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고통의 윤리학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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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와 레비나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독일에 유학하여 후설의 현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하이데거의 존재론 탐구에 열정을 쏟은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교수가 된 평범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나의 가족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렇다. 레비나스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었고, 포로수용소에서 2차 대전을 보낸 전쟁 피해자였다. 그에게 있어 죽음과 고통은 관념 따위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실재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이 그토록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죽음의 복마전을 힘겹게 건너왔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사역 당시 숱한 구타와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다. 그와 다른 수감자들에게 피로란 한결같이 따라다니는 멍에와도 같았다. 레비나스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피로해지면 삶의 의욕을 잃기 쉽고, 또 다시 피로가 더해지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를 레비나스는 ‘존재가 오그라드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렇듯 육체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일을 해야 했던 수감자들은 이미 인간성을 잃고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나치와 히틀러 그리고 전쟁 가해자들은 그렇게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경험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의 고통, 나아가 인류 보편의 고통으로까지 확장시켜 타인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철학을 전개한다.


고통의 윤리학

그간 서양철학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그리 깊은 성찰을 보여주지 않았다. 성찰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통이 ‘더 나은 선을 이룩하기 위해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설파하는 것에 그쳤다. 칸트는 고통이 전제된 이후라야 진정한 쾌락이 올 것이라 하였고, 니체는 성장을 위한 발판인 고통에 동정을 보태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다르게 말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이성으로 고통을 파헤치려는 행위는 보여주기 토목공사만큼이나 무의미한 삽질로 보일 뿐이다. 단지 고통은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며, 감당하지 못할 질료이고 고통을 종합하는 우리 감성은 그것을 수용해 낼 능력이 없을 뿐이다.


고통을 받은 인간은 그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하기 쉽다. 이는 주체적으로 미래를 건설하려는 의지 자체를 상실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의지 혹은 그에 관한 계획은 자신의 미래를 긍정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이러한 능동적 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저 ‘당하는 것’이고,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고통을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라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 없이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타인에게 고통 받고, 사회구조에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레비나스의 말대로라면 우린 그저 고통의 순환에 몸을 맡기고 존재의 오그라듦 속에서 한없는 쭈구리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아니다. 레비나스는 되려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해괴한 소리를 하는 레비나스의 저의는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고통의 무의미성은 현상으로서의 고통 그 자체였을 뿐이다. 윤리가 존재론적인 것보다 선행하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의 근거가 된다고 믿는 레비나스는 고통을 윤리와 직결시키고 나서야 의미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작업은 고통을 단순히 정당화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것을 현상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고통의 윤리학을 생성시키는 것이었다.


고통의 쓸모있음

옆에 있던 누가 나를 때렸다고 치자. 무방비로 가격당한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아!’하고 신음소리를 낼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렇듯 고통과 대면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표현을 하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호소의 메시지를 보낸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고통과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이런 관계의 열림은 실행에의 직결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기에 레비나스는 이 열림을 ‘절반의 열림’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 고통과 열림의 순차적인 고리에서 윤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일 때, 또 그의 찡그린 얼굴에서 고통을 발견하고 난 후라야 비로소 연민, 존경, 행복이란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 고통은 철저히 무의미한 현상이고, 극도의 고독이지만 그것을 통해 관계성이 열린다는 데에서 다른 역설적 의미가 발생시킨다.


물론 우리는 타인 정확히 말하면 소외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인생은 살아진다. 하지만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주체의 주체됨은 타인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성된다. 우리의 존재가 고통의 심연에 내던져져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속죄하고 그것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진정한 주체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창조의 시대에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 필요하다면 말이다.  

[작성자 : NILNILIST (nilnilist@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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