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연재소설>- 인생역전(1)

 

지난 번에 올렸던 엽기적 시(詩)와 달리 이 글을 올리기까진 좀 고민이 있었다.

 

우선 미완의 작품이다. 때문에 '연재소설'이라고 붙였다. 완성시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허걱..


또 앞의 시보단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이 소설에 앞서 내 생애 첫 소설을 썼었다. 여기 올리는 글과 아주 다른 일종의 성장소설이자 연애소설. 근데 묻어두기로 했다. 언제까지 묻어둘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 글을 읽었던 한 친구가 이런 조언을 해준 적 있다.


“원래 처음 쓰는 작품은 자기가 간직하는 것 같아. 자기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첫 작품에 거의 다 녹여내니까. 첫 작품은 자기와의 대화인 것 같아. 그리고 차츰 자기와의 대화에서 벗어나, 자꾸 쓰다보면 세상과의 대화를 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더 커지겠지?”


언제쯤 세상과 대화할 수 있을 만큼 품이 넓어질 수 있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생역전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동화책 마지막 구절이 문제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구절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들은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고 결혼했지만, 서로에, 결혼생활에, 실망을 느껴 싸우는 일이 잦았고, 실망이 커지면서 상대에 대한 증오나 심할 경우 살의를 느낀 적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혼하자’는 말을 적잖이 내뱉었고, 어떤 때는 선수를 빼앗겨 상대방이 먼저 ‘헤어지자’고 요구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으며, 때론, 오! 하나님 용서하소서, 이웃의 아내를 탐하기도 했다. (주 : 이 욕망의 실현 정도는 개인마다 편차가 크다. 특히 이웃, 즉 욕망의 대상의 남편이 자신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 우위를 갖고 있느냐를 중요한 변수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내가 사랑스러워 보일 때보단 길 가는 모든 여자가 낫다고 느껴지는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유난히 옆에 찰싹 붙어 오는 아내를 모른 척하며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아이 때문에 참아야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 시작한 건 자식놈이 채 1살이 되기도 전이라 기나 긴 결혼 생활 동안 도대체 몇 번이나 되새겼는지 헤아리기 힘들다. 자식들은 들어가는 돈에 비해 천천히 자랐다.

 

좀더 나이가 드니 ‘그래도 늙어 등 긁어줄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지 않나’라는 좀더 건설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아내하곤 비교도 안될 만큼 사랑한, 거품 빼고 말하면 투자한, 자식들이 커가며 배신감을 안겨주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랬다.

 

드디어 자식들이 다 자랐는지 그들의 전철을 밟겠다며, 물론 본인들은 부모처럼 살지 않을 거라 믿으며, 제짝을 찾아들 갔고, 아내와 둘만 남겨졌지만, 기대가 크지 않으니 실망이 크지 않더라. 물론 기쁨도 그랬다.

 

그러다 병상에서 옆에 있는 아내를 보며 ‘그래도 총량적으로 내 인생이 행복했겠거니’ 위안하며 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주 : 여기서 행복의 총량 역시 개인마다 편차가 크고, 심지어 총량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한다.)

 

위에서 아내를 곧장 남편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
.
.
.
.
.
.
고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생략과 압축이다. 따라서 왜곡이기도 하다.

 

또 신부가 신랑집에 지참금을 가지고 가거나, 신부 측 가족에게 신랑이 신부대를 지급하는 풍습들을 볼 때 인류사적으로 결혼의 형태는 다양했지만, 그 기원에서부터 ‘거래’였다. 특히 3백-4백여 곳의 결혼정보회사가 성업 중이며 연간 5백억원 규모의 ‘짝짓기’ 시장이 형성된 대한민국 사회는 결혼을 통한 경제적 거래가 자본주의와 비례해 발전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결혼에 대한 동화책 마지막 구절의 효과가 너무도 강력해, 극히 이성적인 남성마저 포섭한다는 것이다. 박 검사처럼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