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대화

2012/01/14 00:09

발췌 : 2005, 리영희·임헌영, [대화], 한길사. : ( )는 쪽수

 

[한국전쟁은]

1. 인민군 전력이 남한군 전력에 비해서 월등했고

2. 남한에 제일 가까운 일본에 주둔한 미군 전력을 사실상 치안유지 수준으로 감축돼 있었고,

3. 인민군 전력에 대항할 만한 전력 투입에는 본토전력의 이동과 전쟁장비 준비에 시간이 걸리고

4. 소련, 중공과의 전쟁 가능성을 포함한 전지구적 수준의 전략평가의 복잡한 협의·조절 단계를 거쳐야 하고

5. 대규모 상륙작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물적·인적·과학 및 기술적 사전조사, 예측작업이 앞서야 하고

6. 한국전 참전 10여국 정부와의 정책·군사적 협의가 수반되어야 하며

7.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경우와 다름없이, 만약 작전이 실패할 경우의 광범위한 긴급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며

8. 유엔 국제정치장에서의 정치·외교적 대책을 연합국 정부들과 협의해야 하는 등등의 문제가 앞뒤로 따르는 거예요.

전쟁과 군사는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에요. (117)

 

[군대 1 : 초기 국군]

첫째, 대한민국 군대는 일본제국주의의 천황군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군대였어요. 소수의 독립군 출신들이 있기는 했지만, 국군의 상층과 중층 지휘관들은 거의가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했던 장교들과, 제 발로 걸어가서 총을 메고 일본군이 되었던 지원하사관들 출신이었어요. 이들이 지난날 목숨으로 충성했던 그 야만적인 일본 군대의 사상과 폭력주의를 그래도 새 나라의 군대여야 할 남한의 소위 ‘국군’ 속에서 재현하고 있었던 거야. 걸핏하면 중위가 소위를 패고, 소위가 상사를 패고, 상사는 하사관을 매질하고, 하사관은 사병들을 개 패듯이 패는 일이 다반사였어. 그냥 매질을 하고 고통을 줌으로써 쾌락을 만끽하는 사디즘의 집단이었어. 그 사디즘 체계의 말단, 밑바닥에 위치한 대한민국 국군의 사병들은 그야말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오.

둘째, 위관급 장교들이나 하사관 또는 사병들 속에는 이와는 다른 성격의 군인들이 있었어. 이들은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생하는 1950년 6월까지의 사이에, 전국 각지에서 새로 의식화되고 사회개혁 운동에 뛰어들었던 개혁사상·공산주의·사회주의 경향의 사람들, 다시 말하면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지요. 미군 점령시의 미군정과 군정을 승계한 거나 다름없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추격을 피해서 군대를 피난처로 지망한 사람들이었지. 군대를 보신책으로 택한 사람들이예요. 그 당시 군대는 유일하게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수많은 우익 폭력단체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폭력집단이었어. 그러니까 전국에서 경찰과 우익 폭력집단들의 박해를 받거나 쫒기던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군대에 들어오기도 했어.

셋째는 무식·무학하고, 사회적으로 하층에 속했던 도시빈민과 농촌의 무위도식하거나 잉여적 존재이던 청년들이 호구지책으로 찾아오기도 했지. 군복과 계급장으로 장식된 외모에다가 총을 메고 있는 ‘권력’ 표지에 유혹되거나, ‘재수가 좋으면 한자리할 수 있겠지’하는 몽상으로 모여든 인간들, 이런 것이 당시 국군의 구성요소였어요. (122-123)

 

[군대 2 : 전쟁과 인간]

직업군인들, 자기 발로 걸어들어갔건 기어들어갔건, 좋아서 군인이 된 사람은 즐겁기도 하고 유리하기도 했겠지. 전쟁을 몸소 치른 지식인들이 거의 반전평화주의자가 된다는 말은 틀린 말이오. 오히려 민간인이었던 지식인이 군복을 입고 군대라는 특수 집단의 집단적 생활양식 속에 들어와 전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힘의 논리, 권력의 숭배자, 일사불란한 통제하의 집단적 삶, 그리고 개개인의 자율적 사고와 자유보다도 규율을 숭상하는 반인격·반자율·반자유의 인간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지요. 그 실례로서 나치 체제하의 독일 지식인의 경우나 무솔리니 파시스트 체제하의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그랬고, 프랑코 장군의 독재지배 체제하의 스페인과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하의 소련 지식인들도 그랬어요.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일본 천황군국주의 군인지배 체제였던 일제시대의 지식인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북한도 그 범주에 속하겠지요. 요컨대,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역사적 체험과 인간적 삶을 경험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개인적 반응 양식은 천차만별이라구요. 인간이란 그렇게 전쟁을 경험하고 나서 반드시 반전평화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다 각기 개인의 주체적 의식의 문제라고 해야겠지. (162-163)

 

[군사독재 시절의 ‘자살’]

난 박정희정권 말기와 특히 1980년의 전두환 집단의 광주 대학살이 있었던 그 시기에는 수사학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고 질실할 것만 같았어. 그리고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오늘보다 더 암담해질 내일을 견디어야 할 절망적 상태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하는가 하는 그런 중압감에 시달렸어요. 그때 나는 ‘사람은 자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 했어. 세계의 유명한 사상가나 예술가나 그 밖의 지식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생애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마감할 때, 그들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에 탈출구가 엇는 철저한 절망감을 겪은 실존적 경지를 공감할 수 있었어요. ‘자살’이 유일한 구원으로 다가온 군인정권 30년을 살아온 결과지. (148-149)

 

[케네디와 5·16이후 박정희]

(1961년 11월 케네디와 박정희 정상회담) 케네디는 박정희에 대해서

1. 조속한 시일 내에 공정한 선거를 통한 민정으로 이양할 것

2. 민정이양에 앞서는 군의 정치관여 금지와 원대복귀

3. 그때까지 모든 경제원조의 집행 연기

4. 군사원조의 잠정적 동결

5. 박정희가 제1차 경제계획으로 요구한 공업화계획 자원 23억 달러 요구의 백지화

6. 조속한 한일회담 재개를 통하여 단시일 내의 한일국교정상화 실현

7. 베트남 사태에 대한 남한의 협력 등을 요구한 거예요. 그 중에서도 조속한 민정이양, 군의 원대복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한일회담 재개를 통한 조속한 한일국교 정상화 실현이었어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서는, 한국은 그런 자본집약적 경제계획은 불가능하니 대신 실업자 구제를 위주로 하는 노동집약적 경제계획으로 개편할 것, 그러기 위해서 미국의 경제조사단을 보내겠다는 애기였어. 탱크니 비행기니 하는 무기나 군사원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었어. 이와 같은 내용의 나의 기사가 합동통신사를 통해서 전국의 신문, 방송으로 보도되니까 동아일보와 조신일보의 특파원 기사로 한숨만 쉬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의 얼굴에 다시 희색이 감돌게 된 거야. 이것이 나의 특종의 내용이었어요. (276-277)

 

[한일교섭]

나는 한일회담에 앞서서 이미 일본이 1950년대에 과거 일본이 점령통치했던 베트남·버마(현재의 미얀마)·필리핀이 재산청구권을 행사한 데 대해 배상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규정된 일본의 의무였지. 그래서 일본 외교문서에서 이 세 나라에 대한 배상의 전모를 찾고, 그 밖의 관련 정보를 수집했어.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거요. 무언인가 하면, 현금상환은 전혀 없고, 개개인에 대한 상환 형식은 취해지지 않았다는 거요. 더 자세히 말하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배상 의무는 다음과 같아요.

1.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 비밀합의(소위 김-오히라 메모)에 따라서 일종의 대한민국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된다.

2. 그 금액은 원권리자인 개인이나 기업이나 법인에게 직접 현금으로 상환되는 것이 아니라 일·한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한국의 경제계획의 자금으로서 제공된다.

3. 그 경제계획 사업은 일본정부의 최종 동의를 전제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 취지는 일본측이 지명하는 사업체들이 담당·감독한다.

4. 일본측의 한국에 대한 ‘축하금’은 한국의 경제계획에 소요되는 일본내 생산품으로서 시설의 구매, 인건비 등 용역(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데 충당된다. (317-318)

 

[베트남 전쟁의 원인]

미국의 패권주의 전쟁으로 시작해서 한국군까지 개입하게 되는 소위 베트남전쟁이라는 것은, 그 원인과 역사적인 배경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한국인들이 그 전모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워요. 그래도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불란서와 베트남 인민의 전쟁이었던 1946년부터 56년까지의 ‘제1차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돼요. 그 뒤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확대된 전쟁이 말하자면 ‘제2차 베트남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요. 54년 휴전협정은 북위 17도를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남북 베트남으로 잠정적 행정 관할구역을 정한 뒤에, 2년 후인 1956년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이것이 1954년 정전협정합의의 핵심이었어요. 그런데 휴전성립 1년이 지난 1955년에 미국이 총선거를 거부한 것이 제2차 베트남전쟁의 결정적인 원인이에요. (341)

 

[베트남의 교훈]

로마제국도 그렇고, 심지어 개인의 경우도 힘에 도취되면 그 주체는 이성을 상실하게 돼요. 폭력의 전능성에 대해서 자기도취가 된 나머지, 미국이 자기비판을 할 이성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 거지요...(중략)...베트남전쟁을 이끌었던 미국정부의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국방장관은 베트남전쟁에서 패망한 20주년에 해당하는 1995년에 자기반성을 겸한 회고록을 출판했어요. (과거를 돌아보며: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 In Retrospect :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중략)...특히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어째서 미국이 원시적 농업부족 집단과 같았던 베트남 인민들에게 패배했냐 하는 14가지 항목의 자기비판을 열거한 장아 ‘제11장 베트남의 교훈’이에요. 이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씩 줄이면 다음과 같아요.

1. 전쟁 상대방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중대한 오판

2. 소위 베트공과 월맹의 지도자와 세력에 대한 인식 부족

3. 지나친 미국이익을 추구한 정책의 오류

4. 미국이 지원한 ‘반공적’ 사이공정권 지도자들의 반민중성

5. 오랜 식민지 지배에 시달린 베트남 인민의 외세에 대한 반감과 해방 독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에 대한 몰지각

6. 베트남 민족의 역사·문화·종교·정치·생활·관습 등에 대한 무지

7. 미국식 자본주의와 정치제도를 유일무이한 인류적 생존 양식으로 착각한 미국의 오만과 무지

8. 현대적 무기와 군사력 등 물질적 전쟁수단에 대한 과신

9. 무지하지만 자주독립의 민족적 미래에 대해서 ‘의식화된 인민의 원초적 역량’을 과소평가

10. 세계 인민들과 국제적 협조·호응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고립된 전쟁

11. 미국 국민에게조차 베트남전쟁의 의의와 필요성과 정당성을 이해시킬 수 없었던 정책적 실패

12. 미국정부와 군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의 전지전능을 과신

13. 전쟁수행 예측이 빗나갔을 때에 정부 내 각 분야의 협동 능력의 상실과 정책적 혼동

14. 미국 건국 이후 불패의 군사적 역사에 도취하여 그 밖의 모든 요소들을 무시했던 힘의 오만 (352-354)

 

[종교]

나의 종교관을 말하자면, ‘신’이라는 것은 대자연이 인간의 인식 능력을 초월한 온갖 형태의 변화를 발동하는데 공포감을 느낀 원시인간들이 그 공포심으로 말미암아 발상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이 현실의 생존 조건에서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과 좌절, 슬픔, 그리운 이와의 영원한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과 어디선가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 등을 인간적 운명의 한계를 넘은 어딘가에서 위로와 보상받고, 괴로움과 쓰라림의 상처를 치유받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신’이라는 기능적 존재를 상정했다고 생각해요. 요컨대 나에게 신이란 것은, 원시시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공포감’과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인 가질 수밖에 없는 생존의 공포심, ‘인간적 한계를 충족해줄’ 어떤 존재로서 신을 창조했고 또 ‘신을 필요로 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필요 때문에 신을 ‘창조’했다고 나는 믿고 있어. (507-508)

 

[자유와 평등]

우리가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온갖 성격과 형태의 사회에서, 오랜 체험과 그것으로 얻어진 예지로써 이제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 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까이 인류의 근현대사에 점철된 수많은 봉기·민란·폭동·혁명·민족 해방 전쟁 등에서 우리는 목표 추구의 질적 무게는 같지만, 목적 달성의 선후 또는 완급에서는 ‘자유’가 평등보다 앞섰다는 많은 실례를 정확히 평가하고 인식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임형이 고민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구만. 현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패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평등으로만 가능하지만, 현실적·사회적 생존차원에서는 개개인에게 가치 있는 것은 자유가 먼저이고 다음에 평등을 욕망하게 되니까요. (523)

 

[중국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

그것이 서양 사람들이 늘 제기하는 문제지요. ‘김일성 숭배’하고는 성격이 달라요. 북한의 역사서술에서 대부분의 현대사가 김일성 한 사람만의 것이고 통일민족해방 행위를 한 사람도 그 한 사람이지만, 중국의 혁명운동 관계문헌이나 기록에는 모택동 이외에 나올 사람은 다 나와요. 모택동의 역할이 다른 사람들이 마땅히 받을 평가보다 높은 비중으로 묘사된 것은 사실이지. 분량에서나 빈도에서나. 그러나 모택동 숭배사상은 김일성 숭배하고는 달라.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모택동 자신이 “이런 식으로 기술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훈시하기도 했고, 본인이 ‘역겹다’고 공식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니까요. 김일성 숭배하고는 많이 달라보여. 다만, 최후기인 ‘홍위병’ 시기는 숭배적으로 묘사된 것이 사실이지. 모택동도 인생 말기에는 정신이상 상태였으니까. (584)

 

[지식인으로서의 기본철학과 정신]

나는 1977년에 출판된 저서 [우상과 이성](한길사)의 서문에서 나의 지식으로서의 기본철학과 정신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 바 있어.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손에서 펜을 놓는 날까지 이 정신으로 탐구하고 쓰고, 세상에 알릴 결심이에요. (675)

 

[자기희생적인 이른바 ‘사회주의적 인간이 왜 안 됐느냐?]

생물학적 인간의 속성에 착안했어요. 결국 나는 인간은 원래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지만, 차원 높은 공동선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속성인 ‘이기심’을 극복하거나 적어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화혁명을 통해서도 또 사회주의 제도로도, 그리고 비록 사이비과학으로 파탄났지만 소련 심리학자 파블로프가 짐승을 이용해 시도한 ‘조건반사’적 반복 훈련을 통해서도, 인간의 속성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됐어요. 다 실패로 돌아갔지.

나의 결론은,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물적 속성 그 자체이며, 그런 속성을 제도나 교양교육을 통해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구한 속성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었어.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기어다니는 갓난아이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한번 쥔 것은 절대로 놓지 않고, 다른 아기와 나누려 하지 않아요. 어쩌면 이것이 인간종의 정신작용의 원초형태가 아닐까? 욕망의 충족 뒤에는 나눔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한, 자기만이 소유해야 한다는 욕심, 배타적 소유욕, 그리고 이기심이 원초적 인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본주의는 인간의 속성인 ‘이기심’에 호소하는 방법과 제도로, ‘물질적’ 생산을 극대화시켰고 그것으로 승리했다고 본 것예요. 그러나 인간과 인류의 진정한 승리는 그것과 다른 의미의 절반의 승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지요. (682-684)

 

[자본주의,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지금의 시점에서 자본주의에게 일단 열세에 있다고 해야 하겠지요. 자본주의는 원리적으로도 그렇고 실제 운용의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도 그렇고, 개인의 사리사욕과 이기심과 끝없는 소유욕을 인간 행위의 원동력으로 삼고, 그것을 제도화하고 법적으로 보호함으로써 성립되지요. 심지어는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남을 죽이든지, 남을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서 돈을 벌든지, 또는 범죄 행위를 해서 돈을 획득하든지 간에, 일단 사유재산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념이 앞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인간 본능을 그대로 개방해서 그것을 물적 획득과 생산을 위한 인센티브의 에너지로 동원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인간중심적 생산방식이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략)...

자본주의의 발전원리는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소유의 ‘물신 숭배’ 신앙으로 물적 생산과 낭비와 파괴를 인간 행복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어요. 그 대신 물질적 획득과 소유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적 요소들은 손상되고 무시되고 파괴되는 위험도 정비례적으로 커집니다. 자본주의사회 어디서나 그렇고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지요. 법률이나 종교가 아무리 해도 인간의 소유욕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저기 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유럽의 사회체제는 소련의 체제보다 훨씬 나은데다, 미국사회의 속성인 이기주의·폭력주의·극심한 빈부격차·범죄·타락을 상당한 정도까지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먼 옛날에 인류의 사회적 형태로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된 인간 생활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어요. (685-687)

 

[체제수렴적 통일론]

전통적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은 현대적 시장처리를 능률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말이지. 문제는, 그렇게 전적으로 시장화하면 인간복지·인간가치적 기능은 사회주의의 인간우선적 철학과 정책으로 보완·확보해야 할 필요가 생겨요. 이 기능을 이론적·경험적으로 적절히 배합하는 게 유럽 사회민주주의(또는 민주사회주의) 제도라는 데는 현재 거의 누구나가 동의하고 있지요. 그러기에 ‘사회주의가 패배했다’는 미국의 사이비 자본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소위 ‘역사의 종언’은 그의 주장이 나옴과 동시에 자기부정을 당한 셈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남북한도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절반씩 도입해서 비슷한 경제·문화가 되어야 각기 국민(인민)의 행복이 증진할 수 있어요. 그렇게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절반씩 가미한 제도의 국가는 통합되기가 쉽지. 이 방식이 내가 주장하는 ‘체제수렴적 통일론’이에요. (694-695)

 

[서해 북방한계선]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조속히 체결하여 미군을 그 가족에게 돌려보낸다는 공약으로 당선됐으니까 빨리 휴전협정을 체결하려고 전력을 다했지. 이승만 대통령이 계속 분쟁을 일으키고, 휴전이 성립된 뒤에도 계속 그것을 깨려고 하니까 화가 났어요. 정전협정 체결 뒤에도 계속 그러니까,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체포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금 군정을 선포케 하고, 이승만정권을 완전히 붕괴시켜 휴전협정을 준수하는 새 정부를 내세우기 위한 쿠데타 준비까지 다 했거든요. 한국 해군이 다시는 황해도를 침공할 수 없게 유엔사령부가 남한의 군함이 북한의 황해도 해안까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는 하나의 선을 그은 겁니다. 그것이 소위 ‘서해 북방한계선’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정전협정으로 금지된 선이지만 미국은 그것을 북한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국(남한) 해군의 ‘출입금지선’으로 유엔군사령부 내부 규정으로 한국정부와 한국군에 실시한 거요. (718)

 

[읽는 이를 위하여]

이 긴 시간에 걸친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自由)와 ‘책임’(責任)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건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背信)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중략)...

마지막으로 덧붙일 청이 있다. 이제는 거의 지나가버린 그 시대를 인간적 고통과 분노, 상처투성이의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기성세대나, 앞 세대들이 심고 가꾼 열매를 권리처럼 여기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맛보고 있는 지금의 행복한 세대의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직면했거나 처했다면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그럼으로써 이 자서전의 당사자와 대담자가 책 속에서 진행한 것과 같은 자기비판적 대화의 기회로 삼기를.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나와도 비판적 대화도 가질 수 있기를.

2005년 2월 군포시 산본 수리산 밑에서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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