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미국, 선군정치의 나라(?)

 지난 3주간 팔자에 없는 미국 여행을 다녀오느라 블로그에 글을 한달 넘게 올리지 못했다.

 

몸은 진작 귀국했는데, 구름 위를 헤매고 다니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한동안 고생했다.

 

이제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 슬슬 귀국 보고 대회를 하고자 합니다.^^

 

미국, 선군정치의 나라(?)

 

"이제 우리 미국의 진정한 영웅들을 불러보고자 합니다. 2차대전 참전 용사들 일어나 주세요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환호성),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환호성), 이라크전 참전용사들(환호성), 육군(환호성), 해군(환호성), 공군(환호성), 해병대(환호성), 그들의 아내, 아들, 딸, 부모, 모두 일어서주십시오.(환호성)"

 

지난 3주간의 미국 방문 동안 내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하와이에서 한 호텔에서 있었던 디너쇼 형식의 하와이 민속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을때 사회자는 그렇게 '미국의 영웅'들을 호명했고, 그 행사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한번씩은 일어났다.

 

나중에 얘기를 듣고 보니 그 호텔이 군 관련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유독 군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겐 섬뜩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워싱턴 D.C에 있는 2차 세계대전기념관의 성조기)

 

어느 사회에서나 전쟁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일상의 조직적인 파괴,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성, 더 나아가 악마성, 또 전통적ㆍ공동체적 규범이 급속히 무너지면서 경험하게 되는 기존 가치체계의 혼란. 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가족과 예기치 않은 이별이나 상실, 신체의 부분적 상실, 극도의 굶주림과 가난, 예측 불가능한 미래...



  이처럼 인간의 잠재적 광기를 총동원하는 전쟁은 인간의 집단적 기억 속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각인된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역사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사회도 반세기전 일어났던 한국전쟁과 그 결과인 분단체제로 전쟁의 비극성과 잔인성을 경험하고 있다.
  
3주간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한국보다 훨씬 많은 전쟁을 수행한, 그리고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 아래 실체가 불분명한 위협세력과 전쟁 중인 미국 사회 곳곳에서 그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또 이런 상처를 직면하는 방식의 차이는 적잖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집집마다 나부끼는 성조기, 일상화된 검문검색
  

"9.11 이후 옷에 성조기 배지를 달고 다녔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9.11 테러 이후 전사회적인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고 싶었다."
  
하와이에서 만난 40대 미국 시민은 지난 2001년 9월 11일 이후 3년 넘게 성조기 배지를 달고 다녔다고 밝혔다.
  

워싱턴, 뉴욕 등 도심 주택가로 들어서면 집집마다 성조기를 걸어놓은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성조기를 워낙에 좋아했지만 일년 내내 성조기를 걸어놓는 풍경은 9.11 테러 이후 비롯된 것이라고 미국 정부 관계자가 설명했다.
  
또 9.11 테러 이후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가 검문검색이 일상화 됐다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미국 입국시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기본적으로 한다. 또 국방부, 국무부 등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정도 규모의 빌딩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신원조회, 가방검사 등을 거쳐야만 했다.
  
특히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은 4차례의 검문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건물 바깥에서 군인들에게 신분증 및 가방 검사를 마친 뒤 건물 입구에 마련된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두 가지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안내데스크로 가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방문 목적 등을 확인받아야 한다. 방문 일정이 확인되면 안내요원이 사진촬영을 한 뒤 사진이 인쇄된 방문증을 만들어준다. 이 방문증을 가지고 다시 줄을 서서 방문증 뒷면에 찍힌 바코드를 인식하는 기계가 달린 출입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펜타곤 건물에 진입한 것이다.
  
펜타곤 건물 내에선 기본적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사진기는 얼마든지 테러용 폭탄으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펜타곤 내에서도 브리핑룸 외에 사진 촬영이 자유로운 곳이 있다. 지난 9.11 테러 당시 여객기 테러로 희생된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당시 비행기 충돌로 탑승자를 포함해 모두 1백89명이 숨졌다. 이 기념관에는 희생자 명단이 새겨진 대리석 비석, 희생자들의 사연이 소개된 책자 등이 있다. 한 옆에 작은 예배당도 딸렸다.

 

새로운 관광명소가 된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된 지점. 원래는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 등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 또는 피폭 중심지를 뜻하는 군사용어)에서도 9.11 테러가 미국인들에게 준 충격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
  
미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이라크전쟁이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 한복판에는 제2차 세계대전기념관, 한국전쟁기념관, 베트남전쟁기념관이 이웃해 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전쟁기념관들을 찾은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국민들에게 아이디어를 공모해 만들어졌다는 베트남전쟁기념관은 기념관 입구에 사망자 이름이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책자가 몇권 배치돼 있었다. 그 책에는 사망자 이름 옆에 기념관 벽에 그 이름이 새겨진 위치가 기록돼 있어 추모객들이 찾아갈 수 있게 했다. 기념관의 검은 대리석 벽면에는 날짜순으로 사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기념관은 당시 군인들의 모습을 형상해 놓았다. 기념관 한쪽 벽면에 새겨져 있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글귀는 의미심장했다.
  
바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경고가 어쩌면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1950년대 반공법을 연상케하는 '애국법'(Patriot Act)이 통과되는 등 일련의 민주주의적 퇴행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아닌가 싶었다. 9.11 테러가 발생한지 6주만에 만들어진 이 법은 수사당국에 이메일과 전화 도·감청, 의료·도서관 기록 검열 등 개인정보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과 비밀영장·체포를 허용하고 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애국법은 숱한 인권 침해 논란과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지난해말 '북한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이 입안된데 이어 공교롭게도 기자가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3월초 미국이 2025년까지 전세계 독재국가를 민주화시키는 등 민주주의와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증진법'(Advance democracy act of 2005)이 의회에 상정됐다. 부시 제2기 행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을 대표하는 이 법안에 대해 '미국의 패권주의'라는 반발이 거세다.


 

(펜타곤 내 9.11 당시 여객기 테러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념관. 9.11테러를 포함한 각종 전쟁 희생자들을 미국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미국을 지켜낸 'American Heroes'라 칭한다.)


 

(뉴욕 그라운드 제로. 뉴욕시는 이 자리에 새로운 건물과 9.11 테러를 기념하는 기념관 등을 지을 계획이지만 아직은 무역센터 빌딩이 철거된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 참상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


 

(워싱턴 D.C의 한국전쟁기념관.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대리석에 기대 어린이 관광객들이 장난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언론의 위기

한 일간지 선배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 회사는 지난해 각 부서에서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

중견기자를 모아 야심차게 '기획취재팀'을 꾸렸다고 한다.

 

다양해지는 독자들의 요구를 총족시키고 신문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말이다.

 

근데 1년이 지나도록 별반 성과물이 없었다는 게 내부 평가다.

 

그 이유를 기획취재팀에 소속된 선배에게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더란다.



"기획취재팀에 제대로된 기획을 할줄 아는 기자가 없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에 쫓겨, 때론 뉴스를 쫓아 허덕이기만 했지

정작 무거운 문제의식과 긴 호흡을 갖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한

제대로된 기획기사를 고민하고 쓰는 것은

경력이 십수년인 기자들에게 조차 버거운 일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기자질을 시작한지 올해로 5년째인데

이대로 가면 나도 기획기사 하나 못 쓰는 중견기자가 돼 있을 게 분명하다.

 

상투적 표현으로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하지만

분초를 다투는 속보경쟁이 치열한 인터넷 시대에

그것도 인터넷 신문 기자인 나는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더욱이

언론이라 할 수 없는 포탈 사이트가

인터넷 뉴스 시장에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개별 언론사는 포털 뉴스에 하나라도 더 많은 기사를 내보내려고

자리 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노컷, 땅콩, 쿠키뉴스...

아...과거 언론의 그 근거없는 자신감과 자존심을 다 어디로 갔던가.

초기 인터넷 매체가 등장했을때

기사의 질과 신뢰성을 문제 삼으며

언론 취급도 안 할 때가 불과 2-3년 전이다.

요즘엔 기존 언론사의 인터넷판 뉴스를 보면서

정통(?) 인터넷 신문 기자들이 인터넷 뉴스의 질을 걱정하고 있다.

(우린 적어도 '정보보고'를 뉴스랍시고 노털에 제공하진 않는다.)

 

위성 DMB, 인터넷 방송의 대중화 등 앞으로도 언론 환경을 계속 변할 것이다.

 

기존 매체에 대한 독자들의 냉소가 어디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할 것인가.

 

그래서 각 언론사들은 생존의 활로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나를 비롯한 모든 언론 종사자들 앞에 놓여진 숙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준희와 오정희, 엇갈린 운명

"난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용기라고 본다. 사실 96년 효산 사건 터트리기까지 무척 많은 고민을 했다. 솔직히 터트리면 뻔하거든. '이문옥 꼴 난다'고 생각했었지. 이문옥 감사관도 양심선언으로 감옥가고 파면된 상태였으니까.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지."

 

지난 96년 4월 "효산종합개발 콘도사업 특혜의혹에 대한 감사를 당시 감사원 남모국장이 뚜렷한 이유없이 중단시켰다"고 내부 고발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현준희씨.  
  
그의 양심선언을 전후해 효산그룹이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에게 떡값으로 6천만원을 줬고, 김영삼 대통령의 중학교 동창 김경배씨가 고문으로 있으며, 김현철씨의 대리인이던 박태중씨가 효산콘도 분양권 24억원 어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됐고, 일부 언론에선 이 사건의 배후로 김현철씨를 지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효산이 제일은행으로부터 1천1백50억원을 불법대출한 점을 적발해, 이철수 제일은행장과 장장손 효산그룹 회장을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 했다.

 

현씨는 감사원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그해 6월 파면됐고, 감사원으로부터 고발 당해 감옥에 가기도 했다. 또 1심과 2심에선 명예훼손 부분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났으나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뒤집고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증거가 포착되지 않는 한 대법원 판결이 뒤집어 지기를 기대하긴 힘든 상황이다. 지난 9년간 겪어온 개인적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당시 감사원, 검찰, 은행, 건교부, 경기도 등을 떡 주무르듯이 해 불법 승인을 받은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효산 사건'은 아직도 감사원을 괴롭히고 있다. 

 

지난해 10월 감사원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효산콘도 비리 문제와 관련된 질의를 통해 이 문제를 다시 쟁점화시키기도 했다. 감사원은 이 의원이 요청한 자료에 허위 답변서를 보냈다가 전윤철 감사원장이 잘못을 시인하는 일도 있었다.

 

또 전국공무원노조도 지난해 11월부터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 제기를 하고 있다.

 

그 의혹의 핵심엔 최근 감사원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오정희씨가 있다.

 

오정희 총장이 당시 5국2과로 효산콘도 비리 정보를 은폐.축소하는 것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오 총장은 이 같은 주장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는 "감사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감사가 부절적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을 현준희씨 본인만 사안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며 "내가 정보보고를 검토했을 땐 이미 감사가 끝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을 대하는 참여정부의 태도를 보건데, 아마 오 총장 건도 '의혹 제기' 수준에서 끝날 것으로 보인다.

 

'효산콘도 비리 감사 중단 사건'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현준희씨와 오정희 총장의 엇갈린 운명에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오정희 총장이 지난달 25일 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해찬 딸. 노무현 아들

흠..아마 나를 '꼴통'으로 지목한 연세대 유석춘 교수가 이 글을 보면 "네가 그러니까 꼴통이지" 할 듯 싶다.

 

오늘 1급이상 고위 공직자 재산등록 자료가 언론에 공개됐다. 이 자료는 25일 관보를 통해 게재된다.    



1년동안 81억1천여만원의 재산을 불린 홍석현 주미대사 동생인 홍석주 인천지검장도 놀랍고, 국무위원중 재산이 가장 적은 김근태 의원의 재산이 4억여원에 이를 정도로 다들 억대의 재산을 모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쨌든 이날 나의 배배 꼬인 심사를 자극했던 것은 우선 노무현 대통령 아들 건호씨가 지난 한해 봉급을 저축해 1천9백64만4천원의 재산을 불렸다는 것이었다.

 

지난 2002년 LG전자에 입사했고, 결혼 4년차, 딸을 하나 둔 가장인(맞벌이 부부도 아니다) 장남 건호씨의 예금액 증가부분에 대해 김종민 대변인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정도로 특별히 큰 금액은 아니라고 본다"며 "봉급을 착실히 저축할 경우 이 정도 저축액은 가능하지 않냐"고 밝혔다.

 

근데 오후 늦게 발표된 자료를 보다가 노건호씨보다 더 착실히 저금을 잘한 이를 발견했다.

 

바로 이해찬 총리의 외동딸이다. 이 총리의 외동딸은 용돈을 모아 1년 동안 1천2백24만4천원의 재산을 불렸다. 98학번인 딸의 재산 증가 부분에 대해 용돈 저축이라고 밝힌 것을 보아 직업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총리 딸은 지난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는 지난해 6월 총리에 취임하고 재산등록을 하면서 딸의 재산은 은행예금 1천2백4만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상당수의 공직자가 공직자윤리법상의 허점(?)을 이용해 자녀나 부모 등 직계 존비속의 재산 고지를 거부해왔던 것과 비교해 보면 여러모로 개선된 것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전총재는 장남 정연씨의 재산 공개를 거부했었다.)

 

또 이들 VIP 급 자녀의 재산이 1천만원대 밖에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칭찬받아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불리진 않았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왜 그렇게 배배 꼬였냐고?

어제 좀 이상한 날이었다.

 

하루종일 추적추적 내린 눈/비와 음산한 바람과

 

오후 늦게 전해진 배우 이은주의 자살 소식도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은주의 팬은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강인해 보이던 그녀가 우울증에 시달려 자살했다는 게 섬뜩했다.)

 

그러다가 어제 저녁 우리 회사 대표가 평 기자들에게 저녁을 사준다고 해서

 

음산한 날씨를 헤치고 용산 국방부 뒷골목에 위치한 '봉산'이란 고기집을 찾았다.



평소 맛보단 찾아가기 수월한 장소를 선호하는 편이라 가는 내내 속으로 툴툴 거렸더랬다.

(공간지각력이 떨어져 길을 잘 못찾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튼 어렵사리 찾아간 술집은 손님들로 그득찬 걸 보니 소문난 집인게 확실하다 싶었다.

 

그리하여 그 맛있다는 음식맛을 맛보려는 찰나,

 

회사 후배가 잠시 나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 교수였다.

 

유 교수는 내 기사를 잘 보고 있다며 대뜸 "사람이 왜 그렇게 배배 꼬였냐"고 질문했다. 뒤 이어 "어릴 때 성장기가 불행했냐" "나도 보수 꼴통이란 소리를 듣지만, 홍 기자도 진짜 꼴통인 거 같다"고 나에 대해 평가했다.  

 

그러면서 소주를 쉴새 없이 권했다. 

 

결국 그날 난 그 집 고기는 한점도 못 먹고 양배추를 안주 삼아 깡소주를 들이켜야했고, 일찌감치 취해버렸다. 쩝;;;

 

건 글코...내 글을 보면 내가 글케 꼬여 있는 거처럼 느껴지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성들이여, 춤을 추자"

"남성들이 춤을 멀리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다."

 

엊그제 퇴근 후 서점에 들러 이런 저런 책을 훑어보다가 <무용의 현대>라는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들게 됐다.

 

늦은 나이에 발레에 미치게 됐다는 일본 문예평론가 미우라 마사시(三浦雅士)가 쓴 춤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그는 이 책에서 20세기 후반부터 무대예술의 중심이 연극에서 무용으로 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마사 그레이엄(1893-1991. 미국 현대 무용의 개척가. 그의 이름을 딴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와 무용단이 있다),  조지 발란신(1904-1983. 뉴욕시티발레단을 만들었으며 네오클래식(신고전주의) 발레의 창시자), 유리 그리고로비치(1927. 볼쇼이발레단 예술감독. 볼쇼이 발레단에서 33년간 수석 안무가를 맡았었다) 등에 대한 평을 실었다.

 

서점에서 잠시 저자의 무용관을 밝힌 부분인 '지금, 왜 춤인가'라는 글을 읽었는데, 춤과 산업화와 신체의 표준화에 대한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끔 방송에서 일부 아프리카나 동아시아 지역에서 아직도 부족사회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춤이 그 사회를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사회에서 춤은 특정 성별이나 연령, 계층이 향유하는 예술이라기 보단 온 부족이 기쁨, 슬픔, 분노 등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소통 수단이다.

 

저자는 남성이 춤을 추지 않게 된 것은 산업화 이후로 그 이후 노동자 남성들에겐 춤 대신 '체육'이 심신을 단련하는 수단으로 확실히 자리잡게 됐다고 밝혔다.

 

춤의 궁극적 목적이 몸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수많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체육은 인간 신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저자는 또 체육은 인간의 몸을 표준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동시에 그것이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산업화로 공장을 통한 대량생산체제가 도입되면서 똑같은 기계를 사용해 생산을 할 수 있는 표준화된 노동자들이 대거 필요하게 됐다. 규격화된 신체를 가진 노동자들을 확보하는 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산업화 이전 사회구성원들의 몸의 다양성은 지금보다 훨씬 컸다고 말했다.

 

저자는 또 남성들의 신체를 표준화시키는 것은 근대 국가의 '군대'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고로 남성들이여, 춤을 춰라.

 

당신의 몸과 감성 체계를 정해진 틀에 몰아넣으려는 자본과 국가의 음모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춤을 함께 추자.

 

고백의 글

 

난 거의 모든 종류의 운동에 소질이 없지만 춤추는 것은 좋아한다. (결코 잘 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난 공을 가지고 승패를 가르는 종류의 운동은 싫어한다. 이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태권도, 권투 등 힘을 쓰는 운동도 싫어한다. 맞으면 아프기 때문이다. 스키, 사이클, 롤러브레이드 등 바퀴가 달린 것을 타는 운동 역시 싫어한다. 넘어지면 다친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 혼자 하는 달리기나 등산이 유일하게 부담을 갖지 않는 스포츠다.

 

춤은 다르다. 춤은 경쟁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만족이 목적이다. 춤은 신체의 한계에 도전한다기 보다 몸을 내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다. 

 

그렇다면 춤을 출만한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어디서 춤을 추냐고?

 

좀 호사스런 취미라고들 할지 모르지만 내 취미 중 하나가 '발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건 1년반 정도 지났다.

 

일주일에 두번 집 근처의 발레스튜디오에 가서 천근만근 무게의 다리를 들어올리며 뒤뚱뒤뚱, 1시간 반 가량 땀 흘리며 춤추는 게 내 일상의 한 부분이다. 춤과 함께 춤추는 여자들의 수다가 즐겁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의와 행복

오늘 한겨레에서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의 칼럼을 읽었다.

 

이 칼럼은 물론 '철학적' 탈성장의 관점에 기반한 글이다.

 

"물질이 어느 정도나 있으면 우리가 행복해질까? 우리는 부가 늘어나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물질의 증가를 행복의 전제로 두는 점에서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는 큰 차이가 없다.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누느냐를 두고 생각이 갈라질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 세계 각국의 부와 행복지수를 나타낸 도표 한 장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자나라가 될수록 더 행복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필리핀이나 브라질 국민들은 그보다 훨씬 잘사는 포르투갈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일랜드, 핀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사람들도 미국보다 ‘못살지만’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 칼럼과 또 이 칼럼을 진지하게 읽는 나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사회가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변했다는 거다. 나 자신도 그렇고.

(물론 간혹 어떤 사람이 '행복하세요' 이런 류의 인사를 하면 아직도 낯 간지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우리(나)는 행복한가'라는 물음 자체가 참으로 '생뚱맞게'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에 앞서 '우리(나)는 정당한가'가 질문돼야 한다고 믿었더랬다.

 

어쨌든 조효제 교수는 이 칼럼에서  리처드 레이어드의 <행복의 경제학>이란 책을 인용,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의 경우에도 전후 50년 동안 무려 6배나 잘살게 되었지만 행복지수는 변치 않고 있으며 여기에는 행복의 복잡한 사회심리적 요인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국민소득 1만5천달러를 분기점으로 하여 더 잘살게 되어도 행복은 거의 제자리걸음 또는 심지어 퇴보하는 경향까지 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윌킨슨은 어느 수준 이상부터는 발전보다 오히려 사회의 응집력과 평등이 그 사회의 건강도와 행복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장과 평등 사이의 해묵은 논쟁에 대한 어떤 암시를 얻는다...1만5천달러의 고지를 눈앞에 둔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진정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의 꿈으로 비웃지 않을 만한 집단적 지혜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

 

어쩌면 결론은 '우리(나)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확연히 다르며, 심지어 결과조차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직설법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에 관심 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도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 번, 휙~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엑스트라 / 정해종



난 정해종(41)이란 시인을 잘 모른다. 지난 91년 등단해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이란 두권의 시집을 냈으며 삼십대 중반이 넘어 아프리카 미술에 매료돼 지금은 '터치아프리카' 대표로 있으며 국내에 아프리카 미술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는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전부다.

 

"정해종의 시는 즐겁지 않다. 때로는 착잡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이미 청춘의 꿈의 내용대로 우리 일상을 채워갈 수 없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또한 버릴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데서 온다. 그래도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시인에게 희망은 막막하고 절망은 구체적이다."

 

그의 시에 대한 비평이다.

 

무엇보다 난  그의 직설법이 마음에 든다. 폐부 깊숙이 우려난 냉소와 비관을 빙 둘러 말하지 않고 확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는다. 아니 머리 속에 팍팍 새겨진다.

 

절망을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게 그가 가진 희망이다.  

 

을지로 순환선
                                정해종

 

구멍난 도시의 심장을 여러분께선
관통하고 계신 셈인데, 관통을
자꾸 간통으로 알아듣는 이가 있다
혀가 짧은 것도 아닌데 순환선을
수난선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그는 종일 간통죄 폐지의 거론과
도덕의 수난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잠실과 신도림이 은밀하게 연결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교통과 고통을 얼버무리고
다 그게 그거라고, 우리말 사전의 몇몇
어휘들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우겼다
90년대에 이르러 그는 문명과 문맹을,
利器와 利己를 얼버무려 놓았다.

이제 그는 없다, 언젠가 그가 바람난 서울을
떠나겠노라 했을 때 아무 말하지 못한 건
관통과 간통의 일맥상통을,
소득수준과 소비지수가 다른
잠실과 신도림의 은밀한 밀회를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호흡의, 팽창하는 성감의 서울
간통죄 폐지의 거론과 도덕의 수난을
생각하며 마크네틱 테잎 들이밀 때
나는 문명의 진공 속으로 빨려드는
담배꽁초가 되고, 아랫배에 힘주어
바리케이드 밀고 나오면
그렇다, 이건 영락없는 문명과 이기의,
간통

 


연애편지를 쓰는 밤 

                             정해종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간디에 대해

"봉사야 말로 나의 종교다.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요 며칠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에 관한 책을 연달아 읽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앙리 스테른 지음. <비폭력>-마리 아네스 꽁브끄 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단 최근 지율스님의 단식을 겪으면서 그냥 우연히 눈에 들어와 읽게 된 책들이다.



간디에 대해선 어린 시절 전기와 그의 삶을 다룬 영화를 통해 접한 지식이 아마 그에 대한 전부였었다.

 

또 서른 한살때부터 종교적 수행을 위해 부부 관계를 갖지 않았던 간디가 쉰 여섯의 나이에 당시 자신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찾아온 33세인 영국인 매덜린 슬레이트와 나눈 애틋한 '정신적 사랑'에 대한 전기적 소설(<미라와 더 마하트마>. 수디르 카카르 지음)이 출간됐다는 기사를 통해 간디를 다시 보기도 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의심하는 인간적인 간디의 모습을 말이다.

 

간디가 미라(매덜린은 이후 신화 속의 여성 양치기이자 힌두신 크리슈나의 연인인 '미라'로 불렸다)에게 보낸 편지엔 격정적인 그의 감정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당신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주변을 둘 러보다 문득 당신을 그리워 합니다. 물레를 돌려보지만 잊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 힌두 성가를 영어로 옮기면서 행복에 겹습니다. 내가 때로 격정에 사로잡혀 당신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던가요?"

 

이런 사랑은 인도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금욕적 생활을 추구하는 그에게 기쁨이자 동시에 크나큰 고통이었다고 한다. 

 

반면 이번에 읽은 간디의 잠언집은 운동가이자 구도자로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기자질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말하기 좋아하고, 평가하기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누군가를 '좋아한다' '존경한다' 이런 표현(특히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날 수 있는 경우)은 거의 쓰지 않는데, 간디의 의지와 결연함이 묻어나는 그가 남긴 짤막짤막한 글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기억하고픈 구절들을 옮겨보았다.

 

"노동자가 그토록 자구 실패하는 것은 비협력을 통해 저항함으로써 자본가를 무력화시키기보다는 자본을 탈취하여 스스로 자본가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유리한 입장에 있고 잘 짜인 계획을 가진 자본가는 언제나 노동자들 가운데 노동자를 탄압하기 위한 지원자들을 찾아낸다."

 

"모든 유형의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나 들짐승처럼 모든 사람에게 생명 유지에 필요한 욕구를 채울 권리가 똑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권리에는 공격에 대처할 수단과 의무가 따르듯이 우리는 근본적인 평등과 승리를 보장할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비폭력 수행자의 무기 가운데 가장 주된 무기인 단식을 남용할지도 모른다는 구실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폭력을 효과적으로 대체하기 위해 생각해낸 단식은 아직까지 시작단계에 있으므로 좀더 완벽하게 보완될 수 있다. 나는 비폭력을 생각해낸 사람으로서 어쨌든 비폭력의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인 단식을 포기할 수 없다."

 

"집착 때문에 행하는 모든 행위를 스스로에게 금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많은 위험을 피하게 해줄 황금률이다."

 

"비폭력은 결코 현실에서 악의와 맞서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결 능동적인 투쟁 형태이다. 악의를 늘릴 뿐인 폭력적인 반격보다 훨씬 현실적인 투쟁 형태이다."

 

"비폭력과 비겁함은 함께 갈수 없다. 무기를 소유한다는 것인 두려움이나 비겁함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면 진정한 비폭력은 전적으로 두려움이 없을 때에야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이란 물리적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굴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의지 굳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종교의 힘

어제 정부 측 대표인 남영주 국무총리실 민정비서관이 최종 협상안을 들고 지율스님이 계시는 정토회를 찾았다는 소식에 '비상대기'하며 간디의 잠언을 모은 책을 읽었다.

 

새만금 삼보일배도 그렇고, 지율스님의 단식도 그렇고, 변화의 속도를 감당하기조차 힘든 테크노크라시 시대에 '자연'이라는 오래된 주제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종교인들의 몸을 던진 수행이었다.

 

물론 그간 환경단체의 공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사심이 없기에 단순명확하고, 신심을 담았기에 비타협적이며, 마침내 타인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은 오랜 수양과 명상을 한 살아있는 현자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 이 글은 개굴님의 [터널이 아닌, 당신들의 막힌 귀를 뚫으십시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