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박노자 |만감: 일기장  2007/02/07 20:59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379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예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 (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써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데르부르그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며는,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이었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 (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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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아 2007/02/08 10:20

    슬랴프니코프...관심이 생기는 사람이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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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르주 2007/02/08 15:00

    쉴랴프니코프에 대해서는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하다 알게된 인연이 있습니다. 사실을 따지자면, 트로츠키가 지금은 스탈린에 반대하는 투쟁의 최선두에 서있는 것처럼 대표되나-물론 그가 한 일정한 역할은 인정되야겠지요-그보다 앞서 여러 활동가들이 그런 투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쉴랴프니코프가 활동한 '노동자반대파'나 '민주집중파'같은 볼셰비끼 분파들이 대표적이죠.
    이들은 이미 1920년부터 당의 관료화와 기형화를 비판했고 이 때문에 당내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당은 이들을 겨냥해서 분파 자체를 금지시키기까지 했죠.
    일부 '노동자 반대파' 활동가들은 사실상 당과는 독립적으로 현장에서 비밀리에 파업을 조직하거나 선동을 한 것으로 인해 볼셰비끼 비밀경찰(체카)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들이 일찍부터 당에 대한 비판활동을 시작했을때 트로츠키는 오히려 이들을 공격하고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했었습니다.
    이때문에 노동자 반대파의 중심적인 또다른 인물인 알렉산드라 꼴론따이는 평생 이 때의 트로츠키와의 충돌의 기억탓에 그와는 상종도 안하려 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볼셰비끼 분파들은 스탈린에 맛서 현장에서,지하에서 끈덕지게 싸웠지만 결국 스탈린에 의해 소멸되고 맙니다.
    트로츠키 자신은 이들에게 연대를 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는데 이때문에 트로츠키가 이끈 좌익반대파가 최종적으로 패배했을 때 트로츠키의 측근인 라덱은 트로츠키가 왜 이들 볼셰비끼 분파들을 경원시하고 배타시했는지 무척이나 의아해합니다.
    그래서 전, 트로츠키가 패배한 이유는 여러 상황적 요인들도 있겠지만, 핵심적으로는 스탈린에 대항한 싸움을 현장에서, 노동자들 속에서 정력적으로 수행할 이들 활동가들과 정치적 거리를 두고 심지어는 그들을 억압하는데 동참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손발을 자른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됐다고 봅니다.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는 당내 민주주의는 주장할 수 있었어도 결코 작업장차원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는 주장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트로츠키가 가지고 있는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쉴랴프니코프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반대하는 싸움에서 제한적으로 협력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항시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레닌도 유언장에서 쓴 것처럼 트로츠키의 약점은 '지나치게 행정적 측면에 치우치는 것' 즉, 관료주의에 기대는 측면이 많았고 그 자신이 초기 소비에트의 관료주의적 위계체제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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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무아 2007/02/08 17:29

    흠.... 공부가 마구마구 되는군요..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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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마법사 2007/02/16 04:49

    비슷한 맥락에서.. 배반당한 혁명을 읽으면서 헛구역질이 나왔더랬죠.. 핀란드사태에 대한 책임회피적이고 모험주의적 패권주의적 서술들...

    '타락했지만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해야 한다' 는 '진지'개념이 트로츠키에게 있어서 '기득권의 방어'로 쓰이듯이 트로츠키를 사회주의 최초의 관료제의 타락으로 보는게 낫지 않을까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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