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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3/27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복음 19, 15).
    장산곶매
  2. 2005/03/27
    늙음, 죽음, 그리고 영원한 생명
    장산곶매
  3. 2005/03/27
    신학교 도서관을 살펴 보면
    장산곶매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복음 19, 15).

  • 등록일
    2005/03/27 02:37
  • 수정일
    2005/03/27 02:37


오늘 우리는 요한 복음 사가를 통해 예수님의 최후를 접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의 저자는 18, 1-19, 42까지의 기록을 통해 마지막 시련 앞에 직면한 예수님과 그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이 대목은 다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즉, 첫 대목은 대사제 예수님의 체포와 가야파의 집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두 번째 대목은 빌라도의 심문과정,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형과 그 직후에 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순서에 따르면 이미 예수님은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신 후였지만, 실제로 그분에 대한 거부는 가야파의 심문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너희의 왕을 십자가형에 처한 말이냐?"고 묻는 가야파 앞에서 군중은...사실은 우리 모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목숨처럼 여긴다던 율법을 어겼습니다. 신명기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으면, 이내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너희는 반드시 너희 하느님께서 골라 주시는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 같은 동족을 왕으로 세워야지, 동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 된다."(신명기 17, 14-15)

과월절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빌라도를 밖으로 끌어냈던 이들이(요한 18, 28) 이번에는 예수님을 못박기 위해 율법을 짖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율법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흔히 유대인들이 율법을 위해 예수님을 박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군중 속에서 율법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한 동기가 율법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님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이며(로마 7, 12), 죄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구실을 합니다.(갈라 3, 19) 그러나 율법의 이 모든 올바름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율법을 정당하게 다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갈라 3, 19)

그렇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며 지키노라 했지만 결국 그들이 지켰던 것은 자기 삶의 질서였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과월절 음식에는 주목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해방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래 율법의 목적은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전제 군주의 압제 밑에 신음하던 다른 모든 백성으로부터 구별되는 계약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정해주신 왕만을 섬겨야 한다는 신명기의 율법은 주권은 하느님께 있으며 지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그분의 도구일 뿐임을 선언하는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은 선택의 순간에 이르러 그 자유의 법을 빌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카이사르로 대변되는 식민지의 현실에 안주하는 길을 선택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러한 실패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우리 교회의 제도와 계율이,
사람들과 세상을 자유롭게 해 주는 힘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만의 거짓된 평화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복음 1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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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죽음, 그리고 영원한 생명

  • 등록일
    2005/03/27 02:29
  • 수정일
    2005/03/27 02:29


교회는 안락사에 반대한다. 안락사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사실상의 살인에 불과하다는 것이 교회의 견해다. 생명을 지키는 교회는 생명을 통해 그 주인되시는 하느님을 섬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되는가? 그 어떠한 상태에서도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그 삶의 무게에 철저히 파괴될 지도 모르는 인생의 의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행복하고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 행복과 사랑을 쫒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교회는 일시적인 것들 대신에 영원을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영원을 향한 믿음이야 말로 고통에 대한 참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교회는 오로지 '치료 중지'만을 허락하고 있다.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의 임박이라는 전제 하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으로는 고통을 가중 시킬 뿐인 그런 종류의 치료를 거절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기암으로 죽음을 몇 일 앞둔 사람이나 그 가족이 심폐 소생술을 거절하는 것은 안락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가톨릭 신자들의 일반적 경향과는 반대로 내가 안락사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지지하는 것을 알게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죽음이 일상화 되고 손쉬운 해결책에 대한 유혹이 만연한 이때에 고통의 가치와 어차피 사멸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숙명을 겸허히 받아 들이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자세는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연장 선상에서 나는 교황의 조기 퇴진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체로 여러가지 불확실한 소문들(연로한 교황을 제쳐 놓고 교황청 관료들이 교회 정책을 지배하고 있다는)에 근거한 교황 퇴진론을 지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몸소 겪는 노화와 질병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겠노라는 그분의 말씀에 더 크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늙었다는 것이 불편함을 너머 죄로 여겨지고, 병들었다는 것이 태만의 탓으로 받아 들여지는 이 때에 고통의 기나긴 터널을 지냐야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슴을 고백하는 교회의 태도는 참으로 신앙의 열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된다면 어떨까....끔찍한 통증과 싸우며 마지막 순간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정말 그때도 나는 믿음대로 살 수 있을까?

언젠가 그분을 뵙게 되면 먼저 묻고 싶다.
왜 사랑의 하느님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락치 않으셨는지....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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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도서관을 살펴 보면

  • 등록일
    2005/03/27 02:26
  • 수정일
    2005/03/27 02:26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칠성사를 놓고 각각의 성사를 다룬 책과 학위 논문 등을 놓고 비교해 보면 성체 - 세례 - 성품 - 고백 - 견진 - 병자 - 혼인의 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성사로서의 혼인을 다룬 책이나 논문은 전무하다 시피 하지요. 영성신학 파트에 가 보면 더 희한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데 성사도 아닌 수도자의 서원이나 사제의 독신을 연구한 책들은 책장이 부셔져라 쌓여만 가는 데 정작 결혼 생활의 영성을 다룬 책들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미국도 같더군요..)

 

성사적 가치를 지닌 혼인 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교회법이지요..심지어 신학교에서는 그 귀한 시간을 쪼개어 혼인법만을 별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디찬 외면과 무관심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왜 혼인이라면 우선적으로 통제와 규율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된 것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왜곡의 근원은 교회 안에서 신학 담론을 생산하는 이들의 절대 다수가 사제와 수도자들이라는 데서 연유합니다. 아울러 혼인한 평신도들의 목소리, 스스로의 필요를 자각하고 교계제도에 대해 봉사를 요구하려는 자의식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혼인의 영적 의미와 혼인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통찰의 결여는 결국 "죽음 이상의 고통이 아니라면 '무조건'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혼인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영적 분별을 할 수 없다면, 결국 드러나는 것은 혼인의 유효성과 불가해소성이라는 법적 관념들 뿐이라는 말입니다.

 

물질적 희생과 영적 봉사를 통해 교회를 지키고 사제와 수도자들을 부양하는 평신도들은 그들로  부터 봉사 받을 권리가 있고 신학자들은 평신도들이 나날이 겪어야 하는 삶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자들, 대다수가 성직자와 수도자들인 그 신학자들의 안목을 넓혀주고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삶 안에서'만' 거룩함을 발견하는 영적 자위행위에 빠져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삶의 형태 안에 담겨 있는 신비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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