과 세 양상이 서로 간에 맺는 관계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해야 한다”의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신 “~하고 싶다”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욕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불황기를 맞아 더욱더 기형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 욕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인간이란 자신의 내부가 의지(意志)하는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욕망은 과연 누군가의 마음속에, 내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자신이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내면화한(자기의 내부로 받아들인) 결과들일 뿐이다.

사람들이 옷을 살 때 신경 쓰는 것은 그 옷이 내게 편할까 하는 것보다는 남이 이 옷을 입은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기를 쓰고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것도 실제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인정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할 때조차도 사람들은 타인들이 바라보는 자기 배우자의 모습을 통해서 그 결혼의 의미를 가늠하게 된다. 인간은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타인의 욕망을 가늠하는 잣대, 즉 자신이 욕망하는 타인의 욕망을 간파해내는 잣대는 타인의 눈길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통해서 자신을 판단한다. 그리고 타인의 눈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한 인간의 눈길 속에는 그 눈길이 향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 판단, 감정, 요구, ... 등이 모두 깃들어 있다. 그래서 타인의 눈길은 자신의 거울과도 같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판단하듯이, 타인의 눈길을 보고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판단한다. 자기가 바라보는 타인의 눈길에 비친 자기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타인의 눈길이란 반드시 물리적 눈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현존(現存)하지 않을 때에도, 즉 어떤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마주 대하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대접’은 곧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눈길이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표, 회사에서 받는 ‘대우’, ... 등등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적 대접/대우는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눈길이 모두 모여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다. 그 거대한 눈은 타인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눈이다. 우리는 그 거대한 눈을 ‘사회’라고 부른다.


이 보이지 않는 눈, 거대한 눈길은 어떤 이름에 응축된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명사이지만, 동물, 가구, ... 같은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일정한 자리를 함축하는 이름이다. 회사에서 계장, 과장, 부장, ... 같은 이름들은 타인들의 다른 눈길, 사회의 다른 대우를 함축하는 이름들이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이름을 욕망하게 된다. 예컨대 의사, 변호사, 사장, ... 같은 이름들은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이름들이다. 타인들은 이 이름들을 욕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들이 욕망하는 이 이름들을 욕망하게 된다. 어디에 가나,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이 이름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조선 시대에 사람들은 태어날 때 이미 이런 이름들을 가졌다. ‘李’, ‘金’, ‘朴’, ...등 이름(즉 성)은 이미 한 인간을 사회의 어떤 자리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이름들이 생겨났다. “~대학(출신)”, “~회사”, ... 등등. 이 수많은 이름-자리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거기에서 응축되는, 즉 타인들의 욕망이 응축되는 곳이고, 그래서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욕망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름-자리들은 일정한 체계를 구성한다. 소위, 중위, 대위, ... 같은 이름-자리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정한 유기적 체계를 구성한다. 체계를 구성하기에 눈길들로 기능한다.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각각이 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즉 하나의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그것의 자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단순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의 놀이를 함축하는 체계이기에 차라리 체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타인들의 눈길은 일정한 체제를 형성한다. 즉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무엇이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드는 것일까? 이런 이름-자리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왜 우리는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매우 어려운 물음이지만, 적어도 오늘날에 있어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두 권력은 국가장치와 자본주의이다. 국가장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20세기 중엽 맑시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학교, 군대, 공장, 병원, 회사, 종교단체, ... 같은 장치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 불렀다.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이 국가장치들 즉 대타자들(커다란 타자들) ― 자신과 구분되는 다른 것들은 타자들이다. 그런 타자들 중 국가장치들은 커다란 타자들이다 ― 에서 어떻게 소주체들(작은 주체들)로 길러지는가를 규명했다. 학교, 군대, ... 같은 대타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부를 때) ― “조국이 너를 부른다!” ― 우리는 그 대타자들이 길러내는 소주체가 된다.


국가장치와 더불어 쌍을 이루면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이다. 근대적 국가장치와 쌍둥이로 태어난 자본주의 체제는 오늘날 국가(‘국민국가’)와 복잡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얼핏 우리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는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등, 기존의 사회들과는 달리 결코 욕망을 부정하거나 누르려 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의 공기나 물과도 같다 해야 할 현대 문화를 창조해냈다.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발달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두 날개이다. 자본주의는 컴퓨터, 핸드폰, ... 같은 테크놀로지들과 스포츠, 연예, ... 같은 대중문화들을 양 날개로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욕망을 부추기고 조작해낼 뿐 긍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돈이 되는 욕망(대중의 욕망)만을 긍정한다. 자본주의는 대중의 욕망을 쥐어짜듯이 우려내 돈을 포획해 간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주의의 욕망은 대중의 욕망을 식민화해 우려 짜낸다. 천박한 욕망의 파도가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다.

전통 문화에서 천박한 욕망에의 저항은 대부분 욕망의 제어(유교)나 제거(불교)를 통해서 추구되었다. 우리말 ‘욕망’이 애초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면서 사용되는 것은 이런 문화적 전통의 영향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라는 고전적인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들에 대응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욕망에 저항하는 다른 욕망, 저항하는 욕망, 건강한 욕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배하려는 욕망과 천박한 욕망에 저항하는 위대한 욕망을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전자의 길을 우리는 ‘소요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길을 ‘투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이 두 길 사이에서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장영란 외, 『성과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철학적 성찰』, 서광사, 1999


플라톤으로부터 들뢰즈/가타리에 이르기까지 주요 철학자들이 생각한 성, 사랑, 욕망을 정리해 놓았다. 욕망 이론의 역사를 개괄하는 데 적격이다.


어빈, 『욕망의 발견』, 윤희기 옮김, 까치


욕망에 관련된 여러 논의들을 담고 있으며,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논하고 있다.


라캉, 『라캉의 욕망 이론』, 민승기 외 옮김, 문예출판사

박찬부, 『기호, 주체, 욕망』, 창비


라캉의 욕망 이론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을 이어받아 인간 주체성의 심층을 파헤치고 있다. 현대의 욕망 이론은 라캉으로부터 시작된다. 『기호, 주체, 욕망』은 라캉 이론에 관한 해설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 『안티오이디푸스』, 최명관 옮김, 민음사

가타리, 『욕망과 혁명』, 윤수종 옮김, 문화과학사


『안티오이디푸스』를 프로이트의 욕망 이론을 비판하면서 창조로서의 욕망 개념을 제시한 독창적인 저작이다. 『욕망과 혁명』은 들뢰즈와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던 가타리가 욕망과 혁명을 논한 저작. 『분자혁명』(윤수종 옮김, 푸른숲)을 또 다른 판본이다.


 

3. 동양/서양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흔히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말을 사용한다. ‘양(洋)’이라는 말은 바다, 그것도 매우 큰 바다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은 어떤 바다를 뜻하는 것일까? 이 ‘양’이라는 말은 차라리 “바다 건너”를 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은 정확히 어느 바다를 건넜을 때 만날 수 있는 곳일까?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우리가 ‘동양’과 ‘서양’을 이야기할 때, 이 ‘양’이라는 말에는 일정한 역사적 경험이 묻어 있는 듯하다. 즉 강화도 앞바다에 떠 있던, 멀리 서쪽에서 온 배들에 대한 경험 말이다. 일본인들에게 ‘흑선(黑船)’은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던가. 그 배들은 바다 건너 동쪽으로 왔겠기에 분명 ‘서쪽 바다’의 배들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에는 19세기 말에 동북아 사회가 겪었던 어떤 특수한 경험이 배어 있다.


이것은 ‘오리엔트(orient)’라는 말에는 바다의 뉘앙스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 말은 단지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해 뜨는 곳”을 뜻했을 뿐이다. 이 “해 뜨는 곳”이 처음에는 다름 아닌 그리스 근방을 가리켰다. 그리스(헬라스) 지역이 최초의 ‘오리엔트’였던 것이다. 로마인들의 지리적 지식이 확대될 때마다 이 말의 외연과 내포도 계속 바뀌어 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동양’과 ‘서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서양’이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실상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몇 개의 국민국가들일 뿐이다. ‘서양’이라고 말하면서 헝가리나 루마니아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동유럽은 분명 유럽이지만, 과연 우리가 ‘서양’을 말하면서 동유럽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그 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는 ‘동양’인가 ‘서양’인가. 서쪽의 유럽 아래에 있으니 ‘서양’일까. 하지만 아프리카를 ‘서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 남아메리카는 어떤가. 북쪽의 미국과 캐나다는 분명 ‘서양’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이 과연 ‘서양’으로 인식되고 있는가.


유라시아 대륙에만 이야기를 국한시켜도 마찬가지이다.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동북아, 동남아, 혹은 러시아 ― 이런 명칭들도 따져 봐야 하지만 일단 관례대로 쓰자 ― 이 모두를 합쳐 ‘아시아’라고, ‘동양’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일까. 중동 사람들과 우리의 어디가 비슷한가. 또 인도어(여러 가지이지만)는 서구어와 가깝지 한자와는 전혀 가깝지 않다. 나아가 러시아는 서양일까 아니면 동양일까. 중앙아시아를 휩쓸며 지나갔던 그 수많은 인종들이 모두 ‘아시아인’일까.


생각해 보면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이분법에 기초해 여러 주장들을 펴곤 한다. “동양은 정신적, 서양은 물질적”이라든가, “서양 철학은 정신-물질 이원론이지만 동양 철학은 일원론”이라든가, “동양은 직관, 서양은 분석”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사실상 부분적인 지식들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런 이분법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뿌리를 내리고 무수한 가지들을 뻗고 있다.


이런 단순화된 생각들이 범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동과 서’라는 이분법이 왜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이란 늘 타인들을 바라보는 눈길=시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눈길 없이는 사물들을 바라볼 수 없다. 인간이란 자신의 눈길로 타인들을 구성해서 바라보는 존재이다.


이때의 눈길이란 신체의 눈길이 아니라 개념의 눈길을 말한다. 고유명사, 이름-자리(예컨대 ‘과장’이라는 이름과 그 자리), 범주(예컨대 ‘군인’, ‘사업가’, ...등), 규정들(예컨대 “의사들은 ...하다”), ... 등의 추상적 틀을 타자에게 투영해서 그 타자를 ‘구성’해서 보는 존재가 인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이런 비물질적 틀이 전제되지 않는 순수한 눈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이런 개념적-가치론적 틀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렇게 일정한 개념적 틀을 가지고서 타자를 구성해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는 사물을 “표상(表象)한다”고 할 수 있다.(철학자들에 따라서는 ‘표상’이라는 말을 다소 다르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표상된 대상이란 일정한 개념 틀로 구성된 타자로서, 타자에 대한 (추상적 수준에서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는 이렇게 사람들의 눈길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들이 각인되어 있다.


‘동양’이란 ‘서양’의, 더 정확히 말해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 ‘동양’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꼭 ‘서양’인 것만은 아니다. ‘동양’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고 표상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양’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표상이다. 즉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서 어떤 지역, 사람들, 문화를 표상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거기에는 ‘동양’에 대한 표상, ‘동양’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이 표상되면 그것에 맞세워져서 ‘서양’도 표상된다. (‘동양’과 ‘서양’ 같은 식의) 대립적 규정은 언제나 맞물려 성립하는 것이다.


‘동양’을 표상하는, 즉 ‘동양’이라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그 표상의 주체가 누구이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서양’이라는 것을 표상하는, 즉 ‘서양’이라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그 표상의 주체가 누구이건, ‘옥시덴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그런 표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뇌리를 깊숙이 지배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옥시덴탈리즘의 한 요소로서 전통보다 발전을 중시하는, 즉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든다. 그러나 ‘서양’의 한 전형인(말했듯이 ‘동양’, ‘서양’은 극히 모호한 개념이지만) 프랑스의 리용을 가보면 전통에의 애착과 보존은 정말이지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그에 비해 ‘동양’의 한 전형인 한국의 서울, 또는 다른 도시들은 어떤가? 거기에 도대체 무슨 ‘동양의 신비’, ‘정신문화’가 있는가? 천민자본주의의 물결만이 휩쓸고 다니지 않는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 옥시덴탈리즘의 이미지는 인식주체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허구적 이미지일 뿐이다.


사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일정하게 고정된 표상/이미지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끝없이 변해 가는 표상/이미지이다. 마르코 폴로 시대의 중국의 이미지와 아편 전쟁 이후의 이미지, 최근의 이미지, ... 등은 매우 다르다. ‘서양’에 대한 이미지 또한 시대에 따라 현격하게 달라진다.


보다 좁은 맥락에서의 오리엔탈리즘, 즉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은 특히 19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를 거쳐 변형되어 온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오리엔탈리즘은 곧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국민국가들이 다른 지역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지식들, 언어들, 기록들, 보고서들, 사진들, 기획들, ... 등 요컨대 표상/이미지의 총체가 오리엔탈리즘이다.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은 19세기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지배 전략의 한 요소인 것이다. 이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은 근본에서부터 해체되어야 할 제국주의의 유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런 해체가 또 다른 ‘우리’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역사의 지루하고 불행한 반복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못지않게 옥시덴탈리즘도 허구이기 때문이다. 모든 거대한 표상/이미지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식주체들 즉 ‘우리’들을 전제한다. 그리고 모든 ‘우리’들에는 암암리에 타자들을 바라보는 일방적인 시선들이 함축된다. ‘우리’가 가지는(그 ‘우리’가 어떤 ‘우리’이든) 허구적인 눈길들을 끝없이 해체시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사이드의 이 저작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을 널리 퍼뜨린 저작이다. 푸코의 지식고고학을 기반으로 삼아 서구가 어떻게 ‘동양(orient)’이라는 이미지를 표상해 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


서구 중심주의와 그것을 내면화한 한국인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옥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푸른역사


인도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다루고 있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 옮김, 이산


일본에서 활동 중인 학자의 시선으로 본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점들이 다루어져 있다.



 

4. 의미


“아빠, 저거 뭐야?”라고 아이가 물으면 아빠는 “응, 저건 고양이야” 하고 대답해 준다. 세 살짜리 딸이 앙증맞은 손으로 사물들을 가리키면서 물으면, 아빠는 그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를 딸에게 말해 준다.

그러나 아빠가 딸이 원하는 대답을 한 것이 아니다. 딸은 자기 눈에 나타난 신기한 어떤 사물에 대해, 그 사물이 자신에게 던지는 원초적 의미를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호기심 찬 물음에 아빠는 단 하나의 기호로 맥 빠진 답을 준다. 그래서 아이에게 사물들은 어떤 기호로 대체될 수 있는 무엇으로서 나타난다.


때로 아이는 그림책이나 tv의 영상으로 표현된 사물들을 보고서 묻는다. 그러면 어른은 그 사물들을 가리키는 기호를 말해 주곤 한다. 그림이나 영상은 본래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들이다. 아이는 기호에 대해 묻고 어른은 다시 그 기호의 기호를 말해 준다.


우리는 의미라는 것을 이렇게 배운다. 사물들은 기호들로 표기되고 기호들은 사물들을 지시(指示)한다. 아이들은 그 지시 관계를 배움으로써 사물들과 기호들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사물들을 기호들로 대치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사물과 기호, 기호와 기호는 거울 놀이를 통해서 관계를 부여받는다. 기호라는 거울은 사물을 비추어 그것을 대체하는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고, 또 기호가 기호를 비추어 다시 상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계속되는 거울 놀이를 통해서 지시의 복잡한 관계망이 형성된다.


이 관계망 속에서 기호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된다. 즉 기호(sign)는 ‘의미작용=기호작용(signification)’을 하게 된다. 기호작용이 없다면 아빠의 입에서 나온 ‘고양이’라는 소리는 그냥 물리적 음파에 불과할 것이다. 기호작용이 없다면 선생이 칠판에 쓴 ‘금강산’이라는 형태는 녹색의 나무판에 묻은 백묵가루일 뿐일 것이다. 기호작용이라는 것이 있기에 아빠 입에서 나오는 소리, 선생이 칠판에 묻힌 백묵가루는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의미라는 것을 이렇게 배운다. 이토록 빈약하고 맥 빠진 방식으로. 무미건조한 거울 놀이를 통해서. 그래서 우리는 사물들을 기호들로 대체하는 법을 배우고, 사물들과의 직접 만남보다는 기호들의 조작을 더 선호하게 되며, 기호계(記號系) 속에, 기호들의 체계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아예 문화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으로서 존립할 수조차 없다. 일정한 기호계 바깥으로 버려진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폴리스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로 정의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이런 기호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 사회 속에 들어가고 하나의 인간, 하나의 주체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곧 기호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기호체계는 마치 자연법칙처럼 애초에 주어진 그 무엇으로서 다가온다. 고양이가 ‘개’로 불리고 개가 ‘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기호의 체계는 자의적이다. 지금 ‘고양이’로 불리는 것이 ‘개’로 불리고 ‘개’로 불리는 것이 ‘고양이’로 불려서는 안 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개-고양이이든 고양이-개이든 둘이 구분되는 한에서 기호체계는 작동한다. 현대 사상의 용어로 다시 말한다면 두 항이 ‘변별(辨別)’되면 되는 것이다. 기호들의 체계란 이렇게 자의적인 체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호들의 체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이 기호들이 세계 없이도, 사물들 없이도 존재하는 자족적인, 자폐적인 체계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기호 하나하나는 자의적일지라도 기호 전체는 사물들 없이는 의미를 상실하는, 세계를 전제해서만 존립하는 전체이다.


기존의 기호체계의 자의성과 빈약함에 처음으로 눈뜰 때가 우리가 ‘의미’라는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될 때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기호체계의 한계에 부딪쳐서 ‘의미’라는 존재에 처음으로 맞닥뜨릴 때, 의미에 눈뜨고 새로운 눈으로 그것과 마주 서게 되었을 때, 의미라는 이 기이한 존재, 모든 문화적 활동, 인간적 활동의 밑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존립시켜 주던 문화 전체, 사회 전체에 근본적인 새로운 시선을 던지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그가 ‘사유’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이다. 사유는 단순한 배움이나 정보획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문화적 향유의 밑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미라는 존재를 의식하게 될 때 탄생한다.


따라서 사유는 반드시 고급한 사상가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는 똑같은 하나의 사물이 두 개의 기호로 지시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혼란을 느낀다. 의미라는 존재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기호들의 작동 방식, 의미가 산출되는 과정, 사물과 기호의 관계, 기호체계의 자의성, ... 등에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문화의 근거인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이 곧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과학과 예술은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고 또 새롭게 창조해내는 대표적인 활동들이다. 과학은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들을 계속 산출해낸다. 파스칼의 등산 경험은 ‘대기압’ 개념을 낳았고, 흑체(黑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은 양자역학을 낳았다. 과학자들은 평소에는 과학사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기호체계를 가지고서 사유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만났을 때 기존의 기호체계를 변경시킬 필요를 느끼게 된다. 새로운 경험은 더 이상 기존의 그물=기호체계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가들의 노력 또한 기존의 기호체계를 벗어던지고 사물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표상하는 각종의 성과들을 산출해 왔다. 재현의 회화에서 화가들은 사물들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 노력했으나, 현대의 화가들은 사물들이 내포하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들을 포착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 다채로운 새로운 회화들을 창조해내기에 이른다. 회화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기호체계라 할 때, 사물들과 기호체계가 맺는 관계는 현대 회화를 통해서 크게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윤리 또는 정치에 관련된 사건들에 있어서이다. 사건들은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건들은 그 높이의 상대성에 따라 사건으로 솟아오르기도 하고 또 그 솟아오른 사건의 배경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이 높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사건들로 온전히 채워져 있다고 볼 수 있고, 생성(生成)에 마디들이 존재하는 그만큼 사건들이 출렁거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 중 각별히 윤리적 또는 정치적 맥락을 띠고 있는 사건들이 특히 우리의 ‘현실’을 채우고 있다. 이 사건들은 의미, 감성, 가치, 이데올로기, 갈등, 해석 등등 무수한 측면들을 압축하고 있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도 고립적으로는 의미를 띠지 않는다. 사건들은 항상 일정하게 계열화됨으로써만 의미를 띠게 된다. 이런 계열화는 하나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건의 계열화를 둘러싸고서, 즉 의미를 둘러싸고서 갖가지 형태의 욕망과 권력의 놀이가, 해석들 간의 갈등이, 사상적 투쟁들이 벌어지게 된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이 의미를 둘러싼 논의들을 학문적 수준에서 담당하기 위한 과학이다.(과학은 메커니즘을 탐구하지만, 인문학은 의미를 탐구한다)


사건의 계열화는 적지 않은 경우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자의적 구성은 여러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때로 이런 자의적 구성이 항구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기도 한다. 사건의 계열화는 실재(reality)에 의거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런 구성은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이란 진리와 달리 어떤 알기 힘든 차원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알 수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또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실재/현실과 관련해 의미를 구성해내는 행위이다.

사건들을 계열화해 의미를 읽어내는 다양한 방식들을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그 한계를 끝없이 초극해 가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철학은 직접적 의미 해독보다는 의미를 해독하는 방식들 자체를 메타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실재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을 닦는다.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의미의 문제를 다룬 들뢰즈의 대표적인 저작. 구조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의미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유를 전개한 독창적인 저작이다.


이정우, 『사건의 철학』, 철학아카데미


사건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건으로부터 의미가 생성하는가, 삶과 죽음 운명은 사건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띠는가 등의 문제를 후기구조주의 사유를 근간으로 펼치고 있다.


이즈쓰 도시히코, 『의미의 깊이』, 이종철 옮김, 민음사


불교를 비롯한 동북아 사상 전통에 근간한 의미론서. 데리다에서의 ‘에크리튀르’의 개념, 이슬람 사상에서의 의미론도 함께 다루어져 있다. 다양한 철학 전통들을 의미론적 각도에서 해명해 주고 있다.


 

 5. 기억  


모든 사물들은 각각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렁이는 땅속을 들어갈 수 있지만 하늘을 날 수는 없다. 물고기는 바다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지만 뭍에 올라오면 맥을 추지 못한다. 사물들, 특히 동물들 각각에게는 나름의 독특한 능력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도 일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인간의 능력은 놀라운 구석이 있어서 일정하게 닫혀 있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들로 계속 열려 간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하겠다. 기계들을 발명하는 능력을 비롯해 사물들을 인식하는 능력, 윤리적-미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 ...등 다양한 능력들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특징짓는다.


인간의 이런 능력들은 대개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신’이라는 것을, 또는 영혼, 마음, 의식, ...등 무엇으로 부르든 정신에 상당하는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하다. 인간의 이런 정신적 능력들을 철학에서는 ‘인성(人性)’이라고 부른다. 불교나 성리학(性理學)이 인성론을 집요하게 파헤친 담론들이며, 서구 근대 철학(영국 경험론, 독일 관념론 등) 역시 ‘인성’을 집요하게 다룬 바 있다.


오늘날 인성을 논할 때 사용하는 개념들은 예부터 내려온 개념들도 있으나 대개 서구 근대 철학에서 유래하는 개념들을 불교 및 성리학의 용어들을 활용해 번역한 개념들이다. 감각, 지각, 상상, 기억, 감정, 판단, 오성, 이성, ...등이 대표적인 개념들이다.


이런 개념들에 관한 논의들이 ‘인성론(人性論)’을 구성하거니와, 이렇게 인성을 논할 때 결코 뺄 수 없는 핵심 개념들 중 하나가 기억이다. 기억이라는 개념은 인간이라는 존재, 나아가 생명이라는 존재를 해명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기억이라는 존재는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띤다. 시간은 늘 생성과 소멸을 가져온다. 우주는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해간다. 현대의 생성존재론과 자연과학이 가르쳐 주었듯이, 견고해 보이는 사물들의 내부에서도 무수한 입자들의 복잡한 생성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생명체들은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늙어 감을 겪고 죽는다. 이 우주에서는 단 한 순간도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다.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 진리는, 적어도 진리들 중 하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시간의 작용을 전혀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버린다.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지 않을까?

시간이 끝없는 생성과 소멸만을 가져온다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지속되는 것, 반복되는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찰나의 생성만이 존재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기억의 작용이 존재하기에 지속과 반복이 존재한다.


기억의 작용은 생명을 낳았다. 생명을 통해 갖가지의 존재들(각종 개체들, 색깔, 모양, ... 같은 성질들, 무수한 사건들, ...)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이 우주에서 지속되거나 반복된다. 이런 지속과 반복이 아니라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채송화가 채송화를 낳고, 철수가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식을 낳지 않는다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사랑, 미움, 배반, 만남, 싸움, 질시, 태어남과 죽음, ...등의 사건들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기억은 정신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전혀 다른 차원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단지 기억의 ‘용량’이 커진다거나,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다거나(예컨대 우리는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에 저장해 놓았다가 꺼내 쓰곤 한다), 기억 내용들을 편집까지 할 수 있다거나(예컨대 우리는 마음속의 기억 내용들에 ‘상상’을 가한다) 하는 것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기억을 활용함으로써 각종의 창작 행위를 하는 것(예컨대 기억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조차도 아니다.


정신 수준에서의 기억이 가져온 심대한 결과는 한 인간의 주체성, 정체성, 내면을 가능케 한 것이며, 사실상 이런 차원들이 전제되어야 방금 열거한 기능들도 가능하다 해야 할 것이다.


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가능케 한다. 한 인간이 겪은 사건들은 기억의 형태로 쌓이며, 그렇게 쌓인 독특한 사건-계열들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한 인간의 고유한 내면을 형성한다. 한 인간의 동일성과 정체성은 다르다. 동일성은 형식적 구조이며 죽어버린 논리적 같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체성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시간 속에서 변해가면서도 시간이 가져오는 차이들을 보듬으면서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갈 때 성립한다. 정체성은 시간의 와류(渦流)에 떠밀려가면서도 기억과 반복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성립한다.


기억이 인간에게 이토록 소중한 것임에도 현대 철학자들(예컨대 푸코, 들뢰즈 등)은 기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반(反)기억(counter-memory)’을 이야기한다. 왜일까? 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해 오토모 가츠히로가 총감독한 애니메이션 「메모리스」(1997)를 생각해 보자. 3부로 구성된 이 애니메이션은 제목 그대로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각각 과거의 기억, 현재의 기억, 미래의 기억을 다룬다.


과거의 기억을 다룬 첫 번째 편은 우주를 항해하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떤 게인 날」(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아리아)을 듣고서 그곳을 찾아가는 우주항해사들이 겪는 환상적인 일을 그리고 있다. 두 번째 편은 어떤 임무를 부여받은 한 평범한 회사원이 중간에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끝까지 임무를 완성하는 과정을 코믹 터치로 그리고 있다. 세 번째 편은 한 마을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항시적인 ‘전시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첫 번째 편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서 그 그림자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한 오페라 가수의 집념을 담고 있는 마그네틱 기억장치를 그린 것으로서,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해 그것이 집념과 강박관념으로 화했을 때 나타나는 광기어린 환상들을 그린 것이다. 두 번째 편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곧이곧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한 사람의 코믹한 모습을 통해서 상황들이 가져오는 차이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뇌에 각인되어 있는 어떤 기억만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희비극적인 가를 그리고 있다. 세 번째 편은 ‘미래의 기억’이라는 독창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며,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으로서의 기억이 사람들을 온통 그 예상=기억에 휩싸여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여기에서 그런 예상=기억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거대한 권력이다)


현대의 어떤 철학자들이 기억을 비판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이 늘 강박관념과 동일성의 지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 차이의 도래, 상황의 변화 등을 수용하면서 살아가기보다 과거의 또는 현재, 미래의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 그런 삶이 가져오는 강박관념과 집착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동일성을 비판하고 차이의 철학을 전개한 인물들이 제시하는 기억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동일성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기억의 가벼운 망각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기억에는 개인의 기억만이 아니라 집단의 기억도 존재하며, 집단의 기억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역사에는 늘 부조리한 기억들, 비극적인 기억들, 피에 맺힌 기억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기억들을 망각한다면, 역사 속에서 부조리한, 비극적인, 참혹한 사건들은 다시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그런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현대만 이야기한다 해도 일제 시대의 정신대나 마루타에서부터 친일 인사들의 행적들, 남북의 비극적인 대립, 자유당 정권 시절의 비극들, 군사 정권들에서 벌어진 그 숱한 조리, 고문, 학살,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어두운, 피에 맺힌 사건들이 한국사의 기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비극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다시 겹겹이 쌓인 부조리와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기억들, 반드시 청산해야 하는 기억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물질과 기억』은 기억에 관한 대표적인 철학서로서 베르그송의 심신론(心身論)이 전개되어 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2장에서 베르그송의 사유를 발전시키고 있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기억에 대한 심리학적/정신분석학적 연구서. 융의 자서전으로서 기억의 문제를 무의식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계기를 제공해 준다.


오카 마리, 『기억 서사』, 김병구 옮김, 소명


기억의 문제를 사건 및 서사(narrative)에 연관시켜 논하고 있는 책. 폭력적 사건에의 기억과 서사의 문제를 연결시켜 논하고 있다.


이계황 외, 『기억의 전쟁』,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기억의 문제를 역사와 연계시켜 논하고 있는 책. 한국과 일본의 ‘기억 전쟁’을 다루고 있다.



6. 코드


조선 시대에는 가족이 아닌 한 남녀가 동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원리로 작동했다. 아니, 사실상 이 원리는 일방적인 원리였다고 해야 하리라. 남성의 경우 기생을 비롯한 다른 여성들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으나,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은 화장실이나 결혼식장 등을 비롯한 특수한 장소들이 아닌 한 더 이상 ‘유별’하지 않다. 극장에서, 운동장에서, 강의실에서 남과 여는 서로 섞여 문화를 향유한다. 1980년대만 해도 여학생이 교내에서 담배를 핀다고 뺨을 때린 남학생이 있었다. 지금 그런 남학생이 있다면 그 남학생이야말로 뺨을 맞게 될 것 같다.


무엇이 변한 것일까? 무엇이 변해서 삶의 양태가 이렇게 달라졌는가? 물리적-생물학적 변화인가? 물론 아니다. 예컨대 조선 시대 사람들의 dna가 지금의 우리 dna와 크게 달랐을 리가 없다. 외형이 변했는가? 물론 적지 않게 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삶의 양태를 이렇게 크게 바꾸어 놓았을 리는 없다. 변화한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 즉 추상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는 그 무엇인가가 (눈에 당장 보이는) 삶의 양태들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무엇, 그러면서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이 무엇은 무엇일까? 야구장에서 우리는 선수들, 심판들, 중계인들, 관중들, ...을 만난다. 그리고 배트들, 글러브들, 공들, ... 같은 기구들이나 조명 등을 비롯한 장치들을 만난다. 그리고 사건들이 벌어진다. 홈런이 터지고 아웃을 당하고 이닝이 바뀐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또 하나 핵심적인 것이 있다. 분명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야구 경기가 성립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우리의 경험을 지배하는 것을 우리는 관습이라든가 규범, 규칙, ... 등으로 부른다. 제사를 지낼 때 과일을 앞쪽에 놓는다든가, 물고기는 동쪽으로 놓는다든가 하는 것을 비롯해, 관습을 비롯한 이 비가시적(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없다면 ‘사회’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비가시적인 존재, 그러나 가시적인 삶을 지배하는 존재, 이것을 언제인가부터 ‘코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늘날 ‘코드’는 일상어가 되었다. “너하고는 코드가 달라 이야기를 못 하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지 않는가. 현 정권 초기에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만 쓴다”는 기사를 자주 내보냈다. 코드란 무엇일까? 어떤 맥락에서 코드라는 개념은 오늘날 중요한 위상을 획득하게 되었는가?


‘코드’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은 ‘구조주의’라는 사조가 연구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무의식적 구조’,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 ‘차이들의 놀이’, ‘변별적 차이’, ‘담론’, ... 같은 말들이 새로운 학술 용어들로서 도입되고, 때로는 일상 언어로까지 확대된 것은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의 도입과 더불어서 이다. 처음에는 주로 언어학에서 사용되던 코드라는 말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거쳐 구조주의 사유 일반으로 퍼지면서 보다 일반적인 의미 내용을 담게 되었다.


코드는 사물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규칙, 특히 무의식적 규칙이다. 여기에서 ‘무의식’이라는 말은 그러한 규칙이 인간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규칙이라기보다는 자연적으로(더 정확히 말해, 자연과 문화의 경계선상에서) 만들어졌으며 그래서 우리의 삶을 심층에서 지배하는 규칙이라는 뜻이다. 마치 태양과 지구가 물리학 법칙에 따라 관계 맺고 운동하듯이, 무의식적 구조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들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학위논문에서 빼어나게 분석했던 ‘친족체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친족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지 그것 자체를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친족체계는 우리 문화의 무의식적 구조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친족체계만이 아니라 문화의 모든 측면들(식사법, 건축술, 신화, 놀이, ...)에서 이런 무의식적 구조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것은 사상사적으로 말하면 주체성과 자유에 강한 무게중심을 두는 근대적 사유에 대한, 즉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와 오만에 대한 ‘탈근대적’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에 대한 지나친 경도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보수주의를 함축하게 된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코드들이 자연법칙처럼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상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 아닐까? 친족체계조차도, 물론 기본적인 부분은 자연적이라 해야겠지만, 예컨대 주(周) 왕조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층의 일종의 지배 전략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의 코드들을 무의식적인 것으로,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코드들 아래에 깔려 있는 “욕망과 권력의 놀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계보학’을 통해서 코드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일구어내야 하지 않을까. 즉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코드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며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현재의 비판적 존재론’(푸코)으로서의 계보학이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감옥을 생각해 보자. 근대 이전에 감옥이란 형벌을 가하기 위해 잠깐 기다리는 ‘대기소’였지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가진 곳은 아니었다. 형벌이란 기본적으로 공개 처형이었으며, 감옥이란 재판을 받거나 처형을 당하기 위해 죄인들을 잠시 가두어두는 곳이었다. 그러나 근대 휴머니즘이 도래하면서 감옥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체형(體刑)’이 금지되면서 이제 형벌 자체가 죄인을 감옥에 얼마동안 가두어둘 것인가의 문제로 변한 것이다. 이제 형벌은 감옥에 가두어 두는 시간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감옥은 그 자체 형벌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처형 장면을 보지 못한다. 그저 영화 등 영상장치들을 통해서 볼 뿐 처형 장면은 이제 시민들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감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또 정신병원은? 삶의 어두운 부분들은 모두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다. tv를 보고 있으면 마치 우리는 낙원에서 살고 있는 듯이 착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감옥의 ‘코드’를 바꾼 것은 무의식적 구조도 아니고 자연법칙 같은 법칙도 아니다. 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짬으로써 코드가 바뀐 것뿐이다. 휴머니즘의 도래를 통해 인권이 강화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코드의 수립을 통해 지배의 전략이 바뀐 것뿐이다. 우리는 코드 아래에 깔려 있는 정치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코드 개념은 원래 삶을 지배하는 어떤 보편적인 법칙을 추구하려는,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연구나 인류학의 미개사회 연구를 비롯한 과학적 맥락에서 성립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에서의 ‘코드’ 개념은 오히려 다원화 사회, 상대주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즉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코드라는 개념에는 무수한 부분들로 쪼개진 사회집단들, 그들이 사용하는 (남들은 알아듣기 힘든) 용어들, 사고의 차이들, 소통의 부재, ... 같은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코드 개념은 어떤 일반적인 무의식적 법칙의 의미보다는 숱한 집단들의 동일성(또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사고 패턴들, 용어들, 정치적 입장들, ... 등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코드가 다르다”는 말은 곧 “말이 안 통한다”와 거의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드는 달라도 대화는 해야 한다. 코드의 문을 닫기보다는 다른 코드들과 끝없이 대화함으로써 자기 코드의 울타리를 깨는 것, 고립된 섬과도 같은 코드 속에 갇히기보다는 섬과 섬 사이로 나아가 자(自)와 타(他)를 함께 바라보는 것, 사람과 사람의 건강한 관계는 바로 이렇게 코드와 코드 ‘사이’에서 사유하고 행위하려 할 때 시작된다.


  

7. 차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다. 플라톤이 존재, 운동, 정지와 더불어 같음과 다름을 가장 큰(보편적인) 개념으로 제시했을 정도로 다름=차이는 우리의 사물 이해를 틀 짓는 근본적인 범주인 것이다.


현대 사상에서도 차이는 핵심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며, 이것은 곧 현대사회, 현대문화에서 차이 범주가 핵심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사상이란 늘 당대의 현실과 맞물려 진행되기에 말이다. 그러나 차이에는 매우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이 함축되어 있으며, 그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차이에 대한 논의들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다. 차이의 여러 가지 의미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흔히 두 사물, 또는 여러 사물들을 고정시켜 놓고서 그 사물들이 인식주체인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들에서의 차이를 논한다. 예컨대 우리는 이 탁자와 저 의자를 놓고서 그 모양, 색깔, 감촉, 기능, ...등에서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좀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한 국가와 다른 국가의 차이(예컨대 일본과 중국), 한 담론과 다른 담론의 차이(예컨대 물리학과 생물학), 한 작품과 다른 작품의 차이(예컨대 운명 교향곡과 미완성 교향곡), ...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우리가 차이를 이야기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차이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그 아래에 일정한 존재론을, 즉 세계를 보는 근본적인 방식을 깔고 있다. 차이에 대한 이런 식의 논의는 바로 실체-성질 존재론을 깔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세계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체들과 “실체들에 부수해서 존재하는” 성질들로 나누어 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존재론은 우리의 일상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존재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체-성질 존재론은 언어적으로는 주어-술어 구조에 해당한다. 저 책상과 이 의자, ...등은 실체들이다. 책상과 의자의 색깔, 모양, 감촉, ...등은 성질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상은 노랗다”, “저 의자는 둥그렇다”고 말한다.


물론 존재론에는 이 실체-성질 존재론 외에도 여러 형태들에 있다. 세계를 입자들의 합성과 분해로 보는 존재론, 에네르기, 생명, 氣 등의 연속적 흐름으로 보는 존재론, ...등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발견/발명해낸 다양한 존재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언어가 전제하는 존재론은 실체-성질 존재론이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면서 살아가는 세계는 바로 실체-성질 존재론을 통해서 이해되는 세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차이’라는 개념에 대한 일차적인 이해도 이런 존재론에 입각해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의 경우에도 이 존재론에 입각한 논의를 펼치는 전통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에 이르는, 나아가 현상학(現象學)에까지 이르는 일정한 흐름이 이 존재론에 입각한 사유를 펼쳤다.


차이의 개념이 이렇게 철학의 역사, 나아가 사유의 역사 일반에서 늘 문제가 되어 오긴 했으나,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이 개념이 새로운 맥락을 획득하게 된 것은 구조주의의 등장 및 신좌파 정치철학의 등장과 더불어서이다.


언어학적 맥락에서, 구조주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소쉬르는 자신이 전개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차이’라고 말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따르면 기호와 사물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앉는데 쓰는 가구가 꼭 ‘의자’이고 물건을 올려놓는데 쓰는 가구가 꼭 ‘탁자’일 이유는 없다. 전자를 탁자라고 부르고 후자를 의자라고 불러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빨간 불일 때 서고 파란 풀일 때 가는 교통체계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빨간 불일 때 가고 파란 불일 때 서는 기호체계이면 안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말과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인/임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자’와 ‘탁자’의 차이이고, ‘빨간 불’과 ‘파란 불’의 차이이다. 의미는 기호에 내재해 있지 않다. 의미는 기호와 기호의 사이에서, 그 차이를 통해서 성립한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다시 말해 변별적인(differential) 관계야말로 의미 성립의 비밀인 것이다.


말과 사물 사이의 자의적/임의적 관계, 그리고 변별적인 관계를 통한 의미 생성이라는 사유는 그 후 사회와 문화의 분석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토테미즘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은 그 한 예이다. 한 부족이 늑대를 토템으로 하고, 다른 부족이 양을 토템으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자의 부족이 후자의 부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한 부족이 흰 곰을 토템으로 하고, 다른 부족이 검은 곰을 토템으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자의 부족은 희고 후자의 부족은 검은 것이 아니다. 거꾸로 되어도 토템체계에는 변화가 없다. 토템은 심리적인 것도, 기능적인 것도, 또 신비한 것도 아니다. 다만 구조적인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변별적 관계이며, 문화란 변별적 관계의 체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에는 그 한계가 극복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를 형성하고 있다.


차이 개념의 또 하나의 맥락은 1968년 ‘5월 혁명’을 전후해서 배태된 새로운 정치사상, 이른바 ‘신좌파’ 정치사상의 맥락이다.


19세기에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이 양분된 이래로 정치사상은 이 양분법을 깔고서 한 세기 동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1968년을 분기점으로 세계사의 새로운 흐름이 도래하기에 이른다. 이는 1945년 이후 형성된 ‘전후(戰後) 질서’에 대한 대중들의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도래하게 된다. 주로 선진국에서 진행된 이 새로운 운동들은 현대 정치사상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간단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경우 1987년 이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의 5월 혁명은 전후의 드골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서 전개되었으며, 정권을 바꾸었을 정도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의 고전’으로서 읽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를 비롯해 많은 사상가들이 이 5월 혁명의 영향을 받는다.(프랑스어로 ‘68동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이다)


아울러 독일, 미국 등에서도 유사한 성격의 운동이 진행되었다.(미국의 경우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 및 케네디 암살 이후의 미국 정세가 배경으로 작용한다) 일본의 경우에도 전후의 부흥이 낳은 숱한 모순들이 격화되면서 ‘적군파(赤軍派)’가 등장하고 (일본 관료들의 산실인) 동경대학이 초토화될 정도의 격렬한 운동이 전개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 권에서도 ‘프라하의 봄’으로 대표되는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동시에 저항 운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자유/자본주의냐 사회/공산주의냐 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하던 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이제 사람들은 이 양자택일을 넘어서 두 체제가 공히 함축하는 모순들에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한국의 경우로 말해서, 박정희냐 김일성이냐가 아니라 이 두 체제가 공히 함축하는,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암암리에 상부상조하는 보다 심층적인 체제적 모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제 사람들은 어떤 지배체제냐가 아니라 지배체제 자체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현대적 의미에서의 ‘대중’이 탄생하게 된다. 인민/민중이 아니라 대중/다중이 탄생한 것이다.

특기할 것은 이런 운동들의 주체가 대체적으로 농민, 노동자들보다는 학생들, 지식계층들이었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주체였던 시기가 지나가고 지식계층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오늘날에는 지식계층이 자본주의에 흡수됨으로써 과거의 저항력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아울러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 동성애자들, 청소년들, ...의 운동들이 도래하면서 이제 사회 운동은 과거와는 성격이 상당히 다른 무엇이 되었다. 이른바 ‘다원화 사회’, 윤리-정치적으로는 ‘타자들’의 시대, ‘소수자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다원화란 곧 차이의 증식을 함축한다. 이제 오늘날의 사회사상은 이런 차이들을 인정한 상태에서 어떻게 사회변혁의 힘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사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 차이이든, 구조주의의 차이이든, 신좌파 정치사상에서의 차이이든, 이런 차이들이 전제하는 동일성이 존재한다. 이 모든 차이들은 항상 무엇과 무엇“의 차이”이다. 책상과 의자의 차이, 기호들의 차이, 집단들의 차이 등은 모두 무엇과 무엇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 개념은 항상 이 ‘무엇’들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책상과 의자의 차이”라고 말할 때, 책상 자체는 그리고 의자 자체는 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책상과 의자의 차이를 이야기하려는 순간 책상과 의자가 계속 변한다면 차이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손과 들뢰즈가 보다 급진적 의미에서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분절해서 부를 때 이미 전제되는 동일성 자체를 비판함으로써 이들은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 차이의 철학, 더 정확히는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의 철학이 함축하는 윤리와 정치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8. 사건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대중매체들은 늘 사건들을 다룬다. 사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다. 사건들은 갑작스럽게 삶의 표면으로 돌발해 나타나며, 때문에 사건이라는 개념에는 예기치 않은 일이라는 뉘앙스가 붙어 있다.


일본 관료들의 불쑥 내뱉는 망언들, 숱한 자연재해들, 지하철 등에서의 사고들을 비롯해 각종 사건들은 갑작스럽게 돌출한다.


“예기치 않은”이라는 말은 사건 발생의 시간과 공간이 우발적(contingent)이라는 말이다. 사건에는 늘 우발성이라는 양상이 결부되어 있다. 때문에 사건을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건이란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돌발하는 무엇이다.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는 시공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시공간이다. 사람들이 직접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체들을 통해서 사건을 접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매체들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선택해서 일정한 시각으로 구성해 대중에게 전달한다. 즉 우리가 매체에서 보는 사건들이 반드시 중요한 사건들인 것은 아니며, 차라리 매체 종사자들에게 관심이 가는 사건들이라 해야 하는 것이다. 매체들은 ‘대중’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 대중은 매체가 만들어내는 대중인 것이다. tv가 대중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tv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건이 아닌 한 세상의 사건들을 매체들의 취사선택을 통해 주입받게 되는 셈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체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사건들은 각 매체의 눈길에 의해 이미 해석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사건의 현장에서 그것을 체험한 사람이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매체에 의해 해석된 사건을 만나게 된다.


예컨대 신문의 기사들이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라 각 신문의 정치적 색깔에 의해 채색된 해석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설사 기사 내용이 모두 사실들이나 진실들로 채워져 있다 해도 그것들을 취사선택하고 배열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해석인 것이다. 요컨대 사건에 대한 순수한 시각이나 인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하겠다.


따라서 정치적 사건만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비정치적 사건들도 정치화된다. 사건들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비정치적 사건들도 정치적 색깔로 채색되는 것이다. 그런 채색은 눈에 잘 띄지 않고 그래서 잘 인지되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이, 매체는 그 속셈을 숨길 때 더 잘 기능한다. 바로 그런 비가시적 틀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은 어떻게 정치화되는가? 더 근본적으로, 사건이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사건의 정치적 의미란 무엇인가?


사건의 발생이란 세계 내에서의 차이의 도래이다.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세계에는 크고 작은 차이들이 도래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해 사건은 세계의 표면에서 발생한다. 세계의 표면, 즉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표면으로, 현실세계로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은 인지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사 세계의 심층부로 들어가 사건들을 채취하는 경우라 해도, 그 때의 사건들은 현미경이나 망원경, 아니면 그 어떤 기계들이든 일정한 장치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들 또한 장치들을 매개해 세계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사건들인 것이다. 요컨대 사건이란 그 사건을 확인하는 인식주체를 이미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의 크기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그것이 ‘사건’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사건’이라는 말에는 어떤 큰 차이의 도래라는 함축이 들어간다. 그래서 사건들에는 항상 날짜들이 붙어 있고, 아주 큰 사건이 발생하면 역사는 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곤 한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건의 이전과 이후, 태평양 전쟁의 이전과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전과 이후 등이 나뉜다. 또 사건들은 장소들과도 관련된다. 예컨대 한국사에서 ‘부마’, ‘제주’, ‘광주’, ...같은 도시들, ‘청석골’, ‘벌교’, ...같은 마을들에는 일정한 사건들이 각인되어 있다. 사건이란 큰 차이의 도래이고, 그 차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변별(辨別)시키면서 역사에 각인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차이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문턱을 넘어서야 사건이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근원적으로 보면, 존재론적으로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찰랑거리는 물결의 운동, 누군가의 기침 등등도 사건들이다. 즉 우주의 생성 자체가 사건들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생성 개념과 사건 개념은 뉘앙스가 다르다. 생성에는 ‘흐름’이라는 연속성의 뉘앙스가 강하고, 사건에는 ‘솟아오름’이라는 불연속의 뉘앙스가 강하다. 생성의 시간은 베르그송적인 ‘지속’이고 사건의 시간은 바슐라르적인 ‘순간’이다. 하나는 수평으로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이다. 현대 사상의 여러 거장들이 시간의 본성을 성찰했거니와, 생성의 시간과 사건의 시간에는 이렇게 분명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차이가 얼마만큼 커야 불연속이 도래하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생성이고 어디에서부터가 사건인가? 차이가 어떤 문턱을 넘어서야 사건이 되는 것일까?


사실 이 문턱은 상대적이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주먹질을 해댄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주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날 광화문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면, 두 사람의 주먹다툼은 그 폭탄 테러의 배경으로 내려가버린다. 광화문에서 한 정치인의 연설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사람들의 이야기 대상이 되겠지만, 만일 그날 어떤 정치인의 암살이 있었다면, 그 연설은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암살 사건의 배경으로 물러가버릴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사건이란 항상 그것보다 작은 사건들을 배경으로 솟아오른다. 거꾸로 말해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들은 그것들보다 큰 사건의 배경으로 물러간다. 즉 물결의 살랑거림, 바람, ...등의 극히 작은 사건들로부터 혁명이나 테러, 자연재해 등의 극히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건들이 도래시키는 차이들은 무수히 다양한 층차(層差)들을 보여주며, 그 상대적 층차들에 입각해 어떤 것은 사건으로서 솟아오르고 다른 것들은 그 사건의 배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생성이거니와 보다 큰 생성이 사건이 된다. 그리고 “보다 크다”는 것은 사건들의 상대적 크기, 즉 그것들이 차이를 도래시키는 정도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다. 모든 생성은 다 사건들이지만,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다 큰 불연속을 도래시키는 것이 사건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보다 큰다”라든가, 다른 사건들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솟아오른다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테러 사건이 주먹다툼 사건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솟아오르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더 많은 물건들이 깨진 것이 기준인가? 아니면 더 근본적인 기준이 있을까?

하나의 생성이 사건으로서 마름질되는, 즉 “하나의 사건”으로서 끊어 이해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의미’에 있다. 즉 생성은 일정한 의미를 가질 때 사건으로서 마름질된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는 자칫 의미라는 것이 있어서, 마치 어떤 사물이 땅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듯이 발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즉 방에 피아노가 있듯이 말에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미는 구성되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즉 말이 있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어떤 생성이 사건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언어를 통해 마름질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건이 있어 그것이 언어화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될 때 비로소 하나의 사건이 뚜렷하게 마름질되는 것이다.


사건이란 단독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광화문에서 폭탄이 터졌다 해도, 그것이 큰 사건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고’가 아니라 ‘테러 사건’이라고 부름으로써이다. 그리고 이렇게 특정한 사건이 마름질되는 것은 그 사건이 다른 사건들과 이어짐으로써이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사건들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떤 폭탄 터짐이 ‘테러 사건’으로서 마름질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의미란 사건들을 이음으로써, 달리 말해 계열화(系列化)함으로써 성립한다. 우리는 앞에서 매체들이 사건들을 취사선택하고 해석해 전달한다고 했다. 이제 이 사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취사선택한다는 것은 세계의 숱한 생성에서 사건들을 마름질한다는 것이고,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어떤 다른 사건들과 계열화해 의미를 만들어냄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이란 순수하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구성은 늘 정치적 입장에 의해 채색된다. 이렇게 사건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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