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레미아서 16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언자의 생은 상징이다."
예언자의 삶이 상징이라는 사실은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목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유일한 증거는
예수의 낙인(갈라디아 6,17)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로사이 1,24)을
이렇게 온 몸으로 감당하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예수의 제자로 살려는 이들에게 이토록 고달픈 삶만이 허락된 것은
실상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20,26)는 교훈의 말씀 때문이다.
섬김의 역리는, 복음적 지도력과 세상을 향한 교회의 복음 증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세상에 휘둘리는 것도 교회의 길일 수 없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것 또한
교회의 사명일 수는 없는 것이다.
봉사하는 것,
자발적 포기와 낮은 삶을 선택하는 것,
그 역설이 불러 일으키는 경이로움...
그것이 십자가로 부활을 드러내신,
그 분의 길을 따르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교회는 섬기는 대신 가르치려 하고,
비우는 대신, 채움으로 세상과 맞서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6월 18일자로 주교회의 생명 윤리위원회로 임명된 이들 중
어느 교수님의 경우, 과연 그의 신학적 태도와 신앙이
주교회의 생명 윤리위원으로서 타당한 정도에 이르렀는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모 신부님이 자신의 저서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을 정도로
그의 신앙과 교회관은 극단적이다.
교회와 사회 안밖의 소수자들에 대한 저주와 증오에 가까운
비난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사람을 생명 윤리위원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처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단지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교황청에까지 지명도가 있는 유력한 평신도라는 이유만으로
주교회의 의사 결정에 참여 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면 더욱 비극이라 할 밖에...
최근 들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점점 더 권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교수나, 변호사라는 까닭에 주교회의로 불려 들어가고
연예인을 내세운 마케팅 전략이 선교라고 소개되는가 하면
저출산의 사회 구조적 요인을 등한시 한 채
무조건 많이 낳으라는 식의 활동만을 벌인다면
그것은 결코 섬기는 이의 자세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포를 뒷받침 하는 것은 신자들의 머릿수도 아니고
유력하고 똑똑한 엘리트 계층의 조언이나 협력도 아니며
무슨 무슨 위원회를 만들어 치밀한 대 언론 활동을 벌이는 일일 수도 없다.
말의 진정성은 삶에서 나온다.
유아와 임산부들을 위해 그 어떤 구체적 활동도 하지 않는 교회가
저출산을 홀로 근심하는 양, 매스컴을 타는 행위는 위선일 뿐이다.
야훼의 뜻을 받들어 온 생애를 걸고 조국의 멸망을 경고했던 예레미야의 최후는
머나먼 이집트 땅에서의 외로운 죽음이었다.
예레미야의 길, 바오로의 길
십자가의 복음과는 남다른 길은 복음과는 무관한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선택일 뿐이다.
예언자의 생, 교회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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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많이 나으라고 대책없이 말씀하실 것이 아니라 이 참에 신부, 주교님들 결혼하시어(성공회처럼) 이 나라 출산정책에 일조를 하심이 어떨지...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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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는 생명윤리연구회 새 위원을 아시다니,,,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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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오니 이런 댓글이 있네요...예전 글이라 잘못 아신 듯..이름을 대드릴까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