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생체권력


누군가가 길거리에 침을 뱉기만 해도, 아니 자기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뜨린다 해도 정부에서 그가 누군지를 식별해내고 때로 제재를 가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통제당하는 끔찍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상황이어서 얼핏 생각하기에 sf 소설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상상도 아니고, 공연히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려는 선정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회로 갈 수도 있는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19세기 사회의 대표적 부산물인 IQ검사가 21세기에는 유전자 검사로 대체되었고, '바이오벤처'들은 유전자를 샘플링해 용기에 넣어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이 용기에 포장되어 'qyt072009'와 같은 식의 기호를 부여받는다. 미국은 전과자 12만 명의 유전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한 codis="combind dna index system"을 세웠고, 마침내 아이슬란드는 전국민의 유전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이제 생명, 신체는 기술에 의해 조작되고, 자본주의에 의해 판매, 유통되고,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미셸 푸코는 이런 상황을 '생체권력'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 바 있다.

권력의 주체들이 사람들을 지배하려면 지배의 대상들이 분명하게 확인되어야(identify) 한다. "identify"한다는 것은 곧 어떤 사람의 아이덴티티(동일성)를 확인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인식론적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서 그 대상이 자기가 알고 있던, 또는 자기가 찾고 있던 "그"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어떤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매일 아침 자신들의 담임선생님을 "알아본다". 알아본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대상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보는 것을 영어로는 "re-cognize"로 표기한다. 즉 그 대상을 "다시" 확인(確認)하는 것이다.

이런 확인이 가능하려면 확인하려는 그 대상이 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만일 담임선생님이 하룻밤 새에 변해버렸다면, 학생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렇게 동일성이 존재함으로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담임선생님은 사실 변했다. 머리카락도 길어지고, 몸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그를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시간 속에서 변해 가면서도 그 변화를 소화해 가는 동일성을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동일성의 존재를 확보하는 것이 합리적 인식의 토대이며,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동일성의 논리를 다듬어 왔다. 그러나 동일성의 문제는 순수 인식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치의 맥락에서도 동일성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동일성이 정치적 맥락을 띠게 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배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지배의 주체들은 그들의 '신민(臣民)들'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를 필요로 한다. 즉 대상의 동일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 가장 원초적인 방식은 타인의 신체를 빌리는 것이다. 누군가를 시켜 그를 어딘가에 가게 해서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게 한다면, 그렇게 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직접 움직이지 않고서 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를 시켜 자기가 보지 못한 어떤 대상을 보고하게 만드는 것은 대상 확인이 정치적 지배를 통해서 수행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대상 확인의 방식은 조금씩 '진화'하게 된다. 대상을 확인해서 그것을 지배의 눈길 아래에 두는 방식의 진화인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한 요소가 사회의 의학화이다. 지배 주체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의학적 지식들, 좀더 넓게는 생명과학과 연계되는 각종 지식들을 동원하는 방식을 푸코는 '생체정치'라 부른다.

생체정치의 중요한 한 요소는 인구 문제이다. 인구는 성행위를 통한 생명체의 증식이라는 자연적 흐름과 정치적 장치들을 통한 주민들의 통제라는 사회적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인구를 조절하는 것은 노동력의 확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고대의 전쟁은 역설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포로를 회득하려는 전쟁이었다.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자 '산아 제한'이라는 개념이 등장해 인구의 증가를 조절하게 된다. 출산율이 급감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노동력 확보를 위한 '출산 장려'가 등장했다. 인구 문제는 사회를 관리하는 중요한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위생 문제 또한 중요하다.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조선을 통제하기 위해 동원했던 주요 개념들 중 하나가 '위생'이었다. 위생을 근거로 사람들의 신체를 지표화(指標化)하고 분류하고 평가함으로써 신체 관리 체계를 운영할 수 있었다. "더럽다"라는 말에는 매우 복잡미묘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으며, 이 "더럽다"는 것을 관리하는 것이 생체정치의 빼놓을 수 없는 한 측면이다.

이 밖에도 무수한 형태의 생체권력들이 존재하거니와, 이 장치들이 직접적으로 차별에 동원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가장 즉물적인 것으로는 피부색에 의한 차별 및 성적인 차별이다. 신체적으로 즉각적으로 변별되는 이런 형질상의 차이들은 정치적 차별의 근거로 작동한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을 식별해내고 구분 짓고 분류/평가해서 차별하는 무수한 권력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루타의 경우는 그 가장 극단적인 경우라 하겠다.

사회의 의학화는 지배 주체들이 사람들의 신체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핵심적인 방식이다. 사람들의 신체들을 각종 지표들로 표시하고 그 정보들을 확보함으로써 사람들을 확인하며, 그런 확인이 가능하지 않다면 지배도 가능하지 않다.

전통 사회에서의 생체권력들과 오늘날의 생체권력들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생체권력은 분자생물학이라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라는 두 핵심 요소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오늘날 분자생물학은 한 사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서 작동하고 있다. 한 사람의 염기배열, 특히 '게놈'이라 불리는 그 종합적 지도는 한 개체로서의 한 개인을 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장치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이제 한 인간은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이라는 네 개의 염기들이 배열된 하나의 방식으로 환원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보면 대단히 유치한 사고방식으로서, 한 존재의 동일성을 그 존재를 구성하는 어떤 한 요소로 환원해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한 인간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란 결정되어 있는 무엇이 전혀 아니며 우발적으로 생성해 가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만나 어떻게 변해 갈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절대 우발성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의" 대상 안에 어떤 본질이 있고 그 본질을 발견하면 그 존재가 모두 해명된다는 식의 생각은 19세기에 이미 극복된 낡은 존재론의 유산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식 방법은 오늘날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문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것은 지식이 자본과 결합함으로써 지배의 새로운 양태들이 전개된다는 점이다. 푸코는 지식-권력의 문제를 논했거니와, 오늘날 이에 못지않게 지식-자본의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면 tv 뉴스는 그 학문적 내용이나 문화사적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부가가치'를 역설한다. 자본주의는 분자생물학이 가져온 천문학적인 부가가치를 노리면서 새로운 형태의 생체권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한 인간의 생물학적 정체성은 실험되고 조작되고 판매되고 유통되는 상품이 되었다. 장기(臟器)의 판매 같은 것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한 인간의 유전정보가 무책임하게 유출되었을 때 일어날 일들, 정부나 기업에서 한 인간의 유전정보를 쥐고서 통제할 때 일어날 일들, 부모들이 더 잘 생기고 똑똑한 자식을 가지겠다고 날뛸 때 일어날 일들, 한 가족 성원의 유전정보 유출이 다른 성원들에게 끼칠 영향, 길거리에 침만 뱉어도 누군지 확인되는 완벽한 통제사회의 도래, 이 모든 상황들이 하나의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 특정 주체들에 의해 다른 주체들이 철저하게 객체화되는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사람들은 성형 수술을 하듯이 자신의 유전자를 고치려 할 것이고, 과학자들은 미래의 비극을 외면한 채 오로지 경쟁 상대자들만 바라보면서 밤을 샐 것이고, 기업과 정부는 유전정보를 활용해 부와 권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인식주체에 의한 주체 자신의 객체화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강화된 경우가 일찍이 있었던가.

인간은 세계를 알기 위해 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지식은 인류에게 더 무겁고 두려운 현실을 짐 지우곤 한다.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존재가 다시 더 큰 운명이 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인류의 역사는 역운(逆運)의 역사인 것이다.

이 역운의 수레바퀴를 조금이나마 늦추려면 대중 전체가 각성해서 권력과 자본의 지배 장치들에 저항하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대중 전체가 깨어나려면 우선 그들을 깨울 수 있는 전위부대로서의 지식인(매우 넓은 의미)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에 안주하는 지식인들만이 득실대는 이 시대에 저항의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10. 민족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병이 있어 병명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병명이 있어서 병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대개는 당연히 병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이름이 붙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많은 병들이 우리 눈에 직접 확인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책상을 보고 "저기에 책상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렇게 a라는 병이 우리에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진단 결과들, 그래프들, 숫자들, 증후들, ...의 복합체를 특정한 이론적 관점에서 해석해서 a라는 어떤 하나의 병이 "존재한다"고 가정되고 거기에 이름이 붙는 것이다. 좀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러이러한 현상들을 하나의 '단위'로 구성해서 a라고 하자 라는 합의가 이루어지면 a라는 병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중세 철학에서 '보편자들'이라고 불렀던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체들 이상의 단위들은 과연 존재할까? 철수나 영희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보편자는 과연 존재할까? 뽀삐나 검둥이, 해피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개'라는 보편자는 과연 존재할까? 아니면 개체들의 전체 집합을 부르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말,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것일까?

이렇게 어떤 사물의 '존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유를 '존재론'이라고 한다. 바로 이 존재론적 사유를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존재'들 중 하나가 '민족'이라는 존재이다.

'민족'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까? '민족'이란 개체 이상의 존재단위들 중 하나이며, '국민', '종족' 등과 유사한 층위의 개념이자 '지역', '인종', ... 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개념이다. 이 모두는 인간이라는 전체를 여러 개의 굵직한 존재단위들로 분절하는 방식들이다. 즉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동원하는 각종의 보편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편자들을 분절하는 방식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한 교실에 50명이 사람이 있을 때, 사회계층에 예민한 사람은 그들을 계층으로 분절할 것이고, 성차에 예민한 사람은 남자가 또는 여자가 몇 명인지를 유심히 볼 것이다. 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옷 입은 것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절해 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 전체를 어떤 기준으로 분절해 보는가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분절되는가? 사물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일 때, 거기에는 늘 '본질' 개념이 작동한다. 한 개념의 본질 규정에 근거해 그것의 외연이 결정된다. 그러나 규정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바뀔 수 있다. 백조는 흰 새이기 때문에 '백조'라 불렸지만,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서 '白鳥'의 본질 규정은 흔들렸다. 생명체들의 경우 오늘날에는 유전자가 중시된다. 그렇다면 한 민족의 본질 규정은 무엇인가? 무엇이 한 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드는가?

'민족'이라는 존재 단위는 대단히 모호한 단위이다. 사람들은 민족이라는 것이 마치 한 사람의 개인이 존재하듯이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민족이라는 단위는 대부분이 극히 모호하고 허구적인 것들이다.

앞에서 우리가 병에 관련해 이야기했거니와, '민족'이라는 존재는 명확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관점을 통해서 구성되는 존재이다. 혈통, 언어, 문화, 지역, ...등 갖가지 기준들이 존재하지만, 그 기준들을 조합하는 방식은 다 다르고,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 객관적으로 분절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서 그런 존재 단위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연구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특정한 민족의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은 위태로워진다. 수천 년, 수만 년을 보존해 온 "한" 민족의 동일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가 밝혀지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사상가인 에른스트 르낭은 "망각과 왜곡은 국민(國民) 형성의 본질적 요소들이다. 역사 연구의 발전은 국민 개념을 위태롭게 한다"고 했다.

르낭의 이 말에서 '국민 형성'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란 결국 국민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동원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왜 국민 형성에 민족이 중요한가? 하나의 국민이 형성되려면 숱한 사람들, 정말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개인들을 '국민'이라는 어떤 인위적인 존재, 구성된 존재 속으로 쓸어 담아 거기에 어떤 확고한 동일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려면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할 수 있는 것, 즉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동원해서 국민 개념을 밑받침해야 한다. 즉 인위적으로 구성된 '국민'을 밑받침하는 어떤 실체가 필요한 것이다.

'민족'이라는 존재는 바로 이런 실체로서 동원되는 개념이다. 하나의 국민이 확고한 동일성을 갖추려면 지역적 구획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해 왔다는 어떤 보증, 숱한 세월 속에서도 "하나의" 그 무엇으로서 살아 왔다는 보증이 필요하다. 바로 그 때 '민족'이라는 개념이 동원되기 시작한다.

물론 민족이라는 개념을 덮어놓고 허구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일정한 지역에서, 같은 말과 같은 풍속, 문화, 관습을 가지고서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살아간 사람들을 어떤 하나의 단위로 묶어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경우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조차도 혈통, 언어, 관습, ...등에서의 복잡한 이질성이 혼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확고하게 보였던 동일성이 금방 와해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 개념을 인정하는 경우에조차도 그것이 매우 모호하고 복잡한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어떤 목적에서 하나의 민족, 한 민족의 동일성을 구성하는가, 민족 개념을 과장하고 조작하고 이용하는가이다. 이들은 곧 근대 '국민국가'를 구성하려 했던 집단들이다. 서구의 경우 중세 카톨릭 사회가 무너지면서 유럽 사회가 다원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구성하려 했던 주체세력들이 민족 개념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여러 차례에 걸쳐 복잡하게 전개되며,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사회주의, 제국주의, ...등 여러 흐름들과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관계를 맺으면 전개된다.

민족주의는 때때로 외부의 침입에 대응하면서 형성되기도 한다. 민족주의가 존재하고 그것이 외부에 대항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외부라는 것이 침입하면서 그것에 대항하는 내부로서의 민족 개념이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말하자면 '저항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적 민족주의도 순식간에 폭력적 민족주의로 둔갑한다. 일본의 경우 역시 서구라는 외부, 근대성이라는 외부에 직면해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 국민국가/민족국가에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시작된 민족주의는 역으로 서구가 자신들에게 했던 짓을 동북아의 다른 지역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하는 비극을 낳았다. 자신이 당했기에 타자는 그렇게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그대로 타자에게, 자신을 가해한 타자가 아니라 다른 엉뚱한 타자에게 가해하는 인간사의 비극은 일본의 경우에 선명하게 확인된다. 이렇게 피해적 민족주의와 가해적 민족주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조선'이라고 하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볼 때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견고한 동일성을 갖추고서 살아 왔던 한국인들은(물론 '한국인들'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구성물이지만) 현대에 들어와 서구와 일본에 짓밟히면서 저항적 민족주의, 피해적 민족주의를 꽃피워 왔다. 적어도 이 저항적 민족주의, 민중들의 자연발생적 민족주의는 역사적 정당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및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파시즘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국민 형성'의 수단으로 계속 이용되어 왔다. 국민국가를 떠받치는 메커니즘으로서 정권들은 민족 개념을 악용해 왔으며, 서구와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에 젖은 사람들의 심리를 적절히 활용했다. 문화적인 성격을 띤 민족주의조차도 언제라도 정치적 민족주의 즉 국민주의로 이용되기 일쑤이다. 전두환이 일으켰던 '국풍(國風)'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악순환적인 관계, 통일을 둘러싼 남한과 북한의 관계, 근대가 이루어놓은 삶의 양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탈근대적 사유들과 몸짓들,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비롯해 각종 문제들은 모두 민족주의와 직간접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그 어느 경우든 민족주의는 언제라도 권력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위험한 개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1. 코라


오늘날의 사상을 이야기할 때 '내재성'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 말은 '초월성'의 반대말이다. 현대 사상이 내재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철학사상들이 이야기하던 초월적 존재들, 예컨대 이데아, 신, 선험적 주체 같은 존재들을 벗어나 모든 것을 평등한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은 서로간의 관계맺음들을 통해서 존재하며, 그런 관계망 위로 솟아올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유는 철학사에서 종종 등장하긴 했지만, 그 본격적인 형태가 전면적으로 도래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를 비롯해 오늘날의(이미 고전이 됐지만)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모두 이런 내재성의 사유를 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내재성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초월성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가장 강한 형태의 초월성에는 플라톤-기독교적 초월성이 있다. 기독교의 초월성은 분명하다.(물론 유대-기독교적 신 개념 역시 비교적 구체적인 형태에서 점차 추상적 존재로 변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만든 조물주로서 데미우르고스를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액면 그대로의 이야기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한다. 데미우르고스를 기독교의 신에 근접시키는 한에서 플라톤-기독교적 초월성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 강한 의미에서의 초월성이 초월성의 전부가 아니다. 따라서 이 초월성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재성의 철학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핏 내재성의 사상 같지만 초월성의 흔적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사상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라톤-기독교적 초월성이 아니라 해도 세계의 이법(理法)을 항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사물들이 그 이법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유도 사실상 초월성의 사유이다. 이런 사유에서 사물과 사물 "사이"는, 그리고 각 사물들의 "바깥"은 부차적이다. 이는 달리 말해 사물과 사물이 맺는 관계 자체가 어떤 항구적인 이법을 통해서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영원한 이법(또는 태극, 섭리, 천명, ...등)의 개념에 근거하는 사유들은 개별자들을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로 파악하기보다는 이법에 근거해 존립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 이법에 초월성을 부여하는 사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성리학, 라이프니츠, 헤겔 등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체계들이, 유연한 경우도 있고 강고한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형태를 띤다. 이런 형태들 역시 완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사실상 초월적인 사유인 것이다.

만일 사물과 사물이 전적으로 우발적(偶發的)으로 관계 맺는다면(여기에서 우발성은 영어의 'contingency'에 해당한다), 즉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어떤 아프리오리한(경험을 초월한, 개별성을 초월한) 이법도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계는 사물과 사물이 열린 관계, 우발적 관계를 맺어가는 세계, 모든 것이 (사물들과 사물들의) "사이들"에서 형성되고 변환되어 가는 세계일 것이다.

이렇게 어떤 사상이 설사 관계적 사유의 형태를 띠는 경우라 해도, 그 관계들이 우발적인 것들이 아니라면 결국 관계들 자체가 실체화되게 된다. 이 경우 관계들의 체계가 이법의 역할을 하게 되며, 이 체계는 결국 개별자들을 초월한 무엇이 된다. 이런 경우는 '구조주의'라 일컬어지는 사유나 더 넓게는 자연과학적 사유 일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내재성의 사유는 플라톤-기독교적 사유만이 아니라 이법의 사유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근대 철학은 '선험적 주체'라는 또 하나의 초월성을 제시했다. 선험적 주체는 자연적인 존재, 경험을 통해서 이해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물들의 차원을 초월해 있다. 칸트와 후설의 '선험철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이 두 사람이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구별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것이 이 때문이다) 오늘날 내재성의 사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고중세적인 실체/본질의 사유 못지않게 근대적인 선험적 주체의 사유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근대 선험철학은 사물 일반과 선험적 주체 사이에 불연속을 놓고서 주체의 초월성을 사유했던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내재성의 사유는 우발적 관계들을 통해 접속되고 일탈하는 사물들의 운동에 초점을 맞춘다. 삶은 정해진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창조의 연속인 것이다.

데리다는 이데아, 신, 선험적 주체 같은 동일자(同一者)의 초월성을 매개해서 사물들을 재단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폐단을 절실히 깨닫고 그런 폐단을 '해체'하고자 했다. 그의 해체의 칼날 앞에는 고전적인 형이상학 체계들만이 아니라 현상학과 구조주의 같은 현대 사유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는 기존의 사유를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이지 '해체'라는 단어의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붕괴시키는 것은 아니다. 각 사유체계의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묻혀 있는 측면을 캐내어 그 체계를 (원래의 저자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하는 것이다.(이 점에서 '탈구축'이라는 번역이 나을 듯싶다) 이 점에서 데리다에 대해 "해체 뒤에 남는 게 뭐냐?", "해체 이후의 대안이 뭐냐?"라고 묻는 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

데리다의 이런 작업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플라톤의 탈구축이다. 데리다는 여기에서 문자보다 음성을 중시하는, 따라서 현존(現存)에 특권을 부여하는 플라톤적 사유를 탈구축한다.(현존이란 나타나-있음, 즉 말하는 사람이 생생하게 현실 속에 나타나-있음을 함축한다. 그래서 문자보다 음성=목소리가 중요하다고 보는 생각은 현존을 중시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현존의 형이상학에 기초해 두 가지 언어를 구분한다. 영혼에 각인된, 즉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살아 있는 언어와 문자로 기록된, 따라서 누가 어떻게 악용할지 알 수가 없는 죽은 언어를 구분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만일 문자가 그릇된 것이라면, 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문자로 기록했는가. 그것은 스승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여기에서 데리다는 플라톤 사유에 존재하는 이중성, 즉 문자를 비판하면서도 문자에 집착하는 이중성을 읽어낸다. 즉 약(藥)이자 독(毒)으로서의 파르마콘(독일어의 'gift'와 통함)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문자는 파르마콘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대화편의 결정적인 부분들에서 신화를 끌어다대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플라톤이 우주 창조를 설명할 때 물질의 역할을 한 코라(cho를 재음미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코라는 파르마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목소리(누스=이성의 목소리)에 따라 즉 이법에 따라 빚어지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 사유에서는 약이자 독인 파르마콘이다. 코라는 곧 이법이 강제하는 동일성에 저항해 차이가 생성하는 곳이며, 열린 관계들의 생성으로서의 '텍스트'가 짜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리좀의 공간이다. 플라톤은 이성=누스로써 이 코라를 제압하는 사유를 전개했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플라톤을 탈구축함으로써 코라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코라는 아마 허(虛)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허(虛)는 단지 텅 빈곳만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것들이 그곳으로부터 조직되어 나올 수 있는 잠재성, 카오스이기도 하다. 장자는 일찍이 이 허 개념을 빼어나게 사유한 바 있다. 데리다는 이 잠재성, 카오스의 긍정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한다.

어쩌면 코라는 민중이 아닐까.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이법들에 의해 주물이 찍히듯이 만들어지는 대중이 아니라 자기조직화(自己組織化)를 통해서 정치와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민중의 역능(力能)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코라의 재음미는 민중의 재음미일지도 모른다.




12. virtuality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새로운 무엇인가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넓게 말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던 무엇인가가 생겨나기도 하고 또 보이던 것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비가시의 세계, 감각을 넘어선 세계도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비가시, 비감각의 세계가 가시, 감각의 세계와 별도로 따로 존재할 리는 없다. 서울과 뉴욕이 따로 존재하듯이 그렇게 두 세계가 따로 존재할 리는 없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이다. 다만 하나인 세계가 우리에게는 감각으로 확인되는 차원과 확인되지 않는 차원으로 구분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세계와 비-현실세계를 구분한다. 그런데 이 비-현실세계를 사유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들 중 하나가 '잠재성(virtuality)'이다.

바둑을 생각해 보자. 흑백의 바둑돌이 20개 놓여 있다. 두 기사가, 예컨대 이창호와 이세돌이 열심히 바둑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미 놓여진 20수를 볼 때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그 외의 공간도 샅샅이 훑어보고 있다. 두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이들은 지금 "수를 읽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수(手)라는 것이 무엇일까? 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없다. 그러나 바둑 두는 사람이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길들'이라고 부르는 어떤 객관적인 것들을 보고 있다. 더구나 두 사람이 함께 그 길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 사람이 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머리싸움'을 하면서 그들에게 공통되는 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길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 길들의 존재는 고수와 하수의 구분에도 중요하다. 만일 객관적으로 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누구는 그 길들을 더 잘 보고 누구는 더 잘 보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고수이고 다른 사람은 상대적으로 하수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수와 하수는 분명 구분된다. 하수가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을 고수는 본다. 하수가 살아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는 공간에서 고수는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읽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 즉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마음에는 보이는 것, 감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데 우리 정신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바둑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구를 칠 때도, 야구경기를 할 때도, 미술관에 전시를 할 때도, 결혼식을 할 때도, 이런 차원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감각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우리의 머리로, 정신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존재론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각종 문화들은 결국 이런 차원, 즉 감각을 넘어서지만 분명 존재하는 차원을 읽어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존재론은 그렇게 발견된 차원들을 종합해서 세계의 근저를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원을 개념화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각별하게 새롭게 주목된 것은 '잠재성(潛在性)'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에 의해 다듬어졌고 들뢰즈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으며,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핵심적인 존재론적 화두들 중 하나라 하겠다.

잠재성은 가능성과 다르다. 이것은 곧 현대 존재론에서의 잠재성과 컴퓨터 공학에서의 'virtual reality'는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컴퓨터 공학에서의 '버츄얼 리얼리티'는 '가상현실'이다. 철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차라리 '버츄얼 액츄얼리티(actuality)'라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가상현실은 잠재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뜻한다.

잠재성과 가능성은 어떻게 다른가? 가상실재에서의 '버츄얼'은 '가짜'라는 뜻을 함축한다. 가상현실은 실제 현실에 대한 지각을 바탕으로 그것을 변형시킨다. 예컨대 강아지를 지각해서 그것의 이미지를 만든 다음 그 이미지를 변형시킬 수 있다. 그래서 바로 그 강아지인데 꼬리를 두 개 가진 경우, 귀가 없는 경우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능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과 통한다. 즉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변형시켜서 그것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상상적인 것이다. 때로는, 아니 상당히 자주, 이미 상상한 것에 다시 상상을 덧붙여 변형하며, 그런 변형을 계속된다. 이렇게 현실보다 훨씬 외연이 큰, 즉 실제 현실보다 더 범위가 넓은 차원이 가능의 차원이며, 가능의 차원은 상상의 차원과 같다.

그래서 가상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이고 또 상상적인 것이다. 이 가상=가능=상상의 차원은 인간의 주관의 차원이고, 이 주관이 인간이라는 존재 특유의 문명을 가능하게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가상=가능=상상의 차원은 '판타지'라는 개념과 맞물려 있다. 상상을 동원해 현실과는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판타지'라고 한다. 오늘날은 판타지의 전성시대이다. 왜일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대중들의 심리와 그 심리를 파고들어 이익을 남기려는 자본주의, 그리고 이 두 존재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와 대중문화의 뒷받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따분한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을 더 좋아한다. 현실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을 바꾸어나가기보다는 허망한 판타지의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현실로부터 아예 도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심리를 자본주의가 놓칠 리 없다. 이로부터 영화를 필두로 해서 거대한 '판타지 산업'이 도래했다. 물론 이 산업은 기술적 장치들과 대중문화의 코드들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중, 자본주의, 테크놀로지, 대중문화가 교차하는 곳에서 판타지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잠재성은 가능성이 아니다. 잠재성은 상상적인 것, 가상적인 것, 판타지가 아니라 객관적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게 확인되는 차원이 아니라 지적 노력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차원이다. 직접적으로 확인되는 차원은 현실차원이다. 그러나 이 현실차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잠재차원이다. 잠재성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현실성을 보다 확대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20개의 돌이지만, 잠재적 길들, 수들을 읽어냄으로써 그 20의 의미는 전혀 달리 읽힌다. 그리고 고수일수록 더 많은 수를 읽어냄으로써 그 20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더 많이 읽어내는 것이다.

잠재성을 읽어내는 것은 실천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잠재적 차원을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좀더 넓은 눈으로 읽어낼 수 있고, 그에 따라 현실을 좀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객관적 진실보다는 주관적 쾌락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시대이다.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진실을 밝히는 작업보다는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허상적인 이미지들이 더욱 각광받는다. 존재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예술적 고투는 외면당하고 싸구려 문화만이 온통 기승을 부린다. 이런 현실은 무엇보다도 우선 신문과 tv를 비롯한 대중매체들에 의해 조장된다. 진실을 전달해야 할 매체들이 선정적인 오락으로 뒤덮이면서, 자본주의의 힘에 압도되면서 매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연예산업으로 둔갑한 것이다.

상상적인 것, 가상적인 것, 판타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진실을 밝히는 작업, 객관적인 진리를 밝히는 작업보다 말초적인 재미를 주고 허망한 환상을 심어주는 작업이 거대한 산업으로서 군림하게 된다. 우리의 시대는 이런 현실과 싸우면서 객관적 진실의 인식을 기초로 한 현실 개혁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가상성의 오락과 산업보다 잠재성의 사유와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출처 : 철학아카데미 자료실 http://www.acaphilo.org/PDS/?tb=J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nomad22/trackback/184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